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14 February 2020

제임스 홀;로제타 홀; 셔우드 홀 선교사

언젠가 고국에 가면 양화진에 가 보리라
몇년을 두고 벼르던 터였다.
내 민족을 위해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님들이 잠들어 있는 그 동산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꼭 보고 싶은 분의 묘지가 있었다.

1.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

나는 그분의 비문 앞에 서서
99%의 순금 목거리를 생각했다.
14k 목거리만 몸에 걸어도 진짜 금목거리처럼 아름다운데
그의 삶을 읽었던 나에겐 순금목거리만 같았다.

당신의 흉한 상처를 가려주기 위해 
100년 하고도
10년 전
어느 날,
과년한 처녀가 찾아왔다.
15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하면 문제가 있다는 조선 땅에서
16세가 넘도록 시집을 못간 처녀가 찾아왔다. 
맙소사!
그녀의 손가락은 세 개가 손에 붙어 있었다
불난 집에서 이 끔찍한 화상을 입은 것이로구나.
의사 선교사로 오지를 찾아온 홀 선교사는 
손가락을 떼어 펴 주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하고 
한숨을 쉬었다.
볼상 사나운 수술자국을 피부 이식으로 덮어주고 싶으나
무지몽매한 원주민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피부를 벗겨내어
그녀의 상처 위에 붙임으로 수술을 마쳤다.
놀란 조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자기 껍질을 벗겨 병자를 치료해주는 사람이라고.
온전해진 그녀의 손을 보는 사람들의 가슴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붙었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제 그 조선 사람들은 
만여 명의 선교사를 땅 끝까지 파송하고
자기들의 껍질을 벗겨 선교지 상처를 덮어주고 있다.

선교란 상대의 흉한 상처를 가려주기 위해 내 껍질을 벗기는 것이기에........ 


그가 하나님께 맡은 지경, 
평양에 전쟁이 왔다.
그리고
싸움이 끝난 지 3주가 지났어도
의사인 그의 일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들 셔우드가 정말 보고 싶구나 
그러나 너의 첫돌에도 난 서울에 갈 수 없다."

아빠가 부재 중인 서울의 가정에서는 
첫 생일을 맞은 아기 셔우드 앞에 진기한 물건들이 놓여있었다.
조선의 풍속대로 아이가 평생의 직업을 선택하는 장면 연출이었다.
상징을 따라 누더기 인형(거지), 책(교사), 성경(목사), 괭이(농부), 청진기(의사)가 놓여졌다.
어린 아가는 어떤 물건을 잡을 것인가?
아기 셔우드는 꼬막 손으로 청진기의 고무호스를 잡았다.
사람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해피 버스데이'를 불렀다.

홀 선교사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부인과 아들 곁에 도착했을 때
그의 온 몸은 중병에 걸려 있었다.

"건강할 때 돌아와 아내를 만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병이 났을 때 집에 돌아와 눕는다는 게 얼마나 편한가를 알게 되었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구하러 자신을 불태우던 그는
더 이상 태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끝냈다."

미국에서나 조선에서나 '아이들의 친구'였던 그는 
하나뿐인 자신의 아들과는 말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영원한 작별을 고하려 하고 있었
다.

그가 마지막으로 부인에게 말하고자 애썼던 말은 이것이었다.

"내가 평양에 갔었던 것을 원망하지 마시오.
나는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소." 

1894년 11월 24일, 석양이 물들 무렵
그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고요히 잠들었다.
아름다운 서울 한강변 양화진에 몸을 뉘었다.
영원한 안식일에 다시 깨어날 때까지 평안히 잠자기 위해

그는 자신의 껍질만 조선인에게 벗겨 준 것이 아니었다.


2. 부인 로제타 홀 선교사 


건강한 사슴은 목이 마를 때, 시내를 찾고
배가 고플 때, 푸른 풀을 찾는다.
그러나 늘
푸른 시냇가에서만 살지 않는다.
푸른 초장만 거닐지 않는다.

그는 암벽 위를 뛰어다니고
때로 절벽과 절벽 사이를 넘나든다.

1898년 5월 1일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사역하다 쓰러진 평양에, 그 부인인 
닥터 로제타 홀 선교사는 그가 남겨놓은 두 자녀(셔우드와 에디스)와 함께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무서운 이질이었
다.
세 사람이 모두 이질에 걸렸지만 이제 갓 세 살이 되어 가는 어린 딸 에디스에게 그 고통은 
더욱 심했다. 여기 그의 마지막 순간을 적은 어머니의 일기를 소개한다.
5월 23일 새벽 3시 30분에 다시 고통스러워 했다. 병이 난 후 처음으로 에디스
는 안아달라고 했다. 심히 고통스러워하는 이 작은 얼굴..... . 
아침 10시 경, 나는 흰 민들레를 에디스의 손에 쥐어 주었다.
오후 3시 아이의 손과 발이 차다. 얼굴과 몸은 뜨거워 섭씨 39.5도
오후 6시 45분 아이는 쉬지 않고 숨을 물아 쉬고 메스꺼워 했다.
7시 15분 열은 40.5도
8시 25분 열은 섭씨 41도. 숨이 가쁘다. 나는 에디스를 팔에 안고 전에 낮잠 재
울 때 하던 것처럼 흔들어 주었다. 아이는 훨씬 조용히 숨을 쉰다. 만족한 것 같아 보인다. 
아이의 얼굴은 평화스러워졌고 호흡의 간격도 길어졌다. 크게 뜬눈으로 엄마를 보면서 이 
작은 영혼은 이렇게 떠나갔다.
오후 8시 40뷴. 에디스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닥터 홀이 우리 곁을 떠날 때, 하나님이 주신 보석 같이 귀한 에디스가 평양의 새 집에 정
착하기도 전에 우리 품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디스를 데려갔다고 하자 그의 오빠 네 
살배기 셔우드는 첫 마디에 말했다.
"아빠가 에디스를 너무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데려가셨을 거예요."
장미꽃들을 관 위에 얹고 아펜셀러 목사님은 성경을 읽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그리고 말씀을 전해주었다. 
"당신의 사랑하는 딸 에디스는 지금 아빠 품에 안겨 잠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 가족의 절반은 이미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닥터 로제타 홀 선교사는 68세가 되기까지 43년간 우리 동족을 위해 봉사했다.
조선 처음 맹인 교육을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부인 병원(현, 이대부속병원),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교(현, 고대의대) 등을 세우셨다.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시18:32)

우리는 닥터 로제타 홀 선교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진정 아름다운 사슴의 의미를 만난다.


3. 아들 닥터 셔우드 홀과 그 부인 닥터 메리안 홀 선교사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도 젊은 나이에 천국 가고
그 어린 동생 에디스까지 애처롭게 죽어간 조선 땅인데 
셔우드 홀은
1893년 서울 생으로 신고되었다.

그가 조선 땅에서 자란 후
미국과 캐나다의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의사 수업을 마치고
부인 의료 선교사 메리안 홀까지 데리고 다시 조선에 올 줄을 누가 알았으랴! 

무슨 권한으로 아내를 이런 벽지로 끌고 와 '고통'을 받게 하는가!

그러나 그는 황해도 해주 땅까지 왔고
1933년,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조선의 폐결핵과 싸울 구세 요양원을 처음 세운다.

믿음의 사람들 바다 건너서 헌금을 보내오고
가진 것이 없는 나라에서 될성싶지 않던 '크리스마스 실'을 이끌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들이 주관하는 '실' 운동, 성공시켰으니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복음의 텃밭 되었으랴!

불쌍한 민족 사랑한 것도 죄라고
강점한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기까지
2대에 걸쳐 희생으로 믿음을 표현한 홀 선교사 가문
박해 속에서도 의롭게 썩은 기독교의 밀알이었기에
비웃어도 30배로
시달려도 60배로
죽여도 100배로 결실을 얻어
선교 대상국이었던 이 나라가
오늘날 그 조선은 선교 강국이 되었으니

하늘보며 하나님께 감사를,
땅에서 당신 가문에 감사를 올립니다.

*** '조선회상'이란 책에서 홀 선교사 가문의 감동적인 모습을 읽고 은혜를 입은 한국민족
의 후손으로 적어보았습니다. 
크리스챤 월드에서 추수감사절 감사의 글을 부탁 받고 특히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신 선교사님들께 감사하는 의미로 '당신 가문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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