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바로 세계적인 '수의학자'였고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의 교수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병리학 강의를 맡았으며 지금도 수의대 구관 2층에는 문화훈장을 단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Frank W. Schofield는 1889년 3월 15일 영국 Warwickshire주 Rugby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Frank를 낳고 산욕열로 돌아가셔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Francis W. Schofield로 대단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신학자였고 Cliffe College에서 신약성서와 희랍어 강의를 하였다. 당시 Frank W. Schofield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따 Francis W. Schofield Junior였고 나중에 이름을 Frank로 바꾸었다. 그에게는 누나 Mary와 맏형 John, 둘째 형 Stephen이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이 다른 유명한 위인들처럼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장난꾸러기로 동네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대학을 진학할 당시에는 집안의 형편도 나쁘고 또 후원자가 생길 만큼 공부를 잘하지도 않아서 대학진학을 포기했어야 했다. 그의 형들과 누나는 각자 후원자를 얻어 런던대학교 의과, 건축학과에 진학했다. 그 후 Frank W. Schofield는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에 진학할 뜻을 가지고 농장과 목장 등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자본주의 체제가 확립되던 당시여서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차가웠고 결국 아무리 일을 해도 필요한 만큼의 돈을 벌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자유와 일할 자리, 그리고 공부할 곳을 찾아 Canada의 한 농장에서 반년을 일하자 대학에 들어갈 만큼의 돈을 얻게 되었고, 그는 Toronto 대학교 Ontario 수의과대학에 입학한다.
그가 수의과대학에 입학한 것은 목장 생활 중 수의사가 목장의 말을 치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힘들게 시작한 대학 공부였지만 그는 뜻하지 않은 불행을 겪게 된다. 대학 2학년 때 소아마비에 걸린 것이다. 그 후 그는 왼팔과 오른 다리가 평생 마비된 상태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Frank W. Schofield는 더욱 공부에 매진해 1910년 공동수석으로 졸업했고 이후 Ontario주 보건국 세균학 연구소의 조수로 취직한다. 1년 정도의 조수 생활동안 그는 Toronto 시내에서 판매되는 우유의 세균학적 검사를 실시하여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16년 한국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교장 Avison 박사가 쓴 한 통의 편지에 의해서이다. Avison 박사의 편지는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서 세균학 강의를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으며, 세브란스는 선교사업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헌신적이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를 찾는데 Frank W. Schofield가 가장 적합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Frank W. Schofield는 1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불편한 몸 때문에 전쟁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항상 죄스럽게 생각하던 터라, 인류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떠날 것을 결정하였다. 그 다음 해 8월 초 Frank W. Schofield 나이 28세 때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출발하여 10월 한국에 도착한다. 서울에 도착한 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하며 목원홍씨에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지 1년 후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한국식 이름도 만들었는데, 바로 '석호필(石虎弼)'이다 그의 성인 '石'은 그의 종교적 굳은 의지를 의미하고,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한국 생활 적응은 순조로왔지만, 그의 아내는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만삭의 몸으로 다시 Canada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Schofield는 혼자 남아 선교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선교 사업과 관련하여 각계 인사와 친분을 나누던 그는 당시 기독교 청년회장이던 독립운동가 이상재 선생, 최초의 사설재단인 정화학교 설립자인 김성혜 여사와 특히 두터운 친분을 쌓는다. 그리고 일찍 어머니를 여인 그는 김정혜 여사를 수양어머니로 삼는다. 1919년 2월 5일 이갑성씨 부탁으로 독립운동 준비를 위한 일을 맡게 되는데 그가 맡은 일은 국제사정을 알려주는 일이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정보를 독립운동가에게 알려준 것도 바로 그다. 자신이 일본과 친교가 있던 영국인이라는 유리한 입장을 내세워 3·1 운동을 위한 세세한 준비를 뒤에서 도운 그는,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과 일제의 시위자에 대한 만행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3·1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난 4월 제암리 사건 당시 Schofield는 수원으로 가 사진촬영을 하고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5월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자신문 'Seoul Press' 지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올리고 당시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엄영애 등이 갇혀있던 서대문 형무소를 직접 방문한다. 이후 그가 근무하던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는 일제의 압력이 가해졌고 그 역시 학교 당국으로부터 조선 독립에 대한 노력을 자제할 것을 당부 받는다. 그러나 그는 1919년 9월 일본에서 열린 <극동 지구 파견 기독교 선교사 전체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알리는 발표를 하게 된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일본 유명인사와 만나면 일본의 비인도적 행위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등의 일을 한다.
1920년 자신이 쓴 [끌 수 없는 불꽃 - Unquenchable fire]라는 3·1운동 목격기를 해외로 가지고 나가려고 하던 Schofield는 출국 전 강도로 가장한 암살미수를 당한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끌 수 없는 불꽃]은 해외로 가지고 나갔으나 결국 출판은 할 수 없었다. 이는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두려워한 나라나 출판사들이 출판을 꺼려했기 때문이며, Schofield는 [끌 수 없는 불꽃]의 일부분만을 강연회나 잡지 등에 투고할 수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간 그는 1921년부터 Toronto 병원에서 근무하게되고 곧 대학에 복직한다. Schofield는 이때부터 67세가 될 때까지 계속 이 대학과 병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아내 Alice는 실성하여 Schofield가 Canada에 돌아왔을 때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의 아들 Frank Junior는 네 살이었다. 아내의 병원비를 대랴, 아이를 혼자 양육하라 매우 힘든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Schofield 박사는 매달 월급의 1/3을 떼어 10년 계획으로 다시 한 번 한국에 갈 비용을 마련한다.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귀국 6년만(당시 38세)에 다시 한국에 갈 여비를 마련하고 곧 1926년 5월 초 한국으로 출발, 23일 서울역에 도착했고, 7월 그는 다시 한국을 떠난다.
1955년 그가 재직 중인 대학을 건강상의 문제로 그만두자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국빈으로 맞겠다고 연락을 했다. 1957년 그의 아내(당시 72세)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은 Canada의 민간 항공 조종사로 일하게 되자 1958년 한국으로 갈 뜻을 비추었다. 그러자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13주 기념일 및 정부수립 10주년 경축 식전에 국빈으로 그를 초빙했고 8월 초 Canada를 출발한 그는 14일 김포국제 공항에 도착한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고 농촌생활은 허탈했으며 거리는 전쟁고아로 가득 찬 시기였다. 한국에 온 그는 8월 20일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을 방문하고 이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보였고 당시 학장이던 이영소 교수와 총장 윤일선 박사의 동의로 서울대학교 외인숙사에 방을 얻는다. 같은 해 9월초부터 그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수의병리학을 강의하며 연세대 의과대학과 중앙대 약학대에서 강좌를 갖고 다른 대학에서도 강의를 시작한다. 그는 학교에 있으면서 50여명의 학생을 자신의 사비로 장학금을 만들어서 도왔으며 유학희망자들에게는 외국 대학의 장학금을 구해주고 적당한 일자리를 구해주는 등의 배려를 해 주었다.
10월 2일 경향신문에
이승만 정권은 1959년 초부터 공공연한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을 해오던 박사에 대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4월 신학기에는 대학에서의 강의를 반정부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명목으로 중지시키고 그와 친한 사람들을 위협하고 그의 거처인 4평짜리 외인숙사를 비우라고 통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의 시위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이후 새 민주당정권은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12월 17일, 대한민국 수립 후 3번째로 박사에게 수여하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서울특별시 행운의 열쇠>를 박사에게 증정하였다. 또, 그는 61년 1월 한국일보에 <내가 본 한국혁명>이라는 4·19 목격기를 실었고, 같은 해 5·16이 일어나자 6월 영자신문 'Korean Republic'에 <5·16 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를 투고하였으며 그는 여기에서 5·16은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한국사회에서 필요불가결한 혁명이라 결론 짓고 이 혁명은 한국의 번영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자 기회'라고 강조했다. 또 Canada의 Guelph시의 'Daily Mercury'지에 한국의 군사혁명을 소개했다. 그동안 한국의 제자들과 함께 [고양이 폐에의 Paragonimus의 침범], [창경원 동물원 꿩에 발생한 New-castle disease], [전염성 고양이 간염], [한국소의 Globidiosis의 병리조직학적 연구], [돼지의 Pasteurella multocida에 기인하는 급성소염성 폐렴]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수의학자였다. Ontario 대학에서 수의 병리학 교실의 정교수로 일했으며 독일 Munchen의 Ludwig Maximilian Univ.에서 명예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수의학회 연례회의 <국제수의학회상> 12번째 수혜자였으며 Canada의 프랑스계 수의학 협회로부터
Schofield 박사는 1970년 4월 16일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영면하셨다. 사실 그의 한국 체류기간은 그리 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동안 그가 보여준 한국을 위한 일이라든가, 한국 땅에 묻히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그의 업적이 얼마나 훌륭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많은 학생을 도왔음에도 지금 그를 기념하는 행사 하나 열리지 않고 있다.
다음 글은 Schofield의 아버지 Francis William Schofield, Sr.이 항상 자신의 아이들에게 하던 말로 Schofield 박사의 인생관이었다.
『인생에는 두 길이 있다.: 배려의 길과 기도의 길이다.
배려의 생활은 환경의 압력에서 힘을 얻고, 상식을 그 인도자로 삼고,
행로의 불측을 각오하며, 항시 염려를 동반자로 한다.
기도의 생활은 사랑을 힘으로, 하나님을 인도자로, 진리를 행로로,
신의 평화를 무적의 수호로 삼는다.』
『There are two ways through life : the way of care and the way of prayer.
The way of care has pressure of circumstances for its force, common sense for its guide,
uncertainty for its path, fear for its attendant and guard.
The way of prayer has love for its force, the Spirit of God for its guide, truth for its path,
and the Peace of God for its inviable guard.』
참조 문헌 : 한국 땅에 묻히리라 <이장락 지음(정음사)>, 글 : '96학번 이지해
========================
그의 생애의 일부
========================
스코필드 박사는 우선 틈만 있으면 서울 거리로 나갔다.
그 당시의 서울 거리에는 경찰에 잡혀가는 학생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고, 여기 저기의 파출소 안은 갓 붙들려온 애국자들로써 어수선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학생을 잡아가는 경관을 보면 곧 그 가까이로 걸어갔다.
"나는 캐너더선교사 석호필(石虎弼)이오. 그 학생 내 집에서 일하는 학생이오. 그 학생 아무 죄 없소. 내 지금 우리집에 데려 가겠소."하면서 경관이 미처 말대꾸도 하기 전에 학생을 데리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파출소 안에 여학생이 잡혀 있으면,
"그 여자 우리집 식모아이오."
하면서 빼어냈다. 그러나 아무리 어리석은 경찰이라 하더라도 스코필드 박사는 그러한 서투른 연극에 두 번 다시는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박사는 당시 일본의 경찰국장인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찾아가, 자기 명함을 내어놓고 천연스럽게 인사를 하고는 마루야마가 내 주는 명함을 슬쩍 집어넣었다. 왜경 두목 마루야마의 명함은 서울시내 파출소 경찰관들에 대한한 위세(威勢)를 부렸다.
"나는 경무국장 마루야마 씨와 아주 친한 사람이오."
그는 이러한 수를 써서 또한 여러 사람을 경찰의 손아귀에서 구출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도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어쨌든 자기 힘 자라는 데까지 한국사람을 옹호(擁護)하려고 정성어린 애를 썼다. 경찰에 쫓기는 한국학생이 숨을 곳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두말없이 최대한의 편의를 도모하여 주었고, 만세소동으로 부상을 당한 한국학생들을 보았을 때는 최선을 다해서 치료하여 주었다.
원한의 사건현장! 이제는 벌써 모든 것이 지나가고 기와집이었던 교회당의 타다 남은 검은 기둥과 무너진 벽만이 무고한 생령(生靈)들의 원한을 대변하는 듯이 앙상하게 남아 있었고, 주위의 민가는 다 타버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채의 민가만이 외롭게 남아 았었다. 물끄러미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스코필드 박사의 귀에는 불에 타죽는 마을의 젊은이들의 애절한 울부짖음이 쟁쟁하게 들려오는 듯하였다. 그는 눈을 감아 머리를 수그리어 가엾고 애처로운 넋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 때 현장에는 경관이나 헌병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스코필드 박사는 찬스라고 카메라에 손을 대려는데 뒤에서 무엇인지 말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한 사람의 서양사람과 일본 경관이 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스코필드 박사는 재빠르게 카메라를 바지주머니 속에 감추었다.
---아이고, 애써 여기까지 와서 허탕치게 되었구나---
스코필드 박사는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겉으로는 태연하게 그들에게 얼굴을 돌렸다.
왜경은 독살스러운 눈망울을 굴리면서 스코필드 박사의 아래 위를 훑어 보았다. 그 왜경은 이번 <만세사건> 통에 입은 부상인지 머리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왜경은 일본말로,
"당신은 누구요? 무엇하러 여기 왔소?"
하고 힐난하는 듯이 날카롭게 물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일본말을 모르니 그저 가만히 서있기만 했더니 왜경과 같이 온 서양사람들이 영어로 왜경의 말을 옯겨 주는 것이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나는 캐너더 선교사요. 교회 일로 오늘 수촌리(水村리里)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잠깐 들렀소."
하고 시치미를 떼면서 천연스럽게 대답하니 왜경은 무엇을 생각하였던지 그 이상은 더 캐어 묻지를 않았다.
알고보니 그럴 까닭이 있었다. 왜경과 함께 온 서양사람은 일본에 파견되어 있는 미국인 선교사였으며 <3·1만세> 소동 후에는 일본정보의 부탁을 받고 우정 한국에 건너온 사람이었다. 일본정부는 그 미국인 선교사를 통해서 <3·1운동>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보도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날도 마침 그 미국인 선교사는 <수원사건> 현장을 그러한 목적으로 돌아보면서 자기대로의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이 왜경은 그를 안내하여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판이라 왜경은 스코필드 박사를 야무지게 추궁하고 싶으면서도 그가 서양사람이자 선교사이니 옆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의 체면도 있고 해서 할 수 없이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스코필드박사는 그 미국인 선교사에게,
"교회나 집들을 무슨 까닭으로 태워버렸답니까?"
하고 물었다. 미국인 선교사는 그 경위를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동네 청년 중에 나쁜 사람이 하나 있어서 그 사람이 어느 집에 불을 지른 것이 마침 바람이 세게 불어오는 통에 교회와 다른 집도 같이 타버렸답니다."
스코필도 박사는,
"그래요---"
하면서도 속으로는 아니꼽기 짝이 없었다.
왜경은 타다 남은 교회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연방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고 그 미국인 선교사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이 연방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의 한 사람은 설명을 하기에, 한 사람은 그것을 듣기에 정신에 팔려 있는 듯이 보였다. 그때 스코필드 박사는 요행히도 몸집이 큼직한 미국인 선교사의 등뒤에 서 있었는데 박사는 마음 속으로
---이 때다---
하고 외치며 번개같이 카메라를 꺼내어 들었다. 양복 저고리로 카메라를 가리면서 교회를 향해 빨리 샷터를 눌렀으나 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이야기만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이 사건이 바로 스코필드 박사만이 찍을 수 있었다는 <수원사건> 현장의 역사적 사진이었다. 이 스냅은 그 후 그의 손으로 널리 국외에 소개되었으며 일본의 포악상(暴惡相)을 폭로함에 있어서 실로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다른 동네에서도 왜군이 횡포(橫暴)를 부렸다는 소문을 들었는지라 멀리나온 김에 수촌리(水村里)(장안면, 長安面)에도 들렀다. 박사가 수촌리 마을에 이르렀을 때는 벌서 한낮이 훨씬 지나 있었다. 수촌리 마을에도 왜병이 발악(發惡)한 흔적이 역연(歷然)했다. 원래 마을에는 마흔두 채의 집이 있었다 하지마는 이제는 거의 다 타버리고 여덟 채만이 외로이 서 있었다. 교회당도 타버렸음이 분명했다.
============
이완용을 만나
============
스코필드 박사는 그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졌다. 박사는 노신사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저는 서울에 와 있는 캐너디 선교사 석호필입니다."
라고 말을 건넸다. 그 노신사는 분명히,
"나는 이완용이오."
하고 어두운 표정을 지닌 채 응대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미처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여보시오, 캐너더 선교사 양반. 내가 예수를 믿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오.?"
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스코필드 박사로서는 의외(意外)의 물음을 당한 것이었다.
한일합방 당시부터 국적(國賊)이라 하여 온 국민의 규탄(糾彈)을 받아오던 중 이번 <독립만세사건>으로 해서 그것이 날로 더욱 심해지자 이완용도 자기가 저지른 일을 크게 뉘우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완용은 그 자신의 괴로움을 예수를 믿음으로써 어떻게 구원을 얻어보자는 것 같았다.
스코필드 박사는 문득 동정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왔다. 그러나 익살꾼인 그는 천연스럽게,
"네, 좋습니다. 이 선생님, 그런데 이 선생님의 경우는 이천만 온 국민 앞에 진심으로 사과(謝過)를 하셔야만 하느님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응수했다. 이완용의 낯이 더욱 침울해지고 호위경관들의 얼굴이 긴장해졌다. 스코필드 박사는 아무말 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오늘 박사는 그 당시의 모양을 이야기하면서,
"그 때 사진 찍을 것을 깜빡 잊었어."
하고 악의(惡意)없는 미소를 짓는다.
============
귀국
============
스코필드 박사는 일본을 거쳐 태평양을 건너 그해 8월말 경에 무사히 캐너더에 도착했다.
그는 오랜 여행의 피로를 풀기도 전에 그가 계획하고 있던 일을 착착 시작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첫째로 손 eof 일은 바로 한국의 실정과 <3.1운동>의 전모를 온 세계에 소개하고 일본의 비인도적 처사(處事)를 전 인류 앞에 폭로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 일을 자기의 의무인 줄 알았으며 그의 대학 복직 절차보다도 더욱 중요한 일로 생각했다.
그는 우선 캐너더와 미국의 신문, 잡지 등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한국의 현상을 소개했다. 그가 한국에서 애써 찍은 귀중한 여러 사진이 여기 저기에 게재되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그는 그가 다행히 별일없이 갖고 나온 『끌 수 없는 불꽃』의 원고를 곧 런던의 어느 출판사에 보내어 그 발간에 관해서 상의했다. 원고의 내용을 검토한 출판사에서는, 내용이 매우 소중한 것이기는 하나, 모두가 일본의 비인도적 포악상(暴惡相)을 폭로하는 것이니 이것을 출판하여 세상에 널리 퍼뜨린다는 것은 영일동맹(英日同盟) 하에 있는 영국으로서는 국제관례상 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해왔다. 스코필드 박사는 출판사의 견해를 수긍(首肯)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사는 곰곰 생각한 끝에 워싱턴으로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찾아 그의 출판에 관해서 상의했다. 이승만 박사는 그의 원고를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그가 잘 알구 있다는 뉴욕의 출판사 플레밍·리벨(Flemming Revell)회사를 소개했다. 그 회사를 찾아 가보니 출판은 해줄 수 있으나 형편상 출판 비용을 부담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코필드 박사에세는 그렇게 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다시 이승만 박사와 의논했다. 이번에는 둘이서 미국선교회를 찾아가서 출판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출판비용의 부담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자기네 처지로서 그런 것을 춘판했다가는 앞으로 일본인이 자기네 선교회가 하는 사업에 대해서 어떤 방해를 할지 모른다 하면서 결국은 출판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별수가 없었다. 그렇다고해서 출판을 단념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서라도 출판비를 마련하는 대로 플래밍·리벨 회사에서 발간을 실현시켜 볼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원고만이라도 플레밍·리벨 회사에 맡겨 두기로 했다. --- 결국은 여기에서 원고(원본)를 잃어버렸지마는---
일이 이렇게 되니 스코필드 박사는 그의 원고의 간행(刊行)은 훗날의 기회를 기다리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원고의 내욜을 자기 이름으로써 단편적으로 발표하는 것까지 주저할 까닭은 없었기에 부분 부분을 잡지류를 통해서 발표했고 강연을 통해서도 소개했다.
그의 모든 글과, 모든 말은 시종 일관하여 한국사람들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밝혔고, 일본의 무도한 행패를 날카롭게 공박했다. 그야말로 훌륭하고 참다운 한국의 대변인이었다.
스코필드 박사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해외의 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한국을 알게 되었고 <3.1운동>이 어떠한 성질의 민족운동이었던가를 알게 되었다. 사실 그 때까지도 <3.1운동>에 관해서 외국사람들은 거의 아는 바가 없으나 다름이 없었고, 당시의 외국신문 중에는 <3.1독립만세사건>을 그저 서울에서 한국사람 몇 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구속되었다고만 가볍게 보도하고 있는 것도 있을 정도였다. 이의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 한국에 관한 사태의 국외에서의 보도를 극히 통제했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3.1운동>후로는 한국사람의 해외여행을 일본당국이 몹시 억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쓴 글을 읽거나 또는 그의 강연을 들어보고 참으로 깊이 감명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 아닌 해외에 있는 우리 교포였다. 그들은 비로소 고국의 슬픈 현상을 자세히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고국의 사태와 모국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세삼스레 간절해졌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해외의 교포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명심하게 되었다.
스코필드 박사에게는 한교(韓僑)들로부터 감격과 감사의 현지가 연이어 전해졌다. 캐너더와 미국의 여러 곳에서 박사의 강연을 듣고자 그를 초빙하는 편지도 꼬리를 물고 매일같이 전해졌다. 이렇게 해서 스코필드 박사는 캐너더와 미국에 있던 많은 한국사람을 알게 되었다. 박사는 그러한 한국사람들을 늘 격려해 주었으며 또한 힘껏 도와주기를 꺼리지 않았다.
============
귀국이후
============
스코필드 박사는 워싱턴 어느 교회 문 앞에 『한국의 얼은 죽지 않았다』라는 제목으로 한국 체류(滯留)중에 보고들은 것을 강연한다는 광고를 크게 써 붙이는 한편 신문에도 그 광고를 내었다.
청중들이 교회당 안에 가득히 찾다.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의 여러 가지를 그의 독특한 익살을 섞어가면서 재미있게 이야기했다. 모두들 웃기도 하고 혹은 분개하기도 하면서 흥미있게 듣고 있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강연을 끝낼 무렵에 가서 더욱 더 열띤 목소리로.
"여러분! 한국사람들은 이렇게도 열렬하게 그들의 나라를 도로 찾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들을 승리의 길로 이끌어 줄 만한 지도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참으로 한국사람들을 동정하고 또한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 준다며는 우리들은 그러한 지도자의 육성에 인색해서는 아니 될 줄로 믿습니다."
라고 전제(前提)하고 나서 이경지 양이라는 한 한국소녀의 앞날을 위해서 학비를 보태어 줄 것을 제의했다.
감명 깊게 스코필드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만장의 청중들은 그의 제안(提案)에 곧 동의했다. 단번에 2,000불 가까운 돈이 거두어졌다.
스코필드 박사는 얼마의 자기 돈을 보태어 이것을 이경지 양에게로 송금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이 양에게 보낸 편지 구절에는,
--- 나도 고학을 하면서 대학을 다녔지마는 그것은 어렵고 힘드는 일인 줄 아오. 자칫하면 원래 목적하던 공부는 뒷전이 되어 고학하는 의의를 잃을 경우가 많소. 이경지 양은 모든 힘을 집중하여 더욱 부지런히 공부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장차 한국여성들을 위해서 더욱 크게 공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오 ---
라고 적혀 있었다.
이경지 양이 열심히 공부해서 소주사범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음은 물론이며 또한 그 후 한국여성 그 중에서도 특히 직업여성의 교육을 위해서 헌신한 것도 세상이 아는 바와 같다.
현재 봉은(奉恩)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경지 여사는,
"어디 그런 고마운 분이 또 있겠어요. 그 때 그 돈을 받고도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이해가 안 갈 정도였어요. 그 후에도 강연을 해서 모은 돈이라 하면서 또 2,000불을 보내주었어요. 물론 나도 죽자고 공부하기는 했지요. 그래도 원래 재주가 시원치 않다 보니 박사가 바라던 만큼은 우리나라 여성을 위해서 크게 공헌하지는 못했어요. 참으로 부끄럽고 미안할 지경이지요. 그러나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일할 생각은 아주 단단히 하고 있어요."
하면서 굳은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후손들에 관한 기사
==============
1999/07/07(수)
--------------------------------------------------------------------------------
스코필드 박사 누구인가
3·1독립운동 국제사회 알리고 지원
--------------------------------------------------------------------------------
캐나다를 방문중인 김대중대통령은 6일(이하 한국시각) 총독관저에서 열린 국빈오찬에 참석하기 앞서, 한국인이 아니면서 우리나라 국립현충원(옛 국립묘지)에 안장된 최초의 인물 프란시스 스코필드 박사의 후손들을 잠시 면담하는 이색 일정을 가졌다.
김대통령이 이날 면담한 사람은 스코필드 박사의 며느리인 캐서린 스코필드씨와 손녀 리사 크로포드 및 손자 딘 스코필드씨 등 3명.
이중 캐서린 스코필드씨는 간호사로 일하다 은퇴한 60대이며, 손녀는 가정주부이고 손자는 조경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고 스코필드 박사는 1889년 영국에서 출생, 1905년 캐나다로 이주한 뒤 일제시대인 1916년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 경성제국 대학에서 세균학과 위생학 등을 가르치며 한국 제자들에게 민족자결권과 민주주의를 가르쳤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외부세계에 알리고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한국의 독립투쟁을 담은 문서와 사진을 모아 자신이 쓴 독립운동 관련 기사들과 함께 선교사들을 통해 비밀리에 국제사회로 빼돌려 한국독립의 주장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그는 33인의 독립지사가 서명한 독립선언문에 스스로 서명, '34인'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기도 했으며 이러한 활동때문에 일본경찰에 체포돼 1919년 봄부터 1년간 수감생활을 하다 캐나다로 추방됐다.
이어 그는 캐나다 온타리오 수의과대에서 뛰어난 수의학자로 활동하면서도 강의와 기고문을 통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1955년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요청으로 다시 한국으로 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병리학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아원 2곳을 설립, 6·25전쟁 고아들을 돌보며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제2의 조국인 한국을 위해 헌신하다 70년 4월 타계했다.
정부는 이러한 공로를 기려 6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각각 수여했다.
김대통령도 이날 국빈오찬사에서 자신과 스코필드 박사의 인연을 소개하며 스코필드 박사의 헌신을 기렸다.
김대통령은 "나는 스코필드 박사가 서울의 한 초라한 아파트에서 병고의 몸으로 고생하면서도 군사독재를 비판하고 우리의 민주화투쟁을 지원할 당시 그 분을 찾아뵙고 서로 격려하고 다짐했던 것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Dr. Schofield 의 일대기(http://schofield.snu.ac.kr)에서 부분적으로 퍼온 글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