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24 February 2015

예수님을 많이 닮은 장기려 박사

국민일보(03.2.11)

장기려 박사가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새벽 1시45분 경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을 때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쳐"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어두운 밤과 같은 우리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주님과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다. 
첫째, 주님만을 섬기며 겸손하게 사셨다. 장기려 박사는 1947년 김일성 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기도하고 시작했다. 그분의 삶의 모토가 "예수를 본 받고 섬기자"였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다. 자신이 칭송을 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기를 좋아했다. 그분은 자기 무덤에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 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했다. 학교와 연예계와 복권계에서는 물론 목사님 세계에서도 ‘성적 순’으로 자리 매김하는 오늘의 세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겸손한 분이었다. 
둘째, 이웃과 나누며 가난하게 사셨다. 장기려 박사는 평생 집이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무소유로 가난하게 살았다. 그의 삶의 목적은 나눔과 베풂이었다. 그는 자기를 주인이나 소유주로 간주하지 않았고 종이나 청지기로 간주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수많은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그는 스스로 가난해 지므로 사람들의 삶을 부요케 만들어 주었다. 그는 자본주의적 물질만능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다. 사례와 대우를 더 많이 받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오늘의 세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난한 분이었다. 
셋째, 사람들을 사랑하며 따뜻하게 사셨다. 장기려 박사는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았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몰래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는 명절 때 거지에게 10만원 짜리 수표를 주기도 했는데, 10만원 짜리 수표를 소지한 어떤 거지가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일도 있었다. 그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다. “사랑은 지고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그의 사랑 실천의 삶은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는데 이상규교수는 “그의 생애와 삶은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었다”고 표현했다. 사모님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다. 그는 1950년 12월 아내 김봉숙씨와 5자녀를 북한에 두고 월남한 후 45년 동안 아내를 그리며 홀로 살았다. 재혼하라는 권유를 받을 때마다 "우리의 사랑은 육체의 이별과 무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 위해 혼자 산다"고 말했다. 사랑이 점점 이기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으로 되어가는 오늘의 세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을 실천한 분이었다. 그는 춘원이 지적한대로 ‘성인이 아니면 바보’였다. 썰렁하고 차가운 바람만 부는 이 겨울에 우리들의 마음을 훈훈하고 순수하게 만드는 그분을 그리워한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