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1 March 2015

마9:18-26 낙심이 되는 일이 있습니까?

들어가는 말

세상엔 문제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가  죽음 문제입니다.
저는 젊은 청년 시절에 부모님을 여의고, 형님 두 분과 큰 누님을 먼저 보냈습니다. 그리고 바로 손위 누님이 암으로 사망의 문전에 서 계십니다. 대개 50대에 가셨기 때문에 저에게는 이 죽음이 상당히 가까운 현실입니다.
다음은 내 차례로구나.
죽음을 준비하여야겠다.
이 세상에서 남은 생애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과연 이 일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죽음 앞에 서지 않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음은 저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인간의 문제입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의 엄숙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죽음이란 절벽 앞에서 믿음으로 낙망을 극복하는 두 사람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란 절벽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두 사람을 만나 그들을 구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이 앉아 계십니다. 그 뒤에는 그 일을 트집을 잡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과 제자들에게 인간의 한계상황인 죽음이란 절벽까지 극복하시는 분이신 것을 보여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고 얼마 후, 저들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이로서 주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지시고 죽음이란 절벽을 넉넉히 뛰어 넘게 하셔서 생명의 나라로 옮기시는  생명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이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는 일에는
1. 믿음으로 기도하는 아버지가 중요합니다.

오늘은 아버지날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존경을 받을만한 분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가장 사랑하는 딸을 사망의 권세 아래 내어 줄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딸을 잃고 예수님 앞에 허겁지겁 달려와서 엎드린 이 절박한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에겐
1] 딸을 살리고 싶은 간절한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누가복음 8장 41-56절과 마가복음 5장 22-43절을 보면, 그는 가버나움 회당장 야이로라 하는 사람입니다.
회당장은 유대인 사회에서 공적으로 가장 중직에 있는 유지입니다. 아무에게나 엎드려 'please!' 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더구나 당시 사회 분위기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이 이유가 무엇입니까? 딸을 살리고 싶은 간절한 아버지의 사랑 때문입니다.
유대인 여자 12세면 성인이 되는 나이입니다.
그런 딸에게 갑자기 사망의 그림자가 덮쳐왔습니다. 이 사람은 종교인이었습니다. 율법에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닥치자 그는 아무런 도움을 줄 능력이 없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12세된 소녀가 생명을 얻는 배경에는 아버지의 사랑과 믿음의 기도가 중요했습니다.
자녀는 연약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생명을 얻는 일에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녀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이 마음은 그 자신의 모든 껍질을 벗어 던지게 하고 있습니다. 모든 장벽을 뛰어 넘게 하고 있습니다. 당시 보통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라면 배척하기에 바쁘던 예수님께 '와서 절하고'(came and worshiped Him) 있습니다. 이것이 그 소녀는 소망이 입니다.

아버지 되신 성도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달려갑니까? 믿음으로 기도하십니까? 이 같은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로 달려나가십니까?
자식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자녀 된 성도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2] 그에겐 동시에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께 절하며 간구하는 말을 보십시오.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그 말속에는  그의 신앙이 녹아 있습니다.  내 딸이 방장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어떤 의사가 오더라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므로 장례식을 치러야겠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 장례식 때문에 간 것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손을 얹으면 살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딸을 사랑하는 하는 데서 그치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손을 얹으시면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죽음 문제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연의 능력을 훨씬 넘어가는, 그분 안에 생명이 있고 그가 원하시는 자를 소생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야이로란 회당장은 열 두 살 된 외동딸이 죽음을 당했을 때, 그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쳤다면, 시체 사랑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만 얹으시면 살아날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그 딸을 구원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습니까?

오늘은 아버지날입니다. 아버지가 왜 존경을 받아야 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아버지가 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딸을 사랑만 한다면 무의미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한 그 가정은 소망이 있습니다.


2. 믿음으로 주님 옷깃을 붙잡는 일이 중요합니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주님을 모시러 나온 야이로에게는 두 가지 장애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혈루병 든 여인의 등장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썩어가는데 주님은 빨리 가셔야 하는데, 원치 않는 혈루병든 여인의 등장은 참으로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던 야이로 입장에서는 원치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집으로 가시는 길을 늦추었습니다. 야이로의 마음을 한없이 졸이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체됨은 큰 축복을 가져왔습니다(요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경우를 참조). 예수님은 이 여인을 통해 야이로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준비하셨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나아오는 회당장
그러나 야이로에겐 한 가지 더 갖추어져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끝까지 주님의 은혜를 놓지 않는 소망입니다.
이것이 혈루병든 여인을 만나게 하신 주님의 섭리입니다.

이 여인의 등장은 우리에게 또한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가는 이 신앙생활에서 때로 원치 않는 장애가 생겨날 때, 너무 낙망하고 불평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앞에 두신 사건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건이 장벽처럼 닥아오면 감사합시다. 어렵겠지만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 어떤 선을 이루실지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찾아갑시다.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의 문제로 고통을 당한 이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병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 고쳐 달라고 공공연하게 말할 수 없는 그런 병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세상의 의사들이 그녀를 고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막 5:26).
나름대로 그녀에게도 재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의사들을 만나는 가운데 그녀의 가진 재산은 다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에는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 병은 사람을 쇠약하게 만들고 재물을 허비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부정하다고 하여 여호와의 집 뜰에서 쫓겨나게 만드는 그런 병이었습니다. 하혈을 하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의 앞에 서지 못하고 뒤에서 겉옷을 만진 이유는 유대사회에서 부정하다 하여 격리되고 소외당했기 때문입니다(레 15:19-30).

그러나 그녀에겐 한 가지 중요한 재산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향해 접근했습니다.

(21)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1)For she said to herself, "If only I may touch His garment, I shall be made well."


예수님의 옷가만 터치해도 나는 나을 것이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간절한 소망 어린 믿음입니까?
그녀는 이 믿음 하나로 자기 몸을 치료받았습니다.

로라 윌킨슨이란 여성이 시드니 올림픽 다이빙 부문에서 금메달을 받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른 쪽 다리 골절상을 입어 올림픽 참가는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만 붙들고 연습한 결과 이런 놀라운 결과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그리스도와 그의 능력에 대하여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겉옷만 만져도' 나으리라고 믿었습니다.
  2) 그리스도는 이 여인에게 큰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를 보기 위해 몸을 '돌이시켰습니다'(22절).  그리고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2)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주님은 그녀를 '딸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가지고서 그녀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안심하라'는 말씀은 두려움으로 가슴 설레는 그녀에게 큰 위로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녀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믿음에 합당한 열매였습니다.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소개한 유대인 계집종처럼 그녀는 주 안에서의 참 소망이 있었습니다.


3. 무엇보다 주님의 손이 중요합니다.

23)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마24)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유대인들은 장례식을 오래 끄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악사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슬픔을 증가시키고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침통한 심정을 자극하기 위해 슬프고 음울한 가락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억지로 애도하는 체 하는 사람들과 피리부는 자들은 떠들썩하였습니다.
죽은 자의 장례를 위해 피리를 불어주고 왁자지껄하며 초상집을 가득 채우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죽은 자와 가정을 위로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잔칫집에 가는 일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당한 가족을 찾아가신 적이 있습니까? 정말 잘하신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깊숙이 드리운 가정에 곁에 있어준다는 것은 참 귀중한 이웃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장례를 위해 피리를 불어주고 왁자지껄하며 초상집을 가득 채우는 것이 랑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결국은 오히려 주님을 비웃음으로 끝납니다. 이것을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이래서 인본주의가 위험합니다. 내가 아는 것이 최고라고 착각하는 일이 위험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들의 조롱의 강도는 그 소녀가 정말 죽었음을 입증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소녀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25)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주님의 손은 중요합니다. 주님의 손은 나의 생각보다, 나의 이성보다, 나의 전부보다 소증합니다. 그 안에 사망을 이기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돈 많은 귀족 집에 미련한 하인을 내보내면서 지팡이를 주었습니다. 너보다 미련한 사람이 있으면 주어라. 온 세상을 다 돌아다녀도 자기보다 미련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중 자기 주인이 아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무슨 준비를? 이 지팡이를 가지고 가셔야겠습니다. 저세상으로 갈 준비를 하지 못한 사람이 가장 미련한 사람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예수님은 한 번도 장례식 설교를 하지 않으셨습니다.(무디)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내게 죽음을 정복하게 해 주시는가?
나는 믿는 자는 죽어도 살리라 말씀하신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내 딸은 살아날 수 있다
겉옷만 만져도 내 몸은 나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이루어질 줄을 믿습니까? 우리가 가진 믿음에 따라 보통사람은 가능성의 10% 수제는 20% 천재는 30% 사용하다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믿는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혈루병든 여인이 자신의 가능성을 1%밖에 사용하지 못하였을 지라도 작은 믿음으로 전신이 살아난 것처럼, 야이로의 딸이 0%의 가능성이었을지라도 주님을 만나 살아난 것처럼 우리가 지금 몇 %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 나의 불완전한 부분이 온전히 치료함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루스벨트 부인 엘리나는 10세에 고아가 되어 노동하면서 자랐다.
그러나 늘 신앙으로 살았다.
그녀는 한때 자녀 중 하나가 죽는 비극의 겪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했다.
아직 나에겐 사랑하는 다섯명의 자녀가 있다.
병든 다리로 인하여 고통당하던 그 남편은 노년에 이렇게 말했다.
폐품과 같은 나를 아직도 사랑하는가?
그녀는 담담히 대답했다.
나는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전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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