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원에 한 나그네가 벤치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빗질에 먼지가 나는데도 벤치를 떠날 줄 몰랐습니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 공원 청소부가 물었습니다.
'당신 누구요?'
'글쎄요, 나도 내가 누군지 몰라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디서 왔소?'
'그것도 몰라 생각 중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갈거요?'
'그것을 알면 내가 이렇게 앉아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로 유명한 데카르트였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대표적 중/근세 철학자로 알려진 르네 데카르트(1596)가 존재를 의심하고 또 생각해도 내가 누군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 고심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면 철학자만 하는 고민인가 하지만, 사실은 모든 인생이 고민하는 주제입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입에 담고 살았던 노래 하숙생도 그런 주제를 담고 있어요.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지’
그러나 오늘 말씀은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버리고 믿음으로 사는 성도에게 내가 누군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명확히 알려 주십니다.
1.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정체성)
[히11:13]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 외국인과 나그네는 목적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 정체성은 나그네요 외국인입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본향(本鄕)이 아닙니다.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존재하지만 그들의 목적지는 본향인 하늘나라였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나그네(파레피데모스)로 ‘제한된 기한 동안 일시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이라는 것도 늘 임시적입니다. 늘 바뀌는 사람, 인심,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는 나그네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목적지가 뚜렸합니다.
방랑자가 아닙니다. 갈 곳이 없이 이곳저곳을 헤매는 사람이 아닙니다.
외국인(크세노이)이란 국적 없이 임시로 머무는 낮선 사람입니다.
또 본국 사람들과는 언어, 풍속, 생활양식이 달라서 이방시 되고 끝까지 이질적으로 취급되고 멸시받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까지 정 권사님이 우리 곁에 계셨는데요.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불편해 하셨는지 모릅니다. 아무런 법적 보장이나 사회적 보장을 받지 못합니다.
편찮으셔도 병원에 가는 것을 힘들어 하세요. 한국에 오가는 데도 신분상의 제한을 받습니다.
요즈음도 이토록 불편하니, 더욱이 고대 사회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에 대하여 온갖 불이익이 있었습니다.
모욕과 경멸, 수치와 감금, 약탈과 추방 등의 갖은 서러움들이 가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 외국에서 목적을 이루고 본국에 돌아가기 위함입니다.
2] 믿음의 선진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 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입니다.”
야곱은 바로 왕을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 47:9)
자신의 정체성을 “나그네”로 표현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온 조상들의 삶을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이라 표현합니다.
그들은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안주하지 않고 임시적으로 살았습니다.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나그네 생활로 고난까지도 기꺼이 받았습니다.
"내 나그네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인데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길 원하시는 복의 근원이 되는 사명,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길 원하는 사명, 생육하고 충만하여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득하게 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3]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 이런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제6대 대통령을 지냈던 존 애덤스는 늘그막에 종종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공원을 산책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를 잘 아는 어떤 사람이 인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예, 건강합니다. 그런데 집이 다 낡아서 지붕은 파손되고 벽은 떨어지고 바람에 흔들려서 받침대까지 세웠습니다. 너무나 집이 낡아 곧 이사할까 합니다.”
“아니 각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집이 낡아서 이사를 가야 하시다니요?” “날 좀 보시오. 대머리가 다 된 자기 머리를 가리킵니다. 아예 바람에 흔들려 쓰러질 지경이라 이렇게 지팡이에 겨우 의지하고 있지 않소? 받침대로 지탱하는 낡은 집이니 곧 이사 가야지.”
나그네요 외국인인 것입니다.
4] 나그네와 외국인은 삶의 자세가 남달라야 합니다.
나그네와 외국인의 삶의 자세는 여행자나 관광자 다릅니다. 그저 즐기고 구경하며 돈을 쓰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하나님의 도성'에서 세상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죄와 세상을 향해서 싸워야 할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고전15:19)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영원한 도성, 더 나은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이런 정체성이 결코 괴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향을 향해 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 54절]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나그네와 외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살았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전서1장 17절]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지 않습니까?
이 땅은 내 집이 아닌 것을 깨달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이번에 박영덕 목사님이 윈저로 이사를 하셨는데, 너무 많은 것을 버리시더라구요. 정말 필요한 몇 가지만 챙겨가십니다.
이렇게 우리도 이 세상을 두고 갈 날이 옵니다.
남다른 삶의 자세와 사는 목적을 분명히 하는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 더 나은 본향을 찾아 가는 믿음입니다.
[히11:15-16]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독일의 생의 철학의 시조로 알려진 쇼펜하우어(1788년 생)가 공원의자에 혼자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느덧 해가 뉘였뉘였 기울고 공원은 텅 비어갔습니다.
공원을 청소하던 공원지기가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말합니다.
“여보세요! 당신은 어디에서 왔길래 해가 지는데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로 그것이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오.”
데카르트와 쇼펜아우어 세월은 200년이 흘렀어도, 나라는 불란서에세 독일로 바뀌었어도 동일한 질문을 놓고 고민하는 철학자를 봅니다.
1] 나그네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소기의 사역을 마치면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떠납니다.
나그네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 수행을 위해 자기 고향이나 집을 떠나 있는 사람이며, 그 목적 수행이 끝나면 사명을 주신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히11:14]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성도를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말하는 까닭은 이 땅에서 성도는 본향을 찾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상의 고향을 자신들의 본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 쉽게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키려고 할 때도 가나안 땅의 여인들 중에서 신부감을 택하지 말고 자신의 고향, 즉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신부감을 구해오도록 그의 종에게 당부하면서도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창 24:6)고 하였습니다.
야곱 역시 메소포타미아를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창 30:25).
야곱이 라반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그의 고향과 본토는 메소포타미아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묻은 가나안 땅, 아브라함이 장사된 땅이었습니다. (창 23:19;25:9-10).
이삭이나(창 35:27-29) 야곱도(창 49:29-33;50:13) 가나안에서 장사되었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고향을 찾았다면 자신들이 태어난 지상의 고향으로 충분히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본향은 어디였습니까?
그들의 본향은 하늘나라였습니다. 그 때문에 지상의 고향을 찾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고향을 찾고자 했습니다.
'유럽사상사'라는 책을 쓴 볼케나우는 죽음에 대한 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다음 세 가지로 크게 나누었습니다.
그 하나가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는 죽음 부정(death-denial) 문명입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미이라로 만들어 피라미드 속에 두고 지금도 살고 있다고 믿는 문명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죽으면 끝장이라는 죽음 수용(death-acceptance) 문명입니다.
그 대표적 경우가 희랍 문명으로서 죽음은 모든 곳의 끝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죽음과 삶을 연결하는 문명입니다. 우리의 전통 문화는 죽음과 삶을 연결하는 문화입니다. 죽은 조상과 살아있는 내가 추석이라는 연결 고리를 통해 서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고향도 찾아가고요.
그런데 성경은 비교할 수 없이 더 나은 본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1:16b]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마25:34]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고후5:1)이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입니다.
1) 우리 성도의 본향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우리 앞에 두신 곳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토마스 월프(Thomas Wolfe)의 작품 가운데 다시 갈 수 없는 고향이 있습니다.
어려서 고향을 떠나 크게 성공한 주인공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어느 날 그의 고향 애쉬빌(Asheville)을 찾아가지만 실망합니다. 고향과 친구들이 너무나 변해 있었고 옛날의 그 고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이렇게 독백합니다. "이제 나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순 없다. 길이 있다면 나는 앞으로 가야 한다. 뒤돌아가는 길은 영원히 사라졌다"
우리의 고향은 앞에 있지 뒤에 있지 않습니다.
3) 우리 성도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우리 성도의 본향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4) 영원한 곳입니다.
5) 거룩한 곳입니다.
6)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곳입니다.
우리 성도는 영원히 함께 살려고 더 좋은 고향을 향해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히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의 조상들이 찾았던 고향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곳, 즉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이 '성'은 '장막'(9절)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처소입니다.
그 하늘에 있는 고향을 '사모‘하였습니다. '열렬히 갈망하였습니다'.
간절히 하늘나라를 갈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망에 대하여 성을 예비하심으로 반응하셨습니다.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 15, 1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하늘나라에 '한 성'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본향을 향해 나아가야 할 줄 압니다.
오스트리아의 한 공작이 여름 축제를 주최하였답니다. 그런데 그는 축제 기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지친 음악가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계속 그 곳에 붙잡아 두었다고 합니다. 그 때 유명한 고전 음악가인 '죠셉 하이든'이 집으로 가고 싶어하는 그 음악가들을 동정하여 특이한 교향곡을 작곡했습니다. 그 교향곡은 곡이 진행됨에 따라 연주되는 악기의 수가 점점 줄어들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자신의 파트가 끝나면 악기를 가지고 무대를 떠나는 곡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향곡이 끝날 즈음엔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단지 2명의 음악가들만이 남아서 아름다운 이중주를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이든의 교향곡 제45번인 "고별교향곡"입니다. 공작은 그 곡을 듣고 작곡의 의미를 알아차리게 되어 고용했던 음악가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또 다른 고별 교향곡의 연주자들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우리를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역할이 끝날 때마다 본향으로 불러 가실 것입니다.
"수구초심(首邱初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 다는 뜻으로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동물 중에 귀소본능을 가진 동물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연어입니다. 연어가 넓은 바다에 나가 살다가 산란기가 되면 자기 고향을 찾아갑니다. 연어는 제가 태어난 곳에서 넓은 바다로 나가 3년을 지냅니다. 바다에서 10Kg 되는 큰 물고기로 자란 연어는 다시 제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때로는 10m 내지 20m 이상 되는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봅니다.
성공하지 못하고 떨어지면 또 거슬러 올라갑니다. 낚시꾼들의 위험, 곰들의 위험이 있어도, 연어는 일심으로 고향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알을 낳고 거기서 죽습니다.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 믿음, 야곱 등의 삶을 마치 고향 가는 길로 묘사하여 믿음생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고,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으며,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그 곳을 향하여 인생길을 걸어간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약속을 환영하며 사는 믿음입니다.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믿음이라는 것은 성경을 통하여 예언된 말씀을 지금 현재 이루어진 것과 같이 생각하고 환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 곧,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과 같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믿음의 선진들은, 모든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믿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이 '보고'라 표현한 것은 신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것을 마음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삭 한 사람을 통해이어 올 천만인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삭을 통해 오게 될 다윗을 바라보고
이삭을 통해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이삭을 통해 하늘의 뭇별과 같은 후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믿음인데
이런 믿음을 가지고 환영하며 살았어요.
이런 하나님 약속은 땅에서도 성취됩니다.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은400 세겔에 구입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사라의 묘지로 구입한 땅 전부입니다.
훗날 하나님께서 하신 땅의 성취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눈앞에 보여주시고 동서남북을 걷게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멀리서 보고 환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을 당대에 믿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모든 것들은 성취된 구원’(Bruce)으로 확증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보지 못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현실 속에서 보는 것처럼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故 김정준 목사 1981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의 묘비에는 ‘임마누엘’이란 단 한마디만을 새겨주시오 라고 부탁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아직 돌아가시기 전의 현실 속에서 다가 올 죽음의 날을 바라보면서 남긴 작품입니다.
내가 죽는 날은 비가와도 좋다 그것은 나의 죽음을 상징하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는 감격의 눈물이기 까닭에,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치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안에 안길 내 얼굴의 광채를 보여 줌이라.
내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저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여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그분이 기다리며 살았던 그날은 왔고, 사람들은 그분의 유언대로 608장. 후일에 생명 그칠때를 불러 환송하였습니다.
(1)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성부의 집에 깰 때에 내 기쁨 한량 없겠네.
후렴: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네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 하겠네
(2)후일에 장막 같은 몸 무너질 때는 모르나 / 정녕히 내가 알기는 주 예비 하신 집 있네
(3)후일에 석양 가까워 서산에 해가 질때에 / 주께서 쉬라 하리니 영원한 안식 얻겠네
(4)그날을 예비하면서 내 등불 밝게 켰다가 / 주께서 문을 여실 때 이 영혼 들어가겠네
믿음으로 그 세계를 보고 환영하며 사셨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현실의 실존에만 목메고 살 때 사람은 삭막해집니다.
세기의 실존 철학자 싸르트르는 그 임종 시간이 참으로 발악에 가까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면서도, 그것을 입밖에도 내지 못한 채 두려워 떨었다는 것입니다.
그 기사를 다룬 한 기자는 그가 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다간 본 훼퍼는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도 평안했습니다. 그를 안내하는 간수는 그가 천국 아버지의 집으로 가며 남긴 작별인사를 평생 간직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환영하는 삶은 허구인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분명 실존 그 자체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독수리와 매가 비슷한 것 같지만 먹는 데서부터 전혀 다릅니다. 매는 항상 죽은 것만을 먹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절대로 아닙니다. 반드시 살아있는 것만을 먹기에 식중독으로 고생하지 않습니다.
태풍이 오면 매는 미리 일찌감치 피하여 숨습니다. 반면 독수리는 태풍이 오면 의연히 바위에 앉아서 몰려오는 태풍을 지켜본다고 합니다.
드디어 빗방울이 독수리 머리 위에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양 날개를 힘차게 펴고 날아오릅니다. 바람을 역이용하여 유유히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가서 태풍이 지나가기까지 밝은 햇빛을 받으면서 구름 위에서 비상을 즐기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그만이 날 수 있는 하늘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 땅의 태풍이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런 독수리를 우리는 비현실적인 비실존적인 짐승으로 매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처럼 이 세상을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살면서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처럼 약속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살 수 있습니다.
독수리가 태풍 영향권 밖에서 높은 창공을 날듯이 그렇게 본향을 믿음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설교 성경 본문]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