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b]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들어가는 말]
진보가 있는 삶은 소망이 있습니다.
진보가 있는 자녀는 소망이 있습니다.
진보가 있는 인생은 소망이 있습니다.
진보가 있는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우리 자신에게는
어떤 진보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
생각해보는 일은 의미가 있습니다.
1. 매임 중에서도 복음의 진보가 있습니다.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우리에게는 이런저런 형태의 매임이 있습니다.
이런 매임은 복음의 진보를 가로 막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사고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건강이 없어서
등등
해야만 하는데 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이제는 한 해가 또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경우, 특별한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12절]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 바울 사도가 당한 일, 곧 옥에 갇히게 된 그의 매임이 복음의 진보를 막지 못했습니다.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마치고 선교지 교회들이 모아 준 동족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바울을 유대인들은 고소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전염병과 같이 이단 사설로 천하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의 영향력이 쓰나미와 같이 강력하였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게 되었지만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황제가 있는 로마로 후송되었습니다.
로마에 있던 기간, 특히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던 사도 바울은 미결수였습니다.
셋집에 연금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의 손은 24시간 쇠사슬이 매여 있었습니다.(존 스타트 사도행전 주석)
다행스런 일은 로마 정부는 사람들이 바울 사도를 방문하는 것은 허락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가 유대인들이 반대하여 가이사에게 항소한 것이지 동족을 고발한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소망이 예수님이심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찾아왔다가 복음을 들었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복음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바울을 통해 좀더 능력있는 복음을 받았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복음을 인하여 위축된 그리스도인들은 매인 가운데서도 생명을 내어놓고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바울 사도로 인하여 담대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로마 귀인들이 많이 사도 바울을 방문하였습니다.
13절]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사도 바울이 당시 로마 사회에 상당히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로마인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로마까지 오는 동안 그를 후송하였던 로마 군인들이 풍랑 속에서 체험한 기적 또한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경로로 바울 사도를 찾아온 많은 로마인들에게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감옥에 매인 사건은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1968년 2월 9일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그분의 할아버지가 목회하였고 자신이 그 아버지와 함께 목회하였던 조지아주의 아틀란타 에벤에젤 교회에서 마지막 유언적 설교를 합니다.
그는 당시에 사방으로부터 죽을 위협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매임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소중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내가 죽는 것을 보실 분이 있다면, 나를 위해 장례를 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긴 조사도 생략해 주십시오.
제가 노벨상 수상자였다는 말도, 300-400개의 또 다른 상을 수상하였다는 언급을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꼭 언급해야만 한다면, 이웃을 섬기는 일에 그의 인생을 주고 싶어했던 사람,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했던 사람이라고 전해주십시오.
그는 이 유언적인 설교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두 달 후에 암살당했습니다.
1964년 12월 11일, 노벨상수상 소감에서 그가 인용한 요일 4:7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죽는 순간까지 세상에 강렬하게 새겼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그렇습니다. 그를 보면 죽음이란 매임까지도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하나님의 복음을 그의 매임을 통해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2] 형제들이 바울을 더욱 신뢰함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였기 때문에 복음의 진보가 있었습니다.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얼마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서강대 영문과 교수 장영희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뉴욕 주립대학에 박사학위를 제출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논문은 완성이 되고 그 완성된 원고를 트렁크에 넣고 제출하기 전에 친구 집에 차 한 잔 마시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트렁크를 도둑이 가져갔습니다. 그녀는 너무 충격을 받아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깨어 나서도 얼마 동안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어둠 가운데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났고 일 년을 연장하여 논문을 다시 써서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그 논문의 헌사에 이런 특별한 글을 남겼습니다.
"내 논문을 훔쳐가서 나의 삶에 가장 중요한 교훈 -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확신처럼 새긴 것이 있습니다.
가정에 매였으니 복음을 전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사업에 매였으니 복음 사역에 쓰임을 받기 힘들다고 합니다.
자녀에 매였으니 복음 사역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정말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 사도는 이런, 아니 이보다 더한 매임 속에서 복음의 진보를 이루고 있습니다.
12절]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매인 중에서도 복음의 진보를 이룸으로 참 소망의 열매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투기와 분쟁자 중에도 복음의 진보가 있습니다.
15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로마 교회 안의 일부 지도자들은 바울 사도의 옥중 전도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경로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로마 교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개선장군처럼 로마에 입성하였습니다.
로마 교인들의 관심이 바울에게 온통 쏠렸습니다.
바울 사도의 죽음보다 강한 예수님 사랑이 로마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바울 사도의 죽음보다 강한 선교 여행이 로마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바울 사도의 능력 있는 사역이 로마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 안에 투기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투기와 분쟁하는 마음 속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더 열심히 전하자 이렇게 복음 전하는 일에 압장을 섰습니다.
17절]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투기와 분쟁은 일반적으로 복음의 진보를 막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장로교회를 많이 축복하셨습니다.
장로교회가 가장 번성한 나라가 바로 한국입니다.
그러나 한국 장로 교회에 투기와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어떤 사람들은 한국에 복음의 진보를 막는 바이러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 장로교회가 마음을 하나로 하여 정진을 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핵분열처럼 장로교단이 나누어지면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던 측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 전하는 동기는 아름답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투기와 분쟁 중에서도 복의 진보가 이루어진 면이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일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8절]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넓은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피터 로드(Peter Lord) 목사님께서 플로리다 대학 곤충학 교수 한 분을 초대하여 나눈 이야기를 옮겨 보겠습니다.
곤충학 교수님이 집 뜰을 산책하고 오더니 18종류의 귀뚜라미가 살고 있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수년 동안 그 집에 살아오면서도 유심히 귀뚜라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없던 목사님으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이야기는 그 교수님은 200종류의 귀뚜라미 소리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귀는 있는데 우리가 듣는 소리는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사도의 귀에는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대신 사도 바울의 귀에 크게 들리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파하는 소리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소리만 크게 들리는 것입니다.
투기하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것입니다.
[적용; 노목사 칼럼]
토론토 큰빛교회에서 열방을 품는 기도성회가 10월 20일부터 3박 4일 동안 열린다.
한국이 낳은 자랑스런 목회자들와 선교사님들을 강사로 모신, 복된 선교 기도 잔치다. '미전도 종족을 기도로 품자'는 이런 아름다운 주제를 가지고 토론토 전지역의 교회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다른 교회가 그렇게 한 것처럼, 우리 서머나교회 또한 주체측의 좋은 뜻에 동의하여, 대문짝만한 포스터를 교회 입구에 두장이나 붙여놓고, 주보에 광고하고, 둘째 날 저녁에는 큰빛 교회에서 연합으로 수요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서머나 교회 찬양대가 또 다른 한 교회와 연합하여 수요예배 찬양을 올려드리는 순서를 맡았다.
우선 당회원들의 아량에 감사한다. 서머나교회 역사 12년 동안 수요예배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교회 안에서 올려졌었다. 본 교회에서 잘 드려지는 수요예배를, 큰빛교회에서 연합으로 올려드리자고 동의하는 일이 쉬운 결정이 아니다. 교단이 다르고, 목회관이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연합으로 예배드리는 일이 쉽지 않은 까닭은 토론토지역 안에 교인간의 수평이동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큰 교회가 힘있게 세계를 향해 웅비하는 동안 블랙홀처럼 작은교회 교인들을 빨아들인다. 그 몸살에 주변의 작은 교회들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린다.
서머나 교회가 작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지난 12년 간 적어도 몇 가정이 이런저런 사유로 큰빛 교회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연합 사역이 성공하는 일은 중요하다.
우선, 기독교인들의 아버지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고, 뿌리가 하나인 기독교가 한 주님의 지체의식을 분명히 가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또, 어두움의 권세의 공격을 막는 연합 전선을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 흑암의 권세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이 때다. 지상의 크고 작은 교회들이 지교회 이기주의에 떨어지면, 오합지졸이 되어 승리할 길이 없다.
비기독교인들을 위해서도 유익하다. 참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비기독교인들도 고대한다. 예수님은 좋은데, 예수 믿는다 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간디의 말을 지나치기 힘들다. 교회가 분리되고, 각개전투, 상호 비방하는 모습 속에서 비기독교인들은 고개를 갸우뚱 한다. 캐톨릭이 교리적 면에서 성경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하나로 세상에 나타나는 면에서는 점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선교적인 면에서는 힘을 합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은 성령을 받은 모든 교회가 한 가지로 순종해야 한다.
서머나 교회 건물에는 비전펠로우십이란 선교관이 있다. 내한 캐나다 선교사님들의 자료를 모아 박물관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지난 5년간 최선수 장로님과 몇 분 간사님들이 심혈을 기울여 자료를 모으고 전시관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일은 개교회 사업이기 보다는, 범 교회적으로 힘을 합하여야 성공할 일이다. 캐나다 정부나 한국 교계까지도 힘을 합해야 할 일이다.
지금도 5대양 6대주 열방 중에서는 수많은 영적 전투가 전개되고 있는데 특별히 미전도 종족을 위해 기도하자고 모인 몇 분의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아름다운 마음에 박수를 보내며, 함께 기도하자는 마음에 하나님의 축복과 성공을 기원한다.
투기와 분쟁이 우리 마음에 일어날지라도
복음의 진보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투기와 분쟁이 있을지라도 복음에 진보가 이루어 지면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3.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실 때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집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도 바울에게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많은 사람에게 있어 내가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범사에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류시화는 <성자가 된 청소부>라는 책을 번역하다 감동하여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소금 인형 이야기]입니다.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그가 좀더 자세히 해설한 글을 소개합니다.
소금으로 만들어진 인형들이 있었답니다.
이 인형들은 여행하며 우연히 바다를 만났고,
한 소금인형이 난생 처음 본 바다에 놀라며 묻습니다.
"너는 누구니?"
"나는 바다야."
"바다? 바다가 뭐야? 넌 도대체 누구니?"
"나를 말로 설명하기엔 쉽지 않아. 하지만 직접 네가 내안에 들어와 보면 쉽게 알 수 있단다."
소금인형은 바다에 살며시 왼발을 내밀자, 사르르 왼발이 사라져 버립니다.
바다에 닿는 순간
자신의 일부가 없어져 버린 소금인형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바다로부터 도망쳐버렸지요.
바다에서 한 발을 잃었지만
바다 맛을 본 소금인형은
이상하게도 바다가 자꾸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바다로 향합니다.
소금인형은 두려웠지만
“조금 더 들어와 보면 자신을 알 수 있다."는 바다의 말을 믿고 오른발도 집어넣습니다.
차츰차츰 소금인형의 몸은 사라져 갑니다.
소금인형은 자신의 일부가 사라져감에 따라
바다를 조금씩 알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여기까지만 소개합니다.
그 다음 내용은
류시화님의 시가 매우 압축적인데 마음에 듭니다.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제가 이 부분을 마음에 들어하는 까닭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는" 그 중심 때문입니다.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마무리하는 말]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롬1:15-17]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줄 아는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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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한 기자가 이 휘호 여사에 대해 섭섭한 적이 있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면회를 온 이여사가 자신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한 때였다고 했습니다.
이여사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더니 이여사는 웃으면서 제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저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 주실 줄을 믿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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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바울의 고백적 간증(빌 1:12-30) "
빌립보서 1장 12~14절
석원태 목사
Ⅱ. 바울의 고백적 간증(빌 1:12-30)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이 되었다는 소식 앞에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간증 형식을 빌어서 자신이 왜 투옥되었는지를 해명하고(빌 1:12-18), 또한 자기 자신의 생사의 의의를 말할 뿐 아니라(빌 1:19-26), 기독교 박해의 의의를 말하고 있다(빌 1:27-30). 사실상 이 부분부터 빌립보서의 본론이 시작된다.
1. 투옥(매임)의 의의(빌 1:12-18)
여기에 기록된 내용은 바울의 매임이 두 가지 경우에서 결과론적으로 유익했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전화위복이다.
1) 투옥의 첫째 의의(빌 1:12-14)
바울의 투옥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간증한 것이다.
빌립보서 1장 12절에 「나의 당한 일」은 빌립보서 1장 13절에 「나의 매임」과 같은 내용이다. 곧 그의 투옥을 의미한다. 우리 본문은 그의 매임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저희가 알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의 매임이 복음의 진보가 된 첫째 이유는,
빌립보서 1장 13절에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라고 한 것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투옥이 어떤 범죄자로 여김을 받지 아니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가이사랴 옥에 있을 때도(행 25:8), 그리고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던 총책임자 백부장교도 바울이 무슨 특별한 범죄 사실 때문에 로마로 잡혀감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사자임을 알고 있었다(행 27:43, 28:6).
뿐 아니라 그가 로마 감옥에서 약 2년 동안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그곳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들에게도 바울은 반 로마적 범죄인이 아니라 복음 전도자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 「온 시위대」란 로마 군대 중에도 최강의 병사들로 구성된 로마 황실 근위 부대를 뜻한다. 「기타 모든 사람」이란 그곳에서 바울과 접촉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뜻한다. 저들에게 바울은 예수를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매임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바로 그러한 매임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빌립보서 1장 14절에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고 한 것 때문이다.
여기 「형제」는 당시 로마에 있던 기독신자들을 말한다. 저들은 바울이 투옥 생활 중에도 복음을 전하는 그 담대함을 친히 목격하였다. 그때 전도자 바울에 대한 신뢰감이 일어났다. 그 결과 저들은 겁없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실로 한 알의 밀알처럼 로마의 감옥에 떨어진 전도자 바울로 말미암아 로마 시위대 안팎에 더욱 많은 열매가 맺게 되었던 것이다(요 12:24).
바로 이것을 가리켜 바울은 그의 매임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여기 「진보」란 군대 술어이다. 군대가 어떤 탐험대가 진군하는데 방해되는 것을 ‘미리 잘라 넘어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프로코페’(prokoph)이다. 말하자면 전진을 방해하는 방해물을 제거하는데 사용된 단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의 투옥(매임)은 문을 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여는 결과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새로운 전도 운동의 분야에 이르는 길을 열어 놓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복음의 로마 전진, 로마 정복을 뜻한다.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없는 것을 알고 그가 가진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여 로마 황제 앞에서 직접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구한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 정부가 그의 신변과 생활을 보호하여 로마에까지 갈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는 로마로 호송될 때 근위대 백부장에게 위탁되었다(행 27:1). 그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근위대 파수병들에게 위탁되어(행 28:16) 그들의 감시 하에 군영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안에서 셋집을 얻어 살 수 있도록 허락되었고, 그를 염려하여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영접하게 되었다(행 28:30). 그곳은 로마 황제를 보호하는 일만의 근위병들의 부대였다. 그 근위대는 로마 황제의 친위대였다.
이 부대는 주전 2세기경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도 참석했다. 초기에는 9,000-10,000명 정도였으나 그후 비델리우스(Vitellius)는 1만 9천명으로 강화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 제도를 폐지하던 때(A. D. 312)까지 300년간 계속된 역사를 가진 부대였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하나도 잘못이 없는데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다고 했다(행 28:17). 빌립보 서신중에도 자신의 투옥을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빌 1:7, 13-14). 골로새서에도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골 4:3)고 하였고,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골 4:18)고 하였다. 빌레몬서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몬 1:9, 13)라고 했다.
에베소서에도 「예수의 일로…갇힌 자 된 나 바울」(엡 3:1)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28:20절에는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고 했다.
바울은 자신이 「쇠사슬에 매인 사신」(엡 6:20)이 되어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고 했다. 하루 종일(24시간) 로마 병사의 손과 자신의 사슬이 연결되어 2년 세월을 넘게 지내면서 모든 류의 사람들에게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쳤는데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행 28:31).
그럼에도 바울은 투옥의 생활이 결과적으로 복음의 진보(전도)가 되고, 로마에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담력을 얻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은 매일 줄 모르는 자유 하는 생명이 아닌가? 그는 이렇게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의 투옥을 변호하고 간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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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바울의 고백적 간증(빌 1:12-30)② "
빌립보서 1장 15~18절
석원태 목사
Ⅱ. 바울의 고백적 간증(빌 1:12-30)
1. 투옥(매임)의 의의(빌 1:12-18)
1) 투옥의 첫째 의의(빌 1:12-14)
2) 투옥의 두 번째 의의(빌 1:15-18)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 절(빌 1:12-14)에서 바울 자신의 투옥이 복음의 진보가 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빌립보 교우들에게 알려주는 고백적인 변호와 간증을 생각했다.
이제 그의 투옥이 가져다 주는 두 번째 의의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복음의 진보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 아래 뜻밖에 두 가지 종류의 일꾼들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저들은 로마의 시위대 안에 사슬로 매여 있는 바울의 선교를 보고 크게 자극을 받은 자들이었다. 한 류는 바울에게 선의의 신뢰를 보내는 참된 일꾼이고, 또 한류는 투기와 분쟁 등 불순한 모양으로 일하는 전도자들을 본 것이다. 빌립보서 1장 15절에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라고 했다.
문제는 이들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이 누구며,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은 또 누구인가?
이들은 모두 이미 로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로마에는 바울이 이르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에 이르럿을 때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행 28:15)고 한 사실에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이들의 성분들은 어떠했는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류들이 있었다(빌 1:15).
저들은 빌립보서 1장 16절에 바울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저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움을 입은 줄로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바울을 사랑했다고 했다. 저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주권적 경륜을 좇아 예정을 받고, 소명을 당하고 사명을 받은 자로 알았다. 그래서 바울을 신뢰하고, 바울을 돕고, 바울을 사랑하는 바울의 동역자들이 된 사람들이었다. 저들은 선한 목적과 동기와 방법을 가진 자들이었다.
반대로 투기와 분쟁(빌 1:15)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이었다. 빌립보서 1장 17절에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이었다.
저들은 바울이 로마에 오기 전까지는 성도들 사이에 상당한 지위와 신뢰와 명예를 누리고 있었던 자들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기독교 복음운동의 일종의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이 온 이후로 저들의 기득권이 흔들리고 상실당할 처지에 이르렀다. 저들에게는 다툼, 헬라어로 ‘엘리데이아’(evriqei,a)가 있었다. 그리고 분쟁심이 있었다. 당파심이 있었다. 원래 여기 사용된 ‘엘리데이아’는 임금, 삵과 관계되어 있는 단어인 ‘엘리도스’(evriqο)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저들의 복음 전파 행위는 자신의 이익 추구를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 동기와 질이 매우 낮다.
더 확실히 말하면 ‘엘리데이아’는 직업인과 관계되어 움직이는 행동을 가리킨다. 자기 이익 추구와 관계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순전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다(빌 1:17). 저들은 이것이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들의 전도의 동기는 불순했다. 자기 욕구 충족이 가득 찬 마음으로 경쟁하려는 심사를 말한다. 저들은 바울이 옥에 갇혀 자유하지 못할 동안 자기들의 주장과 명예를 더 높이고, 바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지금 바울이 투옥되어 잇는 로마의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선교 현장에서 위대한 선언을 하고 있다. 그것이 빌립보서 1장 18절이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했다.
여기 「외모」는 ‘투기와 분쟁’(빌 1:15)을 가리킨다. 「참」이란 ‘착한 뜻’(빌 1:15)을 가리킨다. 「무슨 방도」란 ‘복음 전파의 동기와 행위’를 말한다.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했다. 전도의 동기와 행위가 어떠하든지 간에 저들이 전하는 복음은 좋은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렇다고 복음 전파의 동기와 행위가 불순한 것을 예찬하거나, 묵인함은 아니다. 지금 사도는 전파되는 복음 그 자체를 중심에 두고 토한 일종의 선언적 메시지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가 전파되는 곳에는 인간의 이해관계와 애증 관계가 다 결과적으로 무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의 위력이 인간의 투기와 분쟁과 다툼을 모조리 덮어버리기 때문인 것이다. 오직 복음 전파 그 자체가 인간적인 모든 것을 가리어버리기 때문이다. 실로 사도다운 바울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다운 바울의 모습이다.
지금 사도는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자기 투옥에 대한 번호와 간증 더 나아가 그 의의를 말하고 있다.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혹시나 그의 투옥이 저들의 신앙 성장에 장애가 될까 염려한 나머지 자기의 매임이 오히려 복음에 진보를 가져왔다고 알려준 것이다. 또 하나는 로마의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명암의 사실을 알려주고, 이것도 결과적으로는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하므로 자기의 투옥이 빌립보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활력이 되고 격려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처세 중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선을 목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결코 버릴 것이 없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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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생사(生死)의 의의(빌 1:19-26) "
-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존귀 -
빌립보서 1장 19~26절
석원태 목사
전도자 사도 바울은 고백적 간증을 통해 그의 투옥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했다(빌 1:12-14). 그리고 복음전파의 방법들에 약간의 문제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빌 1:15-18)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고 하였다. 택자 구원을 목적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바울의 고백적 간증이었다.
이제 바울의 고백적 간증은 더 깊어지고 높아지고 넓어짐을 보게 된다. 그것은 그가 삶과 죽음 사이에 끼여 있는 존재라고 한 사실이다. 그는 금세와 내세 사이에 끼여 있다고 하였다(빌 1:23). 더 좁게 말하면 그가 빌립보 감옥에서 착한 뜻으로 전도하는 무리와 외모로(투기와 분쟁) 전도하는 무리 사이에 끼여 있다고 했다(빌 1:12-17). 그럼에도 바울은 전파되는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한다고 함으로 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환영과 배척도 초월하고, 죽고 사는 것도 초월하고 있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울 자신이, 자기가 살고 죽는 생사관에 있어 너무나도 분명하고, 뚜렷하고,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본문 1장 19절에서 26절에서는 바울 자신의 생사(生死)의 의의를 고백적으로 간증하고 있다.
첫째는, 그가 겪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바울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확신하고 있는 삶 때문이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1장 19절에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하였다.
여기에 ‘이것’이란 그가 복음 때문에 겪고 있는 모든 사정들과 환경들을 가리킨다. 본문의 경우는 ‘투옥’이란 그의 매임이다. 그리고 그 매임 가운데서도 자기를 알아주고 환영하는 무리들, 또한 외모(투기, 분쟁)로 전도하는 것으로 실상은 자기를 괴롭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염려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이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기뻐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이것’이 자신(나)을 구원에 이르게 할 줄로 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 ‘구원’(σωτηρ?α)은 ‘죄와 사망에서의 자유’라는 본질적인 뜻이 있으나, 본문의 경우는 ‘안전’ 혹은 ‘해방’, ‘하늘에로의 옮김’ 등의 의미가 담겨 있다.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 바울 자신의 옥중에서의 석방과 자유까지도 포함되어 있는지 모른다.
‘구원’이란 헬라어 소테리아(σωτηρ?α)는 정치적 압제에서의 해방, 사상적 압제나 질병의 고통이나 재난과 기타 위협이나 굶주림의 가난이나 전쟁 등의 위험에서 해방되고, 행복해지는 것들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두 가지로 밝히고 있다.
하나는 바울을 향한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간구)가 있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 19절에 「이것이 너희 간구와」라고 하였다.
바울은 빌립보서의 경우뿐 아니라 다른 서신에서도 자기를 위한 성도들의 기도를 계속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2절에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이라고 하면서 전도자가 전한 말씀이 영광스럽게 되고, 또 전도자들을 악인의 무서운 소행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하기를 부탁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장 11절에는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빌레몬서에는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몬 1:22)고 하였다.
에베소서에는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엡 6:19)라고 하였다.
바울은 그가 예루살렘에로의 위험한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롬 15:30)라고 자기를 위한 기도를 부탁한 일도 있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1장 19절이 또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란 문자적으로 이곳에만 나타나고 있다. 로마서 8장 9절,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라고 함은 성령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보내신바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하였다. 또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자신이 성도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요 14:20). 성령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임재와 내재를 입증하는 산 증인이시다.
지금 바울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것’이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안다고 하였다.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움’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 ‘안다’ (ο?δα)는 말은 ‘경험적 앎’(γιν?σκω)이 아니라 초경험적인 직관적, 절대적 지식(앎)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영으로 확신되는 지식이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는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을 기뻐한다’고 한 것이다. 전도자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는 아무런 변동이나 이상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둘째, 절대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목적적 삶 때문이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하였다.
바울에게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은 헬라어 ‘아포카라도키아’(?ποκ?ραδοκ?α)이다. 이 단어는 ‘απο’(빼내어)+κ?ρα(목을)+‘바라봄’(δοκε?ν)의 합성어이다. 목을 쭉 뽑아내어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마치 학이 목을 길게 빼어 멀리 바라보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아포카라도키아’는 하나의 열망하는 바에 집중하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에서 떠나서 한 목적만을 대망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9절에는 ‘고대’라고 번역하였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그 ‘아포카라도키아’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함」(빌 1:20b)이라고 하였다.
여기 ‘존귀’라는 말 ‘메갈룬데세타이’(μεγαλυνθ?σεται)는 ‘위대한’(μ?γαρ?)이란 말에서 유래한 말로 ‘위대하게 만들다’라는 고대 동사 ‘메갈루노’(μεγαλ?νω)의 미래 수동형 직설법이다.
사도행전 19장 17절에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라고 한 경우이다.
그렇다면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더 크게 하고, 높이고, 위대하게 하고픈 것이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도 뚜렷하고 확실한 그의 목적적 그리스도관 때문에 그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부끄러움을 몰랐다고 하였다. ‘아무 일’, 곧 자기를 모략중상하는 악의의 전도자나, 자기의 몸을 결박하고 있는 로마의 관권이나, 아니면 여러 종류의 모욕과 학대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했다. 이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적극적으로 「온전히 담대하여」라고 하였다.
여기 ‘담대’는 특히 ‘언론의 자유’를 말한다. ‘온전히 담대했다’는 것은 ‘모든 확신에서의 거리낌 없는 언론의 자유’를 말한다. 그래서 그 어디, 그 누구도 바울의 복음전도를 꺾은 자가 없었다. 사도행전 28장 31절에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고 하였다.
「살든지 죽든지」라 고 함은 몸으로 ‘산 제물’(롬 12:1)이 되든지, 아니면 순교하든지 간에 오직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게’ 하고 싶었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곧 아포카라도키아(?ποκ?ραδοκ?α)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학수고대하는 미래란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하는 데’에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이트훗(J. B. Lightfoot)은 ‘자유로이 말하는 권리는 그리스도의 종의 표시요 특권이다.’라고 하였다. 엘리코트(Ellicott)는 ‘바울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연출하는 극장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렇게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존귀가 그의 삶의 절대적 목적이 되어 버렸다.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귀히 되게 하려 하였다.
왜 그런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빌립보서 1장 21절은 「이는」, 즉 이유접속사 ‘갈’(γ?ρ; for)로 시작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였다.
여기 ‘내게’(?μο?)라는 말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확실하다’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적 생사관(生死觀)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고 싶었다. 그 큰 이유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생사에 대한 그의 존재적 의의와 내용과 목적이 오직 그리스도뿐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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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의 고백적 간증"
2. 생사(生死)의 의의-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
빌립보서 1장 21~26절
석원태 목사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바울의 삶의 존재적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함이나, 가족을 위함이나, 아니면 국가나 민족이나 세계를 위함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자체가 그의 삶 전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의 삶의 전 동기요, 전 힘이요, 전 내용이요, 전 의미요, 전 사상(생각)이요, 전 이상이요, 전 방향이요, 전 목적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철저하고도 또 철저한 그의 생명관(生命觀)이요 생사관(生死觀)이다.
다시 바울의 간증적 고백인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분석해 보면,
① 그리스도는 바울 생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바울 삶의 신기원이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바울로 변하면서 그 생이 새롭게 시작된 사람이다(행 9: ). 그는 그때부터 자기 인생을 새로 시작한 사람이었다.
② 또한 그리스도는 바울 생(삶)의 계속(진행)이었다.
그리스도가 바울의 존재적 삶의 현주소라는 뜻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맞은 삶의 순경 중이나 아니면 역경 중에도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함께해 주심으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승리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이다(행 18:9-10). 그의 현재적 생존 그 자체는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포위되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③ 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바울 삶의 마지막이 된다는 의미도 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바울의 마지막 종착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렸을 때 결국 그 마지막에 이를 곳이 그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 앞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개인과 인류역사의 종착이란 말이다(딤후 4:7-9).
④ 또한 그리스도는 바울 삶의 영감이라는 뜻이 된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의 삶의 전 활력이고 활동이며, 주동세력이 된다는 것이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 그리스도 자체가 바울 삶의 전 동력이라는 것이다.
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바울 삶의 과제라는 것이다.
바울을 신자를 만들고, 이방인의 사도로 만들어 세계로 보내어 복음의 사도가 되게 하신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⑥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울 삶의 모든 가능의 힘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였다.
⑦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는 바울의 삶의 극치의 보상이라는 내용도 된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 디모데에게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고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생사’(生死), 곧 ‘살든지 죽든지’에 대하여 초월하고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두 사이에 끼여 있다고 했다. 이 말은 ‘붙잡혔다’는 뜻이다. 빌립보서 1장 23절에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라고 하였다.
이 말은 바울이 두 가지 소원에 흔들리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나는 두 가지 사이에서 곤경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여기 ‘끼여 있다’(συνέχομαι)는 말은 양쪽에 암벽이 솟아 있어서 방향을 바꿀 수 없고, 오직 전진만 계속할 수밖에 없는 좁은 암벽에 둘러싸인 협곡을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쓰이는 말이다.
그 둘 중 하나는 ‘죽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살아서 자기 일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금세와 내세,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 육계(肉界)와 영계(靈界) 사이에 끼여 있다고 했다. 빌립보 교회와 주님 사이, 착한 뜻으로 전도하는 사람들과 순전치 못한 마음으로 전도하는 사람들 사이, 삶과 죽음, 곧 생사 간에 숨 쉬고 있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 경우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b)고 하였다. 죽는 것은 ‘떠나는 것’(빌 1:23)이라고 하였다.
여기 ‘떠난다’(ἀναλύω)는 말은 세 가지 경우의 배경이 있다.
① 텐트의 밧줄(rope)을 풀고 말뚝을 빼면서 캠프를 걷어치우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이 세상 장막을 걷어치우고, 영광스러운 새 세계를 향하는 경우이다(고후 5:1).
② 항구에 정박된 배의 밧줄을 풀고, 닻을 올리고 귀향을 위하여 출항하는 경우이다. 죽음이란, 세상이라고 하는 외국의 항구를 떠나서 영원한 천국의 고향으로 귀향한다는 뜻이다.
③ 얽힌 문제들을 푼다는 뜻이다. 죽음이란 모든 인생의 희비애락의 문제를 푸는 것이 된다.
이런 의미로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빌 1:23)고 하였다. 그래서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고 하였다.
고린도후서 5장 1절과 베드로후서 1장 14절에는 죽음을 장막을 허무는 것에 비유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는 죽은 후의 영생을 집(내 아버지 집)으로 비유했다.
성경에는 성도가 이 세상을 떠나면 그리스도에게로 간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5:8, 계14:13). 그래서 바울은 ‘떠나는 것’(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다.
반면에 바울은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4)고도 하였다.
여기 ‘육신에 거하는 것’이란 ‘누구를 도와줄 것을 목적하고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 유익하다(좋다)’는 말은 ‘단연코 더 좋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살아서 이 세상에 더 머무는 것이 빌립보 교회(교인)를 위하여 더욱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 사역의 열매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1장 22절에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라고 하였다.
‘내 일의 열매’가 무엇인가? 바울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인들에게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 더하여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1장 25절에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바울은 자기의 존재론적 의의가 분명하였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의 성화적 믿음과 기쁨 때문이었다. 이 일 때문에 자기는 육신에 머무는 편을 택했다고 하였다.
바울은 처음에는 이 두 사이에 끼여서 잠깐 혼란에 빠졌다. 빌립보서 1장 22절 하반절에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 장차의 영광 사이에서(롬 8:18) 흔들리다가 교회를 위한 남은 사명 편을 택함이 주의 기쁘신 뜻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재회할 미래적 소망을 피력하게 된다. 빌립보서 1장 26절에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바울이 옥에서 나와 빌립보 교인들을 다시 만날 그때는 바울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풍성한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이 자랑은 기쁨을 동반하고, 사랑을 동반하고, 믿음의 진보를 자랑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본적(神本的) 자랑이다. 바울은 자기의 석방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랑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실로 목회적이고 목자적 자랑이다. 요셉과 야곱 부자가 만났을 때 목을 서로 껴안고 실컷 울고 난 다음에,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창 46:30)라고 한 야곱의 행복한 자랑과도 비교될 것인가!
이 부분의 중심 뜻은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 자신의 생사관(生死觀)이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와 그리스도 예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구원될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이었다(빌 1:19).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생사를 걸고 그리스도 예수만을 존귀케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빌 1:20). 그 이유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였 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나(죽음), 아니면 살아서 빌립보 교회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빌립보 교회(성도)들에게 자랑이 되는 것이라면 살아 있어야 된다고 한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궁극적인 목적이 뚜렷하고 분명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바로 이러한 생사관이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생사관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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