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들어가는 말]
의심은 다가올 미래를 두렵게 하지만,
믿음은 미래를 희망차게 합니다.
의심은 관계를 단절시키지만,
믿음은 관계를 열어줍니다.
사라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미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죽은 자와 방불한 상황 속에서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수많은 믿음의 후손을 키워낸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 잉태할 힘을 얻었습니다.
1] 잉태할 힘이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굉장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순교하기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기까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노아는 심판에서 구원을 받기까지 120년간 방주를 짓는 일에 순종(말씀 준행)함으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사랑하는 독자 이삭(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분들은 범인이 따라갈 수 없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보입니다. 우리와는 유전인자가 다른(?) 분들로 생각됩니다.
사라는 위 믿음의 선진들과는 믿음의 성격이 달라 보입니다.
사라 역시, 아브라함과 함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의 훌륭한 동역자임도 명백하죠.
그러나 믿음의 성격이 좀 달라요.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때문인지 모릅니다.
[창18:9-14]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천사가 이삭이 사라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 알려주었을 때에 웃습니다.
그만큼 믿기 힘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라는 자연인이 잉태할 수 있는 한계를 수십 년 전에 넘겼습니다.
이젠 덤으로 사는 나이었습니다.
잉태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이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90세에 아들을 낳을 수 있겠어요.
너무 비이성적인 약속이지요.
믿을 수 없는 약속이지요.
사라에게는 잉태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웃는 것입니다.
믿겨지지 않는 약속을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잉태할 힘이 없는데
90세된 자기 몸에서 어떻게 아이가 태어난다고 하시니 그 약속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흐트러진 모습이랄까
완전해 보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으니 어떻합니까?
[성경의 다른 경우들]
히스기야 왕에게도 그런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자신의 딱한 형편을 그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37:3]
.....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어요.
해산할 힘이 없으니 어떻하면 좋아요?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그는 사람을 보내 기도부탁을 합니다.
[이사야 37:3]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의 상전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로 말미암아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하니라
[적용]
우리들의 현실을 돌아보면, 정말 딱한 형편이 많아요.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이런 딱한 현실로 정체현상을 빚고 있습니다.
건강문제
경제문제
가정문제
관계문제
문제 문제 문제
잉태할 힘이 없어서 우리는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요.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백성의 기도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잉태할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그 일을 행하신 것이지요.
[예화]
프랑스인 샤르니가 나폴레옹 황제에게 밉게 보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는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잊혀졌다. 처음에는 자주 면회를 오던 가족들도 점점 멀어졌다. 그는 벽에 이렇게 적었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소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에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싹 하나가 돋아났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잎사귀에 부어주었다. 마침내 꽃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그는 먼저 썼던 글을 지우고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조세핀 왕비의 귀에 들어갔다.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왕비는 황제에게 재고를 건의했고, 샤르니는 석방되었다.
2] 하나님께서 사라로 웃게 하셨습니다.
아론의 마른 지팡이에 싹을 틔우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잉태할 힘을 주셨습니다.
사라를 정말 웃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로 웃게 하시니’
사라는 이삭을 안고 웃습니다.
와, 하나님께서는 정말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세요.
그리고 보면, 사라에게만 웃게 하신 것이 아니더라고요.
믿음의 선진들이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어요.
그리고 웃었습니다.
엘리사벳도 나이 늙어 수태하지 못한다 하였지만 늙어서 아이를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잉태할 힘을 주셨어요.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노래합니다.
[눅1:41b-45]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 이르되 .....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한나에게도 하나님께서 잉태할 힘을 주셨습니다.
한나는 잉태할 힘을 얻고 감격하여 노래합니다.
[삼상2:1]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지난 수요일 시편 126편 강해를 마치고 우리로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글로 적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큰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로 웃게 하신다.
노래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애굽에서 자유롭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웃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홍해바다를 여심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춤추며 노래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웃게 하셨다.
이삭이라 이름하고 온 마을 사람들로 더불어 웃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큰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은 다윗으로 춤추게 하셨다.
그의 아내 미갈조차 이해할 수 없는 자유 춤을 두리둥실 추게 하셨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녀는 웃을 수 없었다.
그 뜨거운 광야의 정오
우물가에서 그녀는 큰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녀는 한 달음에 마을로 달려갔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고한 그분을 와 보라”
그녀를 얽매고 있던 모든 줄은 끊어진 채
그녀는 춤추고 있었다.
수가성 여인으로 웃게 하시는 예수님
그분 곁에 마을 사람들은 머물고 싶었다.
아브라함으로 웃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웃게 하신다.
이스라엘로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찬양하게 하신다.
다윗으로 춤추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덩실덩실 춤추게 하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2.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습니다.
[히11:11b]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90세가 다 된 할머니 사라가 가진 의구심은 분명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그런 믿음과 다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라에게는 그런 의구심을 내면에서 다 지울 수는 없지만, 한 가지 귀중한 보석 같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약속하신 분이 미쁘신 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라의 믿음 근거는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미쁘심을 아는 데 있습니다.
사라는 지금 손에 쥐어진 것이 없습니다.
아직 빈손입니다.
그렇지만 사라는 ‘약속하신 분이 미쁘신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마치 두 손에 보화를 가득 쥐고 있는 것처럼 삽니다.
만일 ‘약속하신 분이 미쁘신 줄’을 신뢰할 수 없다면, 사라의 꿈은 물거품이요, 신기루입니다.
그래서 사라에게 그 믿음이라는 것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약속하신 분이 미쁘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분명 사라는 자신 안에 부끄러운 연약한 믿음이 있습니다.
내년 이맘 때 주실 자녀에 대한 의심스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이 열매를 맺는 까닭은 ‘약속하신 분이 미쁘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약속의 위대성 때문입니다.
[예화]
존 맥스웰 목사가 오하이오에서 목회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냥꾼으로 유명한 교우와 함께 100리쯤 쭉 뻗은 고속도로를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교우의 특별한 면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기 다람쥐가 있네요.”
그러나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저기를 보십시오. 오리가 두 마리나 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여전히 보지 못했습니다.
“목사님, 사슴을 보십시오.”
“토끼가 지나갔습니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사냥꾼 교우는 십여 마리의 짐승을 봤습니다. 그러나 같은 길을 같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사냥꾼은 쉽게 보는 것을 맥스웰 목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직 고속도로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약속은 그 내용보다 누구의 약속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현란한 약속이라도 그 약속을 한 사람이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그 약속은 무가치합니다.
그 약속이 좀 황당해 보이고, 이성을 초월한 부분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하신 약속일 경우는 신뢰해야 합니다.
[예화]
알렉산더 왕에게 아주 충성스러운 의사가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의사를 시기해서 어떻게 해서든 그 의사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왕이 마시는 컵에 그 의사가 독약을 넣을것이라는 거짓 편지를 써서 왕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은 왕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편지를 읽어주면서 자신이 의사를 믿고 있다는 표시로 컵에 들어 있는 물을 단숨에 마셨습니다. 의사에 대한 알렉산더 왕의 믿음은 순수하고 전폭적이었습니다.
미쁘신 하나님!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믿음을 수표와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그 수표를 발행한 분이 확실할 때, 그 수표는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수표를 발행한 분이 확실할 때 그 수표 만든 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 수표를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금이나 현물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현금을 들고 다니는 것보다 편리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발행하신 수표와 같습니다.
사라는 받은 약속을 들을 때, 조금 의심스럽고 흔들립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사라는 ‘약속하신 분이 미쁘신 줄’을 알지요.
그래서 그녀가 간직한 하나님의 약속은 위대하고 진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약속하신 분의 신실함이 그녀의 생애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결국 사라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의 생애에서 이루어져가는 것을 보고 삽니다.
약속하신 분이 미쁘신 줄’을 알기에 미쁘신 하나님께서 발행한 약속까지 그대로 믿고 사용합니다.
이런 믿음은 동역자 아브라함에게서 일상적으로 확인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 약속은 대단히 불확실했습니다. 땅을 주시겠다고 하면서 어디에 있는 어떤 땅을 주실 것인지도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수많은 믿음의 후손을 생육하였습니다.
[히11:12]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창조하신 후 맡기신 사명 중 한 가지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한 믿음의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창1:26-28]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가인의 후손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아벨은 아벨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예배자로서 성공했습니다.
아벨같은 사명인이 필요했습니다.
셋을 세우신 이유입니다.
셋의 자손을 통해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에녹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고 땅에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셋의 자손들이 무너질 때 세상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우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가족을 남기시고 또 그들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사명을 감당하기 원하셨습니다.
노아는 노아의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복종했기에 방주를 지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고 자기 이름을 내려합니다.
또한 우상에 떨어진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사라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라는 다른 신앙의 용사들이 그런 것처럼 세상의 영웅적 신앙인이 아닙니다.
사라는 윤리도덕의 롤모델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약속하신 분이 미쁘신 줄’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습니다.
아벨을 보며, 노아를 보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면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꿈은 너무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꿈이 이루어지기를 길이 참으시며 기다리심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뜻을 삶의 본질로 살았습니다.
삶의 본질로 알고, 믿음으로 반응하였습니다.
특별한 유전인자를 가진 분들이 아닙니다.
지능이 빼어난 분들이 아닙니다.
재능이 특별하게 있는 분들이 아닙니다.
힘과 능력이 다른 누구보다 뛰어나지 않습니다.
인간 그 자체로서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분들입니다.
특기할 점이 있다면, 약속하신 하나님이 미쁘신 줄’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습니다.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살았습니다.
사라는 또한 자신의 형편을 생각할 때 죽은 자와 방불했습니다.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키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자신과 무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거듭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15:4-6]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러나 사라는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만인가?
아브라함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원하시는가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몸종 하갈은(?)
그래서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줍니다.
자신은 몸이 늙었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이루셔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창17:15-16]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이스마엘이 아니다!
하나님 약속은 하나님 말씀대로 옵니다.
하나님 약속은 인간의 계획대로 오지 않습니다.
사라는 약속하신 분이 미쁘신 줄’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 결과!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습니다.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그 놀라우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붙들린바 되었을 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귀한 구원의 역사에 쓰임 받았습니다.
[예화]
한 믿음 좋은 처녀가 결혼을 하고 남편의 고향인 전주로 내려가 가정을 꾸몄습니다. 시어머니는 불교에 독실한 보살이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는 처음에는 몰래 교회를 나갔는데 시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10년만 참자. 그 후에는 어머니도 수그러질 것이니 그 때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속셈은 '10년쯤 지나면 신앙을 아주 포기하겠지'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는데 부인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부인은 몸만 교회에 안 나갈 뿐 구역장에게 부탁하여 매주 주보를 받아 가지고 혼자 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부인은 약방을 경영했는데, 구역장을 통하여 십일조를 꼬박꼬박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얼마 후 자녀를 삼남매 낳았는데 그 아이들을 교회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날 행사가 있을 때는 꼭 목사님이나 선생님께 부탁을 드려서 삼남매를 순서에 넣게 하고는 항상 시어머니를 가게 하였습니다. 시어머니는 처음에는 교회가 못마땅해 안 가려고 했지만, 그러면 부인은 "저는 바빠 서 못 가니 꼭 어머니가 가셔야지요. 아무도 안 가면 아이들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라고 하면서 권면하였습니다. 손자 손녀를 사랑하는 할머니는 하는 수 없이 교회에 갔습니다. 처음에는 뒷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손자 손녀의 재롱에 점점 앞으로 나가 박수도 치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긴 세월이 흘러 10년째 되는 날 부인은 남편에게 정색을 하며 물었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압니까?" "결혼기념일? 당신 생일?" "오늘이 바로 당신이 약속한 10년째 되는 날이에요. 그러니 이제 허락하세요. 이제는 교회에 나가겠어요. 그 동안 나는 혼자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 생활을 열심히 했어요."
남편이 깜짝 놀랐습니다.
'10년 동안 신앙 생활을 안 했으니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남편은 어머니 방에 가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며 어떻게 해야 하지요 물으니 어머니 하는 말씀:
"얘! 한 사람이 예수 믿는데도 이렇게 집안이 잘 되는데 이왕이면 우리 식구 다 예수 믿고 잘살아 보자꾸나"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소원을 품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시고 영광 받으시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이루시려고 능력 있는 자를 찾으시는 능력 부족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이루시려고 지혜 있는 자를 찾으시는 지혜 부족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이루시려고 재물 있는 자만 찾으시는 재물 부족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재물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이루시려고 권세 있는 자를 찾으시는 능력 부족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권세를 주십니다.
무능하지만, 지혜가 심히 부족하지만, 가난하고 병들고 낮고 천하지만 겸손하여 하나님의 크심을 알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자, 능력을 의지하는 자, 하나님의 부요로 자기 부요 삼을 자, 하나님의 권세를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지능을 주셔서 능히 감당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무리하는 말]
히브리서 오늘 본문은 말하기를 "사라 자신도 믿음으로" 라고 합니다.
사라가 이 믿음 가진 것은 아주 많은 갈등과 회의를 거친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
사라의 마음속에 있는 죄성이 불신의 회의를 일으켰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벽을 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걸음을 걷다가 그만 중도에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회의,
등등 여러 가지로 회의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이를 극복했습니다.
갈대처럼 흔들렸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사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쁘신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천국이 있다는 것도, 영생의 구원을 얻었다는 것도,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의심이 일어나고 믿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처럼 미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잉태하는 을 주십니다.
18:4에서 하나님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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