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1. 에드워즈의 생애
죠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미국이 나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요.작가요.사상가였다. 미국 교회사가인 윌리엄 스위트(William Sweet)는 말하기를 "죠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이 독립되기 전의 인물 가운데 여러면에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미국이 낸 지성인 가운데 최고의 지성인으로 알려져 있다"고 했으며, 페어베인 (A.M.Fairbaine)은 평하기를 "에드워즈는 미국이 배출한 사상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18세기에 최고로 사색적인 인물이 었다고"고 하였다.에드워즈는 요한 웨슬레(John Wesley)와 동갑내기로, 1703년 10월 미국의 동부 코네티컷주의 원져팜스(Windsor Farms)에서디 모디 에드워즈(Solomon Stoddard)목사의 달로 경건한 여인이었으며, 에드워즈의 영적인 성장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에드워즈는 여섯살 때부터 그의 아버지 디모데에 의하여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13세에는 라틴어, 그리이스어, 그리고 히브리어를 읽을 수 있었다. 에드워즈는 12세에 부흥성가를 작사하였고, 거미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13세가 되던 1716년 그는 새로운 설립된 예일대학에 입학하였고, 1717년에는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Notes on the Mind) 라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죤 로크(John Locke)의 사상을 크게 반영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학자에 의하여 연구될 정도의 수작이다.
그는 1720년 예일대학을 최우수로 졸업하였다. 에드워즈는 1721년(19세에 뉴욕에 있는 한 작은 장로 교회를 맡아 8개월간 섬길 수 있었다.
같은 해 예일대학 교수들이 자유주의를 표방하므로 해고 되자, 에드워즈는1723년 뉴욕의 장로교회를 사임하고, 정통신학을 재정립하기 위하여 예일대학으로 가서 강사가 되었다.
1727년 뉴헤이븐의 목사인 제임스 피어폰트(James Pierpont)의 딸인 사라(Sarah Pierpoint)와 결혼하였고, 그의 외조부인 솔로몬 스티타드가 목회하던 노스앰톤 회중교회의 부목사로 부임하였다. 1729년 스타다드가 사망하고, 1750년 그 교회에서 추방될 때까지 섬겼다.1734 년 경 알미니안주의의 물결이 뉴잉글랜드에 번지게 되자 에드워즈는 이에 대항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라는 일련의 설교를 행하였다. 이 설교에 의하여 노스앰론을 중심으로 뉴잉글랜드에는 적어도 6-8개월 이상 큰 부흥운동이 있었다.
1741년 그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죄인"(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 라는 설교를 통하여 다시 한번 뉴잉글랜드의부흥을 일으켰다. 1750년 42년간 목회하던 노스앰톤 교회에서 추방되어 스톡브리지(Stockbridge)에 가서 인디안 선교에 전념하였다. 7년간 인디안 선교를 하는 동안 그는 인디안 학대를 목격한 뒤 인디안 착취에 대하여 항의 하였다. 에드워즈가 노스앰톤 교회에서 추방된 이유는 반계약제(The half Way Covenant)의 사람들을 성찬에서 제외시킨 것과 청소년 범죄에 강력히 대항한데 있다. 반계약제의 사람들을 성찬에 참여시킨 사람은 바로 그의 외조부 스타다드였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러한 관례를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반계약제는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 인간 편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준비이론(Preparation theory)에서 나온 이론이다. 이는 알린(Allein)의 "회심치 못하는 자들에게 주는 경고"에 영향을 입은 것으로 알린의 책은 은혜체험을 위한 준비 이론의 지침서가 되었다. 이러한 준비이론은 Seeker들이 뉴잉글랜드에 많이 생겨남으로 나온 대안이다. Seeker들은 성령께서 그들을 중생시켜 주시기만을 고대하였다. 스타다드는 이들을 성찬에 참여케 하므로 은혜를 체험토록 하려하였고, 이들의 신실성에 따라 그들의 자녀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을 회개캐 하는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식에 참여하여 인위적인 준비를 하게 하므로 그들의 중생을 스스로 준비케 하게 하므로 그들의 중생을 스스로 준비케하는 그릇된 소망을 제공하는 결과를 제공하였다.
곧 성찬에 참여하므로 은혜체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므로 성경의 교훈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행위가 중생의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준비이론은 결국 영국과 스코틀랜드, 뉴잉글랜드의 신학을 죽이는 결과를 제공하였다.
에드워즈는 노스앰톤에서 추방된 뒤 글쓰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자유의지론"(On the Will)이다. 이 책에서 그는 칼빈주의적인 입장에 서서 의지의 자유를 옹호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사상은 후에 영국의 홀(Robert Hall)과 찰머(Thomas Chalmers)에 영향을 주었고 정통 신앙의 핵심교리가 되었다. 1757년 12월 에드워즈는 프린스톤 대학의 학장이 되었으나 1758년 2월 천연두 예방접종의 부작용으로 주님의 품으로 갔다.
2. 설교의 내용
18세기 뉴잉글랜드의 종교적인 쇠퇴는 에드워즈의 설교를 거칠고,강한 어조를 띄게 하였다. 그의 설교는 감정적이었고,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될 때 오는 무서운 결과를 서술하곤 하였다. 설교의 내용은 칼빈주의적이었고(Adams 107),설교의 성격은 경험적이었으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지옥의 불과 저주를 설교했으나 그의 모든 설교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는 때때로 달콤하며, 경쾌하고, 아름다움을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는 성구인용이 하나의 특징인데, 아담스는 그의 설교 15편을 연구한 결과 374개의 성구를 인용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설교 한편에 25개의 성구를 인용하는 꼴이다.(Adams 107). 그는 몸이 약하였으므로 심방이나 다른 활동을 할 수 없었고, 대신 많은 시간을 연구하며 묵상하므로 큰 설교자가 되었다.
에드워즈의 설교는 당신의 문제들에 대한 정면적인 답변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오직 믿음의 의해서만 의로와지는 칭의"이다. 에드워즈에 있어서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깨우치고,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었다.
그는 노스앰톤 교회를 떠나면서 이와같이 말하였다. "나는 여러분을 두려움 가운데 있도록 깨우치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나는 나의 모든 힘으리 다하여 여러분을 얻으려고 노력하여 왔습니다."(Adams 107) 에드워즈의 설교는 청교도 설교와 같이 회심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의 설교는 엄격하리만큼 조직적이어서 지엽적인 흐르는 것이 없다.
그의 설교는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강해와 교훈,그리고 적용이 그것이다. 그의 강해는 간단하고 정확하며 정밀하였다. 강해가 끝나면 교리 부분이 나오는데 교리부분은 교훈(a statement of the teaching)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적용이 따르는데, 적용은 그의 설교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3. 설교체
첫째로, 에드워즈의 설교는 단순하고 꾸밈이 없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모호한 단어나 혼란을 일으키는 모든 문제점들을 벗기므로 모든 아이디어가 벌거벗게 나타나도록 하였다. 그가 사용한 단어들은 짧아서 한마디가 주종을 이룬다. 어떤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그의 설교의 82%가 5자 이하로 되었는데. 25%가 3단어의 문자. 23%가 2문자, 23%가 2문자 이하로 구성되었으며 보통 4개의 문자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인쇄된 문장은 길게 보이지만 짧고 분리 가능한 절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로, 그의 설교는 2인칭 설교가 그 특징을 이룬다. 그는 생생한 연상, 수사학적인 평행법, 수사학적인 질문을 자주 사용하곤 하였다.
또한 예증 자료를 당시의 상황에서 사용하였고, 성경의 권위에 근거하여 논리적인 논증을 가하였다. 또한 그의 설교는 구어체였다.
4. 설교의 전달
그의 음성은 명쾌하였으나 약하였으며 큰 키에 비하면 가냘펐다.
그의 눈은 날카로와서 원고에서 눈을 떼면 사람들이 덜덜 떨었다고한다. 교회의 종이 풀어져서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어떤 농담 잘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에드워즈가 종치는 줄을 쏘아보니 종이 그만 떨어졌다."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경건한 열정을 가지고 설교하였다. 또한 사고하는 설교자로, 논리적이었고, 성경에 근거한 사고를 근거하여 설교하였다.
히치콕(Hitchcock)은 에드워즈의 설교를 들은 사람의 말을 아래와 같이 인용했다. "그는 처음에는 가로 세로 각각 10cm로 된 종이에 원고를 써서 원고를 읽었으나 원고 외의 말을 할 때에 그는 더 열정적이었고, 그가 원고를 읽을때 보다 더 큰 효과를 나타내었다."
어떤 작가는 과장하여 말하기를 에드워즈는 근시였으므로 "한 손에는 원고를 움켜쥐고 다른 한손에는 촛불을 치켜들고, 고개를 깊숙히 쳐박고 원고를 읽어 내려 갔다"고 하였다(Demaray 69K). 그러나 죠지 필드가 그를 방문하여 충고하기를 원고에 얽매이지 말고 설교할 껏을 설득한 뒤, 곧 1746년부터는 단지 요점만을 가지고 올라가서 설교하였다. (Adams,108) 그의 설교는 현재 약 1,200개가 예일대학에 남아 있다.
5. 설교의 결과
에드워즈의 설교는 견적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가 설교할 때 사람들은 지옥에 내려가는 것과 같은 두려움으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였다. 예를들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이라는 설교 도중 에드워즈가 범죄한 인간의 모습을 기미의 비유를 통하여 지옥의 열린 입 위에 매달려 있음을 묘사할 때 사람들은 자비를 외치며, 어떤이는 기둥을 잡고 늘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설교의 영향력은 1734년대의 대각성 운동을 일으키는 힘이 되었다. 1835년 대각성 운동을 일으키는 힘이 되었다. 1835년 대각성 운동이 끝난지 85년이 지나 영국의 목사 2명이 아직도 에드워즈의 영향이 있나를 살피기 위하여 방문하였을때 그들은 그때까지도 그의 영향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설교가 감정적인 면에 치중하므로 나쁜 영향도 있었다. 곧 어떤 이는 자살을 기도하고, 어떤이는 절망감에 빠져 있기도 하였다. 그는 그의 설교가 몰고온 나쁜 영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탄이 풀리워서 끔찍한 방법으로 날 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첫번째 예로 어떤 한사람이 그의 목을 베어 자살하려 한 일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우울증에 빠져 있다. 마치 어떠한 사람이 그들에게 말한 것처럼 심지어는 어떤 경건한 사람들도 그들에게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니 당신의 목을 베시요"라고 권하기도했다. (Adams,108).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 지 200여년이 지난 18세기 초엽 미국도 영적 및 사회적으로 캄캄한 밤과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미국 대 각성 운동의 주역이 된 요나단 에드워즈가 미국 마사츄셋트 주 노드햄턴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던 1729년 당시는 100여년 전에 불붙던 청교도적 신앙 운동이 극도로 침체된 때였다. 에드워즈는 마을 청년들 가운데 널리 유행하던 방종함을 목격하고 마음에 큰 고민을 느꼈다. 그는 당시 마을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외조부의 사망 후 경건은 극도로 침체했다. 마을의 젊은이들 가운데 수년간 방탕이 크게 유행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밤 거리를 헤매며 걸어 다녔고 술집을 드나들며 음탕한 행위를 자행했다. 어떤 사람은 음탕한 행위를 나타내 보이므로 다른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주 남녀들이 함께 모여 주연과 환락에 빠지곤 했다. 그들은 그 곳에서 밤을 새우고 지냈으며 가정의 질서를 생각지도 않았다.”
17세 때 이미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각성을 체험한 요나단 에드워즈는 노드햄턴의 가정마다 젊은이들을 찾아 다니며 회개와 각성을 독려했다. 1733년부터 젊은이들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734년 에드워즈가 “이신 득의”란 주제로 다섯번 설교했을 때 놀라운 각성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설교는 “때에 맞게 선포된 설교가 되었고 마을 사람들의 영혼 위에 하늘의 축복이 놀랍게 쏟아지게 한 설교였다.” 마을에서 이름난 젊은 여자가 가슴이 깨어져 변화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각성이 1735년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기록했다. “마을이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것 같이 보였다. 전에 볼 수 없던 사랑으로 충만했고 기쁨으로 충만했으며 동시에 통회로 충만했다. 가정마다 그들 위에 임한 구원으로 기쁨을 누렸다. 하나님의 행차가 그의 성소에도 나타났으니 하나님의 날은 기쁨의 날이 되었고 그의 성소는 사랑의 처소가 되었다.”
요나단 에드워즈는 1740-41년에 또 하나의 놀라운 각성 운동을 주도하며 체험했는데, 이 각성 운동을 가리켜 “대각성 운동”이라고 부른다. 에드워즈가 마사츄세트 주의 엔필드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 이란 제목의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는 엔필드 마을의 형식적인 신자들의 가슴에 폭탄이 터지는 듯한 커다란 충격을 가져 다 주었다. 청중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선고에 무서워 떨면서 탄식했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에드워즈의 영적 각성 운동은 사회 개혁으로 이어졌다. 에드워즈는 인디언들에 대한 백인들의 착취를 공박하는 글과 불의한 사업과 부도덕과 부정직을 공박하는 글을 쓰며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 의식에 사로잡힌 설교자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높인 칼빈주의 신학자로 미국의 교회와 역사와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놀라운 각성 운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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