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26 March 2015

약1:1-11 성도여, 이것을 붙들라!

[기]

저자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그리스도셨습니다.

1] 야고보서를 기록한 분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 생각됩니다.

[약1:1]에는 저자에 관한 소식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주후 44년 순교하여서 본서를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 보입니다. 야고보란 이름을 가진 다른 두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야고보서를 기록한 저자로 보기에는 좀 존재가 약합니다. 대신 여러 성경 말씀들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저자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의 내용이나 말씀의 권위로 보나, 그가 예루살렘 총회(행 15장) 지도자였던 신분과 영향력으로 보나, 예수님 동생 야고보이겠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요소가 많습니다.

야고보는 마 13:55에 기록된 예수님 동생들 명단 중 제일 먼저 나오는 예수님 바로 밑의 동생 야고보 말입니다.

당시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요 7:2-5).
그러나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를 찾아오셨어요. 그분의 부활을 체험한 후,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수십 년을 살았던 그가 예수님의 부활까지 체험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초대 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대 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있었음을 증명하게 하는 몇 성경 구절을 나눕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습니다.(고전 15:7)
2. 사도행전 12장, 사도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다가 천사를 통해 옥에서 나와 구원 받았을 때, 그는 교회에 가서 자기를 위해 기도한 사람들을 만난 다음에 자기가 나온 것을 야고보에게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3. 야고보는 초대교회 중요한 결정 기관이던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으로 나옵니다.(행 15:13)
4. 바울 사도가 회심한 이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초대 교회의 기둥(갈 2:9) 야고보를 만납니다.(갈 1:19)
3. 바울 사도는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야고보를 찾습니다.(행 21:18)
4. 유다서의 저자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간단히 소개합니다(유 1절). 야고보는 당시 초대교회에서 존재감이 있는 교회지도자였습니다.


2] 야고보서를 받아 보는 수신자는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본서의 수신자는 “열방에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입니다. 유대인으로 세계 각 지역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지요. 약 2:1,5:7,8은 이런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성경 말씀입니다.
이들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로, 베니게, 구브로 수리아 안디옥 등지로 흩어져 간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이었습니다(행 8:1;11:19).
이는 시험과 박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걸 보아 이해가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즉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던 야고보는 환난 중,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적인 교훈과 격려를 주기 위해 본서를 기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3] 야고보는 그런데 예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형님이라고 하지 않고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그리스도셨습니다.

다윗 왕은 자기는 왕이지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오." 죄를 지적하는 나단 앞에 엎드려 회개합니다.

나단을 선지자로 존중합니다.

비엔나 박물관에 루벤의 작품이 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감독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주후 39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데살로니가 시민 1500명을 학살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밀라노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오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막았습니다.

“ 황제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없습니다.”

막아선 암브로시우스에게 황제가 말했습니다.

“다윗 왕도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성전에 나갔잖아요?”

“다윗 왕을 빙자하십니까? 그러면 다윗 왕의 회개를 본 받으십시오. 다윗 왕은 회개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소.”하고 회개했습니다.

그 모습을 루벤은 그려서 남겼습니다.

만민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야 할 죄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는 예수님의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베드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입니다."(초대교인들)

이런 고백이 넘치는 우리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승]

시험 중에도, 온전한 기쁨과 인내를 이룹시다.

[야고보서1:2-4]

○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 야고보서를 받아 읽는 수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흩어진 성도들입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현실 속에서 만나는 시험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이스'는 외부로부터 야기되는 시험입니다.
내부로부터 오는 사람의 생각이나, 죄의 '유혹'(temptation)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시련'(trial)입니다.
TEST의 성격이 강합니다.

시험을 만난다는 말은 시련 '한 가운데 떨어진다'의 말입니다.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현실에 끊임없이 직면하게 됩니다(눅 10:30).
한번 온 뒤에 다시는 안 오는 그런 도이 아닙니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가는 듯하면 다시 밀려오는 것이 시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부로부터 오는 '시련'을 낙심하지 말고 기쁘게 여기라말씀하십니다.

마치 사람들이 파도타기를 기쁘게 여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파도가 몰려올 때,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사람에게 파도가 밀려오면 유쾌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기를 잡는데도, 여행을 하는 데도, 밀려오는 파도가 즐거울 수 없지요.
그런데 파도타기를 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파도가 참 반갑고 기쁠 것입니다.
그 파도타기를 통해서 자신이 낙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밀려오는 파도를 비유하자면 밀려오는 파도와 같습니다.

감사한 것은 감당할 시험밖에 주님은 주시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시험을 기쁘게 여기면,
자신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3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2] 시험을 온전한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은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잘 정제된 금과 같은 '믿음의 표준'이 시련을 거쳐 이루어집니다.
'시험하여서 인정되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 시험은 정말 버거웠습니다.
그러나 욥은 동방에서 하나님께서 손꼽는 믿음의 거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감당할 시험만 주셨습니다.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여기서 단련은 시험입니다. 시련입니다.

이런 시련의 과정을 거칠 때, 얼마나 귀한 열매가 주어지는 것을 깨달을 수 있고,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시련을 거친 '인내'가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압니다.

요셉에게 있었던 시련들이 요셉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인내를 열매 맺게 하였는지요?
얼마나 복된 것인지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까?
온전히 기쁘게 여깁시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딥시다.
그러면 반드시 정금은 나옵니다.
이는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로 온전하게 열매맺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 5:48).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