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돌봄을 쉬지 않은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
목회자 한경직은 둘째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였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한경직 목사는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교회의 3대 목표를 전도, 교육, 봉사로 정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였다. 그에게 있어서 봉사는 복음의 생활화요 신학의 실천이었다. 그것은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는 1936년경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았다. 복순이라는 다리 하나 없는 가엾은 어린 소녀를 돌보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두 아이로 시작했다. 1939년에는 남 신의주에 땅을 얻어 벽돌집을 신축하여 고아들과 노인들이 함께 기거할 수 있는 공동체적 복지 시설인 '보린원'을 만들었다. 1942년 일본경찰에 의해 교회에서 추방된 후에는 보린원 원장으로 그의 모든 시간과 정성을 고아들과 노인들을 돌보는 일에 다 쏟아 바쳤다. "그는 넓은 밭을 직접 일구고 분뇨를 나르며 거름을 주었다. 보린원에서 보낸 3년은 가난한 고아들의 아버지로, 선생으로, 농부로 살면서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성경을 읽고 명상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보린원 출신의 사업가 김재걸 집사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제가 고아원 보린원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복순이라는 다리 하나 없는 여자 아이와 국섭이라는 사내 아이 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보린원에 있으면서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제가 5학년 때는 보린원에 50명이나 되는 큰 식구로 불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목사님께서 남 신의주에 터를 장만하고 거기에 고아원과 양로원 건물을 새로 짓고 이사를 갔습니다. 목사님께서 아침마다 예배를 인도하시고 우리와 같이 농사도 지으시고 심지어는 똥통도 같이 메고 저희 원생들과 같이 식사하시며 같이 주무시고 했습니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으례히 그러는 것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커서 세상 물정을 알고 나서야 목사님이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린원 원생 김재걸과 윤승호는 해방직후 함께 월남하여 한 사람은 한 기업의 대표이사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의학박사와 의과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이렇게 그의 소감을 피력했다. "나와 윤 박사 부부는 한 피 받은 친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아원에서 자라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는커녕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훌륭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긍지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김선도 목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한 목사님은 교회는 언제나 불쌍한 자를 섬겨야 하고 외로운 사람을 돌봐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 들은 얘기입니다. 신의주에 가게 되면 남 신의주에 큰 둑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생활비를 타시면 그것을 가지고 그 동둑에 나오셔서 헐벗은 사람들에게 먹지 못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빈손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 때에 교회 장로님들이 '우리는 한 목사님에게 직접 생활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모르시게 사모님께 생활비를 드렸습니다' 하는 얘기를 신의주에서 들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남루한 사람을 보면 옷을 벗어주셨고, 먹지 못한 사람을 보면 음식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
한경직 목사가 1945년 10월 월남 후 12월 2일 서울 저동에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고 월남하는 피난민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동시에 양식과 거처할 숙소를 마련하는 일을 했다. 1946년 11월 베다니교회는 영락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영락교회는 피난민들과 실향민들의 안식처가 되었고 새로운 삶의 출발지가 되었다.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를 시작하면서 교회의 3대 목표 중의 하나를 봉사로 정하고 봉사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창립 1주년을 맞은 1946년 12월 1일 주일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민중들을 인도하고 돌보는 사회 봉사임을 밝혔다. "교회야말로 국가의 정신적 간성이며 황야에 헤메는 대중을 인도하는 진리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며 암야의 행로를 밝히는 광명한 등대이며, 거친 세해, 죄악의 파도에 빠져 죽어가는 인생들의 구원선이며, 피곤한 자의 안식처이며, 수난자의 피난처입니다. 이승준 목사가 지적한대로 한경직 목사는 "한국교회의 어느 목회자보다도 먼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사회구호사업을 교회의 중요한 사역으로 삼은 인물"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이미 그 해(1946년) 3월 16일 주일 "상부상조의 정신"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가난한자, 병든 자, 나그네 등을 돕는 상부상조임을 강조하며 호소했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했다. "오늘 우리 신자들은 이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정신이 교회 안에서 언제든지 흐르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구제의 대상은 과부와 고아, 무산자, 병자, 나그네, 죄수, 핍박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대하여 그들은 사랑으로써 상부상조의 정신을 발휘하였던 것입니다. 이 상부상조는 첫째로, 참된 사랑의 자연적 발로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이 상부상조의 생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모리배여, 이 진리를 아십니까? 피난민을 위하여 돈을 쓰는 것은 의무입니다. 자선이 아닙니다. 의무라는 것은 아니하면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가난한 자나 병자를 섬김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으로 이는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부인 집사들이 병자를 심방 할 때 '주님을 뵈러 갑시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셋째로, 교회는 상부상조의 단체로 인정하였습니다. 교회의 첫 일곱 집사는 봉사를 위하여 선택되었던 것이요, 교회에서 하는 헌금은 본래 구제 목적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와 제직의 근본 사명도 오직 전도와 구제였습니다. 오, 대한 교회여! 초대교회로 돌아갑시다. 초대교회의 상부상조의 정신은 지금 어찌 되었습니까? 오늘날 같이 나그네, 가난한자, 핍박을 당하여 부모 처자를 잃은 불쌍한 자가 많이 생길 때가 어디 있으며 오늘 날 같이 그리스도의 순애의 발로인 상부상조의 정신이 요구되는 때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베다니 교회 교우들이 초대교회로 다시 돌아가 깨끗한 생명수를 마시고 상부상조의 생활을 하지않으렵니까? 물론 우리도 다 같이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어떻게 하든지 먼저 온 이들이 뒤에 오는 이들을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때에 기독신자들이 돈만 많이 모아서 무얼 하시렵니까? 서로 돕고 서로 붙들면 다 살고, 나 혼자만 살려고 하면 다 죽고 맙니다. 즐거워 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슬픈 자와 함께 슬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사랑이 강제적인 어떤 사상보다 낫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십시다.
한경직 목사의 봉사의 목회는 그의 성서적인 교회관에서 비롯했다. 그는 교회에 대해서 설교할 때마다 교제와 봉사를 항상 강조했다. 1958년 6월 1일에 행한 "은혜 받은 초대교회"란 제목의 설교에서도 교회의 본질과 내적 생활의 중요한 것은 한 몸을 이룬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인데 이 교제란 말은 사귀면서 나눈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즉 은혜를 서로 나누고 경험을 서로 나누고 특히 물질을 서로 나누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요 내적 생활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여기 초대교회의 된 일을 볼 것 같으면 이렇게 은혜만 나눈 것이 아닙니다. 경험만 나눈 것이 아닙니다. 물질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얼굴을 알던지 모르던지 세계 어느 곳에 있던지 불쌍한 사람,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이 있을 때에 세계의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힘 있는 대로 물질을 바쳐서 그이들을 도와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 몸이 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아름다운 행실인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제직회 부서 가운데 봉사부가 제일 중요한 부서란 말이요. 그 다음에 상례부가 따로 생겼지요. 우리 영락교회 권사가 한 800명이나 된다고 그래요. 그분들이 다 일선 노장들이지요. 봉사부가 역할을 많이 했고 지금도 전통이 내려오지만 4째 주일은 꼭 쌀과 돈을 모아서 돌아다니며 아마 수 백호 나누어 주었시요. 상례부 조직하고서 상례 나면 가서 상복 지어주고 입관하고 장례식 일체를 돌보아주고 돈 없는 사람은 경비 안 받고 교회에서 그 책임을 다 졌거든요. 청계천 양 옆으로 피난민이 많이 있었는데 거기서 장례가 한번 났단 말이요. 영락교회 상례부가 가서 다 해주니까 그 댐 주일날 청계천 피난민들이 한 20여 세대가 와서 등록한 일도 있습니다. 어떤 제직회원이 와서 교회에 한 달 이전에 등록한 사람만 장례 해 주기로 하자고 제안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아무 걱정 말고 장례식 해 달라면 다 해 줍시다' 했시요…. 아,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돋는 일이 첫째지요." 영락교회가 봉사와 섬기는 일에 주력한 결과 피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교인들의 수는 급속도로 성장해서 1947년 1월에는 한국교회역사상 처음으로 2부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3월에는 영락 보린원을 설립하여 고아들과 노인들을 적극적으로 돌보기 시작했다.
한경직 목사는 1950년 6월 서울을 떠나 피난 길을 가면서도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잊지 않았다. 대전에서는 '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여 피난민을 구호하고 국군을 위문하는 일을 했다. 대전에서 미군 통역관의 일을 하던 한경직 목사는 인민군 포로를 심문하는 일을 돕고 있었는데 부상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어린 인민군을 심문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미군에게 부탁하여 그를 대전도립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다. 한경직 목사는 대구에서도 부산에서도 '기독교구국회' 운동을 벌이며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았다. 한국을 돕고자 부산에 와 있던 밥 피얼스 박사에게 부탁하여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목회자 가족에게 밀 가루를 배급하는 일도 했다. 한경직 목사는 전장에서 앰블런스에 실려 부산으로 후송되는 부상 병사들을 돌보는 일에도 힘썼다. 한경직 목사는 밥 피얼스 목사와 함께 기도회를 개최하고 피난민들을 돕는 일을 하다가 피얼스 박사로 하여금 미국에 돌아가서 월드 비젼을 창시하여 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의 피난민들을 돕게 했다. "그분이 모자원도 도와주고, 양로원도 도와주고, 피난민 수용소도 도와서 필요한 물질도 보내주고 병원도 짓고, 이런 좋은 일 다하면서도 이분이 목사고 전도에 관심이 많은 분이거든." 한경직 목사는 피얼스 박사를 가리켜 "사랑의 화신"이라고 극찬했다.
한경직 목사는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영락 보린원을 비롯해서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 등을 세웠다. 그리고 1990년 1월 17일부터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폭 넓게 펴나갔다. 그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그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의 입술과 손 발을 하나님의 도구로 다시 쓸 수 있게 힘을 준 은총에 감사합니다."
정진경 목사는 약한 자들과 함께 한 한경직 목사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의 삶의 자세는 예수님과 같이 눌린 자의 편에 섰고,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 소외되고 병든 자, 외로운 자의 벗이 되어 사셨습니다. 한 평생 영락교회와 대광중고등학교에서 한경직 목사를 보필한 이창로 장로는 목회자 한경직의 특징중의 하나는 '긍휼'의 목회자라고 지적했다. 한경직 목사는 항상 "긍휼하신 주님,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라고 말씀했는데 한경직 목사의 사랑과 봉사의 삶은 긍휼에서 비롯했다고 이창로 장로는 말했다. 이태형 기자도 한경직 목사의 사랑과 봉사의 삶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서 비롯했다고 분석했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 중에 '야웨 라하밈' 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기의 고난 당하는 백성들을 어머니와 같이 태 중에 안아 친밀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세계의 고통이 바로 하나님의 고난이라는 내적 지식에 도달할 때 야웨 라하밈의 참 의미는 구현될 수 있다고 한다. 한 목사님이 모든 계층을 뛰어넘은 그리움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그가 야웨 라하밈의 정신을 온 몸으로 실현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제 침략기와 6.25 등 민족의 격동기에 한 목사님은 고난 당하는 민중들을 친밀하게 돌봤다. 그 분은 알았다. 세계의 많은 폭력들이 상처 받은 내적 자아로부터 표출되는 절망의 행위며,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야웨 라하밈의 심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고통의 내면화와 승화를 통해 함께 부활의 기쁨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가 이런 목사님을 그리워하지 않겠는가?" 목회자 한경직은 긍휼의 사람, 사랑의 사람, 봉사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래오래 남아 있다. 그는 한국의 프랜시스요 한국의 슈바이쳐요 한국의 테레사로 우리에게 영원히 남아 있다.
한경직 목사는 인생의 삶을 지탱해 주는 세 가지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항상 강조하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강조했다. 가난하고 약한 자 그리고 원수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풀며 사는 것이 인간의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이라고 강조하며 그렇게 살았다. 그가 템플턴 수상 연설을 하면서도 결국 사랑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환자들을 사랑했고 자기의 두 아들을 사살한 공산주의자를 용서하고 사랑한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를 하므로 그의 연설을 다음과 같이 마쳤다. "손 목사는 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사랑의 본보기를 손수 보여준 것입니다. 그가 보여준 사랑의 실상은 원수까지도 용서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이렇게 설교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며, 언제나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는 봉사의 마음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종인 동시에 모든 사람의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사는 마음입니다. … 교회 역사를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 시설과 성직자 의복이 점점 호화스러워졌어요.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칼빈 선생은 '교회가 너무 화려해지고, 의식만 숭상하게 되고, 가난한 사람은 돌보지 않게 되고, 돈 많은 사람이 득세하게 되고, 이렇게 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그 분이 목사가 되면서 예배당에 있던 호화로운 모든 것을 다 없애고 간소화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늘 기억할 것은, 우리 사회 안에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언제나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배고픈 사람, 가난한 사람, 어려서 부모 잃은 사람, 무의탁 노인, 미망인 가정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종이요 모든 민중의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봉사할 때에 축복을 받습니다." 목회자 한경직은 돌봄을 쉬지 않은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였다.
한경직 목사의 봉사는 이기적인 봉사도 과시적인 봉사도 아니었다. 이타적인 봉사였고 드러내지 않는 숨은 봉사였다. 동족 사랑과 주님 사랑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봉사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과시성 사업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익추구를 위해 계산된 봉사를 하는 사람도 아니다. 한경직은 교회는 곧 봉사기관이다는 그의 목회신학의 원리대로 봉사에 집념했다. 인간을 잘 봉사함이 하나님을 잘 봉사함이다 라는 그의 명제는 왜 봉사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명히 답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그의 실천신학이요, 봉사신학이다."
한경직 목사의 사회 봉사는 정치신학 또는 민중신학적 사회참여와는 구별된다. 한경직 목사는 항상 정교분리의 입장을 유지했다. 그것은 그의 신학적 소신과 함께 인격적 자질 및 현실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치고 때리는" 방법으로 사회와 정치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고 품고 싸매고 조용히 충고하는 방법으로 사회와 정치에 봉사하려고 했다. "다만 이 사회 참여에 대하여 우리가 기억할 것은 교회와 정치는 반드시 분리되어야 합니다. 교회로써 정치에 직접 간여할 수 없고, 국가로써 또한 교회 내정에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의 소극적인 사회참여의 태도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지만 보다 높고 깊은 차원에서의 나라 사랑과 영혼 사랑의 동기와 소신에서 비롯한 봉사의 몸짓이었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그를 얼마든지 이해하고 흠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김용기 장로는 이렇게 그의 입장을 두둔했다. "뒤에서 욕하고 흉보는 일은 소인배가 하는 일이다. 또 정부의 잘못이 있을 때 의의 병기를 가지고 강단에서 내려치거나 사회인들이 욕하고 나무랄 때 덩달아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가며 은연중 '나만이 의인이다' 하는 식의 만용을 피우는 것도 소인배의 즐겨하는 짓들이다…. 백척간두에 선 국가의 운명을 눈 앞에 보면서 아무도 돌팔매의 대상이 되기를 꺼려하는 때에 한경직 목사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팽개치고 이 나라와 이 겨레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선지자다운 교훈의 말씀과 사랑의 손 길을 펴 보이시는 광경을 언젠가 TV를 통해서 볼 때 나는 평소의 갑절의 존경을 한 목사님에게 돌렸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할 터인데 그 길은 한경직 목사님이 걸어오신 발자취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믿는다."
자기 과시와 자기 명성을 위한 꽹과리 소리가 요란한 선전시대에 이름도 소리도 없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소유와 자신을 모두 허비한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를 우리는 한경직 목사에게서 발견한다. 한경직 목사는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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