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축복을 누리고 사는 사고(思考)를 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축복을 받을 만한 복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늘 주변에 축복을 베풀고 삽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축복이 머물러요.
존경을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세상 물질까지도 그 곁에 머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도 있습니다. 축복을 발로 차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구나 느껴지는데 그걸 발로 차버립니다.
대신 돈 되는 것이 무언가 늘 찾아다닙니다.
그렇다고 물질이 그 곁에 머무는가는 또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오늘 나사렛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삶의 모습을 만납니다.
그렇게도 그들이 그리워하며 기다리던 메시아가 그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이루어 질 수 있는 기회가 그들 가운데 왔습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좋은 축복의 기회를 받은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축복을 전혀 누리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배척해버렸습니다.
대신 돈되는 것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돈도 별로 모으지 못하고 한 평생을 살다가 죽어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갔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고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이 나오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를 알기 원합니다.
무엇이 우리 삶의 현장 속에 하나님 축복을 막고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삶의 현장에 넘치도록 할 것인가?
1. 주님께서는 제자를 통해 축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5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본문은 천국 비유 설교의 결론입니다.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7가지로 천국을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 천국 비유를 주셨겠습니까?
천국을 그들 가운데 이루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님께서 고향 회당에 돌아와 왜 가르치십니까?
이렇게 잘 가르친다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능력이 있는 자다 뽐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천국 복음을 들려주시는 이유도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원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원하십니다.
우리 다락방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원하십니다.
우리 가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원하십니다.
주님이 왜 제자들을 세우셨습니까?[제자의 정체성]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천국의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5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으로 제자들의 정체성을 말씀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배운 새로운 진리를 천국 창고에서 내어오는 주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동시에 구약에 감춰져 있는 언약의 비밀을 캐내는 서기관과 같은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제자들은 말씀 사역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역 방법]
1] 예수님처럼 -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옛 가르침을 존중하시면서 새 언약을 전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을 폐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의 복음을 항상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눅24:25) 위에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눅24:44)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새것과 옛것은 신약과 구약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Bengel). 우리는 '새것'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옛 구약'의 정통성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기억합니다.
또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 말씀을 천국의 보물로 다루는 자세를 배웁니다.
2] 서기관처럼 -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은 성경 해석을 책임지고 있는 신학자일 뿐만 아니라 교사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과 같이 소중히 여겼습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 말씀을 천국 보물 다루듯하였습니다.
천국 창고에서 구약과 신약을 가져와 세상에 나르는 일에 자신을 헌신한 우리들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해주기 원하십니다.
2, 왕을 고향 사람들이 배척하였습니다.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회당에서 능력을 행하시고 지혜 있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되는 고향 사람들은 배척했습니다.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배척한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낯선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활환경에서 살았던 마을 사람들입니다. 당사자들은 예수님 누이의 남편, 곧 처남들일 수 있어 보입니다(막6:3). 고향 사람들입니다(눅4:22)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니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고향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만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그들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능력을 뜻하는 뒤나미스는 힘, 전능, 세력을 의미합니다. 고향 사람들은 이 진리에 대한 넓고 깊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행하시는 이적에 놀랐습니다.
그들에게는 두 결단이 요구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든지 지금까지 모든 유대인들이 선지자들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배척하든지 말입니다.
그들이 배척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예수의 친척들과 동향 사람들이어서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까?
1] 예수님을 피상적으로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막6:3)입니다. 저들에게 예수님은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인간적 외모만 보고 피상적으로 생각할 때, 그들은 예수님의 참 본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예수님을 목수 요셉의 아들인 것만 알고 인정하였지 나사렛 사람들은 천지를 지으신 목수이심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톱과 망치를 사용하며 목재를 다듬는 세상의 목수와 달리,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다듬어 지으셨던 사실에는 눈멀어 있었습니다.
[적용1]
우리가 예수님을 피상적으로만 알 때, 예수님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 피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신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피상적으로만 알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피상적으로만 알 때, 예수님은 나에게 아무런 감동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피상적으로만 알 때, 우리는 예수님을 그들처럼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피상적으로만 알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적용2]
우리가 교회에서 목사나 다른 직분자, 형제 자매를 바라볼 때도 피상적으로 보게 되면 그 본질을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존경할 수 있습니다.
2] 그 결과는 시기요 배척입니다.
'고향'은 예수가 성장한 나사렛입니다. 나사렛 동향 사람들은 예수의 지혜와 기적적 능력에 놀랐지만 시기하여 본능적으로 적대적 감정을 터뜨렸습니다(Morris, Carson).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의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의 지혜로 영혼을 거듭날 수 있게 가르치시는 하나님이심에 대하여 그들은 전혀 무지합니다.
대신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붙들고 여러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 질문인 55절의 이(후토스)는 경멸적 표현입니다. 56절의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는 우리보다 더 높은 출신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나타나는 놀라운 일들이 그들에게는 시기 질투의 대상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자신들과 다른 존재임이 부각이 되자 오히려 시기와 질투가 나타납니다.
영원하신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만 볼 때, 그들은 시기 질투하다 결국 배척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섬기고 통치 아래 살 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생각할 때, 고향사람들처럼 배척함에 이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같은 고향 사람이었던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던 베드로는 그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우리 안에 이런 고백이 늘 살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다스리는 곳에 임하십니다.
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이 같은 마을에 사신다는 것은 큰 기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영접하여 그 분의 통치를 받을 때, 그분의 지혜와 능력이 자신들에게 임하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임하지 않습니다(마13:58) 그들은 분명 예수님과 같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왕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구원의 기회를 상실하였습니다.
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그분의 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말구유에 아기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에서 목수로 사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겸손이란 지혜를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겸손이 얼마나 완벽한 것이었는가를 알게 됩니다. 함께 자라고 함께 생활한 사람들의 말("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은 예수님 겸손이 얼마나 완벽하신가를 보여주십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는데, 이렇게까지 철저히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낮추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30년을 함께 살았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온전히 같아지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조그만 무엇인가 있어도 달라 보이기 위해 무척 애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삽니다. 그렇지 않은 겸손한 사람들을 만날 때,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저는 이곳 캐나다에 살면서 여러 유학생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아직 기억에 남아있는 어떤 청년이 생각납니다. 그는 한국에서 괜찮은 기업체의 사장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곳에 사는 동안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곳에 살면서 기업체의 사장 아들이라는 냄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근본이 하나님이셨고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셨습니다. 그렇지만 온전히 목수와 같이 되셨던 것입니다.
목수로 일을 하셨습니다.
목수의 생활비를 받으셨습니다.
목수 아들이라 불리우셨습니다.
목수가 먹는 맛없는 음식을 자셨습니다.
목수가 입는 초라한 옷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갈망하지 않고 배척하게 되면 아무런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불 신앙이 예수님의 치료 능력과 의지를 막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다락방에서 이런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설교에 대한 평가를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더러 설교학 교수가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했을 때, 얼마나 가난한 삶을 살았던가?
내가 예수님을 왕(그리스도)으로 영접하고 살면서 얼마나 풍성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체험하고 살고 있는가를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저는 간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평범한 사람인가를 제 자신이 너무 잘 압니다.
국어국문학을 하겠다고 대학을 갔는데 저에겐 재능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를 배우면서 시를 써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만 두었습니다. 나는 시인이 될 능력이 없음을 알겠더라구요.
소설도 써보려고 했습니다.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소설을 쓰려면 우선 이야기를 재미나게 전개할 능력이 필요한데 여러분이 제 설교를 들어서 아시지만 그런 능력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평론은 가능한가 하고 평론도 몇 편 썼습니다. 그래서 교지에 발표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도 제가 평생 할 일이 못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소설이나 시를 예리하게 분석 비판할 수 있는 재능이 저에게 약합니다. 남을 깐다는 것이 체질에 맞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학자가 되어야겠다고 하고 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조교를 하면서 몇 년간 대학원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교수를 할 천재성이 없구나 하는 한계가 확실하게 느껴졌어요.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저는 중고등학교 교사 자격시험을 보아 학교교사 부임해 갔습니다. 그 일도 과분하지만 좀 부족한 건 몸으로 뛰면 되는 것이 교직이거든요. 그렇게 일하는 일이 제게는 더 적합했고 행복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지난 주말, 한국 최고의 기독교 출판사라고 알려진 생명의 말씀사에서 제 이름으로 신앙시집이 출판되었습니다.
약 10년 전에 '나그네 목사'란 책이 서울 은혜문화사에서 출판되어 나왔습니다.
약 5년 전에는 '살맛나는 인생'이란 신앙수필집이 서울 쿰란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왜 이렇게 행복한가' 하는 신앙 시집이 출판되었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일일른지 몰라도 제게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도 보통 시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를 담은 신앙시들입니다.
지난 주일에 미국 뉴욕 중부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해서 이 시들을 세 편 소개해 주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은혜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은혜인데 그분들인들 하나님의 선물이 은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은혜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받은 은혜가 가짜겠지요.
어떻게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은혜 때문입니다.
주님을 나의 왕으로 인정할 때, 내 안에 작품을 만들어가시는 왕의 능력과 지혜를 우리는 얼마든지 체험하고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가 뭐라고 해도 제가 세 권의 신앙서적을 출판하였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왕으로 섬기는 종을 후대하신 표적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가능할지 몰라도 제게는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셔들이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교회를 천국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셔들이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가정을 천국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셔들이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삶의 현장을 천국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이 말씀은 너무 슬픈 장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살면, 그 반대의 일이 끝없이 일어납니다
저희의 믿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시니라
이런 놀라운 축복이 우리 생애에서 끝없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Saturday, 28 February 2015
마14:1-12 실패하지 않은 인생 - 한 선지자의 에필로그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일하고 계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주파수를 압니다.
기독교 역사상 귀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의 생애를 들쳐볼 때마다 새삼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곳에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찬송하시는 곳에서 찬송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현장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죽으신 그 자리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대표적인 하나님의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그 범주에서 머물 수 있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외쳤을 때, 그는 하나님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자신을 소개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쳤을 때,
그는 하나님의 심장으로 심판 아래 놓인 세상을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태어나셔?할 그 자리에 태어날 수 있었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할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의 에필로그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깊은 성령의 깨달음을 주셔서 우리도 그와 같이 마지막까지 경주를 잘하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1. 세례 요한의 인생엔 감동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생애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죽음의 순간입니다. 왜 이렇게 귀한 의인이 의미 없게 죽어가는가 의문이 갑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보면서 실패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 죽음엔 죽어야할 때 죽는 감동이 있습니다.
살기를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죽을 때 죽는 일은 위대한 인격입니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이 화려하게 데뷔하고 이름을 날리다가도 죽어야 할 때,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음으로 하여서 서글픈 인생으로 마감하고 마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향해 배반의 땅을 걸어가실 때, 그는 오실 왕의 죽음의 길을 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인의 고난과 죽음을 보며,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바로 새기게 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삶 자체를 볼 때, 많은 사람들의 이해를 뛰어 넘는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언행이 감동적인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출생]이 감동적입니다.
소망이 없던 스가랴와 엘리사벳의 생애에 성령께서 전격적으로 개입하심으로 세례 요한은 태어나게 됩니다.
이삭의 출생에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던 것처럼
사무엘의 출생에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던 것처럼
세례 요한의 출생에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습니다.
[자기 인식]이 감동적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인 자신은 메시아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존재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굽혀 그의 신들레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자신을 오시는 왕의 종으로서 명쾌하게 선포합니다. 자기 부인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사역]이 감동적입니다. 비록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회개의 복음을 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독사의 새끼라 외치면서 과감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이 유난히 돋보이는 까닭은 구속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마침]이 감동적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 선포합니다.
그는 자신의 종료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망하여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망할 수가!
이렇게 불명예스러울 수가!
정말 악하고 가증스러운 헤롯과 헤로디아의 연회 놀이감이 되어 목이 잘려 죽어 가는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실패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종은 왕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얼마나 의인이 철저하게 망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세상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왕이 흥하시도록 자신이 망하는 사람
자신이 흥하도록 왕을 망치는 사람으로 분류한다면
세례요한은 왕이 흥하시도록 자신이 망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죽음을 보면서 자문하게 됩니다.
내가 흥하자고
나를 드러내자고 왕의 길을 망치지 말자!
이상을 볼 때,
그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왕이 오시는 길을 예비한 선지자 중 선지자이십니다.
주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가운데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는 칭찬하신 선지자 중의 선지자입니다.
2. 헤롯의 인생엔 감동이 없습니다.
헤롯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는 헤롯왕과 사마리아인인 그의 아내 말테이스 사이에서 출생했습니다(Buttrick).
그러나 헤롯이 불행했다는 말은 그 출신이 에돔(에서의 후예) 자손이어서란 말은 아닙니다.
헤롯은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주전 40년 로마의 안토니오 황제에 의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 받은 분봉왕입니다.
그는 세상을 감동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46년 동안 성전 건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감동시키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곳에서 행복이나 성공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왕비를 열 명이나 두었습니다.
첫 부인 도리스가 헤롯의 손에 죽었고 그녀의 아들, 안티파텔이라는 왕자가 죽었습니다.
미리암네라는 둘째 아내와 그가 나은 두 아들도 헤롯의 손에 죽었습니다.
자신의 행복과 쾌락만을 추구하여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헤롯은 예수님께서 여자가 나은 사람 중에 이 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신 의인 세례요한을 죽이는 죄까지 범하였습니다.
가문도 불행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헤롯대왕은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많이 죽여야 했을 정도로 불안했습니다.
조카 (아그립바 1세)는 주님의 제자 야고보를 살해하였습니다.(사도행전 12장)
피비린내가 풍기는 집안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정작 실패한 사람은 세례 요한이 아니라 그를 죽인 헤롯과 헤로디아입니다.
그들의 생애에는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대신 탐욕과 피냄새만 있습니다.
헤롯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남을 불행하게 함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 뉴턴이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아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파리 한 마리가 눈앞에서 빙빙 돌며 귀찮게 구는 것입니다. 여러 번 쫓았지만 뉴턴 주위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뉴턴은 벌떡 일어나서 날아가는 파리를 손을 낚아챘는데 잡혔습니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날려 보내며 “야 이 녀석아! 세상이 얼마나 넓으냐! 그런데 너는 하필 내 얼굴 주위만 맴돌고 있느냐” 하였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세계를 모르고 인간의 부귀영화를 찾아 몸부림친 헤롯의 인생은 어리석음 바로 그것입니다. 행복은 남의 생명을 빼앗아 우리 자신의 기쁨을 채우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을 잘 살게 할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나로 인하여 타인이 행복하게 되었을 때 행복합니다.
사람들을 섬기면서 사는 것은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섬김을 받고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이 아닙니다. 송명희씨는 나는 황제보다 하인이 되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3.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배역을 끝까지 잘 감당했습니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상을 받는 배우는 남자냐 여자냐 하는 성을 따르지 않습니다.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조연을 맡아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들이 어느 배역을 맡았느냐로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맡은 배역에서 얼마나 감동적인 연기를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맡은 배역이 아무리 비천하고 사소해 보일지라도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어 낼 때 그의 훌륭히 연기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말씀하실 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자신의 배역을 잘 감당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배역과 재능을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 자기가 맡은 배역을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얼마나 충성할 수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배역을 맡겨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흡족하게 해 드렸는가 이점이 중요합니다.
요한 복음 3장 29절에 보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속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는 조연입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맡은 배역을 놀랍게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신부를 취하는 신랑을 드러내기 위해 죽는 배역을 충성되게 감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의 귀중한 검입니다
불란서에 자케퐁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큰 부자였습니다. 조카가 하나 있었는데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케퐁의 사업이 기울어 파산지경에 이르러 이제 십만 프랑밖에 남지 않았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자케퐁이 충격을 받아 그 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상속자인 조카에게 삼촌이 남긴 십만 프랑의 돈을 찾아가라고 했더니 이 조카도 충격을 받아서 그 길로 죽었습니다. 갑자기 십만 프랑이나 생기니까 너무 충격이 컸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말씀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이 세례 요한에게 너무나 적합한 말씀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마무리하는 말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 이제 요한의 사역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오심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충성스럽게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흥하여야 하실 그 시간에 자신은 쇠하고 있습니다(요 3:30).
요한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죽음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
"시대를 밝힌 각성자일 수 있었습니다.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사21:11).
이것은 밤과 같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인생들이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애타는 부르짖음입니다. 부르짖음에 대해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침이 오나니” (사21:12).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어두움의 시대가 계속되지만 아침도 온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어두운 시대를 마른 뼈가 가득한 죽음의 골짜기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도 아침이 올 것을 내다 보았습니다. 그 아침은 마른 뼈들이 살아서 일어나는 영적 각성과 교회 탄생의 아침이었습니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10).
다윗도 밤과 같이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가면서 아침이 올 것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그 아침은 구원의 아침이요 기쁨의 아침이었습니다.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그리고 아침을 깨우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
시대가 어두워질 때마다 시대를 깨우고 밝히는 각성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어두운 시대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1] 독일에서는 슈페너와 같은 경건주의자들이 하나님의 각성에 참여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 지 150여년이 지난 독일은 영적 및 사회적으로 캄캄한 밤과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1648년에 그친 “30년 전쟁”은 독일을 극도로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도시와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들었으며 굶어서 죽은 시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야콥 슈페너는 하나님의 탄식과 기도에 참여했습니다. 독일 교회 안에 즉각적이고도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슈페너는 300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는데 대부분이 그의 각성 운동을 지지하는 편지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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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일하고 계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주파수를 압니다.
기독교 역사상 귀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의 생애를 들쳐볼 때마다 새삼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곳에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찬송하시는 곳에서 찬송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현장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죽으신 그 자리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대표적인 하나님의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그 범주에서 머물 수 있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외쳤을 때, 그는 하나님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자신을 소개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쳤을 때,
그는 하나님의 심장으로 심판 아래 놓인 세상을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태어나셔?할 그 자리에 태어날 수 있었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할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의 에필로그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깊은 성령의 깨달음을 주셔서 우리도 그와 같이 마지막까지 경주를 잘하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1. 세례 요한의 인생엔 감동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생애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죽음의 순간입니다. 왜 이렇게 귀한 의인이 의미 없게 죽어가는가 의문이 갑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보면서 실패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 죽음엔 죽어야할 때 죽는 감동이 있습니다.
살기를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죽을 때 죽는 일은 위대한 인격입니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이 화려하게 데뷔하고 이름을 날리다가도 죽어야 할 때,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음으로 하여서 서글픈 인생으로 마감하고 마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향해 배반의 땅을 걸어가실 때, 그는 오실 왕의 죽음의 길을 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인의 고난과 죽음을 보며,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바로 새기게 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삶 자체를 볼 때, 많은 사람들의 이해를 뛰어 넘는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언행이 감동적인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출생]이 감동적입니다.
소망이 없던 스가랴와 엘리사벳의 생애에 성령께서 전격적으로 개입하심으로 세례 요한은 태어나게 됩니다.
이삭의 출생에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던 것처럼
사무엘의 출생에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던 것처럼
세례 요한의 출생에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습니다.
[자기 인식]이 감동적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인 자신은 메시아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존재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굽혀 그의 신들레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자신을 오시는 왕의 종으로서 명쾌하게 선포합니다. 자기 부인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사역]이 감동적입니다. 비록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회개의 복음을 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독사의 새끼라 외치면서 과감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이 유난히 돋보이는 까닭은 구속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마침]이 감동적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 선포합니다.
그는 자신의 종료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망하여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망할 수가!
이렇게 불명예스러울 수가!
정말 악하고 가증스러운 헤롯과 헤로디아의 연회 놀이감이 되어 목이 잘려 죽어 가는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실패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종은 왕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얼마나 의인이 철저하게 망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세상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왕이 흥하시도록 자신이 망하는 사람
자신이 흥하도록 왕을 망치는 사람으로 분류한다면
세례요한은 왕이 흥하시도록 자신이 망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죽음을 보면서 자문하게 됩니다.
내가 흥하자고
나를 드러내자고 왕의 길을 망치지 말자!
이상을 볼 때,
그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왕이 오시는 길을 예비한 선지자 중 선지자이십니다.
주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가운데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는 칭찬하신 선지자 중의 선지자입니다.
2. 헤롯의 인생엔 감동이 없습니다.
헤롯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는 헤롯왕과 사마리아인인 그의 아내 말테이스 사이에서 출생했습니다(Buttrick).
그러나 헤롯이 불행했다는 말은 그 출신이 에돔(에서의 후예) 자손이어서란 말은 아닙니다.
헤롯은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주전 40년 로마의 안토니오 황제에 의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 받은 분봉왕입니다.
그는 세상을 감동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46년 동안 성전 건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감동시키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곳에서 행복이나 성공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왕비를 열 명이나 두었습니다.
첫 부인 도리스가 헤롯의 손에 죽었고 그녀의 아들, 안티파텔이라는 왕자가 죽었습니다.
미리암네라는 둘째 아내와 그가 나은 두 아들도 헤롯의 손에 죽었습니다.
자신의 행복과 쾌락만을 추구하여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헤롯은 예수님께서 여자가 나은 사람 중에 이 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신 의인 세례요한을 죽이는 죄까지 범하였습니다.
가문도 불행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헤롯대왕은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많이 죽여야 했을 정도로 불안했습니다.
조카 (아그립바 1세)는 주님의 제자 야고보를 살해하였습니다.(사도행전 12장)
피비린내가 풍기는 집안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정작 실패한 사람은 세례 요한이 아니라 그를 죽인 헤롯과 헤로디아입니다.
그들의 생애에는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대신 탐욕과 피냄새만 있습니다.
헤롯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남을 불행하게 함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 뉴턴이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아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파리 한 마리가 눈앞에서 빙빙 돌며 귀찮게 구는 것입니다. 여러 번 쫓았지만 뉴턴 주위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뉴턴은 벌떡 일어나서 날아가는 파리를 손을 낚아챘는데 잡혔습니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날려 보내며 “야 이 녀석아! 세상이 얼마나 넓으냐! 그런데 너는 하필 내 얼굴 주위만 맴돌고 있느냐” 하였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세계를 모르고 인간의 부귀영화를 찾아 몸부림친 헤롯의 인생은 어리석음 바로 그것입니다. 행복은 남의 생명을 빼앗아 우리 자신의 기쁨을 채우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을 잘 살게 할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나로 인하여 타인이 행복하게 되었을 때 행복합니다.
사람들을 섬기면서 사는 것은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섬김을 받고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이 아닙니다. 송명희씨는 나는 황제보다 하인이 되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3.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배역을 끝까지 잘 감당했습니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상을 받는 배우는 남자냐 여자냐 하는 성을 따르지 않습니다.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조연을 맡아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들이 어느 배역을 맡았느냐로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맡은 배역에서 얼마나 감동적인 연기를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맡은 배역이 아무리 비천하고 사소해 보일지라도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어 낼 때 그의 훌륭히 연기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말씀하실 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자신의 배역을 잘 감당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배역과 재능을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 자기가 맡은 배역을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얼마나 충성할 수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배역을 맡겨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흡족하게 해 드렸는가 이점이 중요합니다.
요한 복음 3장 29절에 보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속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는 조연입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맡은 배역을 놀랍게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신부를 취하는 신랑을 드러내기 위해 죽는 배역을 충성되게 감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의 귀중한 검입니다
불란서에 자케퐁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큰 부자였습니다. 조카가 하나 있었는데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케퐁의 사업이 기울어 파산지경에 이르러 이제 십만 프랑밖에 남지 않았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자케퐁이 충격을 받아 그 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상속자인 조카에게 삼촌이 남긴 십만 프랑의 돈을 찾아가라고 했더니 이 조카도 충격을 받아서 그 길로 죽었습니다. 갑자기 십만 프랑이나 생기니까 너무 충격이 컸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말씀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이 세례 요한에게 너무나 적합한 말씀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마무리하는 말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 이제 요한의 사역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오심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충성스럽게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흥하여야 하실 그 시간에 자신은 쇠하고 있습니다(요 3:30).
요한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죽음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
"시대를 밝힌 각성자일 수 있었습니다.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사21:11).
이것은 밤과 같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인생들이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애타는 부르짖음입니다. 부르짖음에 대해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침이 오나니” (사21:12).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어두움의 시대가 계속되지만 아침도 온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어두운 시대를 마른 뼈가 가득한 죽음의 골짜기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도 아침이 올 것을 내다 보았습니다. 그 아침은 마른 뼈들이 살아서 일어나는 영적 각성과 교회 탄생의 아침이었습니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10).
다윗도 밤과 같이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가면서 아침이 올 것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그 아침은 구원의 아침이요 기쁨의 아침이었습니다.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그리고 아침을 깨우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
시대가 어두워질 때마다 시대를 깨우고 밝히는 각성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어두운 시대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1] 독일에서는 슈페너와 같은 경건주의자들이 하나님의 각성에 참여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 지 150여년이 지난 독일은 영적 및 사회적으로 캄캄한 밤과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1648년에 그친 “30년 전쟁”은 독일을 극도로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도시와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들었으며 굶어서 죽은 시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야콥 슈페너는 하나님의 탄식과 기도에 참여했습니다. 독일 교회 안에 즉각적이고도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슈페너는 300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는데 대부분이 그의 각성 운동을 지지하는 편지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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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4:13-21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들어가는 말
의인이 목이잘려 죽는 시대,
빈 들,
주린 배,
기울어 가는 석양,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배는 고플지라도 채울 음식조차 없는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현실에 지친 단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이런 경우,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이 먹을 것, 마실 것도 없는 광야니 백성들을 돌려보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참 편합니다. 책임도 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광야에서
인간이 한계 상황에 봉착한 바로 그 빈들에서,
주리고 있었던 바로 그 사람들 가운데서
하실 일이 있으셨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상황은 어떻습니까?
의인이 목이잘려 죽는 시대,
빈 들,
주린 배,
기울어 가는 석양,
이런 상황이 아닙니까?
오늘, 광야와 같은 이 시대에 부름을 받은 우리가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우리가 이 시대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을 찾을 수 있기 바랍니다.
1.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일하기 원하십니다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급급합니다.
무리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있는 제자들은 중요한 존재들입니다.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본문에서 제자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가장 절박한 문제의 순간에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는 상관없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해결자로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외합니다.
우리 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가질 때 주님을 열외시키고 혼자 그 짐을 짊어지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광야에서 무리들의 필요를 붙들고 주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주님의 제자입니다.
모세는 광야 40년을 그 백성의 필요를 붙들고 늘 기도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인류의 근본문제를 안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사랑하는 자녀의 문제를 안고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믿음 없이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응답은 무엇입니까?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엉뚱한 기도 응답을 주님께서는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뭐가 있겠습니까?
5병 2어뿐입니다.
그것은 나눌 수 있는 양이 못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저는 중국에 있는 가정 교회를 방문하면서 느끼고 깨닫는 것이 많았습니다.
믿음의 길에 들어선지 몇 년 되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하나씩을 맡아 충성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 다락방에서 평신도들이 진리에 대해 말씀을 나눕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일하실 그 기회를 찾고 계심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 일을 위해 나서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후를 책임지실 준비를 하고 계신 말씀입니다.
내가 책임지마, 내가 역사하마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나의 결혼식장에서 채워야 할 물이 있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항아리 물을 채우라.
하인들은 아구까지 물을 채웠습니다.
이것을 연회장에게 가져다주어라!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인들에게 퍼다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허탄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습니다.
베드로가 내려야 할 그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라
밤이 새도록 단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오른 편 깊은 곳으로 던져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바로 일꾼들을 통해 일할 기회를 찾고 계십니다.
북한 동족을 위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가졌다고 그런 말씀을 해마다 하십니까? 그쪽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한데 지금도 그말씀입니까? 하실 말씀이 많을 것입니다.
내가 선 땅이 너무 열악하여서 (광야이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이 너무나 적어서 (오병이어)
저들의 상황은 너무 열악해서(너무 깊은 곳이기 때문)
비이성적 행위(항아리에 맹물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머뭇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아닙니다 고집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순종할 수 있을 것인가!
2. 주님은 오병이어를 가져 오라 하십니다.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우리가 가져오는 것이 5병2어든, 7병2어든 아무 것이나 좋습니다.
중요한 일은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기도할 떼였습니다. 그는 비몽 사몽간에 한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일어나 잡아먹으라.
그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향해 나아가고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행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베드로조차도 이방인들에게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랐습니다.
행10:4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주님께서 아나니아의 오병이어를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행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안디옥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게 하시고 그들을 선교사로 보내게 하셨습니다.
행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들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순종하여 갔을 때, 세계 선교의 장이 열립니다.
"한 왕이 화려한 궁전에 방 하나를 마련하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가끔 왕은 그 방안에 들어가서 한참을 있다 나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한 신하가 우연찮게 그 방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방에는 오직 목동의 남루한 옷 한 벌만이 걸려있었습니다."
다윗은 과거 목동이었던 자신을 주님께 올려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자를 축복하셔서 크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시로 노래하여 전했습니다.
주님께 올려질 때, 주님께서 그것을 받아 축사하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왜요?
고전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드온과 300 용사란 보리떡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오병이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오리까.
내 집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지극히 작습니다.'(삿6:1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보리떡을 미디안 진영에 굴려 보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작은 자로 말미암아 온 민족이 구원받을 길이 열립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작고,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작고,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작지만, 여러분의 건강이, 재능이, 재물이, 여러분의 삶이 주님께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런 5병 2어를 받아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은 사람들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곤 하는 인간적인 망상이나 꿈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인데, 이것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에게서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 있고 과감한 신뢰입니다”(루터의 로마서 서문 중).
약한 나를 들어 쓰시어 주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게 하시고, 죄인된 나를 의인된 자로 바꾸어 주시는 오병이어는 오늘 우리 가운데 존재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릴 오병이어는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께 드릴 나의 가진 재능은?
수능을 본 학생들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5병2어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줄 아는 믿음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귀히 쓰임 받을 학생들인데 너무 아깝습니다
그들이 가진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 앞에 갔더라면 얼마나 축복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3. 주님께서는 오병이어를 축복하셨습니다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자그마한 어린아이의 도시락,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주님께 드려질 때에 주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5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를 남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축사하지지 않은 것들에게서 어떤 역사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크 여사와 교회에서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영부인을 통하여 우비를 군납하기로 하였답니다. 군납을 시작하게 되면 많은 돈을 모으는 것이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런데,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는 바람에 군납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효심이 아주 지극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매일 가방에 물건을 가득 담아 상점에 배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도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종이쪽지로 가방을 접어 보았습니다. 밑바닥이 네모난 종이쇼핑백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주 편리하고 가벼운 종이쇼핑백. 이 종이쇼핑백은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정은 큰 부자가 됐습니다. 그 때가 1887년이었고 그 소년의 이름은 바로 찰스 스틸웰이었습니다. 그는 종이쇼핑백의 첫 발명자로 기록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올려진 오병이어를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배 오른편 깊은 곳에 던질 때, 내 생각, 내 경험, 내 판단, 내 상식으로 결정하지 않고, 순종하여 그물을 깊은 곳에 던질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하인이 물을 떠다 드렸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에게 자아가 변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계모 밑에서 불행하게 자란 링컨이지만, 오병이어를 주님께 바쳤을 때 주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때 그는 큰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와이트 목사님은 강단에 설 때마다 항상 감사기도로 시작했습니다. 많은 경우 날씨와 관련하여 감사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어느 주일은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이 오늘은 어떻게 감사기도를 하실까?" 궁금해하며 목사님의 기도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드디어 목사님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오! 사랑의 하나님, 다른 날들은 오늘과 같은 날씨가 아닌 것을 감사드립니다."
어떤 분은 감사는 체질이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불평하는 우리의 체질을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감사하는 체질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한 소년이 자신의 친구가 자기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서랍을 열어보고 그 속에 품격 없는 잡지를 발견했다고 자랑거리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친구의 말을 들은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아버지의 서랍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열어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아버지의 "기도일기"가 들어있었습니다. 매일매일의 감사제목과 기도제목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기도제목에는 자신의 이름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우리 아버지의 마음속에 항상 감사가 있고 내가 있구나' 생각하며 뜨거운 감동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금년도 한 해가 기울어져 갑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이 빈들에서 무엇을 얻자고 달려오셨습니까?
내가 가진 오병이어는 무엇입니까?
금년 한 해 여러분은 그 오병이어를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남은 생애가 되시길 바랍니다.
의인이 목이잘려 죽는 시대,
빈 들,
주린 배,
기울어 가는 석양,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배는 고플지라도 채울 음식조차 없는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현실에 지친 단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이런 경우,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이 먹을 것, 마실 것도 없는 광야니 백성들을 돌려보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참 편합니다. 책임도 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광야에서
인간이 한계 상황에 봉착한 바로 그 빈들에서,
주리고 있었던 바로 그 사람들 가운데서
하실 일이 있으셨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상황은 어떻습니까?
의인이 목이잘려 죽는 시대,
빈 들,
주린 배,
기울어 가는 석양,
이런 상황이 아닙니까?
오늘, 광야와 같은 이 시대에 부름을 받은 우리가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우리가 이 시대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을 찾을 수 있기 바랍니다.
1.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일하기 원하십니다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급급합니다.
무리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있는 제자들은 중요한 존재들입니다.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본문에서 제자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가장 절박한 문제의 순간에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는 상관없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해결자로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외합니다.
우리 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가질 때 주님을 열외시키고 혼자 그 짐을 짊어지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광야에서 무리들의 필요를 붙들고 주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주님의 제자입니다.
모세는 광야 40년을 그 백성의 필요를 붙들고 늘 기도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인류의 근본문제를 안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사랑하는 자녀의 문제를 안고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믿음 없이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응답은 무엇입니까?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엉뚱한 기도 응답을 주님께서는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뭐가 있겠습니까?
5병 2어뿐입니다.
그것은 나눌 수 있는 양이 못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저는 중국에 있는 가정 교회를 방문하면서 느끼고 깨닫는 것이 많았습니다.
믿음의 길에 들어선지 몇 년 되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하나씩을 맡아 충성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 다락방에서 평신도들이 진리에 대해 말씀을 나눕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일하실 그 기회를 찾고 계심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 일을 위해 나서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후를 책임지실 준비를 하고 계신 말씀입니다.
내가 책임지마, 내가 역사하마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나의 결혼식장에서 채워야 할 물이 있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항아리 물을 채우라.
하인들은 아구까지 물을 채웠습니다.
이것을 연회장에게 가져다주어라!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인들에게 퍼다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허탄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습니다.
베드로가 내려야 할 그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라
밤이 새도록 단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오른 편 깊은 곳으로 던져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바로 일꾼들을 통해 일할 기회를 찾고 계십니다.
북한 동족을 위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가졌다고 그런 말씀을 해마다 하십니까? 그쪽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한데 지금도 그말씀입니까? 하실 말씀이 많을 것입니다.
내가 선 땅이 너무 열악하여서 (광야이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이 너무나 적어서 (오병이어)
저들의 상황은 너무 열악해서(너무 깊은 곳이기 때문)
비이성적 행위(항아리에 맹물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머뭇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아닙니다 고집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순종할 수 있을 것인가!
2. 주님은 오병이어를 가져 오라 하십니다.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우리가 가져오는 것이 5병2어든, 7병2어든 아무 것이나 좋습니다.
중요한 일은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기도할 떼였습니다. 그는 비몽 사몽간에 한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일어나 잡아먹으라.
그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향해 나아가고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행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베드로조차도 이방인들에게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랐습니다.
행10:4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주님께서 아나니아의 오병이어를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행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안디옥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게 하시고 그들을 선교사로 보내게 하셨습니다.
행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들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순종하여 갔을 때, 세계 선교의 장이 열립니다.
"한 왕이 화려한 궁전에 방 하나를 마련하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가끔 왕은 그 방안에 들어가서 한참을 있다 나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한 신하가 우연찮게 그 방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방에는 오직 목동의 남루한 옷 한 벌만이 걸려있었습니다."
다윗은 과거 목동이었던 자신을 주님께 올려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자를 축복하셔서 크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시로 노래하여 전했습니다.
주님께 올려질 때, 주님께서 그것을 받아 축사하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왜요?
고전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드온과 300 용사란 보리떡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오병이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오리까.
내 집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지극히 작습니다.'(삿6:1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보리떡을 미디안 진영에 굴려 보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작은 자로 말미암아 온 민족이 구원받을 길이 열립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작고,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작고,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작지만, 여러분의 건강이, 재능이, 재물이, 여러분의 삶이 주님께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런 5병 2어를 받아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은 사람들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곤 하는 인간적인 망상이나 꿈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인데, 이것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에게서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 있고 과감한 신뢰입니다”(루터의 로마서 서문 중).
약한 나를 들어 쓰시어 주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게 하시고, 죄인된 나를 의인된 자로 바꾸어 주시는 오병이어는 오늘 우리 가운데 존재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릴 오병이어는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께 드릴 나의 가진 재능은?
수능을 본 학생들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5병2어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줄 아는 믿음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귀히 쓰임 받을 학생들인데 너무 아깝습니다
그들이 가진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 앞에 갔더라면 얼마나 축복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3. 주님께서는 오병이어를 축복하셨습니다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자그마한 어린아이의 도시락,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주님께 드려질 때에 주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5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를 남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축사하지지 않은 것들에게서 어떤 역사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크 여사와 교회에서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영부인을 통하여 우비를 군납하기로 하였답니다. 군납을 시작하게 되면 많은 돈을 모으는 것이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런데,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는 바람에 군납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효심이 아주 지극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매일 가방에 물건을 가득 담아 상점에 배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도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종이쪽지로 가방을 접어 보았습니다. 밑바닥이 네모난 종이쇼핑백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주 편리하고 가벼운 종이쇼핑백. 이 종이쇼핑백은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정은 큰 부자가 됐습니다. 그 때가 1887년이었고 그 소년의 이름은 바로 찰스 스틸웰이었습니다. 그는 종이쇼핑백의 첫 발명자로 기록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올려진 오병이어를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배 오른편 깊은 곳에 던질 때, 내 생각, 내 경험, 내 판단, 내 상식으로 결정하지 않고, 순종하여 그물을 깊은 곳에 던질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하인이 물을 떠다 드렸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에게 자아가 변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계모 밑에서 불행하게 자란 링컨이지만, 오병이어를 주님께 바쳤을 때 주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때 그는 큰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와이트 목사님은 강단에 설 때마다 항상 감사기도로 시작했습니다. 많은 경우 날씨와 관련하여 감사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어느 주일은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이 오늘은 어떻게 감사기도를 하실까?" 궁금해하며 목사님의 기도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드디어 목사님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오! 사랑의 하나님, 다른 날들은 오늘과 같은 날씨가 아닌 것을 감사드립니다."
어떤 분은 감사는 체질이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불평하는 우리의 체질을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감사하는 체질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한 소년이 자신의 친구가 자기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서랍을 열어보고 그 속에 품격 없는 잡지를 발견했다고 자랑거리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친구의 말을 들은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아버지의 서랍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열어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아버지의 "기도일기"가 들어있었습니다. 매일매일의 감사제목과 기도제목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기도제목에는 자신의 이름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우리 아버지의 마음속에 항상 감사가 있고 내가 있구나' 생각하며 뜨거운 감동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금년도 한 해가 기울어져 갑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이 빈들에서 무엇을 얻자고 달려오셨습니까?
내가 가진 오병이어는 무엇입니까?
금년 한 해 여러분은 그 오병이어를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남은 생애가 되시길 바랍니다.
마14:22-34 풍랑은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기회
들어가는 말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중에 풍랑이 있습니다. 가는 길에 풍랑이 없기를 원하여 돼지 머리까지 등장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풍랑이 있는 바다로 보내셨습니다.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풍랑이 일어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풍랑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곳으로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골탕먹이실 분이 절대 아니신 데 말입니다.
1. 풍랑은 주님의 기도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일어날 일이 중요한 사건이겠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내신 후에 기도하신 일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사역을 시작하실 중요한 시점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바다로 제자들을 보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허락하신 그 풍랑 속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날 밤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위하여 기도하고 계심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도 이런 주님을 본 받아 우리의 소중한 자녀와 교우들을 세상에 보낼 때 늘 위하여 주님의 중보기도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한 줄 압니다.
위로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입니다. 제가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데, 놀다가 재미가 없었는지 아니면 성령께서 감동을 주셨는지 그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제 곁에 한참을 엎드려 있었습니다. 아마 10분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제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참 뿌듯하고 좋더라구요. 그 어린이가 어떤 기도를 하였겠습니까? 저의 마음을 알았겠습니까? 아마 엉뚱한 기도를 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빠의 기도에 동참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참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해 주님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을 기도에 참여하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선교사님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2. 풍랑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체험할 기회입니다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갈릴리 바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생활현장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그들 인생과 불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보고 자랐습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바다에 몸을 담그고 헤엄을 치면서 자랐습니다.
그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왔습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하이웨이에서 차를 자유자제로 몰아가는 것처럼 그들은 배를 자유자제로 몰아가면서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친근한 갈릴리 바다였지만 천국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좋은 날, 그들은 바다를 여유있게 노저어가면서 고기를 잡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다는 궂은 날도 있었습니다.
바다는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속성을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바다는 풍랑이 이는 그런 날에 그들의 배를 뒤집어버릴 수 있는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이 바다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은 갈릴리 바닷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숙제였습니다.
그들은 이 무서운 속성에 살아남기 위하여 배를 만들었습니다.
수영을 배웠습니다.
날이 좋지 않은 날에는 바다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는 인간의 모든 준비를 순식간에 뒤집어 엎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형관계로 돌풍이란 변수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세상은 바로 이런 바다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속성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고 삽니다.
생활을 영위합니다.
집을 짓고 삽니다.
문화를 누리고 삽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에덴 동산은 아닙니다. 인간이 침몰되는 현장도 바로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때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을 체험하며 삽니다.
세상은 암이나 에이즈 같은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간을 파괴합니다.
마약 술 같은 것들로 인간을 마취당합니다.
인본주의나 이분법적 사고들로 인하여 인간은 치명적 손상을 입습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란 책에서 인간을 침몰시키는 이런 세상의 속성을 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책의 곳곳에 인본주의적 사고의 위험성을 세상에 경고합니다. 이분법적 사고를 경고합니다. 성경이 우주, 역사 그리고 절대적 도덕 명령에 대하여 확증하는 것을 받아들이라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빨려들어가서는 안됩니다.
빨려들어 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바다에 빨려들어가면 죽음이 오는 것처럼 사람이 세상에 빨려들어가 잠기면 죽음에 떨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세상을 너무 신뢰하고 세상에 지나친 기대와 소망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너무 깊이 들어와서 그 안에 침몰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라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
3. 풍랑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바다로 보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만 하고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풍랑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죄 가운데 고통을 당하는 인류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실 뿐만아니라 때가 되어 육신을 입으시고 찾아오셨습니다.
풍랑 속에서 몸부림을 치던 제자들의 눈에 놀라우신 주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풍랑 이는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이셨습니다.
밤이 4경이면 모든 사람이 다 잠이 든 깊은 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깊은 시간에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깊은 밤을 체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이 말씀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그 바다’ 바로 풍랑이 당장 집어 삼킬 듯이 넘실거리던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본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고통 당하는 바로 그 곳으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그러나 그분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이런 놀라운 사랑의 주님께서 오실지라도 제자들에겐 이런 오해가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있을 수 없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그럴 수 있지요. 들어보지도 못한 사건을 대할 때 그 외의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이해할 만한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그들을 나무라시지 않았습니다.
나무람 대신 큰 위로를 주셨습니다.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주님으로부터 이런 위로의 말씀을 늘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 할지라도 이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힘든 현실을 알고 계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걸어오십니다.
아무리 깊은 밤이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걸어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어린 양이여
땅과 하늘의 권세 잡은 이(너 있는 곳에 주 늘 계시니)
널 찾아 내어 안보하시리니(이 밤이 지나 새멱 올 때까지)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리라(네 선한 목자 함께 하시리라)
다니엘과 세 친구가 풍랑 속에서 찾아오시는 주님을 체험하였습니다.
평강을 주시는 주님, 얼마나 놀라운 주님이십니까? 이런 주님을 만나서 그분을 주님으로, 목자로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4. 풍랑은 주님의 구원을 체험할 기회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두려운 일들을 물리치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살거나 바다에 순종하고 사는 세상에서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바다 위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풍랑 속에서 바다에 빠져들어가는 그 시간 바다에 빠지지 않으시는 한 분이 그들 곁으로 다가오고 계셨습니다.
바다를 이기시는 오직 한 분, 바로 그들이 주로 모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이 사실은 엄청난 감동이었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풍랑 앞에서 벌벌 떨던 자신도 예수님처럼 바다에 빠지지 않고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물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저도 이 악한 세상에 침몰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간단히 대답하셨습니다.
29 오라 !
그 두려움의 대상인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분은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세상을 이길 권세 주시기 원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확증시켜주신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을 수 있는 권세를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선포하신 왕 중 왕께서 그 제자인 베드로에게도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으므로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베드로가 가진 그 믿음이었습니다.
풍랑 앞에서 흔들리는 작은 믿음이었습니다.
무섭게 몰아치는 풍랑을 보면서 그는 잠깐 예수님 바라보는 믿음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가 말씀을 잊었을 때, 예수님을 쳐다보기를 멈추었을 때(히 12:1-2), 그는 바다 속으로 침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믿음에는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폭풍우를 극복하고 불가능한 일을 극복하는 믿음의 비결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손으로 그를 붙드시면서 그가 침몰할 수밖에 없었던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우리가 실패할 때조차도 예수님께서는 은혜롭게 도와 주십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기록하기에 적절하도록 훈련을 받은 셈입니다.
비결은 믿음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풍랑 속의 성도들에게 "믿음이 적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돌보심)이라 !"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기회입니다.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기독교 역사에 보면, 위기가 있었습니다. 중세에 들어서면서 암흑기가 오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겠다는 사람들의 손에서 교회는 성경을 뺏고 핍박을 하는 웃기는 현상이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왈도파는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후스는 이 침몰되어가는 인본주의적 사고 속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을 통해 기독교에 들어온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한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
오늘날, 교회 역시 세상의 풍랑 가운데 있습니다.
제자들도 폭풍 가운데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요나처럼 그리스도께 불순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 순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면 세상에서 오히려 고난과 핍박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어스비가 깨우쳐주는 것처럼 그 풍랑으로 고통 당하는 바로 그 시간에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어느 날,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마무리 하는 말
풍랑 가운데 계신다고 생각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좋은 기회 가운데 있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풍랑은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기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풍랑 가운데 침몰하도록 방치해 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 속에서 고통당하는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안심하십시오.
오늘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세상 권세 아래 침몰되어가는 우리를 모든 부족함과 죄의 고통에서부터 구할 수 있는 메시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 속에서 고통당하는 제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때로 베드로가 바다 위를 믿음으로 걸었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세상 위를 걸어갑니다.
그러나 자주 거세게 불어 닥치는 풍랑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일을 놓치게 됩니다.
보이는 것만 바라보다 두려움에 빠져 믿음을 상실하곤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믿음이 연약해져 바다에 침몰당할 뻔 하였으나 죽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능하신 주께서 그를 건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로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믿음을 잃고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우리는 세상에 침몰당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손을 내미셔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는 침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장으로 모시고, 반드시 강 저편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에 이를 것입니다.
이 놀라운 분이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우리 주님이십니다.
하늘의 것,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며 꿋꿋이 나아갑시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중에 풍랑이 있습니다. 가는 길에 풍랑이 없기를 원하여 돼지 머리까지 등장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풍랑이 있는 바다로 보내셨습니다.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풍랑이 일어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풍랑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곳으로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골탕먹이실 분이 절대 아니신 데 말입니다.
1. 풍랑은 주님의 기도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일어날 일이 중요한 사건이겠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내신 후에 기도하신 일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사역을 시작하실 중요한 시점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바다로 제자들을 보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허락하신 그 풍랑 속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날 밤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위하여 기도하고 계심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도 이런 주님을 본 받아 우리의 소중한 자녀와 교우들을 세상에 보낼 때 늘 위하여 주님의 중보기도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한 줄 압니다.
위로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입니다. 제가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데, 놀다가 재미가 없었는지 아니면 성령께서 감동을 주셨는지 그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제 곁에 한참을 엎드려 있었습니다. 아마 10분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제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참 뿌듯하고 좋더라구요. 그 어린이가 어떤 기도를 하였겠습니까? 저의 마음을 알았겠습니까? 아마 엉뚱한 기도를 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빠의 기도에 동참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참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해 주님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을 기도에 참여하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선교사님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2. 풍랑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체험할 기회입니다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갈릴리 바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생활현장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그들 인생과 불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보고 자랐습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바다에 몸을 담그고 헤엄을 치면서 자랐습니다.
그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왔습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하이웨이에서 차를 자유자제로 몰아가는 것처럼 그들은 배를 자유자제로 몰아가면서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친근한 갈릴리 바다였지만 천국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좋은 날, 그들은 바다를 여유있게 노저어가면서 고기를 잡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다는 궂은 날도 있었습니다.
바다는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속성을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바다는 풍랑이 이는 그런 날에 그들의 배를 뒤집어버릴 수 있는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이 바다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은 갈릴리 바닷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숙제였습니다.
그들은 이 무서운 속성에 살아남기 위하여 배를 만들었습니다.
수영을 배웠습니다.
날이 좋지 않은 날에는 바다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는 인간의 모든 준비를 순식간에 뒤집어 엎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형관계로 돌풍이란 변수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세상은 바로 이런 바다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속성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고 삽니다.
생활을 영위합니다.
집을 짓고 삽니다.
문화를 누리고 삽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에덴 동산은 아닙니다. 인간이 침몰되는 현장도 바로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때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을 체험하며 삽니다.
세상은 암이나 에이즈 같은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간을 파괴합니다.
마약 술 같은 것들로 인간을 마취당합니다.
인본주의나 이분법적 사고들로 인하여 인간은 치명적 손상을 입습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란 책에서 인간을 침몰시키는 이런 세상의 속성을 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책의 곳곳에 인본주의적 사고의 위험성을 세상에 경고합니다. 이분법적 사고를 경고합니다. 성경이 우주, 역사 그리고 절대적 도덕 명령에 대하여 확증하는 것을 받아들이라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빨려들어가서는 안됩니다.
빨려들어 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바다에 빨려들어가면 죽음이 오는 것처럼 사람이 세상에 빨려들어가 잠기면 죽음에 떨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세상을 너무 신뢰하고 세상에 지나친 기대와 소망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너무 깊이 들어와서 그 안에 침몰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라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
3. 풍랑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바다로 보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만 하고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풍랑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죄 가운데 고통을 당하는 인류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실 뿐만아니라 때가 되어 육신을 입으시고 찾아오셨습니다.
풍랑 속에서 몸부림을 치던 제자들의 눈에 놀라우신 주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풍랑 이는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이셨습니다.
밤이 4경이면 모든 사람이 다 잠이 든 깊은 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깊은 시간에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깊은 밤을 체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이 말씀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그 바다’ 바로 풍랑이 당장 집어 삼킬 듯이 넘실거리던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본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고통 당하는 바로 그 곳으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그러나 그분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이런 놀라운 사랑의 주님께서 오실지라도 제자들에겐 이런 오해가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있을 수 없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그럴 수 있지요. 들어보지도 못한 사건을 대할 때 그 외의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이해할 만한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그들을 나무라시지 않았습니다.
나무람 대신 큰 위로를 주셨습니다.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주님으로부터 이런 위로의 말씀을 늘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 할지라도 이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힘든 현실을 알고 계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걸어오십니다.
아무리 깊은 밤이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걸어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어린 양이여
땅과 하늘의 권세 잡은 이(너 있는 곳에 주 늘 계시니)
널 찾아 내어 안보하시리니(이 밤이 지나 새멱 올 때까지)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리라(네 선한 목자 함께 하시리라)
다니엘과 세 친구가 풍랑 속에서 찾아오시는 주님을 체험하였습니다.
평강을 주시는 주님, 얼마나 놀라운 주님이십니까? 이런 주님을 만나서 그분을 주님으로, 목자로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4. 풍랑은 주님의 구원을 체험할 기회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두려운 일들을 물리치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살거나 바다에 순종하고 사는 세상에서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바다 위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풍랑 속에서 바다에 빠져들어가는 그 시간 바다에 빠지지 않으시는 한 분이 그들 곁으로 다가오고 계셨습니다.
바다를 이기시는 오직 한 분, 바로 그들이 주로 모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이 사실은 엄청난 감동이었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풍랑 앞에서 벌벌 떨던 자신도 예수님처럼 바다에 빠지지 않고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물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저도 이 악한 세상에 침몰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간단히 대답하셨습니다.
29 오라 !
그 두려움의 대상인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분은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세상을 이길 권세 주시기 원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확증시켜주신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을 수 있는 권세를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선포하신 왕 중 왕께서 그 제자인 베드로에게도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으므로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베드로가 가진 그 믿음이었습니다.
풍랑 앞에서 흔들리는 작은 믿음이었습니다.
무섭게 몰아치는 풍랑을 보면서 그는 잠깐 예수님 바라보는 믿음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가 말씀을 잊었을 때, 예수님을 쳐다보기를 멈추었을 때(히 12:1-2), 그는 바다 속으로 침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믿음에는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폭풍우를 극복하고 불가능한 일을 극복하는 믿음의 비결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손으로 그를 붙드시면서 그가 침몰할 수밖에 없었던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우리가 실패할 때조차도 예수님께서는 은혜롭게 도와 주십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기록하기에 적절하도록 훈련을 받은 셈입니다.
비결은 믿음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풍랑 속의 성도들에게 "믿음이 적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돌보심)이라 !"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기회입니다.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기독교 역사에 보면, 위기가 있었습니다. 중세에 들어서면서 암흑기가 오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겠다는 사람들의 손에서 교회는 성경을 뺏고 핍박을 하는 웃기는 현상이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왈도파는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후스는 이 침몰되어가는 인본주의적 사고 속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을 통해 기독교에 들어온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한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
오늘날, 교회 역시 세상의 풍랑 가운데 있습니다.
제자들도 폭풍 가운데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요나처럼 그리스도께 불순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 순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면 세상에서 오히려 고난과 핍박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어스비가 깨우쳐주는 것처럼 그 풍랑으로 고통 당하는 바로 그 시간에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어느 날,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마무리 하는 말
풍랑 가운데 계신다고 생각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좋은 기회 가운데 있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풍랑은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기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풍랑 가운데 침몰하도록 방치해 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 속에서 고통당하는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안심하십시오.
오늘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세상 권세 아래 침몰되어가는 우리를 모든 부족함과 죄의 고통에서부터 구할 수 있는 메시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 속에서 고통당하는 제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때로 베드로가 바다 위를 믿음으로 걸었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세상 위를 걸어갑니다.
그러나 자주 거세게 불어 닥치는 풍랑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일을 놓치게 됩니다.
보이는 것만 바라보다 두려움에 빠져 믿음을 상실하곤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믿음이 연약해져 바다에 침몰당할 뻔 하였으나 죽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능하신 주께서 그를 건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로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믿음을 잃고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우리는 세상에 침몰당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손을 내미셔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는 침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장으로 모시고, 반드시 강 저편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에 이를 것입니다.
이 놀라운 분이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우리 주님이십니다.
하늘의 것,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며 꿋꿋이 나아갑시다
마14:34-36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
34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서머나 교회 6주년 생일입니다.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서머나 교회를 향한 꿈도 여전합니다.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서머나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교회의 목적은
'예수님을 닮는 교회’입니다.
1] 진리를 순종함으로,
2] 서로 사랑함으로
3] 땅 끝까지 선교함으로
예수님을 닮는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우리가 흔들어야 할 깃발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아는 진리의 공동체를 이루는 일입니다.
34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34-35a)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을 보자, '예수신 줄을' 알았습니다.
단지 예수란 분이 오셨구나 이렇게 안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이란 구원자가 오셨구나 이렇게 알았습니다. 이 지식이 귀중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약속된 메시아임을 아는 지식이 중요합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똑똑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어야 할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조차 예수님께서 구원하실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한 때,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구원자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많은 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야 병에 걸리지 않을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출세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출세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돈 버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연약함을 감당할 수 있는 구원자이심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병을 치료하실 수 있는 구원자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구원자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는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병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는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메시아시다는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들은 비록 세상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 시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구원자라는 중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 특별히 자랑할 무엇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와 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고 믿는 성도들입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는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배당 건물을 아직 빌려쓰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방 하나가 더 필요하기 때문에 허락해 주실 것을 두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이시라는 소중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구원이 있음을 확신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는 진리의 공동체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이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좋은 교회 건물을 소유한 사실보다 더 소중한 재산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알아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 일이 올림픽에 나갈 만한 건강을 소유한 것보다 더 중요한 건강입니다.
만일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서머나 교회가 간직하면서 자랑해야 할 참으로 중요한 지식은 예수님께서 나의 연약함과 질병을 대신 감당하시는 분이시라는 신앙 고백과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소유한 진리의 공동체란 사실입니다.
구원의 주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지식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으로 연구합시다.
다락방에 모여서도 이 지식을 붙들고 진리의 공동체를 이루어 갑시다.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그 진리에 순종하는 지체를 배나 존경합시다.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으로 예수님을 닮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2. 연약한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예수님을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로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가져야 할 마음이 무엇입니까?
병들고 연약한 이웃에 대한 관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로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 한 일은 병들고 연약한 이웃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연약하고 병든 이웃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통지하였습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신 줄을 아는 지식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병들어 있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는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그들 곁에는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았던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간과 사랑을 나누어서 이런 약한 이웃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배려했습니다.
그들은 이 구원자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을 받아야 할 병들고 연약한 친척과 이웃을 생각했습니다.
절뚝발이 된 이웃과 형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불구자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소경과 벙어리 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것은 병들고 연약한 이웃에 대하여 관심이었습니다.
병들고 연약한 형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연약하고 병든 자들은 건강한 이웃의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초대 교회를 이룬 중요 맴버들 가운데는 바로 약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주된 구성원들 가운데는 노예를 비롯한 하층에 속한 사람들이 많이 속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그런 연약한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행2:45)
예수님의 은혜로 자라가는 우리 서머나교회가 예수님을 닮기 원하면서 노력하는 목표는 연약한 이웃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힘든 일입니다.
이 시대는 강한 자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약육강식의 사회입니다.
강한 자가 존경받습니다.
가진 자가 어깨를 펴고 삽니다.
스포츠 재벌이란 말이 있듯이, 힘센 자가 부를 누리는 시대입니다.
반대로 약한 자는 무시당합니다.
없는 자는 위축되어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연약하고 병든 자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일부러 연약한 자들만 쓸어모을 수만은 없지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와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약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북한 동족이나 탈북자들은 많이 약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갖추고 살더라도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고국의 수재민들이 그 예입니다. 교회가 그들을 위해 관심을 갖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헌금하신 교회 창립 헌금 역시 지금까지는 이런 약한 자들을 위해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시 한편을 이 주제로 적어봅니다.
관심은 간섭이 아니다
관심은 간섭이 아니다.
관심은 사랑이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탓을 때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높은 파도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무관심한 요나의 몸을 고기 뱃속에 집어넣을 만큼
고국을 향한 다니엘의 관심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하루 세번씩 열어젖혔고
사자의 어금니가 떨릴만큼 기도하게 하였다.
조카 롯을 향한 아브라함의 관심은
롯을 향해 쏟어지던 소돔의 유황불을 막을 수 있었느니.
내 동족이 구원 얻을 수만 있다면
내 생명이 끊어져도 좋겠다는 사도 바울의 관심을 안다면
제자들을 향한 관심에
밤 4경,
바다 위로 서둘러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당신 배에 모셔들이라.
그리고 나도 그분의 심장으로
연약한 이웃을 향해 눈을 열자.
호숫가를 거닐며 오늘도 죽음을 생각하는 한 형제랑
소외된 북한 동족에게 팔을 벌리고
만주 추운 산 속에서 겨울을 나는 탈북자들을 향해 따뜻한 불씨를 지펴보라
관심은 간섭이 아니다.
관심은 사랑이다.
3. 약한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선교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예수님을 세상에 오신 구세주로 아는 사람들의 귀한 특징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보니,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든 병든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는 그런 약한 분들을 고칠 능력은 없지만, 약한 분들을 예수님께 데려올 수는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데려 오기가 힘들다면 몇 사람이 합심하여 데려 올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칠 수는 없었지만 주님 앞에 데려왔던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는 없지만 소경의 지팡이가 되어 그를 예수님께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 낮, 운전하면서 한국 방송을 잠깐 틀었더니 참 불우한 이민자의 수기가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캐나다에 이민 와서 사랑하는 남편도 잃고 돈도 잃고 너무 힘들어하는 분의 눈물어린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너무 외로워서 한국 친지들을 향한 전화통에 매달려 살다 그것마저 돈이 없어 할 수 없게 되자 눈물을 쏟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안쓰러웠습니다.
'누가 저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할 수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을 만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텐데..... .'
예수님께만 나아오면 죄사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만 나아오면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만 나아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 저 외로운 이웃을 교회로 인도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주보가 얼마나 예쁩니까? 이 주보를 보신 후, 휴지통에 버리기 아깝지 않습니까? 이웃에 전해주십시오.
저도 남은 크리스챤 신문이 있으면 남은 주보를 끼워 이웃 집에 놓아드립니다.
무언가 할 일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선교지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인터넷에 이메일을 보내실 줄 아시는 분은 선교사님들께 사랑의 언어, 은혜 받은 한 말씀이라도 보내는 습관을 들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무리하는 말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36b)
벙어리가 말하게 되었습니다.
불구자가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절뚝발이가 바로 걷게 되었습니다.
소경이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감동적인 모습을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15:31)
얼마나 신나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의 바른 지식이 사람을 살립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이심을 통지해 줌으로 연약한 이웃에게 소망의 길이 열렸습니다.
전도로 이 놀라운 예수님을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로 인하여 구원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들도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회복이 되었습니다.
사막 같은 저들의 인생에 샘이 넘쳐흐르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어린양이 사자들과 함께 뛰노는 바로 그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하여 천국은 이루어져 갑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가 어떤 교회이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아는 진리의 공동체
연약한 이웃을 품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공동체
외롭고 소외된 이웃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선교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은, 함께 생활할수록 예수님이 서로 생각나는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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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오늘은 서머나 교회 6주년 생일입니다.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서머나 교회를 향한 꿈도 여전합니다.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서머나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교회의 목적은
'예수님을 닮는 교회’입니다.
1] 진리를 순종함으로,
2] 서로 사랑함으로
3] 땅 끝까지 선교함으로
예수님을 닮는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우리가 흔들어야 할 깃발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아는 진리의 공동체를 이루는 일입니다.
34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34-35a)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을 보자, '예수신 줄을' 알았습니다.
단지 예수란 분이 오셨구나 이렇게 안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이란 구원자가 오셨구나 이렇게 알았습니다. 이 지식이 귀중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약속된 메시아임을 아는 지식이 중요합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똑똑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어야 할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조차 예수님께서 구원하실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한 때,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구원자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많은 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야 병에 걸리지 않을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출세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출세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돈 버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연약함을 감당할 수 있는 구원자이심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병을 치료하실 수 있는 구원자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구원자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는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병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는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메시아시다는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들은 비록 세상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 시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구원자라는 중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 특별히 자랑할 무엇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와 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고 믿는 성도들입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는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배당 건물을 아직 빌려쓰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방 하나가 더 필요하기 때문에 허락해 주실 것을 두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이시라는 소중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구원이 있음을 확신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는 진리의 공동체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이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좋은 교회 건물을 소유한 사실보다 더 소중한 재산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알아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 일이 올림픽에 나갈 만한 건강을 소유한 것보다 더 중요한 건강입니다.
만일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서머나 교회가 간직하면서 자랑해야 할 참으로 중요한 지식은 예수님께서 나의 연약함과 질병을 대신 감당하시는 분이시라는 신앙 고백과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소유한 진리의 공동체란 사실입니다.
구원의 주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지식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으로 연구합시다.
다락방에 모여서도 이 지식을 붙들고 진리의 공동체를 이루어 갑시다.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그 진리에 순종하는 지체를 배나 존경합시다.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으로 예수님을 닮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2. 연약한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예수님을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로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가져야 할 마음이 무엇입니까?
병들고 연약한 이웃에 대한 관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로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 한 일은 병들고 연약한 이웃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연약하고 병든 이웃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통지하였습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신 줄을 아는 지식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병들어 있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는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그들 곁에는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았던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간과 사랑을 나누어서 이런 약한 이웃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배려했습니다.
그들은 이 구원자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을 받아야 할 병들고 연약한 친척과 이웃을 생각했습니다.
절뚝발이 된 이웃과 형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불구자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소경과 벙어리 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것은 병들고 연약한 이웃에 대하여 관심이었습니다.
병들고 연약한 형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연약하고 병든 자들은 건강한 이웃의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초대 교회를 이룬 중요 맴버들 가운데는 바로 약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주된 구성원들 가운데는 노예를 비롯한 하층에 속한 사람들이 많이 속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그런 연약한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행2:45)
예수님의 은혜로 자라가는 우리 서머나교회가 예수님을 닮기 원하면서 노력하는 목표는 연약한 이웃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힘든 일입니다.
이 시대는 강한 자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약육강식의 사회입니다.
강한 자가 존경받습니다.
가진 자가 어깨를 펴고 삽니다.
스포츠 재벌이란 말이 있듯이, 힘센 자가 부를 누리는 시대입니다.
반대로 약한 자는 무시당합니다.
없는 자는 위축되어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연약하고 병든 자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일부러 연약한 자들만 쓸어모을 수만은 없지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와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약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북한 동족이나 탈북자들은 많이 약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갖추고 살더라도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고국의 수재민들이 그 예입니다. 교회가 그들을 위해 관심을 갖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헌금하신 교회 창립 헌금 역시 지금까지는 이런 약한 자들을 위해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시 한편을 이 주제로 적어봅니다.
관심은 간섭이 아니다
관심은 간섭이 아니다.
관심은 사랑이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탓을 때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높은 파도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무관심한 요나의 몸을 고기 뱃속에 집어넣을 만큼
고국을 향한 다니엘의 관심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하루 세번씩 열어젖혔고
사자의 어금니가 떨릴만큼 기도하게 하였다.
조카 롯을 향한 아브라함의 관심은
롯을 향해 쏟어지던 소돔의 유황불을 막을 수 있었느니.
내 동족이 구원 얻을 수만 있다면
내 생명이 끊어져도 좋겠다는 사도 바울의 관심을 안다면
제자들을 향한 관심에
밤 4경,
바다 위로 서둘러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당신 배에 모셔들이라.
그리고 나도 그분의 심장으로
연약한 이웃을 향해 눈을 열자.
호숫가를 거닐며 오늘도 죽음을 생각하는 한 형제랑
소외된 북한 동족에게 팔을 벌리고
만주 추운 산 속에서 겨울을 나는 탈북자들을 향해 따뜻한 불씨를 지펴보라
관심은 간섭이 아니다.
관심은 사랑이다.
3. 약한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선교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예수님을 세상에 오신 구세주로 아는 사람들의 귀한 특징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보니,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든 병든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는 그런 약한 분들을 고칠 능력은 없지만, 약한 분들을 예수님께 데려올 수는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데려 오기가 힘들다면 몇 사람이 합심하여 데려 올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칠 수는 없었지만 주님 앞에 데려왔던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는 없지만 소경의 지팡이가 되어 그를 예수님께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 낮, 운전하면서 한국 방송을 잠깐 틀었더니 참 불우한 이민자의 수기가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캐나다에 이민 와서 사랑하는 남편도 잃고 돈도 잃고 너무 힘들어하는 분의 눈물어린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너무 외로워서 한국 친지들을 향한 전화통에 매달려 살다 그것마저 돈이 없어 할 수 없게 되자 눈물을 쏟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안쓰러웠습니다.
'누가 저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할 수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을 만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텐데..... .'
예수님께만 나아오면 죄사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만 나아오면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만 나아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 저 외로운 이웃을 교회로 인도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주보가 얼마나 예쁩니까? 이 주보를 보신 후, 휴지통에 버리기 아깝지 않습니까? 이웃에 전해주십시오.
저도 남은 크리스챤 신문이 있으면 남은 주보를 끼워 이웃 집에 놓아드립니다.
무언가 할 일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선교지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인터넷에 이메일을 보내실 줄 아시는 분은 선교사님들께 사랑의 언어, 은혜 받은 한 말씀이라도 보내는 습관을 들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무리하는 말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36b)
벙어리가 말하게 되었습니다.
불구자가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절뚝발이가 바로 걷게 되었습니다.
소경이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감동적인 모습을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15:31)
얼마나 신나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의 바른 지식이 사람을 살립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이심을 통지해 줌으로 연약한 이웃에게 소망의 길이 열렸습니다.
전도로 이 놀라운 예수님을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로 인하여 구원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들도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회복이 되었습니다.
사막 같은 저들의 인생에 샘이 넘쳐흐르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어린양이 사자들과 함께 뛰노는 바로 그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하여 천국은 이루어져 갑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가 어떤 교회이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아는 진리의 공동체
연약한 이웃을 품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공동체
외롭고 소외된 이웃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선교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은, 함께 생활할수록 예수님이 서로 생각나는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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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5:1-20 신앙의 우선순위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하는 우리들에게는 이 신앙의 우선 순위가 생명입니다. 신앙의 유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 아니냐의 중생문제입니다. 하지만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1. 격식을 갖춘 삶은 참 아름답습니다.
어떤 사람은 식사하기 전에 손을 반드시 씻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식사 후에 반드시 이를 닦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옷을 늘 깨끗하게 입는 분이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어떤 분은 새벽에 무슨 일이 있어도 새벽기도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주일을 존중하여 주일에는 일체 물건 사고 파는 일을 금합니다.
어떤 분은 헌금생활을 성경적으로 잘 하는 분이 계십니다.
어떤 분은 예배를 존중합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잘할 수록 빛이나고 아름답습니다. 가능하다면 그 일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험받을 빌미를 만들지 않았었더라면 더 좋았겠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할 때, 손을 씻지 아니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예수님 제자들은 당시 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빵을 먹을 때 씻지 않는 손으로 집어서 먹으면서 허기를 채우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사역에 동참하면서 영적 지도자적인 위치로 부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역사를 일으키심으로, 사람들이 그렇게도 고대하던 메시아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의 어떤 나라의 지도자들보다 존귀하신 분을 수종드는 존재로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존귀한 신분에 대해 둔감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어부에 속한 그대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한 가지 얻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백성들은 자신이 왕같은 제사장의 위치에 있음을 늘 자각하고 세상에서도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 누를 끼치지 않도록 범사를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늘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유전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 신체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있어서도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유전을 인정하십니다. 좋은 부모라면 마땅히 손을 씻고 빵을 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은 유전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받은 계명을 상황을 따라 적용하는 유전보다 앞세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유전은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줄기에 연결된 세미하고 작은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본질을 놓치면 유전이란 가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 그 좋은 예를 주님께서 저들, 종교지도자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인간의 어떤 유전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잘 믿다는 사람들이 가진 약점은 하나님께 드린다 하면 꼼짝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 하면 이해해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그것을 경계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지 가이사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시간이 있습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물질이 있습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부모님께 드리는 것도 잘못이지만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환원해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세상에 주면서 생색내는 것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꼴불견이지만 세상에 마땅히 환원해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예화] 어제 잠깐 동네 앞 몰에 가야할 일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햇빛이 나고 있어서 많은 차량들이 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앞의 차가 꿈적 않고 있어서 아마 누가 이곳에 차를 세워두고 물건을 사러갔나 보다 하고 옆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상대편에서 오는 차가 화가 났습니다. 자기가 갈 길을 제가 갔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화가 단단히 나가지고 내게 와서 욕을 하고 지나갔습니다. 나는 창문을 열고 정중히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위로가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그 사람이 아빠에게 무슨 말을 한지 아느냐고 욕을 한 것이라고 하면서 씩씩거렸습니다. 자기가 그 사람을 한 대 갈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만 두라고 했어요. 내가 잘못한 것이니까 미안하다고 했으면 되었고,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는 그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상에 대해서 할 일이 있으면 해야 합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잘못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에게 잘못했으면 사람에게 잘못했다고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일은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감사한 일은 사람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에 감사한 일은 세상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선인지를 너무 잘 알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만 진실해지려는 노력, 중요한 일에 자신을 던지는 노력, 선한 사업에 대한 자신의 투자가 실종된 시대입니다.
로버트 콜스(Robert Coles)란 하버드대 교수는 하버드에서 가장 똑똑하고 뛰어나다는 학생들의 도덕적 둔감성에 대하여 연구하면서 많이 놀랐다는 연구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한 여학생이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녀는 학비 조달을 위해 교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실에서 수업하는 학생들은 그녀가 경제적인 수준이 낮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함부로 대하고 야비하게 굴었습니다. 성적인 수작을 걸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두 개의 도덕 논리 과목을 함께 들었는데 그때마다 그런 비도덕적인 학생이 뛰어난 성적으로 최고 점수를 받는 것을 보고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A학점을 받았다는 것이 그의 성품이나 행동과는 전혀 무관한 지식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EMPEROR’S CLUB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는 세인트 베네딕트란 명문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학교의 교훈은 결과는 시작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신입생들을 모아놓고 결과는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시작을 강조합니다. 그 학교를 대표할 수 있는 귀한 헌터드 선생님 한분이 계시는 데 그분은 스승의 모델입니다. 딴 일로 정신이 팔려 잔디밭으로 지나가는 학생을 붙들고, 보도(길)의 정의를 내려보라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길을 따라 가게. 위대한 선배들이 걸었던 길이네”
이 귀한 학교에 상원위원의 아들인 세드윅 벨이란 학생이 편입해 옵니다. 그는 문제아입니다. 이 문제아의 아버지를 면담할 때, 그 아버지가 결론적으로 선포합니다.
“인격은 이 아비에게 맡기시오. 선생님은 지식만 가르치면 됩니다.”
그렇게 말한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준 적이 없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아들을 불러놓고 이제 네 말을 해보아라 오늘은 끝까지 들어주마. 해놓고 말을 시작하자 운명해버렸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아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 셈이죠.
지식은 가지입니다. 인격은 줄기입니다. 지식이란 가지는 인격이란 줄기에 붙어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제가 몇 년 전 우신고등학교 제자들을 만나고서도 느꼈던 사실입니다. 그 중에 제일 공부를 잘했던 학생이 서울 법대를 나오고 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인생에서도 성공하고 있구나 하는 자신을 할 수 없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는 최고 학점을 받았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참으로 서글픈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유전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줄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유전은 그 줄기에서 나온 가지와 같습니다. 줄기나 가지가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둘 중에 줄기가 우선 순위에 서 있어야 가지가 살아납니다. 줄기에서 가지는 여러 다른 종류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내면이 학점이나 격식보다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질책의 핵심은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계명을 대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나에게 있어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가이사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이사에게 주세요.
3.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 영혼관리입니다
15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
격식이 중요하지만 구원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부패했습니다. 내면적으로 썩은 것을 먼저 알고 그 내면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내면을 깨끗이 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입니다.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위생상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유전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법이오. 그런데 당신은 법을 어기고 있소. 그리니 죄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예수님을 판 제자 가룟 유다는 그런 위선에 인생을 망친 사람입니다.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그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가룟유다는 그녀가 가난한 자에게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너무 숭고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다음 예수님의 말씀이 희미해지려 합니다. 그는 또 예수님을 팔 때도 너무나 감동 깊은 격식을 갖춥니다. 그 내면에는 예수님을 팔고 있는데 입술은 예수님과 입맞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지도자들이 정말 진지하게 보았어야만 하는 것은 외적으로 손을 씻었느냐 보다 우선적인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면적인 악을 통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속보다는 겉에 관심을 쏟으며, 입에서 나오는 것보다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에 신경을 씁니다. 이것은 인생을 올바르게 사는 방법이 아닙니다. 겉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속사람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속사람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이 새로워지게 해야 합니다(롬12:2). 속사람의 변화가 없다면 그가 가진 깨끗함이란 껍데기입니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저들의 이면을 조금 더 들춰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왕직 수행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질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통적 유대인의 유전과 본질적으로 다름을 알려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추구하는 진리와 유대주의가 강조하는 점에 차이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행하고 사역, 즉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메시아 사역은 점차 흥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하여 종교적 지도자들의 사역은 왜소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불리한 어떤 허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몇 가지 건수를 잡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먹을 때에 씻지 않고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느덧 예수님의 명성으로 인하여 지도자적인 공인의 위치에 올라와 있었고, 그들은 그런 상황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행동을 했었던 데서 일어난 지극히 지엽적이 사건이었습니다. 정말 그들이 이런 제자들의 연약함을 사랑했다면 더 좋은 충고의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인간의 내면은 이렇게 악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만 악합니다. 겉으로 선량해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도 내적인 죄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는 중대한 일입니다.
여기에 좋은 예화(DOGVILLE)가 있어 소개합니다.
갱단 두목의 딸이 아버지와 의견대립 끝에 화가 난 아버지는 총을 쏩니다. 물론 딸을 죽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쏘려 한 것으로 오해 한 딸은 결사적으로 아버지 곁에서 도망쳐 나옵니다.
그녀가 숨어 들어간 마을이 DOGVILLE이란 마을입니다. 그녀는 그 선한 사람들이 산다는 산골 마을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스무 명 정도 되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순박해 보이는 마을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갱단 두목의 딸이란 사실을 모릅니다. 다만 그녀가 갱단의 한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큰 죄를 짓고 도망을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갱단 두목을 태운 차가 와서 이런 여자가 찾아오면 알려달라고 명함을 주고 돌아 갔습니다.
이어서 경찰이 찾아와서 그 여자의 사진을 현상수배하여 붙여두고 갑니다.
마을 주민들이 모여 어떻게 할까를 상의하다 마을 사람들은 시험기간을 갖기로 합니다. 그녀는 그 마을에서 남들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버려진 일들을 찾아 해주면서 잠시 머물 수 있는 유예기간을 받았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한 연약한 여성을 갱단에서 보호해준다는 착한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갱단에 신고되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존재로 자리매김을 해 갑니다.
눈먼자의 눈이 되어줍니다.
문제 어린이의 친절한 가정 교사가 되어 줍니다.
어떤 사람에겐 피아노를 칠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어떤 중환자에겐 희망을 주는 간호사 역할을 합니다.
어느 고독한 과수원지기에게 대화상대와 일꾼이 되어 줍니다.
그러나 그녀를 찾는 경찰의 수위가 높아지고, 그를 보호해준다는 일이 공로가 되기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천사의 역할에 대한 요구사항이 갑절로 많아 지면서 그것을 모두 충족시킬 수 없는 그 여성은 천사같은 존재에서 마을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온갖 치욕을 다 당합니다. 배반, 강간, 중노동 등 노예보다 훨씬 지독한 고통을 당합니다. 그 착하다는 마을 사람들이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이렇게도 악할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주듯 모든 악을 다 그녀에게 행합니다.
결국 그녀가 끝까지 사랑한 것으로 알았던 청년마저 그들의 모든 악을 공중 앞에서 발표하게 하고 그것도 해답이 아닌 것을 안 그는 그녀를 배반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그들의 사회에서 축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현상을 걸고 수배 중인 갱단 두목에게 알립니다. 물론 그 갱단 두목이 이 여성의 아버지인 것을 그느 모릅니다.
갱단 두목은 그렇게도 사랑하는 그의 딸이 노예처럼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목을 착고에 채우고 그 마을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딸에게 자기 권력의 중요한 부분을 넘겨줍니다.
그 딸은 그 착하다는 마을을 불사르게 하고 그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총살하여 심판하는 것으로 그 연극은 끝이 납니다.
이 작품이 고발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인 악입니다. 모든 인간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철저하게 고발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이 절망적인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유대인의 유전이 무슨 도움이 됩니까? 손을 아무리 깨끗이 씻고 먹은들 이 악한 인간의 본성이 깨끗해지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의 전통이 무익하고 공허힙니다. 이는 곧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야 하며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마음의 사악함을 아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신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거룩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미국 뉴욕의 퀸즈장로교회에 오세종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2001년 9월 11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건 스텐리 회사에서 당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월드트레이드 센타 73층에서 40층까지 18분, 40층에서 1층까지 60대 노파를 엎고 62분 동안 달려 내려왔습니다. 앞에서 쓰러지고 뒤에서 쓰러지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면서 그는 비상구를 "CLEAR OUT!"을 수없이 외치면서 달려 내려왔습니다.
그는 탈출 직후 화염과 연기 속에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건물을 보면서 아침 묵상한 엡 2장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날 본문은 엡2:8-10절이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ALE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씀과 기도와 성령 충만으로 신앙의 우선순위를 붙들므로 하나님 앞에 축복된 생애를 세우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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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하는 우리들에게는 이 신앙의 우선 순위가 생명입니다. 신앙의 유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 아니냐의 중생문제입니다. 하지만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1. 격식을 갖춘 삶은 참 아름답습니다.
어떤 사람은 식사하기 전에 손을 반드시 씻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식사 후에 반드시 이를 닦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옷을 늘 깨끗하게 입는 분이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어떤 분은 새벽에 무슨 일이 있어도 새벽기도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주일을 존중하여 주일에는 일체 물건 사고 파는 일을 금합니다.
어떤 분은 헌금생활을 성경적으로 잘 하는 분이 계십니다.
어떤 분은 예배를 존중합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잘할 수록 빛이나고 아름답습니다. 가능하다면 그 일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험받을 빌미를 만들지 않았었더라면 더 좋았겠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할 때, 손을 씻지 아니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예수님 제자들은 당시 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빵을 먹을 때 씻지 않는 손으로 집어서 먹으면서 허기를 채우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사역에 동참하면서 영적 지도자적인 위치로 부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역사를 일으키심으로, 사람들이 그렇게도 고대하던 메시아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의 어떤 나라의 지도자들보다 존귀하신 분을 수종드는 존재로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존귀한 신분에 대해 둔감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어부에 속한 그대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한 가지 얻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백성들은 자신이 왕같은 제사장의 위치에 있음을 늘 자각하고 세상에서도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 누를 끼치지 않도록 범사를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늘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유전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 신체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있어서도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유전을 인정하십니다. 좋은 부모라면 마땅히 손을 씻고 빵을 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은 유전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받은 계명을 상황을 따라 적용하는 유전보다 앞세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유전은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줄기에 연결된 세미하고 작은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본질을 놓치면 유전이란 가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 그 좋은 예를 주님께서 저들, 종교지도자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인간의 어떤 유전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잘 믿다는 사람들이 가진 약점은 하나님께 드린다 하면 꼼짝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 하면 이해해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그것을 경계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지 가이사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시간이 있습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물질이 있습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부모님께 드리는 것도 잘못이지만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환원해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세상에 주면서 생색내는 것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꼴불견이지만 세상에 마땅히 환원해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예화] 어제 잠깐 동네 앞 몰에 가야할 일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햇빛이 나고 있어서 많은 차량들이 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앞의 차가 꿈적 않고 있어서 아마 누가 이곳에 차를 세워두고 물건을 사러갔나 보다 하고 옆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상대편에서 오는 차가 화가 났습니다. 자기가 갈 길을 제가 갔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화가 단단히 나가지고 내게 와서 욕을 하고 지나갔습니다. 나는 창문을 열고 정중히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위로가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그 사람이 아빠에게 무슨 말을 한지 아느냐고 욕을 한 것이라고 하면서 씩씩거렸습니다. 자기가 그 사람을 한 대 갈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만 두라고 했어요. 내가 잘못한 것이니까 미안하다고 했으면 되었고,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는 그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상에 대해서 할 일이 있으면 해야 합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잘못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에게 잘못했으면 사람에게 잘못했다고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일은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감사한 일은 사람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에 감사한 일은 세상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선인지를 너무 잘 알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만 진실해지려는 노력, 중요한 일에 자신을 던지는 노력, 선한 사업에 대한 자신의 투자가 실종된 시대입니다.
로버트 콜스(Robert Coles)란 하버드대 교수는 하버드에서 가장 똑똑하고 뛰어나다는 학생들의 도덕적 둔감성에 대하여 연구하면서 많이 놀랐다는 연구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한 여학생이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녀는 학비 조달을 위해 교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실에서 수업하는 학생들은 그녀가 경제적인 수준이 낮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함부로 대하고 야비하게 굴었습니다. 성적인 수작을 걸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두 개의 도덕 논리 과목을 함께 들었는데 그때마다 그런 비도덕적인 학생이 뛰어난 성적으로 최고 점수를 받는 것을 보고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A학점을 받았다는 것이 그의 성품이나 행동과는 전혀 무관한 지식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EMPEROR’S CLUB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는 세인트 베네딕트란 명문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학교의 교훈은 결과는 시작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신입생들을 모아놓고 결과는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시작을 강조합니다. 그 학교를 대표할 수 있는 귀한 헌터드 선생님 한분이 계시는 데 그분은 스승의 모델입니다. 딴 일로 정신이 팔려 잔디밭으로 지나가는 학생을 붙들고, 보도(길)의 정의를 내려보라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길을 따라 가게. 위대한 선배들이 걸었던 길이네”
이 귀한 학교에 상원위원의 아들인 세드윅 벨이란 학생이 편입해 옵니다. 그는 문제아입니다. 이 문제아의 아버지를 면담할 때, 그 아버지가 결론적으로 선포합니다.
“인격은 이 아비에게 맡기시오. 선생님은 지식만 가르치면 됩니다.”
그렇게 말한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준 적이 없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아들을 불러놓고 이제 네 말을 해보아라 오늘은 끝까지 들어주마. 해놓고 말을 시작하자 운명해버렸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아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 셈이죠.
지식은 가지입니다. 인격은 줄기입니다. 지식이란 가지는 인격이란 줄기에 붙어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제가 몇 년 전 우신고등학교 제자들을 만나고서도 느꼈던 사실입니다. 그 중에 제일 공부를 잘했던 학생이 서울 법대를 나오고 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인생에서도 성공하고 있구나 하는 자신을 할 수 없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는 최고 학점을 받았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참으로 서글픈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유전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줄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유전은 그 줄기에서 나온 가지와 같습니다. 줄기나 가지가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둘 중에 줄기가 우선 순위에 서 있어야 가지가 살아납니다. 줄기에서 가지는 여러 다른 종류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내면이 학점이나 격식보다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질책의 핵심은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계명을 대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나에게 있어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가이사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이사에게 주세요.
3.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 영혼관리입니다
15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
격식이 중요하지만 구원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부패했습니다. 내면적으로 썩은 것을 먼저 알고 그 내면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내면을 깨끗이 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입니다.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위생상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유전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법이오. 그런데 당신은 법을 어기고 있소. 그리니 죄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예수님을 판 제자 가룟 유다는 그런 위선에 인생을 망친 사람입니다.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그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가룟유다는 그녀가 가난한 자에게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너무 숭고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다음 예수님의 말씀이 희미해지려 합니다. 그는 또 예수님을 팔 때도 너무나 감동 깊은 격식을 갖춥니다. 그 내면에는 예수님을 팔고 있는데 입술은 예수님과 입맞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지도자들이 정말 진지하게 보았어야만 하는 것은 외적으로 손을 씻었느냐 보다 우선적인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면적인 악을 통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속보다는 겉에 관심을 쏟으며, 입에서 나오는 것보다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에 신경을 씁니다. 이것은 인생을 올바르게 사는 방법이 아닙니다. 겉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속사람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속사람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이 새로워지게 해야 합니다(롬12:2). 속사람의 변화가 없다면 그가 가진 깨끗함이란 껍데기입니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저들의 이면을 조금 더 들춰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왕직 수행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질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통적 유대인의 유전과 본질적으로 다름을 알려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추구하는 진리와 유대주의가 강조하는 점에 차이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행하고 사역, 즉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메시아 사역은 점차 흥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하여 종교적 지도자들의 사역은 왜소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불리한 어떤 허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몇 가지 건수를 잡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먹을 때에 씻지 않고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느덧 예수님의 명성으로 인하여 지도자적인 공인의 위치에 올라와 있었고, 그들은 그런 상황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행동을 했었던 데서 일어난 지극히 지엽적이 사건이었습니다. 정말 그들이 이런 제자들의 연약함을 사랑했다면 더 좋은 충고의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인간의 내면은 이렇게 악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만 악합니다. 겉으로 선량해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도 내적인 죄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는 중대한 일입니다.
여기에 좋은 예화(DOGVILLE)가 있어 소개합니다.
갱단 두목의 딸이 아버지와 의견대립 끝에 화가 난 아버지는 총을 쏩니다. 물론 딸을 죽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쏘려 한 것으로 오해 한 딸은 결사적으로 아버지 곁에서 도망쳐 나옵니다.
그녀가 숨어 들어간 마을이 DOGVILLE이란 마을입니다. 그녀는 그 선한 사람들이 산다는 산골 마을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스무 명 정도 되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순박해 보이는 마을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갱단 두목의 딸이란 사실을 모릅니다. 다만 그녀가 갱단의 한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큰 죄를 짓고 도망을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갱단 두목을 태운 차가 와서 이런 여자가 찾아오면 알려달라고 명함을 주고 돌아 갔습니다.
이어서 경찰이 찾아와서 그 여자의 사진을 현상수배하여 붙여두고 갑니다.
마을 주민들이 모여 어떻게 할까를 상의하다 마을 사람들은 시험기간을 갖기로 합니다. 그녀는 그 마을에서 남들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버려진 일들을 찾아 해주면서 잠시 머물 수 있는 유예기간을 받았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한 연약한 여성을 갱단에서 보호해준다는 착한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갱단에 신고되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존재로 자리매김을 해 갑니다.
눈먼자의 눈이 되어줍니다.
문제 어린이의 친절한 가정 교사가 되어 줍니다.
어떤 사람에겐 피아노를 칠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어떤 중환자에겐 희망을 주는 간호사 역할을 합니다.
어느 고독한 과수원지기에게 대화상대와 일꾼이 되어 줍니다.
그러나 그녀를 찾는 경찰의 수위가 높아지고, 그를 보호해준다는 일이 공로가 되기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천사의 역할에 대한 요구사항이 갑절로 많아 지면서 그것을 모두 충족시킬 수 없는 그 여성은 천사같은 존재에서 마을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온갖 치욕을 다 당합니다. 배반, 강간, 중노동 등 노예보다 훨씬 지독한 고통을 당합니다. 그 착하다는 마을 사람들이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이렇게도 악할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주듯 모든 악을 다 그녀에게 행합니다.
결국 그녀가 끝까지 사랑한 것으로 알았던 청년마저 그들의 모든 악을 공중 앞에서 발표하게 하고 그것도 해답이 아닌 것을 안 그는 그녀를 배반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그들의 사회에서 축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현상을 걸고 수배 중인 갱단 두목에게 알립니다. 물론 그 갱단 두목이 이 여성의 아버지인 것을 그느 모릅니다.
갱단 두목은 그렇게도 사랑하는 그의 딸이 노예처럼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목을 착고에 채우고 그 마을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딸에게 자기 권력의 중요한 부분을 넘겨줍니다.
그 딸은 그 착하다는 마을을 불사르게 하고 그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총살하여 심판하는 것으로 그 연극은 끝이 납니다.
이 작품이 고발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인 악입니다. 모든 인간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철저하게 고발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이 절망적인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유대인의 유전이 무슨 도움이 됩니까? 손을 아무리 깨끗이 씻고 먹은들 이 악한 인간의 본성이 깨끗해지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의 전통이 무익하고 공허힙니다. 이는 곧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야 하며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마음의 사악함을 아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신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거룩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미국 뉴욕의 퀸즈장로교회에 오세종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2001년 9월 11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건 스텐리 회사에서 당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월드트레이드 센타 73층에서 40층까지 18분, 40층에서 1층까지 60대 노파를 엎고 62분 동안 달려 내려왔습니다. 앞에서 쓰러지고 뒤에서 쓰러지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면서 그는 비상구를 "CLEAR OUT!"을 수없이 외치면서 달려 내려왔습니다.
그는 탈출 직후 화염과 연기 속에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건물을 보면서 아침 묵상한 엡 2장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날 본문은 엡2:8-10절이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ALE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씀과 기도와 성령 충만으로 신앙의 우선순위를 붙들므로 하나님 앞에 축복된 생애를 세우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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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5:21-28 어떻게 믿음을 넓힐 수 있는가?
들어가는 말
재미나는 얘기 하나 할까요?
"아까 내가 보니까 자네는 큰 고기가 잡히면 물에 놓아주고 작은 것만 잡는데 무슨 이유가 있나?" 그 친구 하는 말이 "글쎄, 우리 집에는 프라이팬이 작은 것 밖에 없어서"라고 하더랍니다.
우리는 자신을 넓혀야 할 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한 좋은 사건을 통해 말씀하심으로 우리 믿음을 넓히기 원하십니다.
어떻게 믿음을 넓힐 수 있습니까?
1.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시작됩니다.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인을 개취급했습니다. 개취급이라니까 캐나다 오래 사람들은 얼른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창밖을 보니 그 추운 날씨에 개를 상전 모시듯합니다. 옷을 입히질 않나, 따라다니면서 똥을 줍지 않나, 대단합니다. 그만큼 사람을 돌보면 하나님께 상급이 크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 어릴 때, 한국에서는 개는 채이는 존재요, 집을 지키다가 복날이면 사람들에게 잡혀 먹는 짐승입니다.
오죽했으면, 밥먹을 때는 개도 그냥 둔다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개취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방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이방인의 지역(두로와 시돈 지방)을 향하여 출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방인들에게도 미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지역엔 하나님의 통치와 멀리 있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신 주님께서 남루한 흑암의 마을을 찾아오셨습니다.
90여년 전의 실화입니다. 미국 어느 시골마을에 한 가난한 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홀엄마는 낮에 양계를 하고, 밤에 삯바느질을 해서 아이의 등록금을 준비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대통령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졸업식장에 입고 갈 변변한 옷 한 벌이 없었습니다.
아들에게 누가 되겠다 싶었습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네 졸업식장에 갈 수 없구나."
"어머님이 바라봐 주지 않는 대통령상은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아들은 답사를 마치자마자 대통령상으로 받은 그 영광스런 메달을 들고 한쪽 모퉁이 남루한 옷차림을 한 어머니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리고 빛나는 금메달을 목에서 벗어 어머니의 목에 걸어드립니다."
"이 메달은 어머니의 몫입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제28대 윌슨 대통령입니다.
그리고 그는 1914년 그는 국회의원들의 동의를 얻어서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 날로 선포케 했습니다.
윌슨 대통령 ! 과연 대통령감이란 생각이 듭니다.
남루한 어머니를 찾아가고 영화롭게 한 윌슨 대통령이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만을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남루한 이방인을 찾아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을 방문하셨다는 것은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그리스도도 되십니다.
이방인의 영적인 상태는 에베소 2장 11-13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영적으로 말할 때 이방인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자신을 위해 희생한 남루한 어머니를 찾아가고 영화롭게 한 윌슨 대통령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면,
아무 것도 주님을 위해 한 것이 없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대신 죽으시고
하나님 자녀 삼으시고
영화롭게 하신 예수님께 대하여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성탄절이 가까워 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감사하는 복된 기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임마누엘 하시기 원하셔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시는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믿음을 넓힐 수 있습니까?
2.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 오실 때, 구하여야 합니다.
어두움의 권세는 흑암의 땅, 이방지역에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딸이 어두움의 권세 아래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찾아와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아도 같은 기사가 있는데 이 여인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그저 인종적인 명칭으로 가나안 여인이라고만 했습니다. 수리아 지방의 뵈니게 출생이란 뜻입니다. 클레멘트 서한에 의하게 되면 이 여인의 이름이 쥬스타라고 하는 여인이었고, 이 여인의 딸의 이름은 비어니스라고 했습니다. 역사가 죠세프소는 이 여인의 딸이 뵈니게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간절히 구했습니다.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귀신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무도 그 딸을 어떻게 치료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그가 얼마나 간절히 고쳐달라 구하겠습니까? 소리질렀다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애절한 요청입니다.
구할 때, 다윗의 자손 메시아께 구하여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간절히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야에 대한 호칭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소리 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했습니다. 같은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데리고 왔을 때 그를 불쌍히 여겨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서 말하기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야'란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긴급하고 중요한 기도제목을 가나안 여인처럼 간청할 수 있다면 그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즈의할 점이 있습니다.
2] 자신을 내려놓고 구했습니다.
그것은 고상한 존재로 기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 주인처럼 상에 앉아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기도를 하려 합니다.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주어억는 개처럼 기도하라를 말씀입니다.
그 여인은 견딜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너는 개다라는 말을 하시지 않았지만, '개!'라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가나안 사람들의 영적 생활이란 개 같았습니다.
개들은 결혼생활에 기준이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생육번식을 합니다. 영적인 개란 아무나 신랑으로 삼고, 아무나 신부로 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이나 섬기고 아무 것이나 의지하는 그런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그 말의 내용을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충분히 자존심이 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그녀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놀라운 이적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내 딸을 귀신의 굴레에서 자유케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딸을 귀신으로부터 자유케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같은 존재로 낮출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우리는 누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얼마만큼 내려놓고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한 딸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한없이 낮출 수 있는 여인의 간구를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히 간구하는 자에게 기도응답을 주셨습니다.
3] 응답을 받기까지 구했습니다.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들이 받는 또다른 장애는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급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른 응답하신 것은 아닙니다.
첫째는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믿음이 익어가는 기간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을 더 깊게 하기 위하여 시간을 끈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의 믿음을 향상시킬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절절한 기도를 하셨을 때 성부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 구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에 오랜 동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그녀는 암부로스 감독에게 물었습니다. "제 아들이 돌아오기를 10년이 넘게 애타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내 아들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
암브로스 감독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자매님,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아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계속 기도하세요."
주님께서 그녀의 간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주님의 지체하심은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거절하셨습니다.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러나 이방인인 그녀가 유대인의 용어인 "다윗의 아들"이란 말로 접근해왔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으신데 이 여인은 계속 부르짖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습니다. 제자들이 견디지 못할 만큼 부르짖었습니다.
계속적인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는데는 25년의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무시하시는 듯했습니다.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무시하지 않으시는 분이 냉혹하리만큼 분명한 선을 긋고 계시는 듯했습니다. 멀찍이 떼어놓는 듯한 밀치는 듯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강청하는 기도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누가복음에는 강청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때로 이런 강청하는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3. 시험을 통해 키워야 할 믿음이 있습니다.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중풍병에 걸린 환자를 친구들이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저희들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에 걸린 환자를 고쳐주었습니다.
여리고 거지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시끄우니 조용히 하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지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라"하시기까지 부르짖었습니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예수님께 나아온다. "예수님!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작음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뽕나무에 오르기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잘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태국 사람들이 야생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이 있다. 먼저 정글 속으로 코끼리를 유인하고 우리 속에 가두어 놓고 발목에 쇠사슬을 채운다. 그런 후 그 쇠사슬의 한쪽 끝을 벵갈 보리수라는 튼튼하고 큰 나무에 묶어 놓고 우리를 치운 후 코끼리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 코끼리는 며칠 또는 몇 주가 지나도록 쇠사슬을 끌면서 나무의 뿌리를 뽑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자기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탈출 시도를 포기해 버린다. 그 후부터는 다리에 묶인 쇠사슬이 팽팽해지기만 하면 활동 영역의 끝에 왔음을 알고 힘을 더 이상 쓰지 않는다. 이 상태에 이른 코끼리는 벵갈 보리수 같은 나무가 아니라 작은 말뚝 같은 데만 묶어 놔도 쉽게 조종할 수 있다고 한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레 겁을 먹거나 포기해 버리기 때문에 강아지만도 못하게 끌려 다닌다는 태국 코끼리 이야기이다.
얍복강 가의 야곱처럼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주님은 마침내는 그녀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상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2] 예수님을 주로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그녀가 "주님"이라고 부르자 주님은 그녀의 간청에 응답하셨습니다(롬 10:12-13참조).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셔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을 확실한 주인으로 모실 때,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주께서 큰 믿음을 지녔다고 추천하신 두 사람이 모두 이방인입니다.(마 8:10/마 15:28)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크게 보십니다.
1968년 10월 20일 오후7시, 멕시코시티 올림픽 경기장엔 수천명의 군중들이 남아 있었다. 아직까지 들어오지 못한 마라톤의 마지막 주자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날이 거의 어두워졌을 때 마지막 주자가 잠시 후 경찰차의 호위를 받으며 어둠을 가르며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이름은 죤 스티븐 아쿠와리로 아프리카 탄자니아 선수였다. 그의 다리는 부상을 당해 피투성이였고 붕대가 보기 흉하게 감겨 있었다. 그의 부상은 심각했다. 그러나 그는 42.195Km를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달려왔다. 그는 절뚝거리며 운동장 한바퀴를 간신히 돌았다. 이 마지막 주자를 향해 관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가 결승선에 들어온 후 누군가가 다가가 물었다. "부상을 입고도 왜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아쿠와리 선수는 숨을 헐떡거리며 짧게 대답했다. "내 조국은 내가 경주를 출발하라고 7,000마일 밖인 이곳에 나를 보낸 것이 아닙니다. 경주를 끝까지 마치라고 7,000마일 밖으로 나를 보낸 것입니다."
고국을 주인으로 섬기는 그 선수에게 마지막까지의 완주는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멕시코 대통령에게 미국 기자가 물었습니다.
"북미와 남미가 그처럼 다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소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북미의 청교도들은 신앙을 위하여 하나님 곧 God을 찾으러 왔지만, 남미의 스페인, 포르투갈 사람들은 금 곧 Gold를 찾으러 왔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북아메리카로 온 청교도들은 하나님도 찾고 금도 찾았지만, 자신을 위해 금을 찾아 남미로 온 사람들은 금도 놓쳤고 하나님도 찾지 못했습니다."
재미나는 얘기 하나 할까요?
"아까 내가 보니까 자네는 큰 고기가 잡히면 물에 놓아주고 작은 것만 잡는데 무슨 이유가 있나?" 그 친구 하는 말이 "글쎄, 우리 집에는 프라이팬이 작은 것 밖에 없어서"라고 하더랍니다.
우리는 자신을 넓혀야 할 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한 좋은 사건을 통해 말씀하심으로 우리 믿음을 넓히기 원하십니다.
어떻게 믿음을 넓힐 수 있습니까?
1.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시작됩니다.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인을 개취급했습니다. 개취급이라니까 캐나다 오래 사람들은 얼른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창밖을 보니 그 추운 날씨에 개를 상전 모시듯합니다. 옷을 입히질 않나, 따라다니면서 똥을 줍지 않나, 대단합니다. 그만큼 사람을 돌보면 하나님께 상급이 크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 어릴 때, 한국에서는 개는 채이는 존재요, 집을 지키다가 복날이면 사람들에게 잡혀 먹는 짐승입니다.
오죽했으면, 밥먹을 때는 개도 그냥 둔다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개취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방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이방인의 지역(두로와 시돈 지방)을 향하여 출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방인들에게도 미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지역엔 하나님의 통치와 멀리 있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신 주님께서 남루한 흑암의 마을을 찾아오셨습니다.
90여년 전의 실화입니다. 미국 어느 시골마을에 한 가난한 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홀엄마는 낮에 양계를 하고, 밤에 삯바느질을 해서 아이의 등록금을 준비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대통령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졸업식장에 입고 갈 변변한 옷 한 벌이 없었습니다.
아들에게 누가 되겠다 싶었습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네 졸업식장에 갈 수 없구나."
"어머님이 바라봐 주지 않는 대통령상은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아들은 답사를 마치자마자 대통령상으로 받은 그 영광스런 메달을 들고 한쪽 모퉁이 남루한 옷차림을 한 어머니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리고 빛나는 금메달을 목에서 벗어 어머니의 목에 걸어드립니다."
"이 메달은 어머니의 몫입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제28대 윌슨 대통령입니다.
그리고 그는 1914년 그는 국회의원들의 동의를 얻어서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 날로 선포케 했습니다.
윌슨 대통령 ! 과연 대통령감이란 생각이 듭니다.
남루한 어머니를 찾아가고 영화롭게 한 윌슨 대통령이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만을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남루한 이방인을 찾아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을 방문하셨다는 것은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그리스도도 되십니다.
이방인의 영적인 상태는 에베소 2장 11-13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영적으로 말할 때 이방인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자신을 위해 희생한 남루한 어머니를 찾아가고 영화롭게 한 윌슨 대통령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면,
아무 것도 주님을 위해 한 것이 없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대신 죽으시고
하나님 자녀 삼으시고
영화롭게 하신 예수님께 대하여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성탄절이 가까워 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감사하는 복된 기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임마누엘 하시기 원하셔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시는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믿음을 넓힐 수 있습니까?
2.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 오실 때, 구하여야 합니다.
어두움의 권세는 흑암의 땅, 이방지역에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딸이 어두움의 권세 아래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찾아와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아도 같은 기사가 있는데 이 여인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그저 인종적인 명칭으로 가나안 여인이라고만 했습니다. 수리아 지방의 뵈니게 출생이란 뜻입니다. 클레멘트 서한에 의하게 되면 이 여인의 이름이 쥬스타라고 하는 여인이었고, 이 여인의 딸의 이름은 비어니스라고 했습니다. 역사가 죠세프소는 이 여인의 딸이 뵈니게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간절히 구했습니다.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귀신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무도 그 딸을 어떻게 치료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그가 얼마나 간절히 고쳐달라 구하겠습니까? 소리질렀다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애절한 요청입니다.
구할 때, 다윗의 자손 메시아께 구하여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간절히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야에 대한 호칭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소리 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했습니다. 같은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데리고 왔을 때 그를 불쌍히 여겨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서 말하기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야'란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긴급하고 중요한 기도제목을 가나안 여인처럼 간청할 수 있다면 그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즈의할 점이 있습니다.
2] 자신을 내려놓고 구했습니다.
그것은 고상한 존재로 기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 주인처럼 상에 앉아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기도를 하려 합니다.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주어억는 개처럼 기도하라를 말씀입니다.
그 여인은 견딜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너는 개다라는 말을 하시지 않았지만, '개!'라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가나안 사람들의 영적 생활이란 개 같았습니다.
개들은 결혼생활에 기준이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생육번식을 합니다. 영적인 개란 아무나 신랑으로 삼고, 아무나 신부로 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이나 섬기고 아무 것이나 의지하는 그런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그 말의 내용을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충분히 자존심이 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그녀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놀라운 이적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내 딸을 귀신의 굴레에서 자유케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딸을 귀신으로부터 자유케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같은 존재로 낮출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우리는 누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얼마만큼 내려놓고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한 딸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한없이 낮출 수 있는 여인의 간구를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히 간구하는 자에게 기도응답을 주셨습니다.
3] 응답을 받기까지 구했습니다.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들이 받는 또다른 장애는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급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른 응답하신 것은 아닙니다.
첫째는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믿음이 익어가는 기간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을 더 깊게 하기 위하여 시간을 끈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의 믿음을 향상시킬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절절한 기도를 하셨을 때 성부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 구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에 오랜 동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그녀는 암부로스 감독에게 물었습니다. "제 아들이 돌아오기를 10년이 넘게 애타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내 아들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
암브로스 감독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자매님,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아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계속 기도하세요."
주님께서 그녀의 간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주님의 지체하심은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거절하셨습니다.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러나 이방인인 그녀가 유대인의 용어인 "다윗의 아들"이란 말로 접근해왔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으신데 이 여인은 계속 부르짖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습니다. 제자들이 견디지 못할 만큼 부르짖었습니다.
계속적인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는데는 25년의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무시하시는 듯했습니다.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무시하지 않으시는 분이 냉혹하리만큼 분명한 선을 긋고 계시는 듯했습니다. 멀찍이 떼어놓는 듯한 밀치는 듯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강청하는 기도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누가복음에는 강청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때로 이런 강청하는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3. 시험을 통해 키워야 할 믿음이 있습니다.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중풍병에 걸린 환자를 친구들이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저희들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에 걸린 환자를 고쳐주었습니다.
여리고 거지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시끄우니 조용히 하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지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라"하시기까지 부르짖었습니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예수님께 나아온다. "예수님!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작음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뽕나무에 오르기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잘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태국 사람들이 야생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이 있다. 먼저 정글 속으로 코끼리를 유인하고 우리 속에 가두어 놓고 발목에 쇠사슬을 채운다. 그런 후 그 쇠사슬의 한쪽 끝을 벵갈 보리수라는 튼튼하고 큰 나무에 묶어 놓고 우리를 치운 후 코끼리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 코끼리는 며칠 또는 몇 주가 지나도록 쇠사슬을 끌면서 나무의 뿌리를 뽑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자기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탈출 시도를 포기해 버린다. 그 후부터는 다리에 묶인 쇠사슬이 팽팽해지기만 하면 활동 영역의 끝에 왔음을 알고 힘을 더 이상 쓰지 않는다. 이 상태에 이른 코끼리는 벵갈 보리수 같은 나무가 아니라 작은 말뚝 같은 데만 묶어 놔도 쉽게 조종할 수 있다고 한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레 겁을 먹거나 포기해 버리기 때문에 강아지만도 못하게 끌려 다닌다는 태국 코끼리 이야기이다.
얍복강 가의 야곱처럼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주님은 마침내는 그녀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상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2] 예수님을 주로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그녀가 "주님"이라고 부르자 주님은 그녀의 간청에 응답하셨습니다(롬 10:12-13참조).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셔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을 확실한 주인으로 모실 때,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주께서 큰 믿음을 지녔다고 추천하신 두 사람이 모두 이방인입니다.(마 8:10/마 15:28)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크게 보십니다.
1968년 10월 20일 오후7시, 멕시코시티 올림픽 경기장엔 수천명의 군중들이 남아 있었다. 아직까지 들어오지 못한 마라톤의 마지막 주자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날이 거의 어두워졌을 때 마지막 주자가 잠시 후 경찰차의 호위를 받으며 어둠을 가르며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이름은 죤 스티븐 아쿠와리로 아프리카 탄자니아 선수였다. 그의 다리는 부상을 당해 피투성이였고 붕대가 보기 흉하게 감겨 있었다. 그의 부상은 심각했다. 그러나 그는 42.195Km를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달려왔다. 그는 절뚝거리며 운동장 한바퀴를 간신히 돌았다. 이 마지막 주자를 향해 관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가 결승선에 들어온 후 누군가가 다가가 물었다. "부상을 입고도 왜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아쿠와리 선수는 숨을 헐떡거리며 짧게 대답했다. "내 조국은 내가 경주를 출발하라고 7,000마일 밖인 이곳에 나를 보낸 것이 아닙니다. 경주를 끝까지 마치라고 7,000마일 밖으로 나를 보낸 것입니다."
고국을 주인으로 섬기는 그 선수에게 마지막까지의 완주는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멕시코 대통령에게 미국 기자가 물었습니다.
"북미와 남미가 그처럼 다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소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북미의 청교도들은 신앙을 위하여 하나님 곧 God을 찾으러 왔지만, 남미의 스페인, 포르투갈 사람들은 금 곧 Gold를 찾으러 왔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북아메리카로 온 청교도들은 하나님도 찾고 금도 찾았지만, 자신을 위해 금을 찾아 남미로 온 사람들은 금도 놓쳤고 하나님도 찾지 못했습니다."
마15:29-39 아프고 주린 무리의 소망
들어가는 말
오늘 아침 사무실에 들어오니 너무 따뜻합니다. 밖에는 겨울 바람이 매서운데 이 방이 웬일로 이렇게 훈훈할까? 가만히 살펴보니 사무실 히터를 공급하는 구멍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기본적인 기물은 필요하고 사무실은 하나밖에 없다보니 히팅이 들어오는 훈풍구까지 다 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겨울이 오면 추워서 벌벌 떨고 담요를 덮고 일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이곳 연합 교회에서 캐비넷을 하나 빼내주어서 공간이 생겼고, 히팅이 들어오는 입구도 열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무실은 따뜻해졌습니다.
저는 우리 인생이란 것이 이런 면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분한 은혜를 주셨을지라도 필요하다는 명분하에 잔뜩 세상 것들로 채워놓고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올 입구가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히팅은 막아놓고 담요를 덮어 따뜻하게 하자던 나처럼 말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우리를 향해 은혜를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 껏 받아 누리는 복된 사람들을 만납니다.
1. 예수님은 그 은혜를 구하는 무리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는 "무리"란 말이 일곱 번 나옵니다.
30절에서는 큰 무리가 환자들을 데려오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십니다.
31절 무리가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놀랍니다.
32절 예수님께선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33절 굶주린 무리의 문제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제자들이 말합니다.
35절 예수께서 무리를 앉도록 명하십니다.
36절 제자들이 무리에게 축사하신 떡을 나눠줍니다.
39절 문제가 해결된 무리를 주님께서 돌려보내십니다.
'무리'란 누구라고 딱 잘라 지명하지 않은 많은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이 그냥 스쳐 보내버린 '무리'들입니다.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무리는 특이한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 앞에 큰 은혜를 기대하고 모여오는 무리들입니다.
[마15: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름도 없는 무리들일 뿐이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심을 믿고 그분의 긍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백성 삼으시기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수고를 기울이십니다.
더구나 32-39절에 나오는 군중들은 주로 이방인들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이방인들일지라도 위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고쳐주세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유대인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시며 저들의 왕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은혜를 구하는' 무리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우리 성도들의 힘이요 재산입니다. 당시 위정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의 관심은 '그 나라와 그 은혜 받는 일'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의 나라와 그 은혜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무리들의 질병을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무리들의 굶주림을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나라와 그분의 은혜를 사모할 때, 주님께서는 나의 연약함과 아픔과 갈증과 공복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내어놓고 그분의 은혜를 구해보십시오. 주님께서는 깊은 관심을 주십니다.
은혜를 구하는 무리들에게 주님은 그 아픔과 연약함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2. 주님께서는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연약한 곳을 치료하십니다.
[마 15:2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 세상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주 문제로 번민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그 위에 우리의 천부께서 모든 것을 더하신다 하셨어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일이 이런 현실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무리'의 연약함에 관심을 가지신 주님께서는 그 연약함을 치료해주십니다.
30-31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고쳐 주시니'
예수님께서는 은혜 받기를 원하는 무리들에게 세상이 보는 것처럼 단지 지나가는 무리로 보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들을 만나주시고 하나님을 위해서나 사람들을 위해서 의미 있는 백성으로 받아들여 고쳐주십니다.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과 연약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우리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정한
<정신건강을 지켜줄 10가지 수칙>입니다.
1] 긍정적으로 세상을 본다.
2]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3] 반갑게 마음이 담긴 인사를 한다.
4] 하루 세 끼를 맛있게 천천히 먹는다.
5]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6] 누구라도 칭찬한다,
7] 약속 시간엔 여유 있게 가서 기다린다,
8] 일부러 라도 웃는 표정을 짓는다,
9] 원칙대로 정직하게 산다.
10] 때로는 손해 볼 줄도 안다.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한 것입니다.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는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없었고 성장하면서 10cm밖에 자라지 않은 팔다리로 달리기· 야구· 농구· 수영 등을 즐겼으며, 초·중·고를 거쳐 일본의 명문 와세다대를 졸업하면서 총장으로부터 '장애물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공로'로 특별상을 받아서 우리를 또 한번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애는 "단순한 신체적 특징일 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팔다리가 없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기에 앞으로 장애 극복을 위해 '마음의 장벽 없애기 운동(Barries Free)'에 매진하겠다고 피력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여 상당한 효과를 본 경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정신 건강 수칙 몇 가지로 도움을 주는 의사가 아닙니다.
세상의 죄악 중에서 절망에 빠진 자일지라도 그분의 은혜를 구할 때, 그 연약한 사람에 관심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치료하십니다.
절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자타가 부인하는 병자를 예수님께서 손수 치료하셨습니다.
2박 3일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입고 다니는 겉옷을 이불로 삼아 잠을 잤고 말라비틀어진 빵을 뜯어먹으며 요기를 했지만, 은혜를 체험하는 그들의 마음은 부요했습니다. 사실 그 동안 그들은 심신의 고통을 많이 당하고 살아왔습니다. 로마의 통치 아래서, 질병의 고통 중에서 심신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위로자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이 모든 고통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셨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흠뻑 젖고, 예수님 치유하시는 은혜에 젖을 수 있었습니다. 매료하여 자리를 뜰 생각을 안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시심과 치유는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3. 주님께서는 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겨 먹이셨습니다.
[마 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1]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갈급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마9:36)
2]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막6:34)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 무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모습을 만납니다.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여 원근각처에서 몰려온 무리를 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사흘 동안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영생의 길, 구원의 길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한 시간은 소중한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사흘이란 시간은 낭비가 아니고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나누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나누는 기도,
주님과 함께 나누는 물질,
주님과 함께 나누는 교제,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복되게 하십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은혜를 베푸시는 시간입니다. 주님 앞에 열린 사람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어루만지심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날도 원근 각처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데가볼리 지역에서 삼 일 동안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삼 일 동안이나 주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먹을 것이 떨어져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리들을 아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무리의 곤고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저들을 위해 늘 나누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무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마음을 우리는 여기서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양식임을 아셨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은 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먹지 않으면 길에서 기진할 이런 가난한 무리"에 대한 관심을 가지십니다.
"어디서 떡을 얻겠습니까?"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하여금 배부르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막막하기 그지없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질문하십니다.
"너에게 무엇이 있느냐?"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나눠주시기 위해 우리를 협력자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묻고 계십니다.
주님은 땅에 떨어져 심겨져야 할 한 알의 밀알을 찾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 일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무리를 땅에 앉게 하셨습니다.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놓고 하늘을 향해 축사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떡과 생선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축복을 받은 떡과 생선이 따로 있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축사하신 떡과 생선을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전체 무리의 수에 비해 가지고 있는 떡과 생선은 지극히 적은 양이었으나 주님께서 축사하신 이후에 약 사천 명이나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통해 무리들은 부족함 없이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떡과 생선은 먹고도 남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을 소유하신 왕이셨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 은혜를 얻은 엘리야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아합을 피해 길을 떠난 엘리야 선지자가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고 있을 때 한 천사가 나타나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주고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천사는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말합니다.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됩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죠지 뮐러라는 분이 있는데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을 수없이 체험한 사람입니다. 5만 번 이상 응답 받았다고 말합니다.
추운 겨울인데 고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일러가 고장 나서 큰일입니다. 보일러를 고치려면 일 주일쯤 걸릴 것인데 이 아이들은 어쩌면 좋지요?
뮬러는 기도하러 갔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추운 날씨가 봄날처럼 따듯해졌습니다. 보일러를 다 고쳤을 때에 다시 추운 겨울 날씨로 바뀌었습니다.
양식 살 돈이 떨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굶게 생겼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밖이 매우 소란스럽습니다. 나가보니 큰 화물차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는 것입니다. 차에 실려 있는 것이 땅에 쏟아졌습니다. 사고를 수습하고 돌아가면서 차에 실려 있던 것을 다 고아원에 두고 갔습니다. 그것은 여러 날 동안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빵이었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우리는 15장 앞 부분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려고 왕으로 찾아오셨을지라도 극히 적대적인 감정을 보인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님께 대하여 큰 믿음으로 나아온 가나안의 이방 여인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서 이루어질 것인가?
천국을 소유할 자가 과연 누구인가?
나아가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놀라운 소식을 만나게 됩니다. 관심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치료하시는 곳까지 나아가십니다.
30절 "예수께서 고쳐주시니"
31절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만납니다.떡 7개와 생선 2마리로 4천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만납니다.
이 무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기울이시는 예수님의 수고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깊은 은혜에 더 깊이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원합니다.
오늘 아침 사무실에 들어오니 너무 따뜻합니다. 밖에는 겨울 바람이 매서운데 이 방이 웬일로 이렇게 훈훈할까? 가만히 살펴보니 사무실 히터를 공급하는 구멍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기본적인 기물은 필요하고 사무실은 하나밖에 없다보니 히팅이 들어오는 훈풍구까지 다 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겨울이 오면 추워서 벌벌 떨고 담요를 덮고 일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이곳 연합 교회에서 캐비넷을 하나 빼내주어서 공간이 생겼고, 히팅이 들어오는 입구도 열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무실은 따뜻해졌습니다.
저는 우리 인생이란 것이 이런 면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분한 은혜를 주셨을지라도 필요하다는 명분하에 잔뜩 세상 것들로 채워놓고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올 입구가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히팅은 막아놓고 담요를 덮어 따뜻하게 하자던 나처럼 말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우리를 향해 은혜를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 껏 받아 누리는 복된 사람들을 만납니다.
1. 예수님은 그 은혜를 구하는 무리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는 "무리"란 말이 일곱 번 나옵니다.
30절에서는 큰 무리가 환자들을 데려오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십니다.
31절 무리가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놀랍니다.
32절 예수님께선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33절 굶주린 무리의 문제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제자들이 말합니다.
35절 예수께서 무리를 앉도록 명하십니다.
36절 제자들이 무리에게 축사하신 떡을 나눠줍니다.
39절 문제가 해결된 무리를 주님께서 돌려보내십니다.
'무리'란 누구라고 딱 잘라 지명하지 않은 많은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이 그냥 스쳐 보내버린 '무리'들입니다.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무리는 특이한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 앞에 큰 은혜를 기대하고 모여오는 무리들입니다.
[마15: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름도 없는 무리들일 뿐이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심을 믿고 그분의 긍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백성 삼으시기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수고를 기울이십니다.
더구나 32-39절에 나오는 군중들은 주로 이방인들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이방인들일지라도 위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고쳐주세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유대인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시며 저들의 왕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은혜를 구하는' 무리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우리 성도들의 힘이요 재산입니다. 당시 위정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의 관심은 '그 나라와 그 은혜 받는 일'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의 나라와 그 은혜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무리들의 질병을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무리들의 굶주림을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나라와 그분의 은혜를 사모할 때, 주님께서는 나의 연약함과 아픔과 갈증과 공복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내어놓고 그분의 은혜를 구해보십시오. 주님께서는 깊은 관심을 주십니다.
은혜를 구하는 무리들에게 주님은 그 아픔과 연약함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2. 주님께서는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연약한 곳을 치료하십니다.
[마 15:2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 세상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주 문제로 번민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그 위에 우리의 천부께서 모든 것을 더하신다 하셨어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일이 이런 현실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무리'의 연약함에 관심을 가지신 주님께서는 그 연약함을 치료해주십니다.
30-31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고쳐 주시니'
예수님께서는 은혜 받기를 원하는 무리들에게 세상이 보는 것처럼 단지 지나가는 무리로 보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들을 만나주시고 하나님을 위해서나 사람들을 위해서 의미 있는 백성으로 받아들여 고쳐주십니다.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과 연약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우리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정한
<정신건강을 지켜줄 10가지 수칙>입니다.
1] 긍정적으로 세상을 본다.
2]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3] 반갑게 마음이 담긴 인사를 한다.
4] 하루 세 끼를 맛있게 천천히 먹는다.
5]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6] 누구라도 칭찬한다,
7] 약속 시간엔 여유 있게 가서 기다린다,
8] 일부러 라도 웃는 표정을 짓는다,
9] 원칙대로 정직하게 산다.
10] 때로는 손해 볼 줄도 안다.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한 것입니다.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는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없었고 성장하면서 10cm밖에 자라지 않은 팔다리로 달리기· 야구· 농구· 수영 등을 즐겼으며, 초·중·고를 거쳐 일본의 명문 와세다대를 졸업하면서 총장으로부터 '장애물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공로'로 특별상을 받아서 우리를 또 한번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애는 "단순한 신체적 특징일 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팔다리가 없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기에 앞으로 장애 극복을 위해 '마음의 장벽 없애기 운동(Barries Free)'에 매진하겠다고 피력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여 상당한 효과를 본 경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정신 건강 수칙 몇 가지로 도움을 주는 의사가 아닙니다.
세상의 죄악 중에서 절망에 빠진 자일지라도 그분의 은혜를 구할 때, 그 연약한 사람에 관심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치료하십니다.
절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자타가 부인하는 병자를 예수님께서 손수 치료하셨습니다.
2박 3일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입고 다니는 겉옷을 이불로 삼아 잠을 잤고 말라비틀어진 빵을 뜯어먹으며 요기를 했지만, 은혜를 체험하는 그들의 마음은 부요했습니다. 사실 그 동안 그들은 심신의 고통을 많이 당하고 살아왔습니다. 로마의 통치 아래서, 질병의 고통 중에서 심신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위로자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이 모든 고통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셨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흠뻑 젖고, 예수님 치유하시는 은혜에 젖을 수 있었습니다. 매료하여 자리를 뜰 생각을 안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시심과 치유는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3. 주님께서는 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겨 먹이셨습니다.
[마 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1]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갈급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마9:36)
2]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막6:34)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 무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모습을 만납니다.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여 원근각처에서 몰려온 무리를 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사흘 동안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영생의 길, 구원의 길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한 시간은 소중한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사흘이란 시간은 낭비가 아니고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나누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나누는 기도,
주님과 함께 나누는 물질,
주님과 함께 나누는 교제,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복되게 하십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은혜를 베푸시는 시간입니다. 주님 앞에 열린 사람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어루만지심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날도 원근 각처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데가볼리 지역에서 삼 일 동안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삼 일 동안이나 주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먹을 것이 떨어져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리들을 아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무리의 곤고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저들을 위해 늘 나누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무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마음을 우리는 여기서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양식임을 아셨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은 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먹지 않으면 길에서 기진할 이런 가난한 무리"에 대한 관심을 가지십니다.
"어디서 떡을 얻겠습니까?"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하여금 배부르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막막하기 그지없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질문하십니다.
"너에게 무엇이 있느냐?"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나눠주시기 위해 우리를 협력자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묻고 계십니다.
주님은 땅에 떨어져 심겨져야 할 한 알의 밀알을 찾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 일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무리를 땅에 앉게 하셨습니다.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놓고 하늘을 향해 축사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떡과 생선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축복을 받은 떡과 생선이 따로 있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축사하신 떡과 생선을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전체 무리의 수에 비해 가지고 있는 떡과 생선은 지극히 적은 양이었으나 주님께서 축사하신 이후에 약 사천 명이나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통해 무리들은 부족함 없이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떡과 생선은 먹고도 남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을 소유하신 왕이셨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 은혜를 얻은 엘리야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아합을 피해 길을 떠난 엘리야 선지자가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고 있을 때 한 천사가 나타나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주고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천사는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말합니다.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됩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죠지 뮐러라는 분이 있는데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을 수없이 체험한 사람입니다. 5만 번 이상 응답 받았다고 말합니다.
추운 겨울인데 고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일러가 고장 나서 큰일입니다. 보일러를 고치려면 일 주일쯤 걸릴 것인데 이 아이들은 어쩌면 좋지요?
뮬러는 기도하러 갔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추운 날씨가 봄날처럼 따듯해졌습니다. 보일러를 다 고쳤을 때에 다시 추운 겨울 날씨로 바뀌었습니다.
양식 살 돈이 떨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굶게 생겼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밖이 매우 소란스럽습니다. 나가보니 큰 화물차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는 것입니다. 차에 실려 있는 것이 땅에 쏟아졌습니다. 사고를 수습하고 돌아가면서 차에 실려 있던 것을 다 고아원에 두고 갔습니다. 그것은 여러 날 동안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빵이었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우리는 15장 앞 부분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려고 왕으로 찾아오셨을지라도 극히 적대적인 감정을 보인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님께 대하여 큰 믿음으로 나아온 가나안의 이방 여인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서 이루어질 것인가?
천국을 소유할 자가 과연 누구인가?
나아가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놀라운 소식을 만나게 됩니다. 관심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치료하시는 곳까지 나아가십니다.
30절 "예수께서 고쳐주시니"
31절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만납니다.떡 7개와 생선 2마리로 4천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만납니다.
이 무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기울이시는 예수님의 수고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깊은 은혜에 더 깊이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원합니다.
마16:1-12 한 해 묵은 밭을 기경합시다( 두편)
한 해 묵은 밭을 기경합시다
마16:1-12
들어가는 말
오늘은 2003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52주간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한 해를 보내면서 마지막 한 주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숙제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나의 한 해를 돌아보고 묵어 가는 한 해를 기경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1. 한해가 가면 묵은 밭이 됩니다.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당시 유대교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로 인하여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분별력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타인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라 말씀하십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들의 심령이 기경하지 않은 묵은 밭처럼 영적 분별력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장에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마15: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그리고 떡 7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아이 외에 4,000명이 먹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들어보지도 못한 많은 표적을 행하였는데, 그들은 그런 표적에서 별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놀라운 표적은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놀라운 표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감동이 되지 않는 듯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표적이 작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가 아닙니다. 그들 영적 심령이 기경되어 있지 않아 영적 감각이 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심령의 밭에는 곡식이 떨어져도 전혀 싹이 나지 않게 마련입니다.
영적 무감각은 예수님의 기적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서로 원수 관계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위하여 서로 연합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신앙의 경향으로 볼 때, 바리새인들은 보수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부활도 믿고 천사의 존재도 인정했습니다. 바리새인은 마카비 시대부터 철두철미한 애국자들로 신앙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진보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의 율법에 기록된 것들만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부활이나 내세나 천국, 천사에 대한 교리를 부인했습니다. 성공과 고난은 인간의 행동의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공회의 주도권을 잡고 풍요와 부요의 온갖 정치적 기득권을 마음껏 누리며 즐기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얼핏 저들은 유사해 보이지만, 늘 서로 으르렁거리는 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들에게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심령이 묵은 밭과 같이 영적 무감각에 빠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여러 가지 일에서 원수였던 빌라도와 헤롯이 서로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늘 본문에서 친구가 되었습니다(눅 23:6-12).
"하늘로부터 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적어가다가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는 저들은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합니다. 영적 수준이 묵은 밭같이 무감각에 빠져 있음을 잘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표적을 유대인들이 그렇게 메시아의 표상처럼 떠받드는 다윗은 예수님과 같은 표적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엘리야의 경우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고 비가 내려 아합을 뒤집어엎는 기적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기적과 예수님의 기적은 차원이 다르고 횟수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에게서 기적이 나타나지만 그 질과 양에서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열 가지 재앙으로, 홍해를 가름으로 그 백성을 구원한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의 한 표에 불과 합니다.
모세 시절에 하늘로부터 만나(떡)이 내려주신 사건도 사실은 생명의 떡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모세가 쓰임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그 일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도구였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친히 떡을 들고 축사하시고 , 또 생명의 떡이 되심으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단지 이방 술사들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를 온 땅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듣고도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저들의 영적인 상태는 묵은 밭과 같이 마비된 것입니다.
금년도 한 해를 돌아보면 우리 삶의 전반에 하나님의 은혜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가지 한 가지를 헤아려 볼 때, 말할 수 없는 은혜가 됩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가 됩니다.
영적 감각이 살아 있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감사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하나님, 금년 한해도 공수로 돌아가게 하십니까? 네가 그렇게 표적을 바라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좀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언제까지 제 생활은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제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표적을 좀 보여주십시오."
나는 어떤 편에 속합니까?
생각할수록 감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감격하세요?
아니면, 금년도 아무런 표적을 보여준 것이 없다는 쿨한 마음이 드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밭이 몇 십 년 묵어야 황무지와 같이 묵은 밭이 되는 줄 압니다. 몇 십년 묵어야 그곳은 곡식을 심어도 잡초만 무성할 뿐, 잘 자라지 않는 줄 압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보면서 이런 묵은 밭을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묵은 밭과 같은 영적 무감각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그런 영적 무감각에 떨어지지 말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우리도 후자에 속할 때, 책망받을 수밖에 없음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한 해를 보내는 나의 심령은 묵어 있지 않습니까?
몇 년 째 묵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는 않더라도 금년 나의 심령이 묵어 있지 않습니까?
한 해만 기경하지 않아도 그냥 잡초가 무성해집니다.
기경하지 않고도 안심할 밭은 없습니다.
이 한 해가 가기 전에 혹은 새해를 맞으면서 밭을 기경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감사제목을 찾으라면 무슨 업적이 내 삶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을 찾으려 합니다.
하박국 3장에 나와 있는 말씀대로 바른 믿음 앞에 서기만 하면 얼마든지 감사의 열매는 있게 마련입니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요한 사도와 같이 심령이 하늘을 향해 열린 사람은 밧모섬에 귀양을 가도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인하여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감격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는지 점검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경하시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주님께서는 묵은 밭을 기경하기 원하십니다.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어떻게 묵은 땅을 기경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어떻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과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그들 앞서 갔던 선지자들의 교훈을 살펴봄으로 그것이 가능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기 원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것입니다.
호2:23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하셨습니다.(로암미->암미)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자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로루하마 ->루하마)
이런 긍휼의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음으로 묵은 땅(심령)을 기경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 가운데 계시면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말씀하십니다. 스바냐를 보세요.
습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메시아가 그들 가운데 계시면서 구원을 베푸시길 원하시는 데, 그 백성으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데, 저들을 사랑하시면서 기뻐하십니다. 이 아름다운 교훈을 온 세상에 베풀라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묵은 밭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시는 분이십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 놀라운 하나님을 만나고 놀랍니다.
미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예수님의 긍휼함을 입는 것을 보면서 놀라는데 사실은 그분이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러한 죄 용서함을 교훈하지 않았습니다.
묵은 밭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하나님만 나의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묵은 밭을 기경하실 수 있는 능력자이십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고, 능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내 마음을 기경하는 일입니다.
요나 선지자를 보세요. 그는 우리에게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임을 알려주십니다.
요나는 묵은 땅을 기경하려 들지 않다가 하나님께 혼이 났습니다. 물고기 배속에 사흘 밤을 들어갔다 나와서 말하는 요나를 보십시오. 그는 니느웨가 재앙을 받아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내 생명을 취하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해 니느웨를 복주시기 원하셨지만 묵은 땅을 기경하지 않은 요나는 복의 근원이 되는 일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집니다. 요나의 표적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여시겠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성전회복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말씀하십니다.
6:11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12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 15 먼 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9: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그날은 왔습니다. 순이라 이름하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내가 세우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 서야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런 교훈을 전혀 전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밭이 묵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 하면 헤롯이 지어놓은 화려한 성전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통치가 있는 성전입니다. 나귀를 타고 저들 가운데 오셔서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성전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메시아께서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하나님이 되고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성전입니다.
죄 사함이 있고, 구원을 베푸시는 성전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우리나라에 박카스가 있습니다. 한국 역대의 최고 상품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오리온 초코파이, 새우깡 모나미 볼펜 등의 쟁쟁한 상품들과 함께 한국인을 즐겁게 하는 공로 1호가 된 것입니다. 연 매상 2000억이 넘는다는 이 음료수는 지난 40년간 줄곧 선두를 유지해온 청량 음료입니다. 동아제약 회장인 강신우씨가 1963년 독일 유학 중 개발했다는 이 음료수가 141억 병을 생산하여 지구를 42바퀴 돌만큼 많은 생산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안에 타우린이란 들어 있어서 간과 심장을 건강하게 한다는 내적인 요인을 갖고 있지만, 사람들의 입에 변함이 없는 상쾌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있습니까? 심령의 밭을 기경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저들이 지식이 없어서도 아니오, 세상적인 무엇이 갖추어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묵은 밭을 기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기대하십니다.
기경하는 일이 밭의 입장에서는 아픈 일이지만, 새로운 소망이기도 합니다. 기경함이 없이는 소망도 없습니다.
세상이 급격히 변하고 있습니다.
월드 라이프 스타일(World Life Style) 즉 세계적 생활 방식이 생겼습니다. 요즘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 김치나 된장국이 아니고 피자나 햄버거 같은 것들입니다.
60년대에는 우리가 태평양을 건너려면 배를 타고 3개월내지 6개월이 걸려서 갔습니다. 70년대에는 비행기를 타고 20시간, 80년대에는 논스톱으로 14시간, 2000년 대, 10시간, 얼마 전에는 4시간대의 비행기가 발명되었습니다.
컴퓨터는 이제 핵심도구요, 절대 필수적입니다.
여성도 거의가 다 직업을 갖습니다. 그만큼 파워도 커집니다.
부자 중심의 사회가 부부중심으로 바뀌더니 이제 부부 중심의 가정도 도전 받고 있습니다. 한국도 두쌍 결혼하면, 그 중 한 쌍이 이혼한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합니다. 동성애가 극성을 부립니다.
노인들이 급증하며, 실버산업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도는 많이 미련해 보이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나 고린도전서 1장에서 하신 말씀대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할 것"(22)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참으로 우리 심령을 기경하고 박카스보다 훨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도는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뿐입니다.
금주는 한 해가 마무리되는 주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송구영신 예배도 있고, 신년 금식 기도회도 마련했습니다. 기경함으로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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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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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빛의 자녀가 새해에 힘쓸 일
성경본문: 살전5:1-11
들어가는 말
우리 성도가 어떤 존재입니까?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우리는 빛의 아들입니다.
성도는 낮의 아들입니다.
성도에게 지나간 금년 한 해의 날들은 무엇이며, 오는 새해의 날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주님의 날과 연관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성도를 위해 예비된 한 날, 곧 주의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도적같이 임하신다는 말씀은 주의 재림이 사람의 인식 밖의 일이란 말씀입니다. 바울은 주의 재림의 때와 시기에 관하여서 만은 성도들에게 쓸 것이 없음을 진술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평안하다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자신들의 쾌락을 좇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때에, 돌연히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때에 악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을 결단코 피할 수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때, 사람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일상 생활을 누리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홍수심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돌아보면서 새해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1. 구원받은 자는 입어야 할 옷이 있습니다.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성도들은 빛의 아들들로서 낮에 속하였기 때문에 입어야 할 옷이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옷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 날의 뜨거운 불심판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옷은 열이 스며들지 않는 어떤 특수 방열의 옷이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옷입니다. 이 옷만 입고 있으면 말세지말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빛의 아들의 중요한 재산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입니다. 모두가 다 있어야 할 것이고 소중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와 같이 진흙탕 밭에서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교회에게는 주님께서 그 중에 사랑이 제일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재림을 기다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에게는 소망의 투구가 가장 유효할 것입니다.
2004년을 맞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는 어떤 옷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낮에 속한 자들 다웁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옷을 견고히 입으시는 이 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나깨나 함께 살아야 할 분이 계십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상이전에 우리 동족을 둘로 갈라놓는데 일조 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도우면서 살아야 할 우리 동족이 서로 다투며 삶을 살아야 하니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 되어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독생자를 주심으로 죄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이 죄문제를 떨쳐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일입니다.
자나깨나 함께 살게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도 성도의 구속을 완성시키시어 자신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2004년을 선물로 받는 서머나 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과 함께 사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3. 덕을 세우는 삶을 원하십니다.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히] @jE (chen) [그] ajrethv (arete) [영] Virtue 세상에서 덕이라 하면 일반적으로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도덕을 말합니다. 고대 희랍인들은 지혜, 절제, 용감, 공정을 인생의 4대 덕으로 생각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지, 인, 용(智仁勇)을 삼달덕이라 부르고, 유교 방면에서는 인의예지(仁義禮知), 즉 사람의 몸에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마음씨-어질고, 의롭고, 예절 바르고, 지혜가 있는 것을 총칭하여 덕이라 말했습니다. 노자(전 5-4세기 중국 老子道德經 저자)의 해석은 이것과 달라, 우주의 원칙인 도의 다음에 위치하는것으로서 덕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창시절에 도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중에 당연히 갖추어야할 품성을 말합니다.(빌 4:8, 벧후 1:5).
신약에는 이 원어로는 4회 씌어져 있습니다(빌 4:8, 벧전 2:9, 벧후 1:3, 5),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찬미에 관련하여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권능의 의미로 쓰고 있다] (빌 4:8 viture). 베드로는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일](벧전 2:9)이 바로 빛의 자녀의 할 사명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로 된 자는 이 덕을 자기의 몸에 지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덕을 갖춤에 있어 믿음은 필수요소이지만 믿음만 있다고 덕은 그냥 갖추어지지 않습니다. 열심히 구해야 합니다(벧후 1:5). 믿음이 중요하지만 믿음이 있다고 그냥 덕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숙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갖추어주시는 선물이 바로 덕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덕을 사모하면서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의 의의 열매가 더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공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벧전 4:11).
그러므로 성도들이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고 권면하십니다. 믿음 충만한 사람들이 교회를 세웁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믿음 충만한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교회를 허는 사람도 많습니다. 상대편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여 함께 세워져 가는 일을 할 때 가능합니다. 교회는 마치 건물을 세워 나가는 것과 유사합니다. 믿음도 좋고, 은사도 좋은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 정말 필요한 요소는 덕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종말을 살아가는 서머나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말씀하셨습니다.
빛의 자녀답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옷을 입고, 하나님과 함게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며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천국 시민으로서의 합당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현실에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성도들 간에도 신앙생활에서 부조화를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분이 오실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십니다(요 8:12). 우리 그리스도인은 낮에 속하였으므로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하여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세상은 마치 1912년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 배"였으나 빙산에 부딪혀 침몰해 버린 타이타닉호에 탄 사람들과 같습니다. 해안 경비대는 타이타닉호에 빙산을 주의시키는 전보를 몇 차례나 보냈으나 무선사는 이 경고를 무시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나는 바쁘단 말이오"라고 전신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시간도 안 되어 그 배는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을 두 가지로 묘사하였습니다. 도둑의 예를 들었습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예로 갑작스러운 진텅에 비유하였습니다.
깨어서 주님오실 날을 준비하는 복된 서머나 교우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16:1-12
들어가는 말
오늘은 2003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52주간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한 해를 보내면서 마지막 한 주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숙제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나의 한 해를 돌아보고 묵어 가는 한 해를 기경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1. 한해가 가면 묵은 밭이 됩니다.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당시 유대교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로 인하여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분별력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타인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라 말씀하십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들의 심령이 기경하지 않은 묵은 밭처럼 영적 분별력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장에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마15: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그리고 떡 7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아이 외에 4,000명이 먹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들어보지도 못한 많은 표적을 행하였는데, 그들은 그런 표적에서 별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놀라운 표적은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놀라운 표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감동이 되지 않는 듯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표적이 작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가 아닙니다. 그들 영적 심령이 기경되어 있지 않아 영적 감각이 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심령의 밭에는 곡식이 떨어져도 전혀 싹이 나지 않게 마련입니다.
영적 무감각은 예수님의 기적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서로 원수 관계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위하여 서로 연합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신앙의 경향으로 볼 때, 바리새인들은 보수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부활도 믿고 천사의 존재도 인정했습니다. 바리새인은 마카비 시대부터 철두철미한 애국자들로 신앙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진보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의 율법에 기록된 것들만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부활이나 내세나 천국, 천사에 대한 교리를 부인했습니다. 성공과 고난은 인간의 행동의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공회의 주도권을 잡고 풍요와 부요의 온갖 정치적 기득권을 마음껏 누리며 즐기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얼핏 저들은 유사해 보이지만, 늘 서로 으르렁거리는 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들에게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심령이 묵은 밭과 같이 영적 무감각에 빠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여러 가지 일에서 원수였던 빌라도와 헤롯이 서로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늘 본문에서 친구가 되었습니다(눅 23:6-12).
"하늘로부터 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적어가다가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는 저들은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합니다. 영적 수준이 묵은 밭같이 무감각에 빠져 있음을 잘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표적을 유대인들이 그렇게 메시아의 표상처럼 떠받드는 다윗은 예수님과 같은 표적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엘리야의 경우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고 비가 내려 아합을 뒤집어엎는 기적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기적과 예수님의 기적은 차원이 다르고 횟수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에게서 기적이 나타나지만 그 질과 양에서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열 가지 재앙으로, 홍해를 가름으로 그 백성을 구원한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의 한 표에 불과 합니다.
모세 시절에 하늘로부터 만나(떡)이 내려주신 사건도 사실은 생명의 떡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모세가 쓰임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그 일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도구였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친히 떡을 들고 축사하시고 , 또 생명의 떡이 되심으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단지 이방 술사들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를 온 땅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듣고도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저들의 영적인 상태는 묵은 밭과 같이 마비된 것입니다.
금년도 한 해를 돌아보면 우리 삶의 전반에 하나님의 은혜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가지 한 가지를 헤아려 볼 때, 말할 수 없는 은혜가 됩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가 됩니다.
영적 감각이 살아 있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감사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하나님, 금년 한해도 공수로 돌아가게 하십니까? 네가 그렇게 표적을 바라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좀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언제까지 제 생활은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제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표적을 좀 보여주십시오."
나는 어떤 편에 속합니까?
생각할수록 감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감격하세요?
아니면, 금년도 아무런 표적을 보여준 것이 없다는 쿨한 마음이 드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밭이 몇 십 년 묵어야 황무지와 같이 묵은 밭이 되는 줄 압니다. 몇 십년 묵어야 그곳은 곡식을 심어도 잡초만 무성할 뿐, 잘 자라지 않는 줄 압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보면서 이런 묵은 밭을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묵은 밭과 같은 영적 무감각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그런 영적 무감각에 떨어지지 말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우리도 후자에 속할 때, 책망받을 수밖에 없음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한 해를 보내는 나의 심령은 묵어 있지 않습니까?
몇 년 째 묵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는 않더라도 금년 나의 심령이 묵어 있지 않습니까?
한 해만 기경하지 않아도 그냥 잡초가 무성해집니다.
기경하지 않고도 안심할 밭은 없습니다.
이 한 해가 가기 전에 혹은 새해를 맞으면서 밭을 기경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감사제목을 찾으라면 무슨 업적이 내 삶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을 찾으려 합니다.
하박국 3장에 나와 있는 말씀대로 바른 믿음 앞에 서기만 하면 얼마든지 감사의 열매는 있게 마련입니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요한 사도와 같이 심령이 하늘을 향해 열린 사람은 밧모섬에 귀양을 가도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인하여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감격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는지 점검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경하시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주님께서는 묵은 밭을 기경하기 원하십니다.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어떻게 묵은 땅을 기경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어떻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과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그들 앞서 갔던 선지자들의 교훈을 살펴봄으로 그것이 가능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기 원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것입니다.
호2:23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하셨습니다.(로암미->암미)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자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로루하마 ->루하마)
이런 긍휼의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음으로 묵은 땅(심령)을 기경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 가운데 계시면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말씀하십니다. 스바냐를 보세요.
습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메시아가 그들 가운데 계시면서 구원을 베푸시길 원하시는 데, 그 백성으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데, 저들을 사랑하시면서 기뻐하십니다. 이 아름다운 교훈을 온 세상에 베풀라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묵은 밭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시는 분이십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 놀라운 하나님을 만나고 놀랍니다.
미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예수님의 긍휼함을 입는 것을 보면서 놀라는데 사실은 그분이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러한 죄 용서함을 교훈하지 않았습니다.
묵은 밭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하나님만 나의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묵은 밭을 기경하실 수 있는 능력자이십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고, 능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내 마음을 기경하는 일입니다.
요나 선지자를 보세요. 그는 우리에게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임을 알려주십니다.
요나는 묵은 땅을 기경하려 들지 않다가 하나님께 혼이 났습니다. 물고기 배속에 사흘 밤을 들어갔다 나와서 말하는 요나를 보십시오. 그는 니느웨가 재앙을 받아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내 생명을 취하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해 니느웨를 복주시기 원하셨지만 묵은 땅을 기경하지 않은 요나는 복의 근원이 되는 일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집니다. 요나의 표적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여시겠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성전회복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말씀하십니다.
6:11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12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 15 먼 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9: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그날은 왔습니다. 순이라 이름하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내가 세우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 서야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런 교훈을 전혀 전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밭이 묵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 하면 헤롯이 지어놓은 화려한 성전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통치가 있는 성전입니다. 나귀를 타고 저들 가운데 오셔서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성전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메시아께서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하나님이 되고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성전입니다.
죄 사함이 있고, 구원을 베푸시는 성전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우리나라에 박카스가 있습니다. 한국 역대의 최고 상품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오리온 초코파이, 새우깡 모나미 볼펜 등의 쟁쟁한 상품들과 함께 한국인을 즐겁게 하는 공로 1호가 된 것입니다. 연 매상 2000억이 넘는다는 이 음료수는 지난 40년간 줄곧 선두를 유지해온 청량 음료입니다. 동아제약 회장인 강신우씨가 1963년 독일 유학 중 개발했다는 이 음료수가 141억 병을 생산하여 지구를 42바퀴 돌만큼 많은 생산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안에 타우린이란 들어 있어서 간과 심장을 건강하게 한다는 내적인 요인을 갖고 있지만, 사람들의 입에 변함이 없는 상쾌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있습니까? 심령의 밭을 기경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저들이 지식이 없어서도 아니오, 세상적인 무엇이 갖추어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묵은 밭을 기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기대하십니다.
기경하는 일이 밭의 입장에서는 아픈 일이지만, 새로운 소망이기도 합니다. 기경함이 없이는 소망도 없습니다.
세상이 급격히 변하고 있습니다.
월드 라이프 스타일(World Life Style) 즉 세계적 생활 방식이 생겼습니다. 요즘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 김치나 된장국이 아니고 피자나 햄버거 같은 것들입니다.
60년대에는 우리가 태평양을 건너려면 배를 타고 3개월내지 6개월이 걸려서 갔습니다. 70년대에는 비행기를 타고 20시간, 80년대에는 논스톱으로 14시간, 2000년 대, 10시간, 얼마 전에는 4시간대의 비행기가 발명되었습니다.
컴퓨터는 이제 핵심도구요, 절대 필수적입니다.
여성도 거의가 다 직업을 갖습니다. 그만큼 파워도 커집니다.
부자 중심의 사회가 부부중심으로 바뀌더니 이제 부부 중심의 가정도 도전 받고 있습니다. 한국도 두쌍 결혼하면, 그 중 한 쌍이 이혼한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합니다. 동성애가 극성을 부립니다.
노인들이 급증하며, 실버산업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도는 많이 미련해 보이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나 고린도전서 1장에서 하신 말씀대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할 것"(22)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참으로 우리 심령을 기경하고 박카스보다 훨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도는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뿐입니다.
금주는 한 해가 마무리되는 주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송구영신 예배도 있고, 신년 금식 기도회도 마련했습니다. 기경함으로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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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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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빛의 자녀가 새해에 힘쓸 일
성경본문: 살전5:1-11
들어가는 말
우리 성도가 어떤 존재입니까?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우리는 빛의 아들입니다.
성도는 낮의 아들입니다.
성도에게 지나간 금년 한 해의 날들은 무엇이며, 오는 새해의 날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주님의 날과 연관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성도를 위해 예비된 한 날, 곧 주의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도적같이 임하신다는 말씀은 주의 재림이 사람의 인식 밖의 일이란 말씀입니다. 바울은 주의 재림의 때와 시기에 관하여서 만은 성도들에게 쓸 것이 없음을 진술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평안하다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자신들의 쾌락을 좇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때에, 돌연히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때에 악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을 결단코 피할 수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때, 사람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일상 생활을 누리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홍수심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돌아보면서 새해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1. 구원받은 자는 입어야 할 옷이 있습니다.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성도들은 빛의 아들들로서 낮에 속하였기 때문에 입어야 할 옷이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옷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 날의 뜨거운 불심판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옷은 열이 스며들지 않는 어떤 특수 방열의 옷이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옷입니다. 이 옷만 입고 있으면 말세지말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빛의 아들의 중요한 재산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입니다. 모두가 다 있어야 할 것이고 소중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와 같이 진흙탕 밭에서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교회에게는 주님께서 그 중에 사랑이 제일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재림을 기다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에게는 소망의 투구가 가장 유효할 것입니다.
2004년을 맞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는 어떤 옷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낮에 속한 자들 다웁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옷을 견고히 입으시는 이 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나깨나 함께 살아야 할 분이 계십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상이전에 우리 동족을 둘로 갈라놓는데 일조 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도우면서 살아야 할 우리 동족이 서로 다투며 삶을 살아야 하니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 되어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독생자를 주심으로 죄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이 죄문제를 떨쳐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일입니다.
자나깨나 함께 살게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도 성도의 구속을 완성시키시어 자신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2004년을 선물로 받는 서머나 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과 함께 사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3. 덕을 세우는 삶을 원하십니다.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히] @jE (chen) [그] ajrethv (arete) [영] Virtue 세상에서 덕이라 하면 일반적으로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도덕을 말합니다. 고대 희랍인들은 지혜, 절제, 용감, 공정을 인생의 4대 덕으로 생각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지, 인, 용(智仁勇)을 삼달덕이라 부르고, 유교 방면에서는 인의예지(仁義禮知), 즉 사람의 몸에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마음씨-어질고, 의롭고, 예절 바르고, 지혜가 있는 것을 총칭하여 덕이라 말했습니다. 노자(전 5-4세기 중국 老子道德經 저자)의 해석은 이것과 달라, 우주의 원칙인 도의 다음에 위치하는것으로서 덕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창시절에 도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중에 당연히 갖추어야할 품성을 말합니다.(빌 4:8, 벧후 1:5).
신약에는 이 원어로는 4회 씌어져 있습니다(빌 4:8, 벧전 2:9, 벧후 1:3, 5),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찬미에 관련하여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권능의 의미로 쓰고 있다] (빌 4:8 viture). 베드로는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일](벧전 2:9)이 바로 빛의 자녀의 할 사명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로 된 자는 이 덕을 자기의 몸에 지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덕을 갖춤에 있어 믿음은 필수요소이지만 믿음만 있다고 덕은 그냥 갖추어지지 않습니다. 열심히 구해야 합니다(벧후 1:5). 믿음이 중요하지만 믿음이 있다고 그냥 덕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숙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갖추어주시는 선물이 바로 덕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덕을 사모하면서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의 의의 열매가 더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공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벧전 4:11).
그러므로 성도들이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고 권면하십니다. 믿음 충만한 사람들이 교회를 세웁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믿음 충만한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교회를 허는 사람도 많습니다. 상대편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여 함께 세워져 가는 일을 할 때 가능합니다. 교회는 마치 건물을 세워 나가는 것과 유사합니다. 믿음도 좋고, 은사도 좋은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 정말 필요한 요소는 덕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종말을 살아가는 서머나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말씀하셨습니다.
빛의 자녀답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옷을 입고, 하나님과 함게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며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천국 시민으로서의 합당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현실에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성도들 간에도 신앙생활에서 부조화를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분이 오실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십니다(요 8:12). 우리 그리스도인은 낮에 속하였으므로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하여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세상은 마치 1912년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 배"였으나 빙산에 부딪혀 침몰해 버린 타이타닉호에 탄 사람들과 같습니다. 해안 경비대는 타이타닉호에 빙산을 주의시키는 전보를 몇 차례나 보냈으나 무선사는 이 경고를 무시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나는 바쁘단 말이오"라고 전신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시간도 안 되어 그 배는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을 두 가지로 묘사하였습니다. 도둑의 예를 들었습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예로 갑작스러운 진텅에 비유하였습니다.
깨어서 주님오실 날을 준비하는 복된 서머나 교우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16:13-28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자
들어가는 말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행하실 일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에서 어떤 일을 행하실까?
우리들은 어떻게 이 하나님의 꿈에 동참할 수 있을까?
특히 새로운 제직, 새로운 사역을 맡으면서 새롭게 마음가짐을 세워 봅니다.
[마 16: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는 데 쓰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1.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갑자기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면서 물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몸입니다.
주님께서 머리가 되시고 성도들은 그분의 지체입니다.
우리는 유기체적인 관계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이를 위하여 지체된 우리가 확실히 고백해야 할 것은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쓰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특징은 주님을 높이 존중해야 할 사람으로 여겼으며 위대한 선지자의 위치에 그를 두었으나, 그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까지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계시와(마 11:27-) 성령의 증거가 없이는(고전 12:3) 아무도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고백은 구원을 받는 데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예수님께 대해 확실한 신앙고백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쓰임 받은 베드로의 특징은 신앙고백이 확실합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고백이 흔들릴 때,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고 확실한 신앙고백으로 주님을 따라 나섰을 때,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가 당대에 누구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이 확실했다는 점입니다.
2004년,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 확실한 한해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마 16: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페트로스-작은 바위)라, 내가 이 반석(페트라-기초가 되는 거대한 암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3:11)
이렇게 볼 때, 반석은 거대한 암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이 거대한 암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이 작은 바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성도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어디에 세우시고 계십니까? 근본적으로 거대한 암반이라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의지할 때, 우리 위에 교회를 세우기 원하십니다.
베드로 자신도 그렇게 말했습니다(벧전 2:4-8/행 4:11-12/시 118:22).
[벧전 2:4-5]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를 반석이라고 지칭했으며, 반복해서 말하기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였습니다(엡 1:20-23/엡 4:8-16/엡 5:23/골 1:18참조).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구약전체를 통하여 반석은 인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신 32:45/단 2:45/시 18:2).
38세의 노총각이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얼마나 감격스런 사건인가?
그러나 결혼 준비를 하던 중, 엄마가 24시간밖에 못산다는 사형선고를 전해 받았다. 결혼 준비는 엉망이 되고 그들은 죽어가는 엄마곁으로 달려갔다. 24시간이 지나도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 예정대로 결혼식을 치루기로 했다.
결혼식이 있는 바로 그날 엄마가 다시 코마 상태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랴부랴 결혼식을 마무리한 그들은 신혼여행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달콤한 신혼여행의 꿈은 산산히 망가졌다. 어머니 곁으로 달려간 그들은 신혼여행 대신 어머니 장례에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
참 기가 막힌 이 상황 속에서 그는 모래폭풍을 체험했다. 환상적인 결혼의 기쁨을 날려버렸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 가운데서 소중한 것을 얻는 감정을 체험했다. 신부 된 그녀의 진심어린 돌봄과 이해 속에서 신부로부터의 깊은 위로를 받게 되었다. 신부에 대한 큰 신뢰와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이 아내만 곁에 있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겨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동역자만 든든해도 좋은데 만세반석 위에 내 인생이 선다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 인생을 어디에 세우시길 원하십니까?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기가 쉽다 하셨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굳건한 반석 위에 세울 때,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도 억지로 된 고백이 아니고, 인위적인 고백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고백이었습니다.
[마 16: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이루어진 서머나 교회가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복입니다.
2.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 16:21]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리스도는 그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죽음을 공개적으로 알리십니다. 주님은 이미 여러 가지 상징들로 자신의 죽음을 알리셨으나(요 2:19/요 3:14/요 6:15/마 9:15/마 12:40-41), 이제는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막 8:32).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시지 마시기를 권함으로써 마태복음 4장 8-10절에 나오는 사단의 시험을 반복하였습니다. 사단은 베드로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순종의 좁은 길에 거치는 돌이 되게 하였습니다. 사단은 다시 베드로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눅 22:31-이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셨고 신자의 삶에 놓여 있는 십자가의 중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치욕을 짊어지고 순종하며 주님을 따름에 있.어 세상과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난과 영광이 언제나 함께 다닌다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벧전 4:12-19/벧전 5:1/벧전 5:10).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는 것만이 행복의 보장이라고 생각하여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이 있었다. 그는 5년동안 두 마디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수도원의 법이었다.
5년의 수도를 마치면서 그는 두마디를 했다. ‘음식이 나쁘다(bed Food)’,
또 5년의 수도를 했다. 그때 그는 다시 두마디를 말했다. ‘잠자리가 불편하다(bad bed)’.
그리고 또 5년을 더 수도했다. 그가 떠나며 남긴 두 마디, ‘더 이상 여기 있지 않겠다.’
그 수도원장이 대답했다. 15년간 이 수도원에 있으면서 한 일은 오직 불평밖에 없었으니 그런 말에 놀라지 않겠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컴퓨터 칩이 모래 알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3. 자기부인으로 하나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 16: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자기를 부인할 때, 하나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제 목숨까지 잃을 때, 하나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할 때, 하나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부인해야 할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융이 많은 사람들을 상담하면서 발견한 것은 35세 이상 인생의 중반을 넘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종교와 씨름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모르는 사람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정신 질환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누구도 정신 질환을 치료할 수 없었답니다.
자기부인이란 자신의 고집과 주관, 경험, 자존심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강함뿐만 아니라, 약함도 부인하는 것입니다.
스몰리는 어렸을 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작가는 지진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맹모삼천을 실천하는 그의 부모는 자꾸만 이사를 했다. 부모는 그에게 반장을 하기 원했으나 사실은 낙제를 하고 말았다. 모래폭풍을 체험했다.
약한 점들을 극복하려고 20번씩을 노력해 다시 씀으로 진주로 바꾸었다. 자기의 고통을 진주로 만들었다 . 12권의 책을 써서 상도 받고 했다. 3학년 때, 글쓰기 등에서 낙제한 것을 아는 선생님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놀랐겠는가?
마무리하는 말
1. 반석 위에 선 확실한 신앙고백
2. 고난(십자가)을 두려워하지 않음
3. 자기부인으로 하나님 일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주님의 사람들에게 열쇠를 맡기십니다.
열쇠는 천국에서의 베드로의 청지기 직분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열쇠는 청지기의 권한과 직분을 상징합니다(사 22:22/눅 11:52). 베드로는 이 열쇠를 유대인들과(행 2장), 사마리아인들(행 8장), 이방인들에게(행 10:1-), "믿음의 문을 열어 줄" 때(행 14:27) 사용하였습니다.
금년 들어 우리 서머나 봉사부에서는 좋은 청지기 한 분을 세웠습니다. 이 청지기는 이경세 집사님이십니다. 이분은 연세가 7순이 넘으셔서 직분을 맡을 수 있는 학년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 성실하시고 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하다가 아, 이분이 바로 누가복음의 시므온과 같이 성전에서 쓰임 받으시기에 적합한 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봉사부에서는 그분께 열쇠를 맡겼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교회를 사용하셔야 할 긴급한 상황이 되시면 늘 이 집사님께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왜 그분께 열쇠를 맡깁니까?
확실한 신앙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들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습니다.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든지 봉사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시간을 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서머나 교회에 열쇠를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가 우리 주님의 열쇠를 맡을 수 있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행하실 일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에서 어떤 일을 행하실까?
우리들은 어떻게 이 하나님의 꿈에 동참할 수 있을까?
특히 새로운 제직, 새로운 사역을 맡으면서 새롭게 마음가짐을 세워 봅니다.
[마 16: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는 데 쓰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1.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갑자기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면서 물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몸입니다.
주님께서 머리가 되시고 성도들은 그분의 지체입니다.
우리는 유기체적인 관계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이를 위하여 지체된 우리가 확실히 고백해야 할 것은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쓰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특징은 주님을 높이 존중해야 할 사람으로 여겼으며 위대한 선지자의 위치에 그를 두었으나, 그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까지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계시와(마 11:27-) 성령의 증거가 없이는(고전 12:3) 아무도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고백은 구원을 받는 데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예수님께 대해 확실한 신앙고백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쓰임 받은 베드로의 특징은 신앙고백이 확실합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고백이 흔들릴 때,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고 확실한 신앙고백으로 주님을 따라 나섰을 때,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가 당대에 누구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이 확실했다는 점입니다.
2004년,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 확실한 한해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마 16: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페트로스-작은 바위)라, 내가 이 반석(페트라-기초가 되는 거대한 암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3:11)
이렇게 볼 때, 반석은 거대한 암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이 거대한 암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이 작은 바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성도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어디에 세우시고 계십니까? 근본적으로 거대한 암반이라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의지할 때, 우리 위에 교회를 세우기 원하십니다.
베드로 자신도 그렇게 말했습니다(벧전 2:4-8/행 4:11-12/시 118:22).
[벧전 2:4-5]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를 반석이라고 지칭했으며, 반복해서 말하기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였습니다(엡 1:20-23/엡 4:8-16/엡 5:23/골 1:18참조).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구약전체를 통하여 반석은 인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신 32:45/단 2:45/시 18:2).
38세의 노총각이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얼마나 감격스런 사건인가?
그러나 결혼 준비를 하던 중, 엄마가 24시간밖에 못산다는 사형선고를 전해 받았다. 결혼 준비는 엉망이 되고 그들은 죽어가는 엄마곁으로 달려갔다. 24시간이 지나도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 예정대로 결혼식을 치루기로 했다.
결혼식이 있는 바로 그날 엄마가 다시 코마 상태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랴부랴 결혼식을 마무리한 그들은 신혼여행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달콤한 신혼여행의 꿈은 산산히 망가졌다. 어머니 곁으로 달려간 그들은 신혼여행 대신 어머니 장례에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
참 기가 막힌 이 상황 속에서 그는 모래폭풍을 체험했다. 환상적인 결혼의 기쁨을 날려버렸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 가운데서 소중한 것을 얻는 감정을 체험했다. 신부 된 그녀의 진심어린 돌봄과 이해 속에서 신부로부터의 깊은 위로를 받게 되었다. 신부에 대한 큰 신뢰와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이 아내만 곁에 있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겨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동역자만 든든해도 좋은데 만세반석 위에 내 인생이 선다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 인생을 어디에 세우시길 원하십니까?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기가 쉽다 하셨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굳건한 반석 위에 세울 때,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도 억지로 된 고백이 아니고, 인위적인 고백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고백이었습니다.
[마 16: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이루어진 서머나 교회가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복입니다.
2.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 16:21]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리스도는 그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죽음을 공개적으로 알리십니다. 주님은 이미 여러 가지 상징들로 자신의 죽음을 알리셨으나(요 2:19/요 3:14/요 6:15/마 9:15/마 12:40-41), 이제는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막 8:32).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시지 마시기를 권함으로써 마태복음 4장 8-10절에 나오는 사단의 시험을 반복하였습니다. 사단은 베드로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순종의 좁은 길에 거치는 돌이 되게 하였습니다. 사단은 다시 베드로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눅 22:31-이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셨고 신자의 삶에 놓여 있는 십자가의 중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치욕을 짊어지고 순종하며 주님을 따름에 있.어 세상과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난과 영광이 언제나 함께 다닌다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벧전 4:12-19/벧전 5:1/벧전 5:10).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는 것만이 행복의 보장이라고 생각하여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이 있었다. 그는 5년동안 두 마디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수도원의 법이었다.
5년의 수도를 마치면서 그는 두마디를 했다. ‘음식이 나쁘다(bed Food)’,
또 5년의 수도를 했다. 그때 그는 다시 두마디를 말했다. ‘잠자리가 불편하다(bad bed)’.
그리고 또 5년을 더 수도했다. 그가 떠나며 남긴 두 마디, ‘더 이상 여기 있지 않겠다.’
그 수도원장이 대답했다. 15년간 이 수도원에 있으면서 한 일은 오직 불평밖에 없었으니 그런 말에 놀라지 않겠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컴퓨터 칩이 모래 알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3. 자기부인으로 하나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 16: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자기를 부인할 때, 하나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제 목숨까지 잃을 때, 하나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할 때, 하나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부인해야 할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융이 많은 사람들을 상담하면서 발견한 것은 35세 이상 인생의 중반을 넘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종교와 씨름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모르는 사람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정신 질환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누구도 정신 질환을 치료할 수 없었답니다.
자기부인이란 자신의 고집과 주관, 경험, 자존심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강함뿐만 아니라, 약함도 부인하는 것입니다.
스몰리는 어렸을 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작가는 지진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맹모삼천을 실천하는 그의 부모는 자꾸만 이사를 했다. 부모는 그에게 반장을 하기 원했으나 사실은 낙제를 하고 말았다. 모래폭풍을 체험했다.
약한 점들을 극복하려고 20번씩을 노력해 다시 씀으로 진주로 바꾸었다. 자기의 고통을 진주로 만들었다 . 12권의 책을 써서 상도 받고 했다. 3학년 때, 글쓰기 등에서 낙제한 것을 아는 선생님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놀랐겠는가?
마무리하는 말
1. 반석 위에 선 확실한 신앙고백
2. 고난(십자가)을 두려워하지 않음
3. 자기부인으로 하나님 일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주님의 사람들에게 열쇠를 맡기십니다.
열쇠는 천국에서의 베드로의 청지기 직분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열쇠는 청지기의 권한과 직분을 상징합니다(사 22:22/눅 11:52). 베드로는 이 열쇠를 유대인들과(행 2장), 사마리아인들(행 8장), 이방인들에게(행 10:1-), "믿음의 문을 열어 줄" 때(행 14:27) 사용하였습니다.
금년 들어 우리 서머나 봉사부에서는 좋은 청지기 한 분을 세웠습니다. 이 청지기는 이경세 집사님이십니다. 이분은 연세가 7순이 넘으셔서 직분을 맡을 수 있는 학년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 성실하시고 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하다가 아, 이분이 바로 누가복음의 시므온과 같이 성전에서 쓰임 받으시기에 적합한 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봉사부에서는 그분께 열쇠를 맡겼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교회를 사용하셔야 할 긴급한 상황이 되시면 늘 이 집사님께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왜 그분께 열쇠를 맡깁니까?
확실한 신앙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들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습니다.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든지 봉사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시간을 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서머나 교회에 열쇠를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가 우리 주님의 열쇠를 맡을 수 있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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