Sunday, 1 March 2015

마8:18-34 가장 극복하기 힘든 세 가지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누구이십니까? 인생의 가장 극복하기 힘든 일을 극복할 수 있는 왕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오 나의 왕이 되십니다.
왕 중 왕이신 예수님께서 극복하신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1.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들은 각기 예수님께 특별한 의견을 묻고 있습니다.
서기관,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메시아를 따르기로 자원하였습니다. 자발적으로 나서서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좇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사람마다 자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자기 주관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이상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사역에서 자기의 이상을 이룰 수 있는 어떤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자기 이상을 이룰 수 있는 메시야를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19)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그러나 이 서기관의 결심은 상당히 충동적이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적이고 탐욕스러운 동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겠다는 서기관에게 합당한 자세를 말씀해 주십니다.

(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자기 자신이 얻기 원하는 세상적 이상을 실현하고 그 자아를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서기관에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십니다. 그가 우선 순위로 삼아야 할 분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이상 원하는 이상 실현의 도구가 아닙니다. 우리 인류의 이상이십니다.

마론 브란도는 아들을 얻고, 그 이름을 Devil이라고 하자는 부인의 주장을 이기고 크리스쳔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름만 크리스쳔이었던 그의 아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는
씁쓸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나는 명성이 오르고 개런티가 높아갈수록 정신과의사에게 가져다 주는 돈만 더욱 많아졌다."

여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좇으라"는 부름을 받은 자였습니다(눅 9:59). 그런데, 그는 그 부친의 사망 소식을 받았습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 속에서 왕께 대한 충성의 나약함을 보셨습니다. 세상을 버리지 못한 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미온적인 모습을 보셨습니다.

(22)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하나님 나라의 우선순위를 말씀하십니다. 그 나라의 가치가 세상 무엇보다도 우선하신다는 말씀이십니다. 그 나라의 왕은 이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심을 알려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를 들라면 부모님의 장례일 것입니다.
이곳 캐나다에서 장례행렬이 지나가면 모든 차량이 우선 통행을 그들에게 양보합니다.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1)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22)

언뜻 보기에 부모님께 효도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참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0세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효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자리에서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효를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실 그는 하나님의 대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특별한 목적을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는 일반적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어떤 장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합시다. 그가 그 장례를 다른 형제나 이웃에게 맡기는 일은 결코 불효라고 몰아붙일 일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더 큰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죽은 그자를 능히 돌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고자하는 자는 때로 우선 순위가 왕께 있고 신하인 우리에게는 자기 부정과 희생이 있어야 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6.25 직후, 한국이 참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C(조동소) 목사님께서는 성탄절 이브 행사를 추진하기 위해 부랴부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가에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 추운 날씨에 얼어죽겠구나 해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남쪽 지역에서 올라온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마에 엄청난 열이 끓고 있었습니다. 조목사님은 자신의 옷을 하나 벗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행사에 쫓겨 부랴부랴 떠났습니다.
그 날 밤 성탄절 행사가 끝나고 여선교회에서 선물을 주었습니다. 성탄 케잌을 선물로 주셨구나 감사하면서 사모님께 말했습니다.
"여보, 그 케잌을 잘라 절반을 그 환자 가져다 줍시다."
"?"
그 상자 안에는 놀랍게도 정장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양복, 와이셔츠, 구두 모든 것이 갖추어진 정장이었습니다.
'맙소사. 나는 불행한 사람에게 대단찮은 속옷 하나 벗어주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모든 것을 갖춘 정장을 주셨구나!'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습니다. 내 겉 양복까지 벗어주었으면 좋았을걸.........  .
그 이튿날, 겉옷을 벗어들고 그곳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파출소에 찾아가 그 병든 환자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순경은 담담히 말했습니다.
"아, 그 사람이요? 어젯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간이 극복하기 힘든 또 한 가지는
2. 자연 재해입니다(8:23-27).

(2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25)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갈릴리 바다에서 큰 놀은 바다에 익숙한 선원들조차도 공포를 느낄 만큼 무서웠습니다. 물결이 사납게 휘몰아쳤습니다.

1)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났습니다(24절).

이 풍랑은 바다 위에 항해를 하고 있는 한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 언제든지 몰아칠 수 있는 것이 풍랑입니다.
오늘 풍랑은 제자들이 주님을 따를 때 일어났습니다. 이런 풍랑은 그리스도와 함께 출항한 배에도 풍랑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출항한 우리 성도들은 풍랑이 올 때, 선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더욱 굳게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4의 경우와 같이 제자들을 위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이 큰 놀 가운데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때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즉 주께서 그들을 등한시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 그들이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시기 위해 주무셨습니다.

3)  그들은 기도로써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들은 마음 속에 죽음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일 당신께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러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탄원한 것입니다. 기도할 때, 불타는 심정으로 애쓰며 씨름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들은 열정적인 기도로 주님을 깨웠고, 또 응답을 받았습니다.

4)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어찌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26절).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기 전에 제자들을 먼저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믿음이 적은 데서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명하지 않으셨던가(눅 8:22)? 그렇지만, 그들이 그런 궁지에 몰려 있는 가운데 그나마 예수께로 향한 것은 전진할 수 있는 믿음의 뿌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5) 그리스도는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권능하신 주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람뿐만 아니라, 바다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얼마 동안 바다는 계속 소용돌이쳤을 것입니다.
악인은 요동하는 바다와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면 폭풍뿐만 아니라 폭풍의 모든 여파와 잔재도 그칩니다. 영혼 속의 커다란 의심과 두려움의 폭풍이 때로는 놀라운 평온으로 끝났습니다.

6) 이것이 그들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27)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27절).  
"이 어떠한 사람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풍랑이 원하는 대로가 아닙니까? 룽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군 장교가 외국에 파병되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서운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배 안에 있던 승객들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교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생이 없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를 보고 있던 부인이 말했습니다.   자신의 안전은 염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가족은 염려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내와 자녀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는 칼을 빼서 아내의 가슴에 들이댔습니다. 무섭지 않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의 손에 칼이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대답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손안에 이 풍랑이 있기 때문에 나는 두렵지 않소."

배는 육신과 같습니다.
영혼은 육신에 실린 보배입니다.
바다는 세상입니다.
풍랑은 시련입니다.
제자들은 교회입니다.
위험은 교회가 처한 궁지입니다.
주님께서 교회인 제자들에게 시련을 주시는 까닭은 겸손과 믿음과 인내를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어떤 풍랑도 우리를 침몰시킬 수 없습니다.


3. 어두움의 권세입니다.

(28)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29)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32)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저편은 갈릴리 호수 동편 가다라 지방을 가리킵니다(28절). 가다라 지방은 갈릴리 호수 남동쪽 8km 지점에 위치한 데가볼리(4:25)의 한 고을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거라사 지방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막 5:1-20;눅 8:26-39).
그곳에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공관 복음서에서는 그 두 사람 중에 몹시 난폭한 자만 언급하고 있습니다(막 10:47 ; 눅 18:35).
여기 귀신들린 사람은, 마음이 악령이나 다른 영들의 지배를 받는 자를 말합니다. 이런 현상이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기간에 종종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오셔서 일하시는 계획에 대적하는 사단의 권세가 더 극성을 부렸지 않은가 생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 돼지 떼의 소유자는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헤롯 빌립의 통치를 받는 유대지역에서 돼지를 사육한다는 것은, 적어도 정신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 손해에 대한 어떤 법적 요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31)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 대

어째서 그 귀신들이 이런 이상한 요청을 했을까요? 아마도 그렇게 해서라도 무저갱(adyss)에 강금당함을 피할 마지막 기회를 붙잡은 것 같습니다(눅8:31 ; 계20:1-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귀신들린 두 사람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과 모든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지옥의 열쇠도 또한 가지셨습니다.

(1) 그들은 무덤 사이에 거하였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나와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2) 그들은 심히 사나왔습키다.  그들은 자신들을 제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해롭고도 무섭게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치명상을 끼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3)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반항하며 그와의 모든 관계를 부인합니다(29절).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불려 왔을 때 그들은 그의 재판권에 대항하며 갑자기 성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귀신들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며 믿고 고백합니다.
성도와 귀신을 구별짓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일정량의 지식이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놀라운 분이심을 고백하면서도 그분과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악의에 찬 비난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에 오셨나이까.

귀신들이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단이 욥을 괴롭힐 수 있도록 허락을 간청할 때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하셨듯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32절).  하나님은 종종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들을 위해 사단의 격노의 수고들을 허락하십니다.  
귀신들이 돼지 떼를 사로잡았을 때 그들을 어디로 급히 몰아갔습니까?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였습니다(막 5:13).  이와 같이 귀신은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로 몰아가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대신 마을에서 떠나도록 부탁을 올립니다. 탐욕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떠나시도록 만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구주보다는 그들의 돼지를 더 좋아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이르지 못하고 그로 말미암는 구원에도 이르지 못하는 사실은 인류의 슬픔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극복할 수 없는 자기와
자연과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을 따를 때, 그분의 승리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사람들은 꽃의 잎만 보고
평가를 하지만
잎은 꽃의 옷일 뿐,
진가는 내면에 있다.

사람들은 꽃잎이 시들고 떨어져가면
서글퍼 하지만
꽃은 속으로 기쁨과 슬픔을 새긴다.

어느 날
벌들이 꽃을 찾아 올 때
착한 사람들은
무법한 침입자로 인하여
억장이 무너진다

순결한 잎은 열어제껴지고
가녀린 꽃술들은 무참히 짓밟히고
내밀히 숨겨둔 꿀이 약탈달할 때,
안으로 파고든 벌이 원망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꽃이 꿀을 벌에게 도적맞을 때
열매는 맺힌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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