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13 February 2020
요일3:1-12 하나님의 자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들어가는 말
인생을 성실히 살다 떠나가신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성공하라고 부르지 않으셨다. 그러나 모두 다 성실하라고 부르셨다."
저는 이 말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한 구절을 바꾸어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출세하라고 부르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자녀다웁게 살아가라고 부르셨다."
제가 성경을 연구한 바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다웁게 살아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존재입니까?
1.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몸에서 태어났을 때,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 성도 안에는 하나님의 씨가 재창조적으로 심어졌습니다. 이는 위로부터 거듭난 성도를 의미합니다(요3:3). 개과천선이 아닙니다. 어떤 부분의 수선, 개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내 안에는 없는 하나님의 생명이 투입(投入), 이식(移植)되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존재를 의미합니다.(벧후 1:4)
하나님께로서 났으니 하나님 나라의 썩지 않는 씨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은 썩지도 쇠하지도, 더럽혀지지도 않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벧전1장)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성도들은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의식이 있습니다. “바꾸지 않으면 바뀌지 않습니다"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바뀌어야 할 의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이제는 세상의 사람 이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위로부터 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한다는 말씀입니다.(9) 하나님 아버지께서 쏟아 주시는 불가사의한 사랑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벤허'에서 보면, 벤허 유다는 원래 유대 귀족 계급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악한 친구의 의도적인 외면으로 인하여 형편없는 노예 신분으로 전락합니다. 노예선으로 끌려 다니며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신분으로 전락을 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유사합니다. 우리 인간이 못된 사탄의 계략에 떨어져 평생 죄의 종노릇하면서 살 수 밖에 없었던 모습과 같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졌습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어두움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신분이 전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노예로 고역을 치르는 동안에 로마의 함대 사령관을 만나면서 다시 한번 신분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로마 사령관이 그를 양자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노예의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귀족의 신분으로 바뀌어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의 신분이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한 것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버스가 비탈 아래로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른 쪽은 뾰족한 바위산이고 왼쪽은 시퍼런 강물이 흐르는 낭떠러지 절벽입니다. 그런데 모통이를 돌자 한 아이가 막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길 한복판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우러 다시 돌아왔다가 그만 그 차에 치어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차는 잠시 후 오르막길에 멈추어섰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바로 그 버스 기사의 아들이었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그 기사는 차 안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을 희생시켰습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진한 사랑을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으로부터 배웁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2.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6)
이산가족 상봉하는 모습 보면, 50여년 만에 만나는데 겨우 만나는 시간은 겨우 몇 시간에 불과합니다. 90넘는 노모가 아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어디가 어디가?” 하며 울부짖는데, 많은 사람들이 정말 가슴 아파했습니다.
부모는 자녀와 함께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안다면 하나님의 자녀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낙준 박사님이 기록한 초대 한국 초대 교회사에 보면, 교회 안에는 "개화교인"과 "기독교인"이 섞여 있었습니다. 기독교를 신문명으로 받아들이는 개화교인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105인 사건과 같은 핍박이 오자, 소위 개화교인들은 모두 다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오직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들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난이 올 때도 그리스도 안에 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진가입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립니다.
예수님께서 12세 되시던 유월절, 예수님을 두고 하룻길을 가다 곁에 없는 것을 알고 허겁지겁 돌아온 그 부모님은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했습니까?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안에 거하는 삶이 있었습니다.
외아들의 희생 대신에 살아남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3.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을 죄로부터 깨끗이 하는 자입니다.(3)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거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사실 때, 우리 안에 나타나는 열매가 의입니다. 그것은 죄를 짓지 아니하는, 곧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덧입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의로우신 주님의 의를 덧입어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는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그 안에 얼마나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원하시는가에 대하여 한 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영화 이야기입니다.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집을 나갑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홉 살 난 아들을 혼자 키우게 됩니다. 전에는 아내가 다 해주던 일을 이제 아버지 혼자 해야 되니까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는 아들을 양육하는 것과 자신의 직장생활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을 나갔던 아내가 불쑥 나타나서 아들을 자기가 키우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양육권을 놓고 법정싸움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이름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입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남편의 변호사가 "아무래도 당신이 불리합니다. 당신 아내가 승소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아들을 양육하고 싶습니까?"라고 하면서 백지를 가져다가 가운데에 수직으로 줄을 긋고 다시 말했습니다. "왼쪽에는 아들을 키우면서 얻는 이득을 적고, 오른쪽에는 아들을 키우면서 얻는 손해를 적으십시오. 그리고 정말로 당신이 양육권을 고수할 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하시오." 그래서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아들을 재워놓고 변호사의 말대로 백지에 줄을 긋고 먼저 손해가 되는 부분을 적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손해되는 게 많습니다. 직장생활에도 지장이 되고, 개인생활에도 지장이 되고, 친구도 제대로 만날 수 없는 등 많은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반대쪽에 아들을 키우면서 얻는 이득을 적으려고 하는데,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뭘 적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백지를 책상 위에 놓고, 아들방 문을 열고 잠을 자고 있는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꼭 껴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는 너를 정말로 많이많이 사랑한단다." (김영준)
그 아이를 원하는 분이 아버지이든 아니면 어머니이든 그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확실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잠자고 있는 어린아이입니다. 그를 사랑하고 기르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루는 부모의 사랑을 안다면 우리 자녀들은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가를 알게되면.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외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어떻게 다시 범죄할 수 있겠습니까?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자녀 자격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자신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삼 남매를 이렇게 해서 하바드,MIT에 보냈다. 라는 제목의 책 서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여자가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이길 수 있었고, 나태로부터 일어설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아이들 때문에 신에게 기도 드리는 숭고한 마음을 갖출 수 있었다. 세 아이들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주었다. 여자로서 엄마가 되어 누릴 수 있는 영광과 행복을 다 안겨 주었다. 내가 그들의 엄마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였다.
사랑할 때, 유혹으로부터 이길 수 있습니다.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세상을 사랑하는 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랑을 하나님께 받아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되었는가를 알 때, 세상의 죄를 피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유대인들이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서 불렀던 노래 중에 '아니 마민'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이 말의 뜻은 '나는 믿는다'입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시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신다."(조봉희)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는 자신을 죄에서 깨끗이 합니다.
조금 지체될지라도 정결하게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거듭난 자녀가 옛사람에 속한 죄들을 벗어버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지난 토요일 밤에는 토론토 지역의 교회 찬양대원들이 연합하여 찬양의 잔치를 가졌습니다. 12개 교회의 아름다운 찬양단원들과 국악, 관현악단원들이 펼치는 찬양을 들으면서 오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내가 바로 그러하구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이토록 귀한 것이로구나!
저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놀라운 찬양을 듣게 하시는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놀라운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가문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누리며 살지 못합니다.
의를 행하는 대신 죄의 종노릇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아 자녀된 것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다웁게 삽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열매맺고 삽시다.
죄를 이기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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