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우리는 복을 많이 받고 삽니다.
연세 드신 분들에겐 좀 생소한 말씀입니다만, 요즈음 우리 젊은 세대는 좋은 정보를 쉽게 나눌 수 있는 축복을 받고 삽니다.
저도 그런 축복을 많이 받는 사람인데요. 지난 주에는 우리 교우 가운데 좋은 책을 읽고 감동받은 부분을 보내왔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 내용이 바로 본문을 설명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겠구나 싶어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 나오는 글로 생각되는데요.
한 번 따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
아멘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사는 우리는 시급히 할 일이 있습니다.
1. 근신입니다.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러므로'란 접속어로 시작합니다.
'우리 성도는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이므로'
그 산 소망에 걸맞게 새로운 삶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이 편지를 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은 통으로 된 것이어서 허리를 묶지 않으면 펄럭거렸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거나 활동을 하려면 반드시 허리를 묶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허리를 동이라는 말은 여정에 나서는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지요.
오늘 날 옷이 많이 편리해졌지만, 이 말씀이 기록되던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허리띠를 잘 메는 것은 일을 시작하는 첫 행동이었습니다.
출12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을 준비시키실 때,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으라’ 하셨습니다.
허리를 동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이 말씀을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는 가운데 긴장된 자세로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리도록 권면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특별한 부분이 있는데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했습니다.
마음에 허리를 동인다는 말씀은 '급한 일을 당할 때 취하는 태도'(출 12:11)로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바람직하지 않는 삶을 반성하고 목표로 매진하는 자세'입니다.
마음에 허리를 동인다는 말씀은 '급한 일을 당할 때 취하는 태도'(출 12:11)로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바람직하지 않는 삶을 반성하고 목표로 근신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종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눅 12:35-37a]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이는 몸의 허리를 묶는 허리띠가 아니라 마음을 묶는 '근신하라'는 말씀입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엔 'Be self- controlled'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기 자신을 control 즉 잘 조절해야 합니다.
성경 딤후2:3에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군사가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다섯 처녀처럼 마음의 허리를 묶는 것입니다.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며 부지런히 장사하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남긴 종처럼 마음의 허리를 묶는 것입니다.
참 된 예배자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합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얼마나 마음을 기울입니까?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건강을 위해 일주일내내 성경 한번 읽지 않고 지내는 사람이 있다면....... .
정신을 차리고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는데 기도를 소홀히 하며 살았다면 정신을 차리고 새벽기도든지 밤기도든지 기도의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맡은 일에 충성하지 못했었다면 다시 부지런함을 회복하는 것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셨는데 움켜쥐려고만 하고 모으려고만 했었다면 나누어 주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은혜를 바라며.
[벹전1:13b]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3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전히 바랄찌어다'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 성도는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살면서 희생하며 불편하게 살아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못하고 영원히 손해만 보고 절제만 하고 살아야 한다면 억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다시 오실 때 또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실 은혜가 있습니다.
[고전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졌기에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가져다 줄 은혜를 소망하면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마음을 가다듬고 언어나 행동에 있어서 조심하며 인내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기름 준비한 다섯 처녀가 신랑으로부터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포도원을 맡은 종이 포도원을 잘 관리하며 오실 주인의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주인으로부터 몇 달란트를 받았든지 그것으로 최선을 다해 장사한 종이 주인으로부터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2. 다르게 삽시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우리 기독교인들은 무엇인가 다른 무엇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아들 낳고 사업에 성공하는 복을 받을 거라는 기복적인 기대를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회는 무엇인가 다를 것이고, 교인들은 무엇인가 다를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그들의 생각은 옳습니다.
다른 무엇을 기대하고 교회 왔다가 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하면 낙심합니다. 먼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고는 실망하고서 실족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그 다른 무엇을 거룩이란 말로 전해주십니다.
우리 믿는 성도가 세상과 다르기 위해서는 몇 가지 힘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1] 사욕은 내려놓고.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주의입니다. 그리고 개인주의 사회의 특징은 사욕을 미화하는 것입니다.
여기 사욕이란
물질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쾌락에 대한 욕심 등
자기 추구의 욕망들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벧전4;3에 보면 이런 것들은 '이전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좇던'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사욕을 좇지 말고 다르게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다가 결국 의인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습니다.
롯이 사욕을 좇다가 가문이 패망합니다.
창14:12에 보면 그 소돔 땅에 '거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롯의 아내는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
삼손이 사욕을 좇다가 파멸의 길을 갑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욕을 좇다가 심판에 떨어집니다.
2] 구별된 삶을 살아야
'거룩한 자'는 성경(70인역)에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자' 혹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정결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을 드러내 줍니다.
이런 거룩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과거에 처했던 어둠에서 광명한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2:9;5:10).
'거룩한 존재이니 거룩함을 나타내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존재요,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존재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본래의 뜻은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거룩'은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요, 하나님께로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성도의 행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윤리를 실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성도들은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도록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이 말씀을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요청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아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바나바는 은혜를 받고 밭을 구별해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둡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약속의 땅에 거하면서도 늘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헤어질 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양보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았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4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롤 모델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15절에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즉 하나님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 기준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3.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편견에 사로잡혀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편견이나 불공평에 빠지지 아니하시고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공의로운 심판자이십니다.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구약시대나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한 일입니다.
베드로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시곤 하셨는데 베드로 사도 역시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습니다(마 6:9; 눅11:2).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보살피시는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마 6:31-32)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버지일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재판장으로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리스도인을 보살피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 판단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여 위로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눅 18:6-7)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즉 이 말은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2] 두려운 나그네 삶입니다.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로 있을 때'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지내는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본향이 이 세상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세상은 영원한 삶을 영위하기 이전에 잠시 거쳐 지나가는 여행에 불과합니다.
어제 조정옥 집사님의 모친 이순덕 권사님께서 소천하셔서, 입관예배를 드렸습니다. 98년을 향수하다 아름답게 떠났습니다. 복인이라 하십니다.
98년을 사셨어도 잠깐입니다. 나그네에요. 저도 그분을 22년 전에 만나 뵈었고 3년을 함께 신앙생활하였습니다. 그날이 엊그제에요. 그렇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나그네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할 것처럼 안일하게 삶을 살아갈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하나님이 원하는 악에서 떠난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를 생각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중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처럼 영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 어떤 어려움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은 영적 어려움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성도들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밤 10시 5분 기도 운동을 하고 있는데요.
여러분, 다니엘처럼 장소를 정해놓고, 정해진 시간에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면 방해를 덜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 얼마나 몇 번이나 기도해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생활은 영적 생활의 바로미터와 같은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세상과의 영적 전쟁을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면서 그러므로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했고 특히 늘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대적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으니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죄와의 영적전쟁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7:21이하]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 )( )가 아니었습니까'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고, 어떤 직분을 가졌느냐, 목사였느냐, 장로였느냐, 권사였느냐, 집사였느냐 하는 것은 천국 갈 보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옛 자아와 구별되는 새로운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길 주님은 원하십니다.
며칠 전, 어떤 성도가 보내온 글이 좋아 소개합니다.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나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를 사랑한다치고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위대한 비밀
하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나 무관심에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또 하나님께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죄를 치료하겠다는
결심을 완수할 때까지
단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우리 죄를 치료하겠다는
결심을 완수할 때까지
단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랑할 수 없는 이웃까지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다시 오실 예수님은 우리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유일한 소망이 되십니다.
[오늘 설교 본문]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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