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좇아갑니다.
(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하나님 나라 왕을 따르는 자들은 먼저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왕을 따르는 자들은 왕을 좇아가야 합니다.
마태 복음서의 저자인 마태는 막 2:14 ; 눅 5:27에서 레위로 불리운 사람입니다. 마태란 이름은 우리 교회에서는 동기와 태희가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 의미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마태의 일터는 가버나움 세관이었습니다. 당시의 세관은 통행세나 물품세를 받기 위해 길가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가버나움(9:1)은 다메섹에서 해안 도시에 이르는 대로에 위치해 있으므로 육로나 갈릴리 해상을 통해서 들어오는 상품에 대한 관세를 받기에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마태는 그곳에서 세금을 걷는 세리였습니다.
마태는 세상적으로 볼 때, 돈벌이가 좋은 직장에서 세리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독했습니다. 세리는 악평을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직업은 로마 정부의 앞잡이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직업에는 아주 많은 부패와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마태와 같은 세관의 직원을 가장 악한 부류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창녀와 동일한 정도로 멸시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1) 마태가 죄인이었을 때 주님께서 그를 보셨습니다.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 오셨고, 하나님 왕국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보면, 어떤 사람도 그 직업 때문에 구원받지 못할 만큼 죄스런 직업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죄인들을 왕국 구성 맴버로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2) 주님께서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태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태를 택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요15:16)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3) 마태는 즉각 순종하여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르셨을 때 그는 '세관에 앉아' 일하고 있었습니다(눅 5:27). 그리스도께서 부르셨을 때, 그가 자기 직업에 성실했다는 점은 평가받습니다(마 4:18).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자신의 직업을 즉각 버렸습니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부들이었던 제자들이 이후에도 다시 고기 잡으러 갔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마태가 다시 세관에 앉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신을 확실하게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그리스도를 좇았습니다. 마태는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새 사람
새 소명
새 마음
새 사고방식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마태는 주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를 대신하는 선지자로 세우도록 엘리야에게 명하셨습니다(왕상 19:16, 19). 엘리야는 12겨리 소로 아버지의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만나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 뜻을 깨달은 엘리사는 집에 돌아와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았습니다. 그리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사람들을 모아 송별연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엘리야를 따라가 수종 들었습니다(왕상 19:19-21).
2. 긍휼을 배워야 합니다.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알 수 없는 면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시는 것입니다(10)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마태의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시는 모습을 만납니다.'
마태가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마태 자신은 우리들에게 그 집이 그 자신의 집이었다는 것도, 그것이 잔치였다는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께서 '그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셨다'고만 말합니다.
하지만 마태는 그리스도를 초대하였고, 그 자리에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예수님을 배울 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배울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교제하는 일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주님과 깊이 교제하면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됩니다. 주님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이러한 행동을 트집잡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배우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서기관(3절)과 바리새인들(11절)은 자기들 나름대로 철학이 있었습니다. 저들에게 있어서 세리와 죄인들은 교제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죄인들과 더불어 교제하시는 예수님 또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행악자들과 친하게 재내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시 1:1; 119:115). 세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장로들의 유전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교제를 가증스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무리에게 주님께서는 '배우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라 하십니다.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 그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요.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려주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3)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도록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었습니다. 의인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없어도 됩니다.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긍휼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하나님의 긍휼을 배워야 합니다.
긍휼(Mercy) 비참한 상태에 있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구약에서 [긍휼]로 역된 히브리어 명사중 가장 많이 씌어져 있는 [라하밈-]은 주로 어버이(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형이 동생에 대하여 가지는 근친적 정애(近親的情愛)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시103:13)
[태의 열매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사 13:18)
[여인이 어찌…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사49:15)
[인자](자비)로 역된 원어, 즉 [언약(계약)에 기초한 책임있는 사랑]을 뜻하는 히브리어 명사 [헤세드)]와 동의어(同意語)로 쓰여집니다.
[긍휼]의 반대는 [잔인]으로서 (렘 6:23, 50:42), 사 47:6에는 바벨론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포로에 대하여 가혹한 취급을 하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먼저 보여진 것은 이스라엘에 대해서인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약함, 비참함, 도울자 없는 상태에 대해서이고,
하나님께서는 산들은 옮길지라도 떠나지 아니하는 불변 언약 때문에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십니다(왕하13:23, 욜2:18). 예수님께서는 마태가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긍휼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하였습니다(호 2:23, 11:8).
하나님의 긍휼은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으로 역사 가운데서 엄연한 사실이 되었습니다.(벧전 1:3)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사건은 하나님의 긍휼의 결정체입니다(엡 2:4, 딛 3:5-6). 하나님의 긍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되고,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벧전 2:10).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긍휼이 이웃사랑의 근본임을 알려주었습니다(눅 10:30-37).
3. 새 부대를 준비합니다.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몸을 비웠습니다.
성경의 정규적인 금식은 매년 속죄일에 행하였는데, 바리새인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금식하도록 정하였습니다. 이런 금식은 바리새인들도 준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눅 5:33) 바리새인들처럼 일주일에 두번씩(월, 목요일) 정기적으로 금식했습니다.(에 4:1). 그리고 거국적인 금식일(부림절 전날, 속죄일,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는 아빕월 9일)에도 관례에 따라 금식했습니다.
금식함으로 회개하며 통곡하며 하나님을 우리 삶에 충만히 채우는 일이 얼마나 귀합니까?
에스더는 목숨을 내놓고 금식함으로 온 민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간 금식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역 기초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금식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제자들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제기한 금식 문제를 계기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15)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주님을 신랑으로 영접한 신부들이 혼인집에서 금식하는 것이 정도는 아닙니다.
회개하며 통곡하며 하나님을 우리 삶에 충만히 채우는 일이 참으로 귀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을 만나고 그 은혜를 받는 신혼의 날, 금식은 너무 걸맞지 않습니다.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늘 금식하며 하시지 않았습니다.
(16)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생베 조각은 풀을 바르거나 물로써 유연하게 처리하지 않아 줄어든 적이 없는 헝겊으로서, 이것으로 기운 긴 겉옷은 세탁할 때에 갑자기 수축하므로, 낡은 본바닥이 찢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께서 선포하는 역동적인 삶과 교훈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가진 자기 나름대로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삶의 자세를 고집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신앙 자세가 필요함을 교훈하십니다.
주님은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새 포도주에 맞는 새 부대입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러 이 땅에 오신 왕이십니다.(겔36:26)
영접하는 자에겐 참으로 큰 경사입니다. 거듭난 자에겐 경사 중의 경사이지요.
새로운 영, 새 마음, 새로운 삶으로 정진이 시작됩니다.
신랑을 영접함으로 참된 구원이 임하였습니다.
육신을 금식함으로 새로운 영, 새 마음, 새로운 삶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영, 새 마음이란 포도주는 새로운 삶이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새 옷과 새포도주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율법"이라는 오래된 그릇에 "복음"이라는 새로운 멧세지를 부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은 새로운 형태를 취합니다. .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를 가지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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