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인생유전
세상을 일주하며 노예를 사고 파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인신상인(人身商人) 카르레티가 일본 나가사키에 들른 것은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중으로 많은 조선인 남녀를 납치해다 노예 시장에서 팔아 먹던 때였다. 당시 카르레티의 기록을 보면 이렇다. `코리아란 나라는 아홉개 주(州)로 나뉘어 있으며 일본군은 그 연안의 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소년 소녀를 잡아다 헐값으로 팔아 넘겼는데, 나도 다섯 사람을 겨우 12 스쿠드를 주고 샀다. 이들을 세례시킨 다음 인도 고아까지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자유인으로 풀어 주었다. 다만 그 중 한 사람을 나와 더불어 프로렌스까지 데려왔으며 지금은 안토니오라는 이름으로 로마에서 살고 있다.'
카르레티는 아프리카에서 두당(頭當) 1백 스쿠드씩 주고 산 노예를 컬럼비아에서 1백 80 스쿠드에 판 것을 보면 조선 사람 다섯을 12 스쿠드에 샀다면 값도 아니다. 그 헐값의 인신을 다섯 사람만 샀다면 아예 장사할 목적이 아니라 기독교 정신이나 연민의 정으로 해방시켜 주고싶은 마음에서 샀다 할 수가 있다. 이탈리아까지 데리고 간 조선 사람에게 지어준 안토니오란 이름이 바로 카르레티의 아버지 이름인 것을 미루어 보면 연줄을 맺고 싶은 저의가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
카르레티 일행은 포르투갈 선박의 특등실을 타고 귀국하는데, 매일처럼 선실에 놓아 먹인 닭요리를 식탁에 올렸을 만큼 호화스러운 것이었다. 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 헬레나에서 네덜란드의 해적선과 만나 일전을 벌이는데, 끝내 패배하여 약탈을 당하고 만다. 난파당한 포르투갈 선박에 탔던 사람들은 네델란드선박으로 헤엄쳐가 구조를 요청했으나 몸에 귀중품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찔러 죽이거나 익사시켜 버렸던 것이다.
기구한 운명의 이 조선인은 대단한 기지의 소유자였던지, 십자가가 못박힌 십자가 상과 카르레티의 초상이 조각된 목걸이를 하고 헤엄쳐 갔던 것이며, 해적들은 이 목걸이를 귀금속으로 착각하고 이 조선인을 앞다투어 건져냈던 것이다. 카르레티가 데리고 갔던 딴나라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말았는데 유일하게 안토니오만이 살아 남았으며 카르레티는 생명을 구해준 이 자신의 초상목걸이를 평생 몸에 지니고 살았다 한다.
카르레티와 안토니오는 브라질 인근의 무인도에 버려져 지나가는 배에 구제되기까지 팬티와 셔츠 한장 그리고 들새와 들쥐 잡아 먹으며 한달 남짓을 살고 있다. 조선 천지에 이 안토니오만큼 풍상을 겪은 어떤 조선사람이 더 있었던가 싶어진다.
이 안토니오가 코레아란 성씨를 창시하여 십수대의 핏줄을 이어내리게 했으며, 22 가구의 코레아 성바지가 모여 산다는 이탈리아 알비시(市)의 집 성촌장이 우리 나라를 방문하고 있다. 안토니오가 이탈리아에 건너간지 6 년 모자란 4백년 만의 일이다.
92/11/5
하나님은 사람들을 찾아 오십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 오십니다.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하나님께서는 땅에 코를 박고 지렁이와 같이 살아가는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일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께서 죄악 중의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렘33:2)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는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신약 시대때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 기사를 인용하시면서, 자신이 사닥다리의 본체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요 1:51). "사닥다리의 천사들 중 어느 누구도 가만히 서 있지 않았습니다." - D.L. 무디 - 하나님께서 하나님 보좌로 연결된 사닥다리를 통하여 야곱을 지키시며 그에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 사닥다리는 땅에 있는 죄인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연결 통로가 되어 주신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요 1:51;14:6). 이는 또한 사닥다리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거룩한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이 진정한 영적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요 10:9;행 4:12).
창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 하신지라
야곱을 찾아오셔서 함께 계시면서 꿈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끄시고 허락한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신 핵심적 사건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고넬료와 베드로를 찾아오십니다. 베드로의 평견병을 고쳐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고넬료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순종했습니다.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베드로는 주의 뜻을 생각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베드로에게 이런 일은 불가능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깊은 편견병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이 있습니다.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자기 생각과 전혀 다른 말씀입니다. 그때 순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나 같은 대선지자는 니느웨와는 정 반대 지역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사울왕은 제 마음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갑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지시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오늘 하나님께 쓰임받고 있습니다.
예화]
붓글씨를 써보셨습니까? 먹을 묻쳐서 쓴 붓글씨 말입니다. 좋은 붓글씨(명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중요한 점은
1] 글씨를 쓰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글씨를 쓰는 사람이 명필가여야 합니다. 아무리 붓이 좋아도 글씨를 쓰는 사람이 별볼일이 없으면 별볼일 없는 글씨가 써집니다.
2] 붓은 주인의 뜻에 잘 순응할수록 좋습니다.
좋은 붓은 글씨 쓰는 사람의 손에 척 붙습니다. 쓰는 사람의 손에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모발은 연하고 부드러워서 쓰는 사람이 쓰고자 할 때, 주인의 뜻대로 잘 움직여 집니다. 빼딱하게 빠져나오는 털이 없구요. 필자가 눕히면 눕혀지고, 세우면 세워집니다. 어떤 붓이 그렇지 않겠느냐 할 수 있지만, 좋은 붓은 눕혀지고 세워지는 감촉이 역시 다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바로 이 붓글씨 원리와 너무 흡사합니다. 명작이 나오려면 하나님의 손에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글씨를 쓰시는 분과 같고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것입니다.
늘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은 가장 확실한 명필가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분보다 좋은 작품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온 우주가 그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온 우주에 충만한 것이 하나님 작품이니까요.
언젠가 Kleinburg에 있는 미술관에 가본적이 있습니다. 캐나다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Group 7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입니다. 보면 놀라게 되고, 보면 볼수록 신기한 작품들입니다. `참 잘도 그렸다!' 감탄이 절로 납니다. 그런데요. 저는 그 우수한 작품들을 보고 나오면서 또다른 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창밖의 광경이었습니다. 녹음이 우거진 창밖의 풍경이 창틀에 끼어 있는 미술품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풍경은 지금까지 보아온 그 아름다운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런 명작으로 우리 주변은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이 불가사의 한 작품들을 만드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훌륭한 창조주께서 우리를 들어 명작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좋은 작품을 만드시기 원하십니다. 최고의 작품을 남기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에 들린 붓과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쓰시는 하나님의 손에 척 붙어야 합니다. 쓰시는 하나님의 손에 부담스럽지 않아야 합니다. 연하고 부드러워서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주인의 뜻대로 잘 움직여져야 합니다. 빼딱하게 빠져나오는 털이 되어서는 안되지요. 하나님께서 눕히시면 눕혀지고, 세우시면 얼른 세워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지 않겠느냐 할 수 있지만, 좋은 신앙인은 눕혀지고 세워지는 감촉이 역시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만 움직여지면 명작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999년도 한 번 주어진 생을 하나님의 명작으로 채우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손에 순응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베드로처럼 순종해 보십시오. 놀라운 일을 여러분 생애에 만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 아래 순종함으로 편견병을 극복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쓰임받기 원하십니까? 평견병을 극복하십시요.
편견병자는 주님이 쓰실 수가 없습니다. 편견병을 극복한 자를 하나님은 쓰십니다.
요나는 그의 평견병 때문에 고기 뱃속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개는 광견병에 걸릴 때 무섭고, 사람은 광견병에 걸릴 때 무섭습니다. 베드로 또한 편견병이란 중증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 아래 순종함으로 편견병을 극복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고넬료를 쓰십니다.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통치국의 군인이 피통치국의 모든 국민들 사이에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더욱 귀한 점은 그가
하나님 말씀을 각별히 사모합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점령지구의 당당한 백부장이 초라한 갈릴리 어부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하나님 말씀이 듣고 싶어서입니다. 왕 앞에 엎드린 백성처럼, 주의 사람으로부터 말씀을 갈망합니다. 그들의 가장이요, 지도자라 할 수 있는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듣고 싶어서입니다. 황제에게 알현하듯이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듣고 싶어서입니다. 일가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발에 입을 맞추어 절을 합니다. 존경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듣고 싶어서입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듣고 싶은 타는 목마름으로 베드로를 우러러 봅니다.
저는 우리 서머나 교회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할 때, 이런 전통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독일에서 공부할 적에 위로 엄마가 캐나다에 처음 다녀왔을 적에 익사이팅하게 전해준 소식은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듣고 싶은 타는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만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제가 토론토에 와서 이 몇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을 서머나교회의 기둥으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런 순수한 믿음의 사람이 귀합니다. 갈릴리 어부 베드로에게 들을 게 무엇이냐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눈으로 베드로를 봅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베드로가 어부로 보이지 않습니다. 목마른 심령을 적셔줄 수 있는 구원자로 보입니다. 고넬료에게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고넬료와 같이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는 사람에게 베드로와 같이 초라한 갈릴리 어부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듣게 하시는 믿음의 비밀을 이해하십니까? 직접 말씀하실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구태어 모세를 통해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구태어 선지자와 사도를 통해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구태어 기름부음 받은 목사를 통해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넬료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 자신이 직접 성경을 읽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가족들에게 나름대로 진리를 전할 수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집으로 청하여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복은 아무나 받은 것이 아닙니다. 광야를 가던 200만명 중에는 구태어 모세만을 통해 말씀을 주시는 것에 반역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열린 사람입니다.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 30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 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고넬료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구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다는 것은 고넬료가
기도자 곧 하나님을 향해 열린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구제자, 곧 이웃을 향해 열린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고넬료의 기도하는 경건에 대해서는 몇주 전에 말씀드렸거니와 그의 구제의 귀함이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예화] 어느 장애자의 아사(餓死)
공양미 3백 석에 팔려가기 전날 밤 심청이는 눈먼 심봉사 동냥다닐 때 메고 다닐 헌 전대 구멍난 걸 꿰매 놓고, 잠든 아버님의 얼굴을 내려보고 복받치는 울음을 참느라 목이 멘다.
'내가 아예 없었던들 다니기에 길이 익고 얻어먹기 투가 나서 아무 염려 없으련만 6,7 년간에 출입 한번 없었으니 다리에 힘이 없어 평지낙상(平地落傷) 종종 할새 자식 없는 저 봉사 누가 일으켜줄꼬.'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하는 아버지 장애자가 그를 돌보고 거둬 먹이던 18 세의 아들이 절도 혐의로 구속되자, 보름을 굶은 끝에 절명한 인륜(人倫) 사고가 영주에서 일어났다. 외아들인 홍군이 잡혀갈때의 심정은 심청이 심봉사 놓고 떠나가던 전야의 심정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심봉사처럼 구제받지 못한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데 우울한 문제들이 가로놓였기 때문인 것이다.
생이별 사실을 안 심봉사, 올려 뒹굴 내리뒹굴 마른땅에 새우 뛰듯 숯불에 자반 뒤집듯 하는데 심청이 데리러 온 뱃사공들, 이를 슬피 여겨 쌀 20 섬과 돈 1 백냥을 삼백 섬 외에 따로 심봉사의 의식 밑천으로 주고 간다.
홍군 아버지의 심정도 심봉사와 똑같을 텐데 의식할 밑천은 커녕 의식할 거동의 채비도 없이 잡아간 법망의 무자비와 비인도가 가슴에 아프게 와닿는다.
심청이 떠날 즈음에 동네 처녀들 몰려와 심청이 손을 잡고 울어대자 '전일의 의(誼)를 안 잊거든 내 집에 종종 들러 불쌍한 우리 아버지 등이 가렵거든 이 잡아주고, 병들거든 약 달이기 가끔가끔 하여주면 천신이 감동하여 복을 아니 받겠느냐'하며 총총히 떠나간다.
홍군에게도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을 텐데 어찌 종종 들러서 우리 아버지 목마르면 물 떠드리고 배고프면 라면 끓여드리라느니, 천신이 감동하게 할 여건이 돼 있지 못했던가 말이다. 현대 사회가 인간으로부터 정을 증발시키고 이해에 오그라질 대로 오그라진 미이라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심청이 없어진 뒤에도 심봉사는 세간살이가 이전보다 풍족하여 동네 과부들에게 재물을 과시하며 엽색질까지 한다. 홍군 아버지는 거둬 먹일 손발이 없어 보름 동안을 앉아서 굶다가 서서히 탈진하여 죽어갔고......
인간다움을 상실한 물질 만능의 현대, 그 현대를 사는 현대인의 미래상을 그대로 구현한 죽음만 같다. 심청이 시대에 비해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교통이 발달하고 가전 제품이 범람하고 의식주가 풍족하고 GNP가 상승하길 몇백 몇천 배인 오늘날, 현대가 심청이 시대보다 살기 안 좋다는 망상(妄想)을 고발하는 죽음이기도 하고...... 그 더욱 장애자의 주간에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9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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