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오늘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에게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하셨던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일곱 번째 되는 주일로, 성령께서 직접 교회에 찾아 오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지 50일이 되는, 그러니까 5순(열흘 순旬)이 지난 날이었습니다.
부활 후 50일째가 되기 때문에 오순절(五旬節),
성령님께서 세계 만민을 향한 공동체 위에 임하셨기에, 기독교는 이 날을 교회의 시작으로 계산합니다.
교회가 성령 하나님께 절대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은 어떤 분이실까?
어떻게 성령 체험을 할 수 있을까?
성령의 세례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을까?
성령의 은사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이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을까?
오늘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에게 주시는 영적 보배로 갈라디아서 강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1.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으로 주십니다.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 사도는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다는 신분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다는 학벌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열심이 있었다는 것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다녀온 삼층천에 대하여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받은 은사들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생각하였습니다.
대신 그는 오직 한 가지를 자랑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 보배를 만나고 난 후, 모든 세상 자랑은 다 버렸습니다.
배설물처럼.
왜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에게 주신 구원은 너무나 찬란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은 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48장 만유의 주제란 찬양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주예수 빛은 더 찬란하여 참 비교할 수 없도다 아-멘"
왜 그렇습니까?
1]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를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 안에서 성령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성령에 관한 서신이라 할 만큼 성령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12/191번이나 성령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에 관한 말씀을 정리하면
- 성령은 율법을 행함을 통해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받습니다.
[갈라디아서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라디아서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라디아서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갈라디아서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라디아서 3:3 ]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부자 청년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계명을 다 지키었나이다!"
내가 내 힘으로 계명을 지켰습니다.
선한 행동이 많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법을 지켰습니다.
돈을 벌었습니다.
건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썩어질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슬픈 기색을 하고 떠났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행위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내 자신이 완전히 죽어야 성령을 받게 됩니다.
내 자아가 끝나는 곳에서부터 성령께서는 인도를 하십니다.
[조지 스위팅]은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어떤 곳을 채우려면 먼저 그곳을 비워야 한다.
당신의 인생이 무기력하다 면 그것은 당신이 완전하게 성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있으므로 우리 생활의 전역을 주장하길 원하지만 전역을 주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욕심, 정욕,허영심,고집,향락 등이 성령의 지도를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우신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자아를 비우기 시작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였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이 순간부터 하나님께로서 오신 성령께서 일을 시작하십니다.
2]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내 인생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세상 무엇도 영향을 미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예수를 믿게 된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모두 성령의 역사입니다. 나의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이의 마음 속에 성령이 계셔서, 우리 마음과 생활의 전 영역을 주관하고, 충만하게 하십니다. 나의 공로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시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보배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해서 이루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율법주의적 삶을 내려놓고 성령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 성령을 좇아 살아가면 놀라운 열매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예화>
영국 런던의 유명한 샤프츠버리(Shaftesbury)경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건너는 횡단보도에 한 어린 아이가 서서 도저히 차들이 질주하는 길을 건널수가 없어 망설이다가 마침 샤프츠버리 경이 오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 "아저씨 나좀 도와 주세요" 라고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샤프츠버리 경은 그 어린아이 를 안고 길을 건너서 아이를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즉 우리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때에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하면 주님이 도와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새로 지으심을 받습니다.
15절]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마틴 루터는 인생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가 보통 사람이라고 하는 것인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저 무사안일하게 살 아갑니다. 자신이 더러워 졌다고 하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것도 느끼지 못 합니다. 무감각자 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속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율법으로 위협을 느끼고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좀 바로 살려고 무한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도덕가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자기 죄도, 하나님의 진노도 모두 깨달아 알고 자기만으로 는 멸망 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 얻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 입니다.
이 세번 째 인생은 오직 위로부터 난, 새로 지으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성령에 해당하는 '루아하'라는 말은 구약성서에 378번이나 나오고 신약성서에는 '프뉴마'와 '파라클레이토스'라는 말로 표기되고 있습니다.이 영(靈)은 믿는 자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 더 나아가 이웃과 세계로 결합시켜 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기도 한 이 영은 그의 활동영역이 넓기 때문에 다양한 형식으로 체험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죽은 자들이 새 생명을 얻고 세계는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 위에 머물 때, 사람을 새롭게 하는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이 영이 임할 때 어린이들과 청년들, 여인과 노인들이 꿈을 꾸고 비전을 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요엘 2:28). 이 영은 진리의 영으로서 죽음과 죄의 세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종국적으로 이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는 역사의 원동력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이 영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우리 모두는 초청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서 종살이 하며, 해방되지 못하고, 허무한 것들에 얽매어(롬8:20)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우리와 지금도 함께 하시며, 함께 탄식하고 계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이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동역자로 부름 받는 사건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이여 오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성령과 함께 기도하면서 새사람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화]
중동 산육국들은 지하수에 염분과 석회분이 많아서 그대로 식수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담수화 공장을 많이 세운다고 합니다. 이는 물이 흐르는 큰 수도관 속에 화덕 같이 뜨거운 불이 흐르는 작은 철관을 여러개 지나가게 하여 수도관의 물을 뜨겁게 하여 물이 증발되게 하는데 물을 더욱 증 발시키기 위하여 한쪽에서 강한 바람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렇게 증발된 수증기를 냉각하여 증류수를 만들고 여기에 약품을 가미하여 식수로 사용합니다. 염수나 더러운 물이 아무리 담수가 되려고 해도 스스로는 되지 못하는 것 같이 죄로 더러워진 인간의 영혼은 성령의 뜨거운 열과 강한 바람을 통해야만 죄로부터 분리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우리 영혼이 도저히 죄에서 놓임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는 수도관 속에서 물을 뜨겁게하고 증발되게 하는 철관과 같습니다. 그곳에 닿은 물들이 증류수로 변하는 것과 같이 십자가를 제대로 만나면서, 우리는 증류수가 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쓸만하고 먹을만한 새로운 물 곧, 염수나 담수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바로 이렇게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습니다.
17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1] 성령의 주시는 힘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사람입니다.
엡4:11-12 이 밝혀주고 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봉사의 일을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위해서이다.
즉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주신 것이 아니란 말씀이다. 자기의 명예를 나타내도록 주신 것이 아니다. 자기 자랑하도록 주신 것이 아니다.자기 편리 위해 주신것이 아니다.
또한 육신 위해 주시는 것도 아니요 세상적인 유익도모를 위해 주신것도 물론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본주의적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개인위주로 주신 것이 아니다. 오직 교회 위주로 주신 것이다. 남의 유익을 도모하도록 주신 것이다. 건덕위해 주신 것이다. 교회부흥 위해 주신 것이오 교회봉사 위해 주신 것이며 성도봉사 위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 영광 나타내도록 주신것이다.
2] 벧전 4:10 은 선한 청지기처럼 겸손한 사역자가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사람입니다.
주인의식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만 종의 자세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맡은 은사가 마치 자기 소유인양 교만한 자세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자세 봉사하는 자세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사람입니다.
3] 감사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사람입니다.
보혜사를 (R.S.V)에는 상담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밤에 바리새 사람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와 상담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상담이 끝난 후 니고데모는 변화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예수의 제자들은 다 도망쳐 버렸으나 공의회의 의원이었던 부자 아리마대 요셉과 공의회의 의원의 한 사람이었던 니고데모, 두 분이 예수의 시신을 안장하였습니다.(요 19:38~40)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감사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예화]
별미를 좋아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너무 놀라운 음식의 맛에 감탄하여 요리사를 불러 상을 주려했습니다.
요리사는 싱싱한 야채 덕분이라면서 그 공을 야채장수에게 돌렸습니다.
야채 장수는 그 공을 농부에게 돌렸습니다.
농부는 그 공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감사는 그 하나님 형상을 받은 사람들이 가진 흔적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생깁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무리하는 말]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 '이란 시를 소개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집 <주막에서> (1979)
우리의 소풍이 끝나고 돌아갈 날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으심으로
자랑이 변한 인생
새로워진 인생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인생으로 하나님 앞에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성경본문]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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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우리는 성령이 인격을 가지고 계심을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함께 창조사역에도 참여하셨고 선민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도 이끌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에게 감동 감화를 주어 예언도 하게 하셨고 성서를 기록하게도 하셨습니다.
또한 성자시대에도 성령은 우리 주님과 항상 함께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 또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시는 분으로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시대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주님 재림하시는 때까지 성령께서 놀랍게 역사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모든 역사는 성령이 주역으로 강하게 활동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감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을 모신 자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는 특별감지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가진 재산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죽음에 자기 결정권이 있는가? (양봉식 sunyang@amennews.com)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고국을 충격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유명연애인의 자살과 함께.
“죽을 권리 있다”
존엄사를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 모 일간지의 헤드라인 제목입니다. 이 제목만을 두고 보면 여러 가지를 유추하게 된다.
자살을 할 권리가 있다는 말도 되고, \
안락사도 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독자의 호기심을 끌기위한 자극적 제목이지만 한편으론 너무 무책임한 언론플레입니다.
대법원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존엄하게 죽을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로 판결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대법원의 존엄사 인정판결은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무의미한 환자를 의료적인 장치로 연장하는 것은 환자가족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환자 당사자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데서 나온 발상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환자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모든 생명을 인간이 주도적이고 주권적으로 다룰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결정권은 더 나아가 안락사와 자살을 정당화시킬 수 있게 만듭니다. 삶이 의미가 없고 살고 싶지 않을 때 누구든지 죽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존엄사 인정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은 소멸되지 않는 영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의 생명은 죽으면 그것으로 소멸되지만, 인간의 생명은 죽으면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다시 말해 죽을 권리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생명의 관리자이지 생명을 자의적으로 처분할 신분이 아닙니다. 상황윤리 가운데서 생명연장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 생명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주권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이 생명청지기의 사명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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