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24 August 2021

유진 벨

소명

유진 벨(Eugene Bell)은 1868년 4월 1일 미국 켄터키 주에서 태어났다. 켄터키 주 센트럴 대학교를 졸업하고(1888~1891), 켄터키(UTS) 신학교를 졸업했다(1892~1893). 이어서 루이스빌 신학교를 졸업했다(1893~1894). 유진 벨은 남장로교 제2진 선교사로 아내 로티(Lottie W. B.)와 함께 1895년 4월 9일 한국에 왔다.
그는 서울 정동에 있는 딕시 하우스(Dixie House)에서 한국의 풍습과 한국어를 배웠다. 한국어 선생은 변창연이었다. 나주 지역 선교를 위임받은 그는 어학 선생 변창연과 함께 나주로 가서 1896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나주 지역을 답사했으나 주민(유생)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거처도 얻지 못하고 그해에 개항한 목포로 갔다.

목포 선교부

1898년 3월부터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초가에서 8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다. 땅을 사서 우물을 파고 교회당을 지었다. 1898년 5월 15일 입당 예배를 드렸다.
낯선 나라에 와서 지역 주민들과 사귀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주민들과 사귀기 위해서 매월 15일에는 살림집을 개방하고 구경시키는 날로 정해놓고 누구라도 들어와서 둘러보고 구경할 수 있게 했다. 곧이어 의료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이 부임해왔다. 오웬의 합류로 유진 벨의 선교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아내의 병사

로티 위더스푼 벨(Lottie Witherspoon Bell)은 1867년 미국에서 태어나 아우크스투스 여자신학교를 1889년에 졸업했다. 남편 유진 벨과 함께 1895년 4월 9일 입국했다. 1896년 5월 27일 서울에서 아들 헨리를 낳았고, 1899년 1월 6일 목포에서 딸 샬롯을 낳았다.
목포에서 선교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일어났다. 1901년 4월 아내 로티가 딸 샬롯(Charlotte)을 낳은 지 2년 되던 해에 병명이 밝혀지지 않은 풍토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남편이 지방 선교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에, 로티 벨은 아들 헨리와 어린 딸 샬롯을 품에 안고 숨을 거두었다. 1901년 4월 12일의 일이다.
이때 유진 벨은 전주에서 아내가 위독하다는 기별을 듣고 목포로 달려왔으나 아내가 숨을 거두고 4일이 지난 후에야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로티 위더스푼의 무덤은 서울 양화진에 있다.
로티 위더스푼은 1895년 4월~1898년 2월까지 서울에서 한국의 풍습과 한국어를 배웠고 1898년 3월~1901년 4월 12일까지 목포 선교부에서 땀과 눈물을 뿌린 뒤, 사랑하는 남편과 철모르는 아들과 딸을 남겨놓고 갔다.
장례를 마친 유진 벨은 엄마 잃은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선교사 자녀들 중 풍토병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허다했거니와 엄마 잃은 두 아이를 데리고 선교지에서 살아갈 일이 캄캄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누이에게 맡기고, 1902년 10월 30일 다시 입국한 그는 자리를 비운 동안 다 흩어져 몇 명 남지 않은 신자들을 모아 150~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당을 지었다. 1903년에는 세례를 받고자 준비하는 교인이 101명이었다고 한다. 그는 정명 학교와 영흥 학교도 설립했다.

광주 선교부

유진 벨은 1904년 마가렛 불(Margaret Bull, 1873~1919)과 재혼했다. 마가렛은 군산에서 사역하고 있던 윌리암 F. B.의 여동생으로 버지니아 놀포크 출신이었다. 1904년 봄, 광주에 선교부를 개설했다. 광주 남쪽 성벽 가까운 곳에 대지를 매입하고 교회당을 지었다.
광주에서의 첫 예배는 1904년 눈 내리는 성탄절에 유진 벨의 임시 주택에서 드려졌다.
유진 벨과 오웬 가족, 어학 선생 변창연 그리고 요리사들이 자리를 함께 했고 마을 사람들이 참석해 줄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 막연히 기다리는데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고 놀라 반갑게 맞았다고 한다.
남자들은 한 방에 모여 앉고, 여자들은 또 다른 방에 모여 앉았다. 유진 벨은 양쪽 방을 다 바라볼 수 있는 가운데에 서서 예배를 진행하며 설교를 했다고 한다. 이 때 모인 주민들은 선교사의 살림살이(이삿짐)가 궁금한 40명의 구경꾼들이었다고 한다. 이삿짐의 큰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이런 것들에 호기심이 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진 벨 부부는 주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석해 준 것에 만족하고 고마워했다고 한다.
1905년 오웬 선교사와 함께 양림동에 근대식 병원 제중원(지금의 광주기독병원 전신)을 개원했다. 1907년 유진 벨의 사랑방에서 2명의 남자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같은 해 문간방에서 3명의 여자 아이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이후 1908년 광주 숭일 학교와 수피아 여자 학교로 발전하였다.
교회 창립 6년만에 교회 성도가 오백 명이 되었다. 교인들이 차고 넘쳐서 세 번이나 교회당을 증축했다고 한다. 유진 벨의 선교 지역은 25개 군(郡)으로 1910년에는 세례 교인이 일천오백 명이었다. 유진 벨은 성격이 느긋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영력있는 유능한 목회자(선교사)였다고 한다.
1919년 3월 26일 마가렛은 서울에서 선교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병점 철도 건널목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장례식은 광주에서 거행되었고 광주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진 벨은 1922년부터 평양 장로교 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그는 57세에 별세했으며, 광주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진 벨 기념 재단

1995년 유진 벨 선교사의 한국 선교 100주년이 되던 해에 그의 4대손들이 미국에서 유진 벨(선교 100주년) 기념 재단(Eugene Bell Foundation)을 설립했다. 2002년에는 같은 이름의 재단을 한국에서도 설립했다.
유진 벨 기념 재단은 북한 식량 지원 및 결핵 치료 의료 시스템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유진 벨 기념 재단은 지난 10년간 북한 지역 13개소의 결핵 예방원과 63개의 결핵 요양소에 의약품을 지원하며 20만 명의 북한 결핵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한다.
유진 벨 기념 재단 이사장 스티브 린튼은 휴 린튼의 둘째 아들로 자신의 어머니가 순천에서 1960년 이후 평생을 봉사해왔던 결핵 퇴치 사업을 토대로 하여 현재까지 10여 년 동안 북녘 동포들을 위해 결핵 퇴치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kilwonpil@hanmail.net

출처 : 크리스찬저널(http://www.kcjlogos.org)

Saturday, 6 February 2021

네가 행복하기까지

 

네가

행복하기까지
나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네가
자유하기까지
나의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니다.

네가
건강하기까지
나의 건강은
온전한 건강이 아니다.


어릴 때

나는
주리는 너를 보고도
배부를 수 있었다.

네가 헐벗은 때에도
나는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네가
실패로 흐느낄
 때도
나는 
성공을 춤출 수 있었다,


철이 들면서
나는 알았다.


네가

행복하기까지
나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님을.

네가
자유하기까지
나의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님을.

네가
건강하기까지
나의 건강은
온전한 건강이 아님을.


필요투성이인
형제를
나의 곁에 두신 

아버지의 마음을


너는
나의 아픈 눈일 수 있었는데
너를 소중히 지켜오지
못해
미안해. 


Tuesday, 16 June 2020

까똑소리

One Korea 한반도 자전거순례 1


- 까똑소리



One Korea를 꿈꾸는
노새

순례 길

함께 하는 형제들
이리 저리 마음을 엮어,

까똑방 열었다.


이화령 한계령 
헉헉 오르노라면
인간한계도 턱밑에 이른다.


그 아름다운 새소리도
차오르는 숨소리에 묻고

전후좌우 둘러보아도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산을 향하여 눈을 드는 절박한 순간


까똑!”



해는 한사코 산기슭으로 기울어
가야할 길 멀어
몸은 파김치가 되어 가
쉬어 갈 숙소 보이지 않아


힘내라!

까똑!”

정신 차려!

까똑!”


등 떠미는

까똑!”



그 문자 
그 내용 
확인할 겨를이 없다만,
외마디처럼
하늘로부터 내려 와
거룩한 고독 속에 사랑을 피우고
사라져간
신비로운 소리!

까똑!”

Monday, 8 June 2020

수락산 순례

가고 가도
새롭게
펼쳐지는
수락산 계곡 길!
 
 
이 길이 다하면
어떤 감동을 펼쳐 보이시려나?
 
 
 
볼 부은
부엉이 울음소리
예사롭지 않고
 
이름 모를 새들은
나눌 사연이 많은데
 
말없는 바위도
이름 없는 정자도
멜로디만 붙이면
곧 찬송이 될 법한데
길 가는 노인
한 분,
부채만 흔들고 간다.
 
 
같은 아버지를 믿음 안에 둔
나그네
당고개 갈림길을 가며
그날,
함께 천국 길을 걷게 될
그 환상적인 형제자매들
기도에 담는다.
 
 
 
한 번 꺼지면
가고 다시 못 올 생명
미련일랑 내려놓고
영생으로 날기를
기도한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던
아버지
 
내가 곧 길이라신
주님
 
그 확정된 길 뒤로 하고
헤매는 중생들!
 
 
 
 
때로는
끝이 보이지 않은 길!
오르고
또 올라도
버겁기만 한 오르막 길
 
뉘엿뉘엿
해는 기울고
땅거미는
산자락에 젖어드나니
 
이러한 때는
 
거인의 발자국을 보라!
독수리의 비상을 생각하라!
 
그분은
이미
골고다 언덕 오르셨고
벌써
십자가로 날아 매달리셨나니.... .
 
 
 
 
 
 
쓴 커피를
달게 마시고
뜨거운 국물을
시원하게 느낄 때
 
나는
벌써
날고 있는 것이다
.
그러한 날에
자신을 부인하고
그분 앞에
납짝 엎드려 보라!
 
 
놀랄 것이다.
 
주와 함께
날아오르는 이가
나일 수 있음에.
 
.
 

Friday, 14 February 2020

제임스 홀;로제타 홀; 셔우드 홀 선교사

언젠가 고국에 가면 양화진에 가 보리라
몇년을 두고 벼르던 터였다.
내 민족을 위해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님들이 잠들어 있는 그 동산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꼭 보고 싶은 분의 묘지가 있었다.

1.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

나는 그분의 비문 앞에 서서
99%의 순금 목거리를 생각했다.
14k 목거리만 몸에 걸어도 진짜 금목거리처럼 아름다운데
그의 삶을 읽었던 나에겐 순금목거리만 같았다.

당신의 흉한 상처를 가려주기 위해 
100년 하고도
10년 전
어느 날,
과년한 처녀가 찾아왔다.
15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하면 문제가 있다는 조선 땅에서
16세가 넘도록 시집을 못간 처녀가 찾아왔다. 
맙소사!
그녀의 손가락은 세 개가 손에 붙어 있었다
불난 집에서 이 끔찍한 화상을 입은 것이로구나.
의사 선교사로 오지를 찾아온 홀 선교사는 
손가락을 떼어 펴 주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하고 
한숨을 쉬었다.
볼상 사나운 수술자국을 피부 이식으로 덮어주고 싶으나
무지몽매한 원주민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피부를 벗겨내어
그녀의 상처 위에 붙임으로 수술을 마쳤다.
놀란 조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자기 껍질을 벗겨 병자를 치료해주는 사람이라고.
온전해진 그녀의 손을 보는 사람들의 가슴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붙었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제 그 조선 사람들은 
만여 명의 선교사를 땅 끝까지 파송하고
자기들의 껍질을 벗겨 선교지 상처를 덮어주고 있다.

선교란 상대의 흉한 상처를 가려주기 위해 내 껍질을 벗기는 것이기에........ 


그가 하나님께 맡은 지경, 
평양에 전쟁이 왔다.
그리고
싸움이 끝난 지 3주가 지났어도
의사인 그의 일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들 셔우드가 정말 보고 싶구나 
그러나 너의 첫돌에도 난 서울에 갈 수 없다."

아빠가 부재 중인 서울의 가정에서는 
첫 생일을 맞은 아기 셔우드 앞에 진기한 물건들이 놓여있었다.
조선의 풍속대로 아이가 평생의 직업을 선택하는 장면 연출이었다.
상징을 따라 누더기 인형(거지), 책(교사), 성경(목사), 괭이(농부), 청진기(의사)가 놓여졌다.
어린 아가는 어떤 물건을 잡을 것인가?
아기 셔우드는 꼬막 손으로 청진기의 고무호스를 잡았다.
사람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해피 버스데이'를 불렀다.

홀 선교사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부인과 아들 곁에 도착했을 때
그의 온 몸은 중병에 걸려 있었다.

"건강할 때 돌아와 아내를 만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병이 났을 때 집에 돌아와 눕는다는 게 얼마나 편한가를 알게 되었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구하러 자신을 불태우던 그는
더 이상 태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끝냈다."

미국에서나 조선에서나 '아이들의 친구'였던 그는 
하나뿐인 자신의 아들과는 말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영원한 작별을 고하려 하고 있었
다.

그가 마지막으로 부인에게 말하고자 애썼던 말은 이것이었다.

"내가 평양에 갔었던 것을 원망하지 마시오.
나는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소." 

1894년 11월 24일, 석양이 물들 무렵
그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고요히 잠들었다.
아름다운 서울 한강변 양화진에 몸을 뉘었다.
영원한 안식일에 다시 깨어날 때까지 평안히 잠자기 위해

그는 자신의 껍질만 조선인에게 벗겨 준 것이 아니었다.


2. 부인 로제타 홀 선교사 


건강한 사슴은 목이 마를 때, 시내를 찾고
배가 고플 때, 푸른 풀을 찾는다.
그러나 늘
푸른 시냇가에서만 살지 않는다.
푸른 초장만 거닐지 않는다.

그는 암벽 위를 뛰어다니고
때로 절벽과 절벽 사이를 넘나든다.

1898년 5월 1일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사역하다 쓰러진 평양에, 그 부인인 
닥터 로제타 홀 선교사는 그가 남겨놓은 두 자녀(셔우드와 에디스)와 함께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무서운 이질이었
다.
세 사람이 모두 이질에 걸렸지만 이제 갓 세 살이 되어 가는 어린 딸 에디스에게 그 고통은 
더욱 심했다. 여기 그의 마지막 순간을 적은 어머니의 일기를 소개한다.
5월 23일 새벽 3시 30분에 다시 고통스러워 했다. 병이 난 후 처음으로 에디스
는 안아달라고 했다. 심히 고통스러워하는 이 작은 얼굴..... . 
아침 10시 경, 나는 흰 민들레를 에디스의 손에 쥐어 주었다.
오후 3시 아이의 손과 발이 차다. 얼굴과 몸은 뜨거워 섭씨 39.5도
오후 6시 45분 아이는 쉬지 않고 숨을 물아 쉬고 메스꺼워 했다.
7시 15분 열은 40.5도
8시 25분 열은 섭씨 41도. 숨이 가쁘다. 나는 에디스를 팔에 안고 전에 낮잠 재
울 때 하던 것처럼 흔들어 주었다. 아이는 훨씬 조용히 숨을 쉰다. 만족한 것 같아 보인다. 
아이의 얼굴은 평화스러워졌고 호흡의 간격도 길어졌다. 크게 뜬눈으로 엄마를 보면서 이 
작은 영혼은 이렇게 떠나갔다.
오후 8시 40뷴. 에디스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닥터 홀이 우리 곁을 떠날 때, 하나님이 주신 보석 같이 귀한 에디스가 평양의 새 집에 정
착하기도 전에 우리 품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디스를 데려갔다고 하자 그의 오빠 네 
살배기 셔우드는 첫 마디에 말했다.
"아빠가 에디스를 너무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데려가셨을 거예요."
장미꽃들을 관 위에 얹고 아펜셀러 목사님은 성경을 읽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그리고 말씀을 전해주었다. 
"당신의 사랑하는 딸 에디스는 지금 아빠 품에 안겨 잠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 가족의 절반은 이미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닥터 로제타 홀 선교사는 68세가 되기까지 43년간 우리 동족을 위해 봉사했다.
조선 처음 맹인 교육을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부인 병원(현, 이대부속병원),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교(현, 고대의대) 등을 세우셨다.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시18:32)

우리는 닥터 로제타 홀 선교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진정 아름다운 사슴의 의미를 만난다.


3. 아들 닥터 셔우드 홀과 그 부인 닥터 메리안 홀 선교사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도 젊은 나이에 천국 가고
그 어린 동생 에디스까지 애처롭게 죽어간 조선 땅인데 
셔우드 홀은
1893년 서울 생으로 신고되었다.

그가 조선 땅에서 자란 후
미국과 캐나다의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의사 수업을 마치고
부인 의료 선교사 메리안 홀까지 데리고 다시 조선에 올 줄을 누가 알았으랴! 

무슨 권한으로 아내를 이런 벽지로 끌고 와 '고통'을 받게 하는가!

그러나 그는 황해도 해주 땅까지 왔고
1933년,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조선의 폐결핵과 싸울 구세 요양원을 처음 세운다.

믿음의 사람들 바다 건너서 헌금을 보내오고
가진 것이 없는 나라에서 될성싶지 않던 '크리스마스 실'을 이끌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들이 주관하는 '실' 운동, 성공시켰으니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복음의 텃밭 되었으랴!

불쌍한 민족 사랑한 것도 죄라고
강점한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기까지
2대에 걸쳐 희생으로 믿음을 표현한 홀 선교사 가문
박해 속에서도 의롭게 썩은 기독교의 밀알이었기에
비웃어도 30배로
시달려도 60배로
죽여도 100배로 결실을 얻어
선교 대상국이었던 이 나라가
오늘날 그 조선은 선교 강국이 되었으니

하늘보며 하나님께 감사를,
땅에서 당신 가문에 감사를 올립니다.

*** '조선회상'이란 책에서 홀 선교사 가문의 감동적인 모습을 읽고 은혜를 입은 한국민족
의 후손으로 적어보았습니다. 
크리스챤 월드에서 추수감사절 감사의 글을 부탁 받고 특히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신 선교사님들께 감사하는 의미로 '당신 가문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