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한경직은 셋째 화평의 목회자였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2,3). 한경직 목사는 교회 일을 보면서 제일 애쓴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것은 화평이라고 대답한 일이 있다. "교회 일을 보시면서 제일 애쓰신 것은 어느 점이었습니까? 교회 안의 화평이었습니다. 좋은 목표가 있다 하더라도 먼저 화평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할 수 있었던 일도 하지 못하고 마는 경우도 있긴 하지요. 그러나 아무리 뜻이 훌륭해도 온 교회가 하나 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손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 안에서 온유와 겸손을 바탕으로 화평을 이루어간 화평과 협력의 목회자였다. 최창근 장로는 한경직 목사의 목회의 첫째 특징을 화평의 목회라고 지적했고 이종성 박사는 한경직 목사의 목회의 특징 세 가지 중의 하나가 협력의 목회라고 지적했다. 영락교회의 장로로서 한 평생 한경직 목사를 보필했던 최창근 장로는 한경직 목사의 화목의 목회를 이렇게 회고했다. "제가 1961년도에 장로 장립을 받았는데 그 어른의 당회운영하시는 것을 직접 보고 새삼 깨닫고 은혜 받은 바가 정말 많았습니다. 워낙 30여명이나 되는 여러분들이 모여 의논하는 자리인 만큼 당회가 항상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는 것은 어디서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께서는 당회 진행 중에 어쩌다 의견이 분분하여지면, '여러분 다 저의 덕이 부족하여 이렇게 된 듯 합니다. 오늘은 이만하고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며 조금도 노여움을 품는다든지 어느 누구를 원망하는 일 없이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평화로운 가운데 당회를 마치시곤 합니다. 특히 덕을 세우지 못하는 당회원을 위해서 뜨겁게 기도하시고 사랑으로 심방도 하시니 한마디로 은혜스럽고 덕스러운 일밖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승준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목회를 화평을 중시하는 '관계적' 목회였다고 지적했다. 한경직 목사는 "강행하게 되면 할 수 있는 일도 있었으나 알면서도 못했는데 교회의 화평을 위해서 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즉 교회는 일도 아니고 사업도 아닌 신자들의 공동체적 모임이므로 신자들의 공동체적 모임을 화목하게 이루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했다. 즉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구원한 다음 관계를 회복하고 치유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경직 목사에게 있어서 겸손과 인내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하나의 단순한 인격적인 수양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나가는 방편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올바른 이해일 것이다.
이와 같은 화평의 목회는 한경직 목사의 교회관에서 비롯했다. 영락교회는 "한경직 목사 성역50년"에서 한경직 목사의 교회관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머리에 붙은 몸인데 그 몸의 통일성과 공동성이 결코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사업보다 인화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다. 그리스도가 분열될 수 없는 한 교회의 통일성과 공동성이 파괴될 수 없다. 사업보다도 인화가 더 중요하다. 다양의 극치 속에서도 조화를 찾아 총화의 아름다움을 드높이는 것이 교회의 참 모습이다. 인간은 항상 인간의 부족과 유한성을 인지해야 한다. 진리수호를 빙자하여 평범한 자기의 고집을 고집하거나 교리수호를 구실로 주도권의 야심을 가지고 분열과 불화를 초래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머리에 또 하나의 가시관을 씌우는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변치 않는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의 안과 밖에서 화평을 추구한 협력의 목회자였다. 자기의 신앙은 보수이지만 교회론에서는 에큐메니칼하다고 지적하곤 했다.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의 지도방침 네 가지를 설정했는데 네 가지 지도 방침 중 첫째가 성서중심적 복음주의 신앙이고 셋째가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협력과 연합을 이루는 것이었다. "에큐메니칼 정신이라 함은 협력, 협동, 동참, 참여의 정신을 의미한다. 백화만발이란 말로 표현하는 꽃의 세계를 볼 때 그 다양성과 통일성은 실로 놀라 마지 않는다." 한경직 목사의 보수적이면서도 에큐메니칼적인 신앙의 입장을 한숭홍 교수는 정 반 합 중 합의 신앙이라고 표현했다. "분명한 것은 한국신학의 정은 박형룡의 보수주의 신학이고 한국신학의 반은 김재준의 자유주의 신학이고, 박형룡도 김재준도 포함하는 합의 신학은 한경직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의 목회뿐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와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목회에 있어서도 화평과 협력과 연합을 추구해 나갔다. 한숭홍 교수는 한경직 목사의 에큐메니칼적 포용의 자세를 이렇게 기술했다. "그는 배타주의를 주장하는 옹졸한 사람도 분리주의를 역설하는 과격한 사람도 아니다. 그는 분명히 그의 신학사상이 복음주의적 신앙과 에큐메니칼 신학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그와 신학사상이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한 형제로 포용하는 포괄적인 사상의 주인공이다. 그는 암탉이 병아리를 자기 날개아래 품듯이 신앙형태의 좌우를 모두 그의 넓은 가슴에 품으려는 사람이다. 장로교 총회가 그를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 조직위원장(1956)으로 선출하자 그는 동 위원회 위원으로 박형룡, 안광국, 전필순, 유호준, 정규오, 박병훈, 황은규 등을 품에 품고 사업추진을 성공적으로 해 나갔다. 이것은 총회가 그의 도량과 역량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에게 맡긴 사명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파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조화와 통일을 추구했다. 즉 한국교회 안에서 복음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폭 넓게 펴 나아갔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손을 잡고 모두를 협력하며 격려했다. "비록 교파는 다르지만 교파를 초월해서 온 교회가 다 같이 당면하는 일 즉 국가 민족 사회를 위한 봉사나 복음 전파에 있어서 서로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 한경직 목사는 순복음교회와 조용기 목사가 교계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처했을 때 그에게 격려의 손을 폈다. 그래서 조용기 목사는 한경직 목사에 대해서 항상 고마운 마음과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최근에 이렇게 회고했다. "한경직 목사님은 신학적인 이해와 폭이 대단히 넓으셨고 사랑과 포용력이 탁월하신 분이셨습니다. 제가 중소 교파 목사로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때 한 목사님이 자원해서 우리 교회 강단에 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반대로 한 목사님은 주일 강단에 서지 못하시고 우리 교회 실업인 모임에 오셔서 말씀을 증거해 주심으로 간접적으로 저에게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 백주년 기념대회' 때도 저를 부르셔서 위축되지 말고 당당히 참여하라고 격려하신 일들을 기억합니다. 저는 한 목사님의 훌륭하신 사역 뿐 아니라 따뜻한 사랑과 후배 목회자를 밀어주시던 그 은덕을 지금도 흠모합니다."
신현균 목사도 비슷한 고마움과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1977년 8월 14일 오후 나는 대성회 준비를 위해 하루를 앞두고 바쁜 시간임에도 무언가 아쉬움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이른바 누가 찾아와서 수고한다는 따뜻한 격려의 말 한 마디도 없는 채 정신 없이 대회 점검을 마치고 강단 위를 서성거리고 있을 때에 여직원이 한경직 목사님이 찾으신다는 전갈을 해왔다. 깜짝 놀라 아래쪽을 보았더니 따님과 함께 서 계시는 것이 아닌가. 내 영혼이 몹시 시장해 있던 때라 한경직 목사님을 뵙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내 볼을 적셨고 또 내 손을 잡고 위로하는 말씀 한 마디에 내 심령은 크게 위로 받았으며 한없는 용기가 샘솟았다. 나는 마치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린 아이가 먹을 것을 사 들고 늦게 귀가하신 아버지 품에 안긴 것 같았다. 이날 강단에 오셔서 내 손을 잡으시고 감격이 넘치는 기도를 해주셨다. 나는 이날 전쟁에 출전하는 장군이 백만의 대군을 얻은 것 같은 큰 힘을 얻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생각의 폭이 크고 넓은 분이다." 김준곤 목사도 비슷한 기억을 가슴에 지니고 있다. "그분에게서 발견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따사로운 햇볕 같은 온화하고 인자한 인간성이다. 「엑스풀로 74」때 세상은 시류에 영합하여 모두 내게 돌을 던질 때도 한 목사님은 아버지처럼 내 뒤에 서 주시고 「엑스풀로 74」의 단 위에서 목사님의 봉급의 십일조를 내 손에 쥐어주며, 무엇보다 재정적 부담에 집회 후까지도 마음을 써 주시던 분은 목사님 중에서는 그분 한 분밖에 없었다." 누가 그를 가리켜 한국교회를 품에 안고 복음을 위해서는 모두에게 격려와 사랑의 손길을 편 한국교회의 화평의 사도라고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는 기독교연합회 회장(1955-1956),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재(1982-1984),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주역 등으로 한국교회의 초 교파적 연합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한경직 목사가 한국교회 100주년을 맞을 때 모든 교회, 모든 단체를 하나로 통합, 결집시키는 일을 한 것은 교회사적으로 괄목할만한 일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항상 한국교회의 분열을 안타까워하며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염원했다. 한국교회 100주년을 1년 앞둔 1983년 7월 5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모인 "기독교 100주년 지도자 세미나"에서 행한 강연에서 한경직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과거 100년간 민족에게 주신 은혜를 말하자면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서 모든 교단이 연합하여 이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한국기독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과거를 돌아볼 때 한국교회는 경이적인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듯이 분열이 많은 것이 탈입니다. 100년을 돌아보면서 회개할 것이 많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앞으로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서로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비슷한 때 「신앙계」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한경직 목사는 같은 심정을 토로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지 명년이면 꼭 1백년이 됩니다. 이 개신교 1백주년의 역사를 계기로 해서 한국의 여러 교단들이 다같이 모여서 은혜 받기 위해서 1백주년 기념사업회를 조직했고, 여러가지 면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네 가지 입니다. 그 중 가장 첫째이고 중요한 것은, 과거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고 누리면서도 너무나 참으로 분쟁과 분열 교권 다툼이 많았는데 개신교 1백 주년의 역사를 계기로 한국의 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 화해와 화합, 일치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큰 뜻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이런 뜻 깊은 때를 맞이하여 한국의 온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우들이 과거는 과거로 돌리고 주 안에서 자기 주장, 자기 입장을 지양하고 사랑과 이해와 용서로써 오직 하나가 되는 일에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제일은 사랑이라는 교훈을 기억하고 어디서나 할 수만 있으면 화평한 생활을 하며, 또 화평을 만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십시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교회도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한경직 목사의 화평의 목회관은 그의 정치관과 통일관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는 정교분리의 입장을 표방하면서도 교회는 정치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데 그 방법은 투쟁적 방식이 아닌 사랑과 평화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했다. 한숭홍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바로 이런 논리에서 그의 나약한 듯하고 소박한 듯한 정교분리주의는 역설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투쟁적 방식이나 과격한 행동을 통해 국가권력의 남용과 불의를 지탄하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행동 자체로서, 지도자들에게까지 그들의 행동의 오류를 재고하도록 했고, 부드러운 행동에 강한 의미를 담아서 압력을 가했다. 아무튼 그는 기독교는 폭력을 배제한 평화의 실체요, 사랑의 종교이며, 화해의 상징이라는 것을 생활에서, 사상에서, 나타내 보여준 것이다. 한경직 목사는 또한 남북의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통일도 무력통일이 아닌 자유 통일이고 평화 통일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의 통일은 붉은 통일도 아니고 중립 통일도 아닌 "자유를 중심한 평화적 통일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통일 논의는 "제약 없이 개방되어야 하고 6천만 민족성원 전체가 공감하고 합의 할 수 있는 또 실현 가능한 최선의 통일 방안이 나와야 한다"고 이미 1988년에 밝히기도 했다. 한경직 목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평화주의자요 박애주의자였다.
한경직 목사의 화평의 목회가 그의 성서적인 교회관에서 비롯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예수 닮은 온유와 겸손의 인격을 지니지 못했다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살았다. 주선애 교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분에 대해선 겸손하신 것이 제일 감화 받은 것입니다. 그분의 겸손은 겸손하겠다 하는 것에서 나온 게 아니고 완전히 몸에 배어 있는, 자기를 비운 그 상태에서의 겸손입니다. 꾸미는 겸손이 아닌 장녀스럽게 겸손하신 것, 바로 그것입니다." 김준곤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겸손과 화목의 인품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를 대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꾸며진 겸손이 아니라 몸에 배어버린 겸손을 볼 수 있다. 공 사석에서 자리를 좌정할 때 예외 없이 윗자리를 사양하고 양보하는 일을 볼 수 있다. 그는 화의 사람, 순리와 중용의 한국형 신사다. 한국민족과 교회는 분열과 쟁투가 장기다. 목사들 가운데는 무섭고 사나운 분들이 많고 영웅과 웅변가도 많다. 사소한 부정적 의식구조를 가졌고 사소한 이슈를 가지고도 모임 때 보면 핏대를 올리고 팟삭팟삭 깨지고 찢는 소리가 난다. 그런데 한 목사님은 그런 점에서 초연하다. C신학교에서 학생들과 교수간에 신학적인 이슈로 교수 고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 목사님이 충정어린 중재와 화해노력을 했던 사실을 알고 있다. 깨진 그릇 조각도 주어 맞추어보는 분이다."
신의주 제2교회시절부터 한 평생을 한경직 목사 곁에서 지냈고 마지만 6년 7개월동안은 남한산성에서 한경직 목사의 수족과 같은 역할을 했던 그리고 마지막 운명을 혼자서 지켜보았던 백운경 장로는 한경직 목사를 "조금이라도 남에게 괴로움을 끼치지 않은 정직 온유 겸손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한 목사님은 전혀 사심이 없는 분이셨고 남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신 분입니다. 조금이라도 남에게 괴로움을 안 끼치게 하겠다는 마음이 있으셨고 정직하며 온유하며 겸손한 믿음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한 목사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을 유산은 바로 이러한 온유, 겸손, 인내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잠깐 온유와 겸손과 인내로 화평을 이루어간 화평과 박애의 목회자 한경직 목사에게 약점은 없었는가를 생각해 본다. 최창근 장로는 한경직 목사의 유일한 약점이 '어떤 사람의 요청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손봉호 교수는 한경직 목사의 '지나친 너그러움'이 약점으로 남는다고 평했다. "한경직 목사의 고매한 인격과 너그러움이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하고 올바른 신앙에 일관성 있게 살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너그러웠고 그들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다른 교역자들, 교인들, 나아가서 사회를 꾸짖는 것을 그의 설교에서 찾기는 힘들다. 그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정도의 절반 정도라도 독재와 부패를 비판하고, 주초문제에 대한 꾸지람의 절반만큼이라도 기독교인들의 탈세나 부정직을 꾸짖었다면 상당한 효과를 거두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면서도 손봉호 교수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신도들은 한경직 목사의 청빈하고 겸손한 삶과 경건을 본 받아야 하고 한경직 목사를 우리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며 그의 글을 맺었다.
필자는 온유와 겸손과 인내로 화평을 이루어간 화평과 박애의 목회자였고, 어떤 사람의 요청도 거절하지 못한 연약한 목회자였으며, 호된 욕 한마디 못 하실 정도로 지나치게 너그러우셨던 목회자 한경직 목사의 약점을 감히 평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경외 감을 느낄 뿐이다. 그가 우리를 호되게 책망하지 않으신 것이 그 분의 잘못이었다고 말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분은 너무 선하셨다. 너무 눈물을 혼자서만 흘리셨다. 혼자서만 탄식 하셨다. 아마 책망은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서 혼자서 우셨는지 모른다. 그분은 너무 약하셨고 너무 너그러우셨다. 그러므로 잘못은 그분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온유와 겸손과 인내와 화평과 사랑의 몸짓을 무시하고 짓 밟은 것은 우리들이었다.
모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민족을 동서 남북으로 갈라놓은 갈등과 분열이 최고조에 달한 이 시대에 우리는 온유와 겸손과 인내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하나로 치유해간 그리고 민족의 평화 통일을 염원한 화평과 박애의 목회자를 한경직 목사에게서 발견한다. 한경직 목사는 화평을 추구한 박애와 협력의 목회자였다.
제7장 민족과 세계를 품은 역사의식의 목회자
목회자 한경직은 넷째 역사의식의 목회자였다. "눈을 들어 밭을 보아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4:35). 한경직 목사는 역사의식과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산 분이다. 아마 민족과 세계를 바라보는 역사의식은 오산학교의 이승훈 선생과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배웠을 것이고 후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폭 넓게 연마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일대학 박사과정에서 교회사를 연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경직 목사는 귀국 후 조선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했다. 그리고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몸으로 살아가면서 역사의식을 스스로 터득하며 역사의식을 가지고 한 평생을 살았다.
한경직 목사가 남다르게 폭 넓은 사고와 비전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고 세계를 그의 활동 무대로 삼은 것은 그의 비범한 인격과 함께 그가 터득한 역사의식과 역사적 안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그는 다양성 가운데서 조화를 이루는 역사적 안목의 비결을 지녔다. 이만열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교회사를 공부한 그는 교회가 신학사상을 좀 넓게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교회사에서 그는 교회가 보수와 진보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신학사상을 가지고 싸운다든지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보았다."
필자가 서울교등학교 3학년 때 한 목사님을 찾아 뵙고 "앞으로 목회자가 되려면 무슨 공부를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여쭈었을 때 한 목사님은 나에게 역사를 공부하면 좋겠다는 조언을 해 주셨다. 사실 나는 역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이 있었지만 한 목사님의 조언에 따라 서울 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하여 역사를 연구했고 나중에는 교회사를 연구했다. 얼마나 잘 한 일인지 모른다.
한경직 목사는 평생 한국 나라와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한 분이었지만 동시에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세계를 품고 사랑하며 봉사한 분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1957년 3월 3일에 행한 "성서적 애국심"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예수님도 애국자이십니다'라고 말하여 나라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성서적 애국심이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가지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성서적 애국심은 혹 우리 사회에서 가끔 듣는 민족지상주의나 국가지상주의는 절대로 아닙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애국심은 민족을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국가가 귀하지마는 국가를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민족과 국가가 아무리 귀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상입니다. 애국심이 잘못되어서 변태적으로 발전되게 되면 독재주의가 생기는 것이고 배타주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1958년 4월 27일에 행한 "우주시대와 신앙생활"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우주시대의 신앙생활은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한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우주시대의 종교는 먼저 민족이나 국경을 초월한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이와 같은 종교는 전 인류를 포섭할 수 있는 사랑의 종교,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의 종교이어야 될 것입니다. 셋째는 이와 같은 종교는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속죄, 구령의 종교이어야 될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이기주의와 지역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 인류의 연대성을 강조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만민의 아버지시오, 사해는 다 동포이며 형제입니다. 연대성이라고 하는 말은 서로 연한 것같이 우리 사람은 각자 나뉘어 있지 않고 다 서로 연결되어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 없는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서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연히 사회를 이루어 살게 되어 있는 까닭에 사회의 한 분자가 되었고 사회의 한 분자가 된 다음에는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실에 대하여 공동적인 책임을 자연히 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다 한 배에 타고 항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배 가운데에 어떤 사람이 그릇된 행동을 함으로써 잘못 파괴된다면 그 배에 탔던 선객 전원에게 그 영향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인간 생활의 연대성을 생각할 때 내 생활을 얼마나 조심하여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신앙을 자기 개인의 울타리 안에 가두거나 목회를 개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지 않고 이웃과 사회와 민족과 세계의 울타리로 뻗어나가게 했다. 그는 폭 넓은 시각을 가지고 폭 넓은 연계를 이루며 살았다. 따라서 그의 삶과 활동의 범위는 넓고 다양했다. 그의 삶과 사역은 전도와 교육과 봉사는 물론 사회복지, 치안유지, 정당활동, UN 활동, 세계선교와 구호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 미쳤다. 그는 한국 사람과 한국교회가 지니지 못했던 역사의식과 역사적 안목을 지니고 폭 넓게 살았다.(글:김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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