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24 February 2015

템플상을 수상한 한경직 목사(1)

서론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한경직 목사를 가리켜 "제가 가장 존경하고 사모하는 분"이라고 부르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목회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한 목사님과 같이 있으면 저는 부족한 부분들을 많이 느꼈기에 그 분을 닮게 해 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너무나 진솔한 표현이고 고백이다. 템플턴 재단은 1992년 4월 29일 한경직 목사에게 템플턴 상을 수상하면서 "20세기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목사"라고 평했다. 정진경 목사도 한경직 목사를 가리켜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목회자이며 봉사자이며 사랑의 사도"라고 불렀다. 
시인 고훈 목사는 한경직 목사를 기리며 "가난한 목자, 사랑의 목자, 작은 예수"라고 목이 메어 불렀다. "아무 말 없으셔도 무슨 일 안 하셔도 당신은 우리의 힘이셨습니다. 한 사람을 만인만큼 소중하게 만인을 한 사람 대하시듯 어떤 요구에도 거절 못하시고 누구의 의견에도 손들어주시고 단 한 사람에게도 섭섭함 주신 일 없으신 한국의 성자여 한국의 작은 예수여. 모든 것 가지고도 아무것도 없으신 가난한 목자,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 다 가지신 사랑의 목자여. 우리가 오늘 여기 이토록 슬픈 것은 아무리 둘러봐도 당신 같은 목자는 하나도 없는 이 텅 빈 세상이 너무 슬퍼서 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목메어 부르짖는 사랑의 고백이다. 한경직 목사는 목자 중의 목자였고 목회자 중의 목회자였다. 
목회자의 길을 걸으려고 집을 떠난 한 젊은 신학생이 한경직 목사님이 걸으신 발자취를 바라보며 마치 예수님이 걸으신 발자취를 보는 듯 하다고 고백했다. "사랑하는 한 목사님, 목사님의 그 발자취를 보니 예수님의 발자취를 많이 닮으셨군요. 저도 가렵니다. 민족과 교회를 위해 이 몸을 바치렵니다. 소중하신 목사님께서 남기신 그 흔적들을 더듬으면서 묵묵히 가렵니다. 주님께서 부끄러워하시지 않도록 바르게, 바르게, 바르게 섬기겠습니다. 평안하소서. 샬롬." 목회자의 길을 떠나는 손자 같이 젊은 한 후배의 마음과 몸과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는 목회자야말로 진정한 목회자일 것이다. 
아니 한국교회의 대표적 목회자들과 지성인들치고 한경직 목사의 감화와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그를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목회자라고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들은 한경직 목사를 가리켜 "목회의 위대한 신화를 남겨놓으신 우리의 선한 목자"(김선도 목사), "예수님을 닮은 분"(림인식 목사),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성자"(정진경 목사), "길고 긴 20세기를 흔들림 없는 자세로 사도의 길을 걸어오신 목사님"(강원용 목사), "세계에서 성자로 불리는 목회자"(강신명 목사), "내가 흠모하고 흉내내고 닮을 목자"(김준곤 목사), "한국교회의 백년 역사에 있어서 목회자로서의 영원히 기억될 최고봉에 서신 분"(김희보 목사), "뵙기만 해도 감격의 눈물이 볼을 적시게 하는 분"(신현균 목사), "나의 믿음의 아버지"(박조준 목사), "목회자의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옥한흠 목사),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김용기 장로), "한국교회에 내리신 하나님의 귀한 선물"(손봉호 교수), "가장 존경하는 사람"(125명 기자) 이라고 칭송했다. 한경직 목사는 목회자들의 목회자였다. 
한경직 목사의 목회는 그가 31세 되던 1933년부터 시작되었다. 목회자로서의 소명과 헌신은 22세의 청년 한경직이 1924년 여름 황해도 구미포 해변을 혼자 걷고 있을 때 주어졌고 철저한 항복과 재헌신은 27세의 청년 한경직이 1929년 미국 프린스턴에서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주어졌지만 실제로 목회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귀국 1년 후 한경직이 31세 되던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의 전도사로 부임 함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학문에 대한 꿈을 품기도 했었고 교수에 대한 꿈을 품기도 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좌절되었다. 후에 한경직 목사는 이것을 "좋은 기회"였다고 긍정적으로 표현했다. 
모든 것이 좌절되고 있을 무렵 한경직은 신의주 제2교회의 김기범 장로로부터 교역자 청빙을 받았다. 결국 한경직은 한 평생 목회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가난과 좌절 중에 있던 수 많은 평민들과 청년들의 힘과 소망이 되고자 하는 일념으로 목회의 길에 뛰어든 것이었다. 부임 첫 예배의 소감을 한경직 목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이 때 저는 평민의 한 사람으로 가난한 무리 중에 끼어 있다는 행복감으로 가득했습니다." 한경직 전도사는 심혈을 기울여 기도하고 설교하고 봉사하며 목회에 전념했다. 한경직은 행복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나의 사랑하는 겨레를 위해 봉사하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데 대해 너무나 행복하였습니다." 1년 후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부임 후 2년 만에 건평 365평의 2층 붉은 벽돌 교회당 건물을 건축했다. 고아원 양로원도 세웠다. 가난한 사람들과 청년들이 모여들어 신도 수는 300에서 1,000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는 1937년경부터 일본의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강요에 시달리다가 1938년에는 총회 총대로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장로회 총회에 참석하여 신사참배결의에 참여하고 말았다. 교회로 돌아와서는 교회 차원의 신사참배나 동방요배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이에 반대했다. 결국 한경직 목사는 오산학교 출신이라는 것과 미국 유학생이었다는 이유 등등으로 일본 경찰에 의해 1942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교회를 사임한 한경직 목사는 1945년까지 보린원 원장으로 고아와 노인들을 돌보다가 1945년 10월 월남하여 그 해 12월 2일 월남 피난민들과 함께 서울 저동에서 베다니 전도교회를 설립했다. 이듬 해인 1946년 11월 영락교회로 교회의 이름을 바꾸고 영락교회의 목회자로 아니 한국교회의 목자로 한 평생을 바치다가 2000년 4월 19일 고난절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98세를 사시고 천국으로 옮겨졌다. 

제1편 인간 한경직

목회자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 이 땅의 역사 안에서 만들어진다. 수 많은 고난과 약함과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안에서, 그리고 한 인간의 진솔한 참회와 자기 부정과 헌신의 과정 안에서 하나의 목회자와 설교자로 만들어진다. 목회자와 설교자는 재능도 기술도 학문도 아니다. 목회자는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그리고 자기 부정과 헌신의 결단 안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인간이요 하나의 인격이다. 결국 목회는 한 인격이 목회현장에 그대로 나타난 모습이고 설교는 한 인격이 설교현장에 그대로 나타난 모습이다. 인간 됨과 인격 됨이 없는 목회자와 설교자는 참된 목회자와 설교자는 아니다. 인간 됨과 인격 됨이 없는 목회자와 설교자는 종교인이나 연설가는 될 수 있고 사업가나 연출가는 될 수 있지만 진정한 목회자와 설교자는 될 수 없다. 
한경직 목사가 이 시대의 진정한 목회자와 설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이나 학문 때문이 아니다.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자기 부정과 헌신의 과정 안에서 그리스도의 종과 민중의 종의 인격을 지닌 하나의 참된 인간으로 만들어진 데 있다. 우리는 20세기 한국의 가장 위대한 목회자요 설교자인 한경직 목사의 인간의 면모와 목회자의 면모를 살펴보려고 한다. (글:김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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