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봉사는 누구에게나 아름답습니다.
Google에서 '봉사'를 클릭하니까 22,000,000개가 나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봉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지요.
"꿀벌이 다른 동물보다 낫게 평가되는 것은 부지런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자를 위해 일하기 때문이라"(크리소스톰)는 말이 있습니다.
봉사는 그 사람의 가치를 높여줍니다.
기독교적 봉사는“디아코니아"란 원어로 설명히 되는데요.
디아코니아는 그리스어로 섬김과 봉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봉사, 섬김, 긍휼, 나눔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정신에 따라서 이웃과 사회를 위해 실천하는 기독교적 사회봉사”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디아코니아의 본래 의미는 디아코네오(diakoneo)로 “섬기다”, “봉사하다”, “사역하다”라는 의미가 있고, 디아코노스(diakonos)는 “종”, “섬기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사를 말할 때 등장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섬기는 자, 곧 종이라는 의미의 ‘디아코논’으로 불렀습니다(눅22:27). 당시 디아코니아는 자유인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장로교의 선구자 (칼빈)은 교회에 네 가지 직제를 두었는데, 그 중 디아콘직이 포함됩니다. 빈자들을 위한 자산을 관리하는 역할과 병자간호와 빈자구호를 담당하는 역할이었습니다.
디아코니아는 진실한 교회의 시금석입니다. 이를 위해 내적인 구조가 필요합니다.
칭의론에 대한 개혁가들의 원래 의도는 신앙만을 강조하려는 일면성에 있지 않고 의롭다함을 받는 신앙에 사랑이 첨가됨으로 통일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 디아코니아는 사랑의 부분입니다.
지난 십여 년 전부터 한국 교회는 성장에 제동이 걸리면서 아 우리가 디아코니아에 관한 부분에 약함이 있었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섬김실천이 하나의 큰 주제란 것을 깨달았고 교회 사명으로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도 한국 나이로 하면 열 다섯 살입니다.
예수님이 생각나는 좀더 성숙한 교회를 꿈꾸면서 디아코니아(봉사)에 담긴 비밀을 만날 수 있기 원합니다.
1. 예수님은 디아코니아[봉사]를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0:44-45]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분이셨습니다.
[요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중에 섬기는 자로 계셨습니다.
2] 예수님은 종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은 세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는 그런 섬김으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그것이 아닙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독생자의 목숨을 우리 죄를 위한 대속물로 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겁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섬김입니다.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하나님의 종으로의 섬김입니다.
3] 이런 놀라운 섬김을 받은 우리 성도는 이웃을 섬김으로 하나님 사랑을 꽃피웁니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 믿음과 행하는 이웃 사랑을 연결시켰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신비의 결과인 십자가 상의 의와 그 의를 덧입어 행하는 이웃 사랑을 '즐거운 교환'이라 하였습니다.
2. 성도의 봉사는 하나님을 섬김에서 출발합니다.
1] 성전 봉사자는 아릅답습니다.
[민수기 4:30]
삼십 세부터 오십 세까지 회막에서 복무하고 봉사할 모든 자를 계수하라
2] 하나님의 집에서 섬기는 일은 큰 일입니다.
[민수기 16:9]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3] 하나님의 봉사자란 호칭은 영광입니다.
[이사야 61:6]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4] 온전한 봉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웁니다.
[에베소서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봉사를 통해 교회를 이루어가십니다.
5] 봉사를 통해 성도들의 부족한 것은 보충됩니다.
[고린도후서 9: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다비다는 봉사로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습니다.
[행9:38-39]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3. 봉사는 이웃을 섬김으로 마무리합니다.
디아코니아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하여서 이웃을 섬김으로 마무리해야 합니다.
"강도당한 이웃을 돌본 사마리아인처럼 귀와 눈이 열리고, 마음이 움직여서 생명을 살리는 봉사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디아코니아가 무엇인지 잘 말해줍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달리 선한 사마리아 인에게 있어서 그의 행동의 근거는 자기 옆에 강도 만난 이웃이 있다는 것과 그가 자기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1] 이웃을 섬기려면 성령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내가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몸을 사용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봉사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지요.
봉사는 이웃에게 나눔입니다.
눅8:1-3은 예수님의 섬기심에 감동한 함께한 여러 여자들이 자기들의 소유를 희생하여 예수님과 열두제자들, 그 사역을 섬기는 모습이 나옵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 교회는 [나눔]으로 봉사합니다.
봉사는 자신의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함으로 나눔의 봉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주장하면서 나눌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 때 물질을 통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소유권과 재산권을 주님께 양도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됨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아는 봉사자들입니다.
하나님께 거저 받았기 때문에 거저 주는 것이 봉사입니다.
디아코니아에는 [자기 부인과 자기 희생]이 따릅니다.
바나바가 자기의 소중한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나눔으로 봉사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온전치 못한 자까지 나누어야 되는 줄 알 정도로 초대 교회의 나눔은 왕성하였습니다.
자기 재산과 소유를 팔아 봉사하는 것입니다.
교회 들어가는 질퍽거리는 길에 날마다 벽돌 한 장씩을 깔아 온 교회 성도들을 감동시키고, 결국 교회를 짓게 만들었다는 소년을 아시지요?
미국 백화점 왕으로 성공하고 훗날 체신부 장관이 된 그의 어느 인터뷰에서
"장관은 부업이고 주일학교 교사가 본업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
자신의 인생에서 최대의 투자는 성경이었다고 고백한 사람.
그리고 우리 한민족을 위해 종로2가 TMCA 건물을 지어준 장본인.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존 워너메이커(1838-1922)입니다.
[1] 그는 새벽에 일어나 첫 30분을 성경 묵상에 투자했고, 그 때 주어진 말씀대로 하루를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2] 워너메이커의 인생은 희망을 노래하기에는 너무 열악했습니다.
그 날의 계획은 치밀하게 세웠고, 남들보다 30분 먼저 출근해서 일찍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3] 절약하고 저축하는 습관을 가졌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을 위해서는 거액의 돈을 쾌척하곤 하였습니다.
[4] 학교 교육이 짧아 받지 못했던 지식을 독서를 통해 습득했습니다.
[5]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백화점 건물을 지으면서도 기도실을 따로 만들었는데, 그는 출근하면 가장 먼저 기도실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로 백화점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중국에 여행중, 소와 사람이 함께 멍에를 매고 밭을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농부가 하는 이야기가 교회당이 너무 낡고 허름해서 가지고 있던 소를 팔아 교회당을 새로 짓고 지금 이렇게 자신의 아들이 소와 함께 멍에를 메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워너메이커는 세상을 섬기는 봉사자로 헌신하였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세상을 섬기는 일에 많이 내놓았습니다.
[2] 은사대로 봉사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독일통일에서 디아코니아 정신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디아코니아가 무엇입니까?
“디아코니아의 과업은 일종의 생명의 힘입니다. 결코 사회윤리가 아닙니다. 디아코니아는 공공의 삶 속에서 제시되는 기독교인의 현존입니다.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근거를 찾아야만 합니다. 디아코니아는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시된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현재입니다."(Pfarrer Juergen Gohde)
독일의 디아코니아 사역은 <디아코니아재단(Diakonisches Werk)>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디아코니아 재단의 철학은 섬김의 신학이었습니다. 그들은 섬김을 통해 보이는 사랑을 실천했으며 특별한 유대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들은 병원, 양로원, 고아원 등을 위시하여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그 어떤 기관이라도 주의 사랑으로 찾아가서 따뜻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엄청난 물질적 지원이 뒤따라야 했습니다. 디아코니아 재단은 동독에 사무실을 설치해놓고 사역을 실질적으로 효과적으로 진행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들의 활동은 결국 동서독의 인간관계를 언제나 견고히 묶어주는 사랑의 띠였습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기독교인은 북한선교를 하든 대북한 관련 사업을 하든 기독교인으로서 그 일을 해야지 비기독교인과 같은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인의 기독교인 다움으로 북한을 품는 것이 디아코니아의 핵심입니다.
디아코니아는 인도주의적 봉사와 섬김 그 자체에서 끝나서는 안 되며, 기독교인의 향기를 발산하는 기회입니다. 조건으로 동족을 돕는 것보다 궁극적으로 동족의 영혼을 살리려는 중심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예화]
부모에게도 버림을 받고, 의사 선생님도 포기한 어린 생명이 병실 구석에서 인공 호흡기에 의해 실날 같은 생명을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어느 은퇴한 간호사 한 분이 죽음을 눈 앞에 둔 어린 생명에게 다가갔습니다.
"이 아이는 살아날 수 있다. 살아나서 훌륭한 미국 시민이 될 수도 있다."
반응 없는 어린 아이를 날마다 몸을 씻어주고, 사랑을 전해주었습니다.
찬송을 불러주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난 어느날, 아이를 안고 깜박 잠이든 간호사는 자기가 아이에게 들려준 찬송가 소리를 듣고 잠이 깼습니다.
놀랍게도 품에 안겨 있는 아이가 깨어나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살아난 이 어린 아이가 바로 헬렌 켈러의 스승이었던 설리반 여사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어느 추운 겨울 날, 워싱턴 사령관은 군인들의 사역 현장을 시찰하고 있었습니다.
막사 근처의 군인들은 한 상병의 지휘를 따라 커다란 통나무를 높이 쌓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흡족치 못한 일에 화가 난 상병은 부하 병사들에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힘껏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통나무 하나가 꼭대기에 거의 다다랐다가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워싱턴은 얼른 앞으로 뛰어가 있는 힘을 다해 그 통나무를 밀어 올렸습니다. 마침내 통나무는 맨 꼭대기 제자리로 굴러 들어갔습니다. 병사들이 감사하는 말을 했습니다.
워싱턴은 지휘하는 상병에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도움을 필요로 하던 이 사람들을 돕지 않았습니까?"
"뭐라고? 내가 상병인 줄 모르나?"
"그래? 나는 최고 사령관인데. 다음번 또 병사들이 들어 올리기에 힘든 통나무가 있거든 나를 불러주게나."
봉사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신실히 봉사하는 이에게는 상급이 큽니다.
1] 그래서 말세에 봉사를 경홀히 여기는 자들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봉사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2] 봉사를 잘 감당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미국에 감자칩을 주로 만드는 프리토라고 하는 회사가 있는데 이들의 경영원칙은 바로 봉사입니다.
운송비가 많이 들어 손해가 나는 먼 지역이라 할지라도 제품을 운송해 줍니다.
재해가 일어난 지역에 가서 상점을 열고 섬깁니다.
그들의 목적은 이유보다 봉사를 앞세웁니다.
그런데 매출이 더 증가하였습니다.
봉사를 기업으로 삼은 이 회사는 미국 칩시장의 70%를 점유하고 매출은 20억불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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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시대의 새로운 전도 패러다임-1강
김한옥 교수 (서울신대 실천신학)
I. 들어가는 말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본질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한 교회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계명’ 아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시대적인 상황이나 지도자의 신학적인 관점에 따라 둘 중에 어느 한 쪽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다른 한 쪽을 아예 배제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개신교회는 디아코니아보다 복음전도를 더 강조해 왔다. 지금도 많은 개신 교회들은 디아코니아를 목회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여기거나 교회성장을 위한 방편으로 생각한다. 때로는 디아코니아가 전도의 문을 열기 위한 활동으로 오해되기도 하였다. 디아코니아는 전도의 수단이 아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시작된 디아코니아는 목적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면 다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교회가 디아코니아를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로 생각하지 않고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 도중에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디아코니아는 먼저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성찰을 거치고 난 다음 목회 현장에 적용되어야 한다.
II.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의 신학적 이해
1. 디아코니아의 개념과 영역
헬라어 διακονεω는 두 개의 명사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봉사’ 또는 ‘섬김’이라는 의미를 가진 διακονια이고 다른 하나는 ‘종’ 혹은 ‘노예’라는 뜻을 가진 διακονος이다. 세속 헬라어에서 이 단어들은 ‘식탁에서 시중드는 일’(Tischdienst)로, ‘생활을 돌보다’(für den Lebensunterhalt sorgen)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일반적으로 ‘섬김’(Dienst)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참조: “διακονεω, διακονια, διακονος”, Hermann Wolfgang Beyer, in: 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 (ThWzNT), Gerhard Kittel, Hg., Sttutgart: Kohlhammer, 81f.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생애에 근거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삶이 ‘디아코니아’라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구원론’이라는 교리 안에서만 생각하지 않고 보다 넓은 범주에서 이해하였다. 구원은 인간을 영적이며 육적인 모든 문제에서 건져내는 것이다. 디아코니아는 예수님의 섬김을 계승한다. 참조: 김한옥, 「기독교 사회봉사의 역사와 신학」, 부천: 실천신학연구소 2004, 21.
디아코니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αγαπη’를 본질로 한다. 디아코니아는 가톨릭이나 세속적인 봉사기관이 말하는 박애나 자선(Caritas)과 구별된다. 보편적인 인간애에서 출발하는 모든 사회봉사는 디아코니아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디아코니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시작하며, 그 사랑이 전달되는 현장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주린 자에게 양식을 공급하고 벗은 자에게 의복을 주는 일이 베푸는 자의 자기만족이나 성취감을 얻는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데 있다고 이해한다.
디아코니아는 예수께서 전해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을 다시 전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두 가지 방향을 지향한다. 하나는 생활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닮아 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 세계에 들어오셨고, 창조주이시면서도 피조물의 고통을 대신 지고 고통을 당하셨다. 디아코니아는 이와 같이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동등한 인간으로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런 일을 통해서 소외되고 결핍된 이웃이 사랑받는 한 인격으로 재창조된다. 아가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은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으로 이웃을 돌보는 행위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디아코니아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해진 사랑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행위이다.
디아코니아가 지향하는 다른 하나는 도움을 받는 자와 돕는 자가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예수께서 베푸신 구원의 더 큰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디아코니아를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이 동시에 전파되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디아코니아를 통해서 전도의 문을 열자는 의미가 아니다. 디아코니아는 인간의 모든 시련과 고통의 근본적인 이유와 궁극적인 해결 방법을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디아코니아는 이웃의 결핍을 보상함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구현하려는 사회봉사 단체의 자선활동을 넘어선다. 참조: 김한옥, 「기독교 사회봉사의 역사와 신학」, 22.
2. 디아코니아와 인접 학문과의 관계
복음전도가 ‘전도학’ 혹은 ‘설교학’이라는 학문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디아코니아는 학문적으로 독자적인 위치를 확립하지 못한 채 근거리에 있는 학문에 더부살이를 해왔다.
학문적으로 오십 여 년의 역사를 가진 디아코니아는 목회학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목회학과 디아코니아가 사역의 상당 부분에서 서로 공동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와 디아코니아는 사람을 돕는 것을 주된 과제로 한다. 이 둘은 교회의 ‘돕는 활동’(Helfen)에서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참조: Gert Otto, Handlungsfelder der Praktischen Theologie, Münch- en: Chr. Kaiser 1988, 142.
다만 두 학문은 그 의미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디아코니아가 구제활동이나 제도의 개선을 위한 행위라면, 목회는 신학적인 돌봄의 사역이다. 디아코니아는 목회의 과제를 제시하고, 목회는 디아코니아 사역에 내용과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목회와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돕는 활동 안에서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서로 협력하는 입장에 있다. 참조: Dietrich Rössler, Grundriß der Praktischen Theologie, 2., er- weiterte Aufl., Berlin. New York: Walter de Gruyter 1994, 158ff.
선교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 디아코니아를 다룬다. 우선, 복음전도와 병행하는 사역으로서 디아코니아를 말한다. ‘바람직한 선교는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이 함께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선교의 포괄적인 의미에서 디아코니아를 언급하기도 한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선교는 복음전도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섭리라는 차원에서 실천하는 모든 일을 다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디아코니아를 복음전도의 문호를 개방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런 입장은 주로 신학적으로 근본주의적인 선교관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은 피선교지에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워서 성장시키는데 선교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디아코니아를 실천하더라도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생각한다.
사회복지학은 기독교의 디아코니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나 상부상조의 문화는 존재하지만, 사회복지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이 태동하게 된 배경에는 기독교의 자선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참조: Robert, Bessel, Introduction to social work, B.T. Batsford Ltd., London 1970, 12. in: 박영호, 기독교와 사회사업, 서울: 예수교문서선교회 1979, 13.
사회복지학은 인도적인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사회를 통제하며, 경제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디아코니아가 결핍된 인간을 돕거나 사회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피조세계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사회복지학은 인간의 결핍을 보상하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둔다. 사회복지학이 보상과 정의를 목적으로 사회에 봉사한다면,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회봉사에 대한 두 학문의 입장은 가치관에서도 관점의 차이를 보인다. 디아코니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반면에 사회복지학은 개인의 품위와 존엄, 자유,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본다. 참조: 김한옥, 「기독교 사회봉사의 역사와 신학」, 33f.
3. 신학적 관점과 디아코니아
기독교 사역에서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에 대한 이해는 신학적인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신학적인 입장은 두 가지 사역의 우선순위와 내용을 선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근본주의 신학의 주요 관심사는 직접적인 복음전도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고 교세를 확장해 나가는데 있다. 때로 디아코니아가 교회 사역의 한 부분이 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복음전도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근본주의 신학은 복음은 개인구원에 관한 것이며 사회개혁과는 근본적인 관계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근본주의 신학에서 디아코니아는 복음전도와 같이 진지하게 수용되기 어렵다. 근본주의자들은 고통당하는 이웃의 현실을 주로 영적 혹은 신앙적인 문제로 보려고 한다. 그들은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부의 분배나 정치적인 정의를 말하기보다 자유기업체제와 자본주의 정치구조가 성경적인 가치관에 부합한다고 믿는다. 참조: 서정운, “선교신학에서 본 사회봉사”, 이삼열 편, 「사회봉사의 신학과 실천」, 한울, 1992, 35ff.
그러므로 근본주의 신학에서 디아코니아는 단지 구제의 차원에서 일시적으로 실천하는 자선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존재를 표현하는 방식이나 교회의 필수적인 과제가 아니다. 근본주의의 관심은 오직 복음을 전하여 개개인이 구원을 얻고 이로 인하여 교세가 확장되는 것에 있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며 또한 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진보주의 신학은 디아코니아를 신학과 교회의 필수적인 과제로 받아들인다. 이 신학은 교회의 대사회적인 봉사 가운데서도 특히 급진적인 사회개혁에 관심을 갖는다. 이 신학은 복음전도와 개인의 영혼구원보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진보주의 진영의 교회들은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세계교회협의회에서 교회의 사명을 재확인하고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천명한다. 1948년 제1차 대회 이후 오늘날까지 세계교회협의회가 내놓은 교회의 사회적인 관심은 근본주의들과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교회는 사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는 교회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주목하지 말고 교회 밖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개선해 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진보주의는 교회에 부의 공정한 분배,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 경제생활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 제시,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에 대한 물질적, 지적, 인적인 지원 그리고 세계의 문제와 세계의 질서에 교회의 참여를 촉구한다. 진보주의 교회는 세계 속에서 진정한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교회는 인간화와 인간해방을 위해 힘써야 한다. 인간의 생명과 삶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서 교회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일들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는 인간의 권리가 존중되고, 인종과 성에 대한 차별이 철폐되도록 힘써야 할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기술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개발에 참여해야 한다.
셋째, 교회는 생태계 보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을 보존하고 자연과 공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피조물들의 탄식 소리는 사람들의 생태계 파괴에서 비롯된다. 교회는 모든 피조물의 갱신에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참조: 세계교회협의회 엮음, 「세계교회협의회 역대총회 종합보고서」, 이형기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54ff.
진보주의 신학에서 디아코니아는 이와 같이 인간 세계의 모든 문제에 관여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치 제도적인 문제의 개선과 인간의 가치를 지키는 일 그리고 자연 환경보호를 중요한 주제로 내세운다. 진보주의자들은 고난당하는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은 물론 인간에게 닥쳐올 불행에 총체적으로 대응하는 것까지도 디아코니아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주의자들은 디아코니아가 다루어야 할 분야를 폭 넓게 다루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복음전도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거나 거의 배제 된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를 이해함에 있어서 진보주의와 근본주의는 각각 한 방향으로 치우치고 있다.
복음주의의 디아코니아 이해는 1966년 베를린 선교대회를 출발점으로 하여 1974년 로잔대회에서 절정을 이루고 복음주의 서약과 마닐라 선언을 거치면서 더욱 확실해 졌다. 수차례의 선교대회를 통해서 발표된 복음주의 선언문들에서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가 균형 있게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복음주의는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가 교회 사역의 두 축이라고 생각하지만 복음전도가 우선이고 디아코니아가 차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서열은 의미상의 순서일 뿐 실질적인 차별은 아니다. 복음전도는 디아코니아를 유발 하고, 디아코니아는 복음전도에 탄력을 더한다. 그러나 둘은 절대 상호보완의 관계는 아니고 각각 자신의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어느 하나를 더 잘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른 하나를 하는 것은 어느 쪽에서 보든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복음주의 대회에서 발표된 선언문들은 이러한 입장에서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의 관계를 규명한다. 참조: 김한옥, 「기독교 사회봉사의 역사와 신학」, 68ff.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쪽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다른 한 쪽이 약해진다면, 그 결과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이 약해지거나 또는 교회의 사회적인 영향력이 사라져 목회에 불균형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는 목회의 두 축과 같다. 복음전도는 사람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디아코니아는 결핍된 자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찾아 주고, 그들로 하여금 행복을 추구하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한다. 이 두 가지 사역은 내용과 형태는 다르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목회활동에서 복음전도는 목회의 중심(center)이며 핵심(core)이고 또한 심장(heart)이라고 할 수 있다. 참조: David Bosch, Witness to the World: The Christian Mission in Theological Perspective, John Knox Press, Atlanta 1980, 207, in: 서정운, “선교학에서 본 사회봉사”, 이삼열 편, 「사회봉사의 신학과 실천」, 한울 1992, 43.
4. 구약성경의 디아코니아
디아코니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대사회적인 봉사’라고 한다면 구약성경의 디아코니아는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있다. 야훼 하나님 신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기들의 경계선을 넘어서 대외적인 봉사활동을 한 적이 거의 없다. 구약성경에서 사회적인 봉사라고 해야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온 소수의 외국인들에 대한 배려가 전부이고, 그밖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디아스포라의 상태에 있을 때 외국인들에게 생활의 영향을 미친 것 정도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발적으로 야훼신앙 밖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나가 봉사한 적은 거의 없었다. 참조: Roger E. Hedlund, 「성경적 선교신학」, 송용조, 서울: 서울성경학교출판부 1990, 227-237.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은 디아코니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책이다. 이스라엘은 야훼 한 분을 섬기는 한 신앙 공동체로서 넓은 땅에 퍼져 한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자국 내에서 일어나는 대소사와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해 제도를 개혁하고 마음과 물질을 내놓아야 했다. 경제의 발전과 함께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소외된 계층을 돌보고, 여러 가지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경고하고 제어하는 것은, 국가의 존립과 신앙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디아코니아의 직접적인 대상은 사회적인 약자들이었다. 이들은 고아와 과부처럼 보호자를 잃어버려서 약자가 되어버린 자들도 있었고, 사회의 변화에서 밀려났거나, 제도적인 모순이 낳은 약자들도 있었다.
구약의 ‘자선법’은 매우 방대하다. 그것은 약한 자, 특별히 가족과 땅의 자연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인 과부, 고아, 레위인, 이주민, 이방인 등에 대한 보호와, 가난한 자에 대한 정의, 공평, 추수기와 일반 경제생활에서의 관대함, 사람과 타인의 재산에 대한 존중, 이방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 고용된 일꾼의 품삯을 속히 지급하는 것, 담보로 저당 잡은 것에 대한 적절한 처리, 결혼 초기에 있는 사람, 또는 사별한 사람에 대한 배려, 심지어 가축과 야생동물들, 그리고 과일나무들에 대한 배려까지도 포함한다. 참조: Christopher J. H. Wright, 「현대인을 위한 구약윤리」, 정옥배, 서울: IVP 1989, 192f.
약자보호의 방법은 개별적인 구제에서부터 정치, 사회, 경제적인 방법으로 하는 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들이 있었다. 첫째,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네게 있는 것으로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개 의복과 양식에 관련된 것들이 언급되었다. 둘째, 정치와 경제적인 면에서 정의를 실천하여 약자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구약성서는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공동체 생활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근절하고 덕을 세우도록 하라고 한다. 요컨대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는 것’(사1:16), ‘악을 미워하며 선을 사랑하는 것’(암5:15)과 같은 것을 말한다. 구약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넉넉하게 만들고, 기름지게 하며, 복되게 하고, 낫게 하는 삶을 추구하라는 뜻이고, 사람의 삶을 옹색하게 만들고, 딱딱하게 하며, 나쁘게, 못되게 하고, 갉아먹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참조: 박동현, “구약의 경제윤리(II)", (구약논단, 제7집, 1999), 123ff.
셋째, 연대책임을 지는 방법이다. 고엘제도는 매우 폭넓게 적용되었다. 넷째, 권력자들에게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도록 요구하며, 약자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방법으로 약자들을 보호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대개 주전 8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의 예언활동을 통해서 나타났다. 구약성서의 디아코니아는 사회적인 약자들을 우대한다는 정신을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조: 서인석,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왜관: 분도출판사 1998, 129f.
구약성경의 디아코니아에서 우리는 몇 가지 기본적인 틀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인간사랑은 결국 ‘신앙’, ‘사람’, ‘공의실천’이라는 단어로 압축될 수 있다.
먼저, 종교적인 차원에서 추진되는 디아코니아는 그 종교의 정신과 구조가 중요하다. 종교단체의 사회봉사는 단순히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의 디아코니아는 야훼신앙의 속성을 삶으로 표현한 것이다. 야훼신앙의 우수성이 탁월한 생활방식으로 드러난 것이 구약성경의 디아코니아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디아코니아는 야훼 신앙인의 삶의 스타일로 표현된 것이다.
둘째, 사람의 중요성이다. 모든 인간은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살 권리가 있다. 이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은 끊임없이 약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변호하신다. 약한 자 결핍된 자는 착취, 억압, 조롱, 비방을 당하거나 비인간적,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대상이 아니라 특별한 관심과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셋째, 공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야훼신앙의 생활상이 왜곡되지 않고 펼쳐지며, 모든 사람이 평등과 자유를 누리는 사회는 공의가 강물처럼 흐를 때 구현될 수 있다. 부한 자, 강한 자, 권력을 잡은 자는 약한 자를 붙들어 함께 강한 자 만드시는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는 청지기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의로운 길을 가야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진 자, 강한 자, 부한 자들이 먼저 공의를 실천해야 한다.
5. 신약성경의 디아코니아
복음서에 나타난 디아코니아는 구약성경의 이웃사랑의 계명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참조: “διακονεω, διακονια, διακονος”, Beyer, 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ThWzNT), Gerhard Kittel, (Hg.), 2.Bd., Stuutgart Kohlhammer 1935, 83f.
그러나 복음서는 우리에게 구약성경과는 질적으로 다른 디아코니아를 보여준다. 복음서의 디아코니아는 전인적인 구원과 행복을 지향한다. 예수님은 인간을 영혼과 육신의 모든 결핍에서 건져내신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고통 받는 인간들에게 전인적인 만족을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죄를 용서하고, 병든 육신을 치유하고, 그릇된 질서와 힘을 책망하고, 약자들을 바로 세우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적인 불의로부터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개인적인 불행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선포하심으로써 강한 자를 결박하셨으며, 병을 치유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셨다. 그분은 주린 자의 배를 채워주심으로써 모두가 한 식탁에서 풍성하게 먹게 될 천상식탁의 맛을 미리 보여 주셨다. 하나님 나라는 주린 자의 영혼과 육신을 풍족케 하는 곳이다. 참조: 김지철, “신약성서에서의 사회봉사”, 사회봉사의 신학과 실천, 이삼열 편, 한울 1992, 133f.
예수님은 결핍된 자들을 돌보는 것을 구원과 연관시키심으로써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하나님 나라는 지극히 작은 자가 주님과 동등하게 인정받는 곳이다. 예수님은 곤경에 처한 자가 곧 이웃이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봉사를 통해 강한 자는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임을 보여주셨다. 하나님 나라의 맥락에서 강한 자는 섬김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약한 자는 모든 거짓된 권위로부터 오는 위협과 좌절에서 해방됨으로써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디아코니아는 예수님의 인격에 근거하고, 그의 삶과 사역을 모델로 한다. 참조: 김한옥, 「기독교 사회봉사의 역사와 신학」, 153ff.
사도행전은 기독교회가 첫 출발부터 복음전파와 디아코니아를 병행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떡도 나누어졌다. 선포와 봉사는 처음부터 교회사역의 두 기둥처럼 버티고 서있다. 이것은 고넬료가 환상 중에 천사로부터 들은 음성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천사는 고넬료를 칭찬하면서 고넬료의 기도생활과 구제생활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고넬료는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잘 감당하였다. 참조: 사도행전 10:4.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는 자기의 집을 방문한 베드로에게 이 말을 그대로 반복한다(행 10:31).
이러한 사건을 통해 베드로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행10:35-36) 알게 된다. 우리는 베드로의 주석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의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두 가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교회의 핵심적인 사역자는 복음을 전하며 기도에 전무하는 사도들과 ‘공궤를 일삼는’ 집사들이었다. 초기교회의 삶과 사역에서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의 교회는 선포와 봉사를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로 알았지 선포의 수단, 혹은 교회성장의 방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초기교회는 봉사가 선포를 보완하거나 대체하는 것으로도 보지 않았다. 초기교회는 처음부터 선포와 봉사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종’으로 이해한다. 그는 주의 종으로서 말씀과 행동으로 성도들을 섬기는 봉사자였다. 그의 이러한 자기이해와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봉사적 삶과 봉사에 대한 이해는 무조건 주님을 모방하는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분명한 신학적인 틀을 기초로 한다. 그는 교회의 구성원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봉사자’라는 이름 아래 세운다. 교회는 봉사자들의 집단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봉사이다. 봉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취사선택 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자신의 모든 직무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에 ‘봉사’(διακονια)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디아코니아의 내용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의 정신적인 기틀을 분명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은 모두 ‘디아코니아’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위한 ‘봉사자’이며 그리스도의 ‘종’이다. 참조: 김한옥, 「기독교 사회봉사의 역사와 신학」, 190ff.
III.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의 교회사적 이해
1. 초기 교회의 디아코니아
콘스탄틴 이전의 교회는, 시기적으로 매우 어려운 때였지만, 교회의 본질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았다. 교회 내적으로 이단이 난립하는 중에서도 교회 지도자들은 이단자들과 신학적인 논쟁을 통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고수하였다. 교회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참혹한 박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와 인내로 복음을 전하여 새로운 신자들의 수를 더하여 갔다. 또한 빈부의 심한 격차와 사회적인 계급구조에서 오는 많은 비인간적인 문제들을 직면하여, 교회는 가난한 자들에게 구체적으로 구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여 사회 안에서 자신의 몫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릇된 교리에 붙들린 자들은 영과 육,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전인적인 구원과 축복을 외면하고 있었다. 영지주의, 몬타니즘, 마르시온은 어느 한 극단으로 나가면 지나친 금욕주의자가 되고 다른 한 극단으로 나가면 윤리적인 방탕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올바른 기독교 스승들은 인간의 전인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내리시는 영육의 복을 가르쳤고, 그러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었다. 교회의 사명은 박해 중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물론 인과응보의 사상이 싹트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이 당시 기독교의 봉사는 성경의 원칙을 준수하려고 노력하였다. 참조: 김한옥, 「기독교 사회봉사의 역사와 신학」, 210ff.
디아코니아는 당시 교회와 사회가 안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비록 교회나 그리스도인 각자가 문제의 근본원인을 파헤치고 해결하는 조직적이며 적극적인 디아코니아는 하지 못했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도움이 필요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여행자, 교회 사역자, 고아와 과부, 수감자, 여성들, 장례와 묘지문제 등 교회는 교회와 사회에서 연약한 자들의 지팡이가 되어 주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사유재산 제도가 인정되던 시절에 가진 자들의 횡포를 질타하고, 나아가서 부자들로 하여금 가난한 자를 위해서 전대를 풀어 나누게 하였다. 참조: Henry Chadwick, 「초대교회사」, 박종숙,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64f. 히뽈리뚜스, 사도전승, 이형우, 왜관: 분도출판사 1994, 183.
교회 지도자들의 이와 같은 수고는 연약한 자들의 무릎에 힘을 실어 주기에 충분하였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유재산과 부를 인정했다. 그들은 부와 재산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되기를 원했다. 부와 재산이 분별력 있게 사용될 때 부자의 부는 완전해 진다. 교회 지도자들은 사유재산이라 할지라도 목회적인 차원에서 사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부자는 물질로 가난한 자들의 물질적인 결핍을 돕고, 가난한 자들은 기도로 부자의 영적인 결핍을 도우라고 하였다. 특히 부자는 더 많이 모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 힘쓰라고 가르쳤다. 모든 재화는 공동체가 함께 사용하도록 주어졌다. 참조: 헤르마스의 목자, in: J. B. Lightfoot & J. R. Harmer(Tr.), Michael W. Holmes(edited & revised), 「속사도 교부들」, 이은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275ff..
그러나 물질 분배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미 이때에 인과응보의 사상이 대두되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영성을 위해 하는 금식까지도 구제와 봉사가 병행되거나 전제될 때 의미 있는 금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한 한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금식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먼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한 일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기간 동안 절약된 양식은 가난한 자들에게로 돌려져야 한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금식이나 기도보다 더 좋은 것은 구제라고 가르쳤다. 참조: J. B. Lightfoot & J. R. Harmer(Tr.), Michael W. Holmes(edited & revised), 「속사도 교부들」, 106, 321, 223f.
노예제도에 관한 한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경과 당시 사회적인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노예제도는 성경에서와 같이 이방세계에서도 당연시되고 있었다. 기독교가 이방세계에 들어갔을 때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책방하기 보다는 그것을 인정하고 복음을 전했다.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현장을 목격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강자들의 편에 서서 노예제도를 옹호하였고, 더 나아가서 교회 공동체를 지키려는 의지를 노예해방을 위한 투쟁보다 더 중요시하였다. 참조: Franz Laub, 「고대 노예제도와 초기 그리스도교」, 박영옥,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8, 149ff.
2. 중세 이전의 디아코니아
콘스탄틴 황제로부터 교황 그레고리 1세에 이르기까지 300년간의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는 이전보다 더 개방적이고 활발하였다. 콘스탄틴 이후로 교회가 자유롭게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자 디아코니아는 신자와 비신자를 포함하는 모든 결핍된 자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또한 디아코니아의 내용도 이전보다 더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디아코니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신학적인 근거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문제에서 신학적인 해답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예를 들면, 그들은 대개 노예제도를 인정하였다. “Kenneth Scott Latourette, 기독교회사, 상, 윤두혁, 서울: 생명의말씀사 1978, 383.
한편으로 교회 지도자들은 자선을 구원의 조건으로 인정하였다.
보다 완전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시작된 수도원들은 주로 개인의 영적 성숙을 도모하는데 집중하였다. 초기의 수도원은 개인의 경건과 구원, 신앙생활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기에 봉사라고 해야 고작 수도원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국한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점들을 인지한 수도원들은 교회와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시작한 수도원들은 당시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움 속에서 의지할 곳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하였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숙박소, 혹은 종합적인 의미의 병원이다. 이것은 본래 교회에서 먼저 시작하였는데, 후년에 이르러서는 수도원에서도 운영하였다. 교회나 수도원이 운영하던 숙박소는 주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여행 중인 그리스도인이 며칠 쉬어 가는 숙소로 제공되거나 혹은 빈곤한 나그네에게 제공되기도 하였다. 이것이 후에는 구제의 필요가 있는 모든 사람들 즉 고아, 과부, 노령자, 병자, 극빈자 및 나그네를 위한 시설로 바뀌게 되었다. 지윤, 사회사업사, 서울: 홍익제 1985, 42. 박영호, 기독교와 사회사업, 서울: 예수교문서선교회 1979, 55.
수도원이 세상의 아픔을 안으려는 노력의 이면에는 축적되는 부와 권력의 문제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결핍된 자들을 구체적으로 돕는 일과 자신을 물질만능의 세계에서 건강하게 지켜나가는 일은 수도원이 해결해야 할 무거운 과제였다.
3. 중세교회의 디아코니아
디아코니아는 중세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었다. 그러나 초기 교회부터 시작된 디아코니아에 대한 신학적인 오류는 중세교회의 긴 역사를 거치면서 개선되기보다 오히려 고착되었다. 봉사자들 또한 순수한 봉사 정신을 상실해 갔다. 따라서 중세교회의 디아코니아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첫째로 중세 교회는 디아코니아를 꾸준히 실천하였다. 말씀선포와 디아코니아가 교회에 주어진 두 개의 큰 과제라면, 중세교회는 이 두 가지 중에 후자에 열심을 낸 교회였다. 당시 교회는 박해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 일이 시급하였고, 또한 재정적으로도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교회는 항상 결핍된 자들과 함께 하였다.
둘째로 중세 교회는 디아코니아를 통해서 함께 사는 사회를 구현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스도인, 교회, 수도원은 분명히 세상과 다른 가치관과 삶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고난 중에 있는 이웃과의 관계를 확장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동기의 순수성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중세교회에 있어서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삶의 스타일이었고 교회의 본질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셋째로 중세교회는 디아코니아를 실천함에 있어서 전교회적인 참여를 독려하였고, 또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교회의 십일조 중 일부는 결핍된 사람들의 몫이었다. 자선을 위한 재정이 부족할 때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독려하였다. 교회는 구빈원에 들어오지 못하고 유랑 걸식하는 이들을 주님처럼 여기고 도와주도록 가르쳤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제와 봉사를 생활화 하였다. 중세교회는 복음전도보다 디아코니아에 더 비중을 두었다. 교회나 수도원 그리고 그리스도인 각자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자기의 몫을 다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교회가 사회를 지탱하는 일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었다. 참조: 김한옥, 「기독교 사회봉사의 역사와 신학」, 274ff.
반면에 중세교회의 디아코니아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세교회의 디아코니아가 가장 강하게 비판받아온 것은 ‘인과응보’의 사상이다. 행위에 대한 보상사상은 이미 중세 이전부터 등장하였으나 중세에 들어와서 그것이 더욱 고착되었다.
다음으로 중세교회의 무차별적인 구제는 태만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인과응보의 사상을 비롯하여 결핍된 자와 주님을 동일시하는 가르침은(마 25:31-46) 자율적이든 타율적이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구제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다. 선을 행한 자는 보상을 받는다는 주장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 보상의 적용범위가 개인으로부터 부모형제와 일가친척으로, 죄의 용서에서 천국의 보상으로 계속 확대되어 갔다. 이처럼 기부금을 내는 일이 하늘의 상급을 얻는 일로 가르쳐지면서 자연적으로 자발적인 기부자가 증가하게 되었고, 기부금을 거두는 사람도 늘어갔다. 이런 현상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켰다. 구제할 만한 여유가 있는 부자들에게 구제는 회개를 대신하였고, 노동을 하기 싫은 사람에게 구걸은 주님과 동등한 대접을 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는 방편이 되었다. 무차별적인 구제가 태만한 인간을 양산하여 정작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을 선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중세교회는 디아코니아를 계속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의 순수한 정신을 지속하지는 못하였다. 걸인이 없는 사회를 위해 권장한 구제활동이 오히려 구걸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대대적인 시설봉사는 부정과 부패를 조장하였다. 기독교인들 중에 집단 수용시설에서 봉사하기 위해 헌신하였거나 채용된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었다. 구빈원이 처음 출발할 때와는 달리 재정적으로 넉넉해지자 구빈원을 운영하는 사람들 중에는 공금을 횡령하거나 부식을 빼돌리기도 하였다. 구빈원의 직원들에게 있어서 봉사정신은 점차 직업정신으로 대체되어 가는 경우가 많았다. "Hospital", Teologische Realenzyklopädie(TRE), Bd.,IV, 1979, 602.
4. 개혁자들의 디아코니아 이해
중세 교회의 인과응보 사상에 근거한 무차별적인 봉사가 가져온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는 루터는 동일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독교 디아코니아의 신학적인 정립과 그에 근거한 봉사를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디아코니아는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믿음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믿음을 생활 속에서 표현하는 것이 디아코니아이다. 그리스도인의 디아코니아는 결코 더 나은 믿음의 경지로 도약하는 발판을 만들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기대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루터는 디아코니아를 설명함에 있어서 이러한 신학적인 원칙을 고수한다.
루터의 디아코니아는 의인론을 기초로 한다. 타인을 위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선한 행위보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인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죄의 쓴 뿌리에서 발동되기 때문에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본질적인 제약을 벗어나고서야 인간은 진정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루터는 그것을 ‘의’라고 보았다. 기독교의 디아코니아는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결핍된 자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믿음이 디아코니아의 근거라고 한다. 참조: "두 종류의 의", 「루터선집」, 5, 지원용 편, 서울: 컨콜디아사 1984, 266ff. "선행에 관한 논문", 「루터선집」, 9, 35ff. “그리스도인의 자유”, 「루터선집」, 5, 301ff.
칼빈에게 있어서도 믿음이 이웃사랑의 원동력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 하는 동정이나 자선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는 실제적인 헌신이다. 믿음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믿음이 요구하는 바를 거부하지 않고 실천한다는 말이다.
사회적인 약자와 짐을 나누어지는 일은 실제로 고통을 분담해야 하기 때문에, 칼빈은 누구든지 먼저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이웃 사랑을 위한 자기부정은 두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 방향은 하나님을 향한다. 하나님을 향한 자기 부정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자기의 의지를 따라 사랑할 이웃과 사랑할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결정하시도록 하고 그의 결정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한 방향은 이웃을 향한다. 이웃사랑에 있어서 자기부정은 이웃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의 형편과 처지를 초월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참조: 존 칼빈, 「기독교 강요」(중),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3, 200ff.
칼빈은 이러한 신학적인 원칙을 세우고, 몰려드는 피난민과 가난으로 시달리는 제네바 시민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구빈원을 재건하여 시설봉사를 하였으며, 집사를 세워 구빈원을 운영하게 함으로써 디아코니아에 전문인을 기용하는 전례를 남겼다. 참조: W. Fred Graham, 「건설적인 혁명가 칼빈. 사회와 경제에 끼친 영향」, 김영배,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8, 149ff.
그의 이러한 시도는 제네바를 하나의 이상적인 도시로 만들어 보려는 단순한 이상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이해한 성경과 신학이 내포하고 있는 진리를 실천하려는 의지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은 개혁자의 입장에 서서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를 이해하였고, 그것을 사역의 현장에 적용하였다. 루터가 그러하였듯이, 칼빈 역시 기독교의 디아코니아를 올바른 신학위에 세운 개혁자이다.
루터가 의인론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설명하고, 칼빈이 믿음에서 나오는 자기부정으로 이웃사랑을 말한다면, 웨슬리는 구원론을 기초로 디아코니아를 이해한다. 디아코니아를 이해함에 있어서 웨슬리는 두 가지 면에서 다른 개혁자들과 차이가 난다.
첫째는 사람은 구원받기 이전에도 일반적인 차원에서 선행을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말하지만, 루터나 칼빈과는 달리 ‘선행은총’의 교리를 주장한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내린 ‘선행은총’은 영적인 면에서의 선악에 관한 것들 그리고 사회적인 영역에서의 정의를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간은 구원받기 이전에도, 비록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전인적인 차원에서 악보다는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다. 참조: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서울: 성광문화사 1996, 111ff.
그러나 중생과 성결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온전한 존재로 변화 된다. 따라서 웨슬리는 비록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모든 인간이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두 번째로 웨슬리의 구원론은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완전한 구원은 삶으로 증명된다. 웨슬리는 구원의 교리와 구원받은 사람의 새로운 생활을 불가분의 관계에 두었다. 영적인 구원은 곧 사회적으로 변화된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소위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참조: “신생의 표적”, 웨슬리총서, 1, 서울: 유니온출판사 1983, 222ff.
웨슬리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가르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사역을 통해서 입증해 보였다. 그의 설교와 삶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구체적으로 돕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웨슬리는 개인의 금전사용과 재물에 있어서 청지기 정신을 강조하였으며, 교도소 개혁, 노예제도 폐지, 교육제도 개혁, 기타 사회제도들의 문제점들을 개혁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IV. 나가는 말
약 반세기 전에 태동한 디아코니아학은 때로는 목회학의 한 지류로서, 때로는 선교학의 한 갈래로서 학문적인 셋방살이를 해야만 했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는 디아코니아학이 국민의 행복을 위한 사회복지의 필요성을 지지해주는 선동대가 되기도 하였다.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데 관한 것들을 다루는 학문이다. ‘사랑’은 곧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서 나오는 사랑을 의미한다. 예수의 삶과 사역을 특징짓는 사랑을 우리는 ‘아가페’라고 한다. 기독교의 디아코니아는 바로 이 아가페의 정신으로 세상의 상처를 예방하고 치유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의 특징은 ‘종’처럼 섬기는 것이다.
디아코니아는 단순한 봉사활동이 아니라 신학적인 신념에서 나오는 사역이다. 디아코니아가 기독교 공동체의 사역이 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실천되려면 신학적으로 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 신학적인 정도를 벗어난 디아코니아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추진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기독교적인 의미의 디아코니아가 아니다.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듯이, 사도들의 시대가 지나고 초기 기독교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미 디아코니아는 기독교 신학의 틀을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디아코니아가 공로사상, 응보사상과 접목되면서 기독교 신학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복음전도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하나님의 주권이 약화되면서, 은혜의 종교가 인간 공로의 종교로 변하였다. 중세 천 여 년의 세월을 ‘암흑’으로 몰아넣은 데는 이와 같은 신학적인 오류가 큰 역할을 하였다.
디아코니아는 교회성장의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나 교회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는 디아코니아를 도구나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생태적으로 봉사 지향적이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섬기는 분으로 존재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사역을 ‘봉사’라는 차원에서 이해하였다. 사도들 역시 자신들의 직분의 의미를 ‘섬김’에서 찾는다. 교회는 서로 섬기기 위해 부어진 성령의 은사의 공동체이며, 서로를 돌아보는 몸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디아코니아는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이며 존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교회는 섬기는 동안 교회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은 기독교 사역의 두 기둥이다. 이 둘은 상호보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독자적인 위치에 있으며, 그 자체로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에 속하며, 교회의 존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는 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두 종류의 사역이다. 그것은 교회가 취사선택할 사안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해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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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노하덕'이란 이름을 적어놓았더니 68,600회나 등장합니다.
정말 놀라운 세상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블로그(josungseop)는 저의 작품 가운데 겨울의 정경을 여러모로 찍어서 '겨울 나무의 노래'란 이름으로 실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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