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종려주일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승리의 주님께서 왕 중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군사력과 기마와 전차를 거느리는 왕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시고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호산나 찬송에 맞추어 입성하는 하나님 나라의 왕
메시아의 모습을 만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왜 종려주일의 기쁨이 필요합니까?
고난의 십자가
눈물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이오
오늘 본문의 상황도 눈물이 적셔있는데
왜 이런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까?
말씀이 주는 중심을 이해함으로
눈물과 고난이 있는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피어나는 하나님의 기쁨을 믿음의 화원에 심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 원합니다.
1.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합니다.(3)
[고후2: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신 28:47] 말씀을 펴면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란 말씀을 만납니다.
풍족한데
모든 것이 풍족한데 말씀입니다.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 형편이 그러니까 이해한다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기쁨을 우리 안에 가득 담아 주시기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요15:12]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입니다.
사랑 위에 기쁨의 꽃이 피어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요15:13]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을 향해 들어갈 때, 기쁨이 넘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시던 예루살렘에 살기가 시퍼렇게 서 있었던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도 기뻐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득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 들어온 거짓 교사에 의해 뿌려진 가라지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이 전한 진리 위에 견고히 선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미쁘심을 예로 화답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로 받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을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교회입니다.
이런 복된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교회입니다.
바울 사도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했고,
그 교훈 위에 교회는 세웠는데
거짓 교사에 의해서 잘못된 가라지가 뿌려졌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교리를 뿌리 뽑고자 고린도 교회를 방문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에 대한 오해가 교회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여러 학자들은 이 적대자의 행위가 바울의 두 번째 고린도 여행 즉 가슴 아픈 방문과 관련하여 바울을 모욕하고 바울의 권위를 무시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Barrett, Lowery,Harris).
그는 바울의 복음 사역과 그의 인격과 사도적 권위를 흔드는 일에 앞장섰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도전은 그의 인격과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며 그가 전한 복음 위에 선 고린도 교회 전체에 대한 적대 행위였습니다.
그는 가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문하였지만 오히려 문제가 확대되었습니다.
바울에게 기쁨을 주어야 할 고린도 교인들이 도리어 근심을 끼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진정으로 근심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단순히 오해에서 비롯된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거짓 사도들에 현혹되어(11:1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에 대해 직접 해결하고 교회에 기쁨을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교회에 움트고 있는 가라지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기쁨으로 가득하게 하는 것은 이런 진리 회복입니다.
교회가 이런 진리 위에 온전히 설 때, 교회는 기쁨을 회복합니다.
진리가 교회를 기쁨으로 세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이 귀한 복음을 흔드는 가라지가 뿌려졌습니다.
몸된 교회에 암세포가 생겨났습니다.
몸 안에 있는 암세포를 떨쳐내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진리를 회복하는 것과 같겠습니다.
이 암세포를 극복하는 일은 기쁨의 회복입니다.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입니다.
고린도교회 전체를 살리는 사도 바울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바로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바울 사도는
고린도 방문을 강행하여 지금까지 저지른 성도들의 잘못을 엄단한다면 그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큰 근심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지 않고 계획을 변경하여 그들에게 회개(悔改)할 시간적 여유를 줌으로써 훗날 기쁨으로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줄 확신함이로라
바울이 소원하는 모든 기쁨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1:6-12).
지금은 관계가 많이 악화되어서 기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 가운데에 피어날 하나님의 기쁨을 바라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애정과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기쁨이 그들의 기쁨이 된다는 확신이 그의 중심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오르심으로 세우신 기쁨이 교회 곳곳에서 휘날리는 것을 만납니다.
[요한복음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사도행전 2: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사도행전 8: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도행전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2. 그분 사랑을 모두에게 나타냅시다.(7-8)
[고후2:7]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1] 큰 눌림과 걱정이 있습니다.
[고후2:4]
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보낸 것으로 알려진 '눈물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편지를 디도를 통해 고린도에 보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왜 눈물의 편지를 썼을까요?
고린도 교회에 뿌려진 거짓 교사들에 의해 뿌려진 가라지 때문입니다.
그 가라지를 뽑고자 했지만 오히려 바울 사도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가라지가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도에 대한 오해까지 겹쳤습니다.
큰 눌림과 걱정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사도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반(反)바울적 논리에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가 동조(同調)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깊은 심적 고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그 모든 눌림과 걱정을 뛰어넘을 수 있는 무엇이 있습니다.
2] 눌림 걱정을 이기는 길은 '넘치는 사랑'입니다.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2:4b]
바울 사도는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큰 눌림과 걱정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눈물의 편지를 쓴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를 남달리 사랑합니다.
넘치는 사랑을 합니다.
그런 사랑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요한일서 4:10-12]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3] 이 사랑을 나타냅시다.
[고후2:8]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하나님 백성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할 수 없는 대상에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문제 많은 자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을 더욱 애틋하게 사랑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넘치는 사랑이지요.
3. 그 사랑은 용서입니다.
[고후2:10-11]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1] "무슨 일에든지" 용서합니다.
2] "누구든지" 용서합니다.
3] 사탄에게 속지 않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순간에 그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용서를 우리 성도들이 누리기 원하십니다.
[누가복음 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예화]
크리스 캐리어는열 살 되던 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유괴를 당했다. 숲에 버려진 그가 발견되었을 때, 그의 머리는 피범벅에다가 눈은 멍들어 있었다. 그 일로 크리스는 한쪽 시력을 잃었고, 몸을 움직이는 운동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여론이 크리스가 살아남은 것을 ‘기적’이라고 떠들어 대자, 그는 자신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무슨 ‘기적’이냐며 분개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열세 살 되던 해에 그는, 부상이 훨씬 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악몽 같은 지난 사건을 저주가 아니라 은혜로 보기 시작했다. 또한 언제까지나 분노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적개심과 복수심 그리고 자기연민에서 돌아서기로 결심했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크리스를 유괴했던 사람이 밝혀졌다. 그는 데이빗 맥앨리스터란 사람으로, 크리스의 집에 고용되었다가 음주 문제로 해고되었었다. 크리스는 다음날 데이빗을 찾아갔다. 그는 이제 병들어 앙상하게 뼈만 남은 노인이 되어, 외롭게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는 그날, 데이빗을 용서했다.
크리스는 말한다. “용서를 해야 하는 데에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 우리가 복수를 선택했다면 우리의 삶은 분노로 타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앙갚음을 했다 하더라도 남는 것은 공허함뿐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또한 용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입니다. 이런 용서를 통해 저는 정말 삶의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다.”
* 「잃어버린 기술, 용서」/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용서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 해야만 하는 해독제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사는 가격보다 그 유지비가 훨씬 더 많이 드는 물건입니다.
인간 영혼에 가장 강력한 독소로 작용하여 자신을 괴롭히고 인간관계에 불화와 갈등을 조장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쓴뿌리는 정서의 독으로 주변을 오염시켜 스스로를 고립화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일생동안 과거의 끈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자신의 육체와 인격을 파괴할 뿐 아니라, 신체적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은 상처를 만들어 내고 분노와 적개심, 복수심을 증가할 뿐 아니라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용서하지 못하는 당사자입니다.(김필곤)
용서에는 먼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용서의 권고를 받았을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이 내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요?" "상처받은 건 나인데 왜 내가 용서하지요?"라고 묻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이지 상대방의 반응 때문이 아님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의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나의 권리를 포기하려는 것, 그것은 참된 지혜자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1.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합니다.(3)
2. 그분 사랑을 모두에게 나타냅시다.(7-8)
3. 그 사랑은 용서입니다.
[설교본문]
1.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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