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종려주일에 우리가 만나게 될 예수님은 분명 왕이십니다. 그러나 천국의 왕이십니다.
유대인들이 세계 각국에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엘리야와 같은 능력으로 불병거를 타고 오실 왕(메시야)을 기다렸습니다. 그분은 로마를 일시에 뒤엎을 것이고, 압제 당하는 이스라엘은 로마로부터 독립하게 될 것입니다.
왕으로 오실 그날을 위해 충성(장사)할 것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나귀를 타신 메시야로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앞에 서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왕으로 오셔서 다스리실때,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회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1. 평강과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까요?
유독 그날 다리가 아프셔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다 위세를 부리자고 나귀를 타신 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나귀를 타고 가시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왕의 모습을 우리들과 예루살렘 성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그림처럼 전하는 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에 평화의 왕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시기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나귀는 서민들의 교통수단입니다. 솔로몬 시대 이후로 어떤 왕도 나귀를 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 중에서도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겸손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멍애를 매고 겸손을 배우시기 원하십니다.
나귀를 타고 오셨던 평화의 왕이요, 겸손의 왕을 영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 평강의 왕, 겸손의 왕이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두 가지를 행하십니다.
평안이 찾아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평강의 왕이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교만한 자가 겸손해 집니다. 겸손의 왕이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님을 등에 모시고 세상에 나아갈 때, 세상에 평강과 겸손의 왕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화] 고구마전도왕 김기동집사 : 교통사고와 전도
하나님께서 믿도록 예비하신 사람을 오늘도 만나게 하소서.
꽝!
미안합니다.
범퍼는 받으라고 있는 겁니다.
고치고 청구하십시오
점심이나 한번 사세요.
예수님 믿고, 흔들리는 회사를 살려준 결과로 나타남
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왕으로 오셔서 다스리실때,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회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2. 자유함과 사명입니다.
'풀어 끌고 오너라' - '주가 쓰시겠다'
(30)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만일(萬一)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主)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여기 아직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어 있습니다. 이 어린 나귀의 운명은 세상 주인에게 매여 일생 종노릇하다가 힘이 다하면 죽는 겁니다.
예화]
미국 어느 도시에 밥 먹는 일 외엔 잠만 자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물도 끼얹고 별 수단을 다해 보아도 대책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아침, 신문을 보던 이 청년이 어머니에게 일좀 하겠다고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농담으로 생각한 어머니는 건성으로 대답했대요. "그럼 너도 일좀 해야지." 그런데 그날 밤 자정이 다 되어서 돌아온 겁니다. 그 이유를 물은즉, 침대회사의 모델로 취직하였답니다. 침대를 선전하기 위해서 가장 오래 누워 있을 수 있는 모델로 시간당 $3에 당당 합격을 했데요.
잠에 매여 일생을 살아갈 그 아들을 생각할 때, 그 어머니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통곡하고 싶지 않겠어요?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시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심판 받을 날은 가까운데, 사명을 망각하고 죄악 가운데 잠들어 있는 그 예루살렘과 그 백성들이 불쌍해서 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린 나귀는 오늘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고 왕 중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싣고 예루살렘에 당당히 들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 온 우주의 왕이신 메시야를 등에 모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맞은 편 마을에 매어있는 어린 나귀를 끌어오게 하여 자유케 하시고 왕 중 왕의 나귀로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많이 만납니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옛사람에 속한 본토, 친척 아비 집에 매여 있었습니다. 우상 장사(돈)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매임에서 풀어 복의 근원을 삼으셨습니다. 천하만민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젊은 날에 미디안으로 피한 후, 바로에 대한 두려움에 매여 있었습니다. 모세는 거듭 "내가 누구관대!" 합니다. 말이 능하지 못하고 입도 뻣뻣합니다. 자기는 아무래도 그런 사명을 감당할 인물이 못됩니다.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매임에서 풀어 바로에게 보내어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여 내게 하셨습니다.
에스더는 왕비였지만, 왕의 사랑을 잃어버리는 두려움에 매여 떨고 있었습니다. 사망의 그늘이 그 민족을 덮고 있었으므로 그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죽음의 권세도 그녀 가까운 곳에서 조여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모르드개를 통하여 믿음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 규례를 어기고 왕께 나갈 수 있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민족을 구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왕께 사랑을 받는 복도 누렸습니다.
기드온은 당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하였듯이 미디안을 피하여 산의 굴에서 추수를 몰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추수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토지 소산뿐만 아니라 소, 양들을 약탈해갔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마음(懷疑)에 매여 굴속에서 떨고 있는 기드온을 불러내어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정말 귀히 쓰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교만에 매이고, 사람에 매이고, 자기 영광(기념비)에 매이고, 불순종의 죄에 매인 사울을 하나님께선 사용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다윗은 골리앗(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라."
다윗도 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매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도전]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매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옛사람에 매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아에 매여 종노릇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육신을 사랑하여 종노릇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풀어 끌고 오너라' - '주가 쓰시겠다'
일생을 매여 종노릇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 그리고 세상의 종노릇하는 데서 자유하길 원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십니다. 자유인으로 주님을 나타내는 사명을 회복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쓰시겠다고 하셨을 때, 그들은 흔쾌히 허락한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잘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무엇이든이 사용하시도록 내어 놓을 수 있는 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왕으로 오셔서 다스리실때,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회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3. 기쁨과 찬양의 회복입니다.
(37)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弟子)의 온 무리가 자기(自己)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因)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讚揚)하여 (38)가로되 찬송(讚頌)하리로다 주(主)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王)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榮光)이로다 하니
사랑을 받고, 은혜를 입을 때, 우리는 사랑한 사람과 은혜를 베푼 사람을 생각하면 기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오늘 오산나를 부르면서 기뻐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살아난 나사로는 말할 것도 없고, 베다니에 사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들은 마음껏 주님을 외쳤을 것입니다.
찬송(讚頌)하리로다 주(主)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王)이여
마리아가 값진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는 사건으로 그 지역 주민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습니다.그들의 중심에는 감사와 찬양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여리고에서 눈을 뜬 바디매오와 그 친족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들은 마음껏 주님을 외쳤을 것입니다.
찬송(讚頌)하리로다 주(主)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王)이여
여리고에 살던 삭개오와 그 주변사람들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예수님을 만나 변하여 복의 근원을 회복하였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찬송(讚頌)하리로다 주(主)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王)이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신 구원을 체험한 데서 나오는 찬양이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얼음이 되는 추운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옷을 다 벗겨 그곳에 가두었습니다. 믿음대로 살고자 하는 그분이 이초록 고통을 당하면서 어떻게 그 추운 밤을 보냈는지 아시겠습니까? 밤 새워 춤을 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신 크고 비밀하신 사랑을 춤으로 보답했습니다.
점검과 도전]
마무리하는 말
왜 사람들이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서가 아닙니까?
예화] 몰라도 너무 몰라!
아들 위로가 한국을 방문한 때는 재작년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 것이 있다.
아니 그 감격이 더 생생해지는 일이 있다.
친척들을 방문하는 중에 상당히 많은 돈, 9만 6천 원을 선물로 받은 사건이다.
위로가 고모를 가장 좋은 분이라고 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고모가 가장 많은 돈을 주었다는 것도 한몫을 하고 있다.
6-만원을 주셨다고 지금도 그때의 감격을 톤을 높여 표현한다.
그런데 이 감격스런 돈을 위로 엄마가 빌려쓰고 아직 돌려주지 않은 모양이다.
위로는 돈을 사용하고 싶을 때면, 늘 그가 엄마에게 빌려주었다는 9만 6천 원을 생각한다.
목이 말라 무엇을 마시고 싶을 때, 그가 엄마에게 빌려주었다는 9만 6천 원을 생각한다.
배가 출출하고 무엇인가 먹고 싶을 때, 그가 엄마에게 빌려주었다는 9만 6천 원을 생각한다.
장난감이 사고 싶을 때, 그가 엄마에게 빌려주었다는 9만 6천 원을 생각한다.
어제 밤에는 좀 도가 지나치다 싶어서 한 마디를 물었다.
위로야, 네가 하룻밤을 자는데 얼마나 돈이 들까?
난 그에게 깨우쳐주고 싶었다.
엄마가 그를 위해 방을 마련해주고,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마련해 주고, 옷을 따뜻이 입혀주고 사랑으로 돌봐주는 것에 비하면, 네가 빌려주었다는 9만 6천 원을 아무 것도 아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로는 깜짝 놀랄 만한 답을 말했다.
"1센트?"
초등학교 5학년인데! 그래도 산수 점수, 특히 계산에서만은 몇 학기 째 꼬박꼬박 A를 받아오는 녀석이 자기가 하룻밤 묵는 값이 $1의 1/100인 1센트라니!
'아빠의 의중을 알고 넘겨짚어 답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의 얼굴 표정은 진심으로 답하고 있어 보였다.
참으로 어안이 벙벙한 이 사건을 기회로 나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 역시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외아들을 내 죄 대신 내어주심으로 나는 오늘도 영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매일 매순간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은혜가 또한 값으로 헤아릴 길이 없다.
1초를 지체하지 않고 공급해 주시는 이 맑은 공기를 50년째 무상으로 받아 마시며 산다.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풍성히 받아먹는다.
시절을 좇아 좋은 옷으로 옷장 가득히 채워 주신다.
좋은 교회, 좋은 성도를 만나 천국 생활을 하게 하신다.
좋은 부모 형제, , 복된 가정을 만나 누구 못지 않게 행복하다.
그런데 때로 내 안을 들추어보면,
한 구석엔 불만과 투덜거리는 마음이 자락을 드리우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없건만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의 은혜가 1센트밖에 더되냐고 되묻는 것처럼 .
하나님께서 햇빛을 너무 강하게 주셔서 광야가 되고 말았는가?
주님
아직 황폐해 있는 한 내 마음의 한 구석을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찬송할 마음을 회복케 하소서!
15년만에 만나게 된 이모님과 함께 나이아가라 갔습니다. 그곳에 머물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나누는 동안 제 안에는 깊은 감사가 솟아났습니다.
저절로 찬송이 솟아나왔습니다. 40장에 맞추어 찬송을 지었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나이아가라
하늘 높이 뜬 언약의 무지개
물보라 속 날으는 저 물새들
넘치는 주의 은혜 노래해.
만왕의 왕이 우리 안에 입성하시길 원하십니다.
평화와 겸손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자유함과 사명을 회복하시길 원하십니다.
기쁨과 찬송을 회복하시길 원하십니다.
이번 종려 주일에 이 놀라운 주님을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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