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3 March 2015

요1:1-4 소중한 인생을 이 일에 소모하는 이유

요1: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The sam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 thing made that was made.)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들어가는 말]


동창이 밝기 전에
주섬주섬 점퍼를 걸쳐 입고
새벽공기를 가르며
덜덜거리는 승합차에 시동을 걸고 올라탄다.

새벽시장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이들
작업용 면장갑을 하나씩 나눠주면서
오늘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원한다.

나는 예수를 판다.
불신자들의 삶의 현장에서
면장갑을 나눠주면서 예수를 끼워 판다.
값은 무료이다.

저들이 예수만 사가지고 집으로 간다면
내 일생 다해 거칠어진 저들의 손에
붉은 페인트 칠해진 노동 장갑을 끼워주면서
예수와 함께 행복을 끼워 판다.


나는 날마다 예수를 판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약도 판다.
구약과 신약을 판다.
붉은 칠을 한 누런 목장갑에 끼워서
예수를 판다. 내 청춘도 함께


    김성구님이 쓴 작품인데 그 전하는 마음이 아름다워서 나눕니다. [중간에 덕이 되어보이지 않는 부분은 제가 삭제하였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작품의 작자는 왜 예수님을 파는 일에 그의 소중한 인생(물질과 시간)을 소모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새벽부터 자원하여 그 고통을 감수하는 것일까요?


    1. 태초부터 계신 말씀(로고스) 때문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태초에 계신 말씀을 로고스라 합니다.
이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 로고스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로고스를 말씀으로 번역을 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the Word was God"이라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어떻게 말씀이 곧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일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말하는 것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고 하지요.
그래요 꼼꼼이 생각해보면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 자체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the Word)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많은 것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더구나 이 말씀을 어떻게 보느냐?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 중요한 주제입니다.
긍정적으로 받느냐, 부정적으로 거부하느냐에 따라 인생 전체가 달라집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묻는 무덤에 대한 생각을 좀 나누어보겠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저는 무덤에 친숙한 편입니다.
어린 시절, 앞 동산은 우리들의 친밀한 놀이터였습니다. 그 앞 동산에 무덤들이 군데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그 앞 동산에서 노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동산에는 잔디가 덮여 있었고, 아이들이 놀기에 적합한 아기자기한 구릉이 무덤과 잘 어울려 있었습니다.
무덤 속에 죽은 자의 시신이 누워 있다는 생각을 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 무덤에 오르내리며 미끄럼도 타고 뒹굴기도 하였습니다.
무덤에 아이들이 올라가면 따라 올라가 끌어내리기 놀이도 하고,
눈이 오면 무덤은 미끄럼틀로 변했습니다.
밤이면 무덤 위에 누워 하늘에 총총한 별을 보며 친구들과 이야기도 하고 놀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럴리는 없지만, 만일 무덤 속에 인격체가 있었다면 우리들로 인하여 많이 행복하였을 것입니다.
무덤이 있는 동산은 우리의 좋은 자연이었고 우리는 자연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지금도 저는 가끔 공동묘지를 찾습니다. 캐나다의 공동묘지는 예쁜 꽃들과 휴식 시설을 잘 만들어 놓아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에는 매우 적합한 공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 가서 산보도 하고, 잔디나 쾌적한 공간에 누워 책을 보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귀신과 무슨 친분관계가 있다거나 영통한다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이 세상을 한 발자국 떨어져 생각해 보고 싶어서일 뿐입니다.

    이곳 서양 사람들 또한 무덤 친화적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무덤이 교회와 함께 있습니다.
유럽에 가보니까 교회 안에 무덤이 있습니다.
라이프찌히 교회(St. Nikolas Kirche로 기억됨)를 방문했을 때, 바하의 무덤이 교회 강단 밑에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는 무덤이 그렇게 유쾌해 보이지 않은 것을 봅니다. 무덤을 무섭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토론토 서머나 교회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 교회 장소를 알아보는 중에 공동묘지와 함께 있는 교회를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분이 반대를 하던 생각이 납니다.
한국 사람들의 정서상 공동묘지와 함께 있는 교회는 좋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공동묘지에 대한 관점만 해도 이렇게 많이 다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어떻게 보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십니까?

오늘 말씀은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눅5:4-6)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베드로는 이 놀라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시기에 이런 놀라운 사건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8:2-3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십니까?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십니다.

    마8:8에는 하인의 병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온 백부장의 고백이 나옵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정말 이 부탁대로 예수님은 말씀만 하셨고, 그 하인은 그 말씀이 주어진 바로 그 시간에 병이 나았습니다.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의 주님으로 믿습니다. 용서의 주님으로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과 사람을 넉넉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문제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한 단점을 갖는 경우가 있음을 시인합니다.
    예수님을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이나 세상에  대하여 좀 엄격하고 법도를 존중하며 사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나 타인에 대하여 좀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어서 넉넉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지켜주시는 보호자로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치료하시는 의사로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이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마스터 키를 제공하여 줍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바로 이해하게 하는 해설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이와 같이 말씀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기적들은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태초부터 하나님'으로 믿게해 줍니다. 이것을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 성숙을 이루게 하여 줍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 앞에 놓인 의식주에 인생이 달린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성패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으로 지어진 우주를 가리켜 코스모스라 부릅니다. 질서라는 의미입니다. 영적인 혼돈과 공허로 허물어진 인간의 도덕과 윤리는 물질로 회복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바로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조하신 분만이 창조하신 우주를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성탄절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우리 가운데 오신 날입니다.
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우리 가운데 오셨을까요?
우리 가운데 재창조를 하시기 위함입니다.
죄로 파괴된 세계를 재창조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인간이 잃어버린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말씀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 놀라운 하나님의 일이 나타납니다.



    2.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 thing made that was made.)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만물을 창조하셨습니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All things were made by him!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뭍이 드러나라 하면 뭍이 드러났습니다. 땅은 식물을 내라 말씀하시면 땅이 식물을 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저 빛나는 태양이 말씀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습니다.
    지난 밤의 그 둥근 보름달이  말씀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습니다.
    엊그제 내리던 그 현란한 눈이  말씀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신묘막측한 눈동자가  말씀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습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without him was not any thing made that was made.)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말씀의 비밀을 부인할 때 우리는 눈 앞에 있는 것에만 몰두하다 멸망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우리 인생의 모습을 끈끈이에 붙은 쥐가 미끼인 쇠고기를 탐하며 뜯어먹는 것에 비유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비참한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인생을 살라고 말씀으로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침대, 집, 이성, 지식, 교사, 교회건물 등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단잠, 행복한 가정, 신실한 부부, 인격, 도덕과 윤리, 신앙 등)을 살 수는 없습니다.
말씀으로 살 때 중요한 삶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카오스만이 있을 뿐입니다.
단잠이 없는 침대,
행복이 없는 가정,
신실함이 없는 지식,
도덕과 윤리가 없는 교사,
신앙이 없는 교회
이런 모든 것이 비극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축복만 있습니다.
단잠이 있는 침대,
행복이 있는 가정,
신실함이 있는 지식,
도덕과 윤리가 있는 교사,
신앙이 있는 교회
이런 모든 것이 행복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까닭은 바로 죄로 타락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하나님의 말씀대로 재창조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소중히 생각하고 또 사랑을 갈망합니다.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이시고 사랑을 창조하신 분 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용서가 어디에 있습니까? 용서를 창조하신 분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누가 심판할 수 있습니까? 창조하셨기 때문에 정확히 모든 것을 아신 분이 평가하고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치료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치료하고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누리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바로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분 안에 우리가 누리는 가치있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3.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사람들의 빛이신 생명,
하나님 안에 계신 생명,
이 생명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작아지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지셔서 마침내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신 형태로 오셨습니다"(필립 얀시)

그 안에 생명(life)이 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에 우리는 믿음을 통해 접목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안에 생명(life)이 있는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돈을 모으는 일에 올인을 합니다.
그러나 돈을 모아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돈 안에는 생명(life)이 없다고!

    미국에 이주한 많은 한국인들이 돈 안에서 생명을 추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흑인들의 폭동 때 돈 안에 생명(life)이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흑인들의 동네에서 흑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면서도 흑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돈만 벌다가 한국인들이 흑인들의 폭동 때 집중적인 약탈의 표적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작은 자들을 상대로 돈을 벌면서 자신들이 너무 커져 있다가 당한 불행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돈 안에는 생명(life)이 없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In him was life)

    부부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 안에도 생명(life)은 없습니다.
사마리아여인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생명life)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남편만 잘 만나면 life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남편이 다섯이 있었을 지라도, 그리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나 살고 있었을지라도 그 안에 생명(life)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그녀는 생명을 가진 자로 변했습니다.
왜요? 그분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원하십니까? life를 가지고 싶으세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접목될 때 생명이 있습니다.

    어떤 왕이 시골을 순찰하던 중 한 처녀를 보고 한 눈에 반했습니다. 왕은 신하에게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는 완곡히 반대하였습니다. 신분상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그 처녀를 데려올 수도 그 처녀에게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관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하였습니다.(키엘게골의 왕과 시골처녀의 사랑)

    하나님 나라의 말씀, 왕이 우리에게 반하여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다 버리고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입니다.
    그러므로 창조하신 분의 말씀은 피조물인 우리 인생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메뉴얼입니다. 지침서요 설명서란 말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메뉴얼 대로 살면, 제대로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출발점이요 도착점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이 말씀을 심령에 담아두고 늘 되새김을 합니다.
    어릴 때 얘기 하나 더 합니다. 소를 끌고 꼴을 먹이러 갑니다. 놀라운 것은 소가 한 시도 쉬지 않고 풀을 뜯어먹습니다. 소의 꼴을 먹여본 사람은 압니다. 배가 곧 터질 것 같은데요. 그래도 계속 풀을 뜯어 먹습니다. 만삭이 된 아기를 가진 엄마의 배처럼 배가 부른데도 불구하고 계속 꼴을 뜯어 먹습니다.
그런 다음에 소가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되새김 질을 합니다. 소는 쉬는 시간에도 계속 되새김질을 합니다. 첫번 째 위에 뜯은 꼴을 담아두었다가 되새김질을 해서 둘째 위에 담습니다. 마지막은 그 위에서 꼴을 꺼내어 씹은 다음 세번 째 위에 삼킵니다.
이렇게 하여 소는 힘을 얻고 그 힘든 일을 묵묵히 감당하지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처럼 쉬임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다음 그 말씀을 꺼내어 늘 묵상을 하여야 합니다.
한 번 두 번 거듭 묵상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인 건강이 유지됩니다.


    1965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썰물처럼 교회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때 그들은 말씀 안에서 소망을 접었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1990년도 이후 다시 밀물처럼 교회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동안 물질문명을 섬기던 미국인들은 엄습하는 세상의 악한 파도로부터 자신과 자녀를 보호할 방도가 그들에겐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자신과 자녀를 보호해 줄 보호자를 찾고 있습니다. 마약과 섹스 그리고 폭력 등의 거대한 악으로부터 학교와 정부가 자식들을 더 이상 보호해 줄 수 없음을 알게 된 부모들이 다시 찾아 나선 곳이 교회입니다."(브라우닝 박사; 시카고대교수)
    생명( life)을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을 만납니다.



[마무리하는 말]

안병한 목사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한 젊은이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연기 속으로 영혼은 떠났습니다.
불속에서 끄집어낸 그의 몸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를 보며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그를 끌고 높은 곳으로 갔습니다.
아, 그곳은 그가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지옥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런 곳에 왔단 말입니까?
그를 끌고 온 이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늘 나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따라다니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곳에서 살 길이 있는 줄 알고 헤매고 있지 않습니까?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접목되세요.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내릴 때 생명이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이 놀라운 생명의 말씀을 믿음으로 그 이름을 힘입어생명을 얻고 그 생명에 접목된 인생,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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