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20 March 2015

히12:1-3 믿음의 경주를 잘하려면)

  [들어가는 말]

    우리 시대에 귀하게 쓰임 받는 릭 워렌 목사님을 아시지요?
    저는 그분의 저술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으면서 참 귀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적인 새들백 교회를 담임하는 것보다 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그에게 아주 특이한 병이 있습니다. 아드레날린이 뇌에 분비될 때 뇌가 그 호르몬에 대해 이상반응을 보이는 '뇌기능 부전증입니다.
그래서 현기증 이 일어나기도 하고
앞에 있는 것도 잘 안보이기도 해요.
머리아 욱신거리기도 하고
무서운 공포가 일어나기도 하고
심할 때는 실신하기도 합니다.

그는 설교하러 가기 전에 '중보기도팀'에 찾아가서 기도를 요청합니다. 설교 중에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계속 기도합니다.

  ‘이 연약한 그릇을 붙들어주세요. 사용해 주세요. 나의 약함 속에서 주님만이 능력이 되게 하옵소서.’

    신앙 경주자로 세계적인 챔피언라 할 만한데 얽매이는 것이 있습니다.
새들백 교회를 보러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가는, 세계 제일의 교회를 목회하는데도 정작 그는 주님만 바라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신앙의 경주자랍니다.
믿음의 경주자답게 벗어버려야 할 것이 있다  하십니다,
바라보아야 할 분이 있다고 하십니다.
참고 달려야 할 코스가 있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좋은 신앙의 경주자로 거듭날 수 있기 바랍니다.


    1.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어버리라.

    [히12:1]

    1. 이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본문에 보면 경기자가 출전하기 전에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합니다.

    신앙의 경주자에게 주님은 두 가지를 버리라 말씀하십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1] 모든 무거운 것입니다.

    무거운 것은 운동선수가 운동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입니다.
운동선수는 경기를 할 때 가장 가볍고 몸에 맞는 옷만 입습니다. 장신구는 필요 없습니다.
    많은 수영선수들이 머리칼까지 밀어버린 것을 봅니다.
    아베베란 선수는 신발까지 벗어버리고 42,195Km를 달립니다.

    믿음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신앙의 경주에서 성공하기 원하십니까?
우리를 얽어매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헤아려 보세요.

우리에게는 우리는 그것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너무나 많은 군더더기가 있습니다.



벗어버려야 할 옷이 무거운 것은 무엇입니까?

근심 걱정입니까?
삶에서 우리 각자는 안전과 사명 사이에서 종종 선택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으로 인도하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편안함과 행복을 ‘보호하려’ 할 것인가? 여러분이 자기 보호를 택한다면, 안정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당신은 일시적인 안전지대를 유지하기 위해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버렸다는 사실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여러분의 여정을 마치려면 걱정 근심의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모험과 믿음의 길이며, 그 상급은 당신의 안정감과 편안함보다 훨씬 더 큽니다. 당신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김으로, 걸음을 늦추는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십시오.

교만입니까?
우리는 겸손의 참된 의미를 잊었습니다. 오직 우리의 무능함과 비참한 모습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겸손은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격 특성입니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의존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첫째가 하나님, 둘째는 다른 사람들, 셋째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상냥한 말투나 자신을 비하하는 태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선물인 능력 안에서 담대하고 끈질기게 사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죄의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하십시오.


    2]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


    죄는 죄인데 어떤 죄요?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아무리 신앙의 경주를 잘 하다가도 죄라는 올무에 걸리기 시작하면 제대로 달릴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일입니다.

    이성주의 사고가 때로는  얽매이기 쉬운 죄가 됩니다. 이성은 중요하나 이성주의는 죄입니다. 범사를 이해해야만 움직이는 것은 이성을 우상으로 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신의 이성을 따릅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얽매이기 쉬운 죄가 됩니다. 신앙은 중요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모든 종교 안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면 죄입니다.
    뉴에이지 사고가 얽매이기 쉬운 죄가 됩니다. 선악과는 중요하지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는 것은 죄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이 삶의 곳곳을 파고 듭니다.
얼마 전 어떤 이름 있는 교회에서 교육에 쓰임 받는 신학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요가를 통해 선교를 하겠다고 하는 분도 보았습니다.

지나치게 세상을 사랑하지 않나요?
세상적인 관심사에 너무 빠지지 않았어요?
필요 이상 자만하지 않나요?


    2.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생각하라.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1] ‘믿음의 주요’라는 말은 믿음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은 한 가지만 생각해야하는데 그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십니다.
믿음의 '완성자'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예수만 구원자로서의 믿음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참된 믿음의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믿음의 목표와 방향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문제는 은혜가 모자란 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결국 은혜(능력)가 차단됩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싸워야만 합니다. 당신의 집으로 물을 보내 주는 수로관을 생각해 보세요. 만일 그 관이 파열되면 물의 흐름이 끊길 것입니다. 수원에서 물이 무한정 공급되더라도 관이 파열되었기 때문에 물이 더 이상 당신의 집까지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관이며, 물은 은혜입니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믿음 안에서 바로 서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또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세우기 위해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결국 믿음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세상을 다스리지 못하고 반대로 세상이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존 비비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믿음이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은혜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내가 믿는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서 믿음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 얻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을 바라볼 때 믿음이 생깁니다.

    ‘그분을 바라본다’는 말은 힐끗 한번 보는 것이 아니라 초점을 고정해서 보는 것입니다. 응시하는 것입니다. 주의 깊게 뚫어져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생각, 관심, 시선, 귀, 마음을 고정하고 예수님 앞에 내 마음과 몸과 생각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

    옛날 한 젊은 재상이 나이 많은 임금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의 유혹을 피하고 많은 시험을 이겨서 나라를 위한 깨끗한 충신으로 일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임금님은 그 뜻이 기특하다고 생각하여 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 젊은 재상으로 하여금 컵에다가 물을 가득히 채워서, 이 컵을 들고 제한된 시간 안에 시내를 한 바퀴 돌되, 물을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큰 벌을 내리겠다고 하명했습니다. 그리고 창과 칼을 든 군사들을 재상 뒤로 따르게 했습니다. 젊은 재상은 질문 한번 했다가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임금님이 명하신 대로 제 시간에 물 컵을 들고 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임금님은 크게 칭찬하시며 그의 수고를 고마워했습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자네가 시내를 한바퀴 도는 동안 여자를 보았나?" "못 보았습니다." "그럼 술집은 보았나?"
"못 보았습니다."
"그러면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나왔던가?"
"임금님, 못 보았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본 것이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야. 내가 할 일을 열심히 하노라면 하지 않아도 되는 시시한 일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법이네"



[1] ‘온전케 한다’는 말은 ‘완전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앞에 가면 내 믿음이 완전해 집니다. 내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완전하시기에 예수님 안에 있으면 내가 완전해 지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흠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십자가를 기쁘게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영광과 기쁨을 보셨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즐거움을 위하여’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즐거움이라는 말은 기쁨, 미래에 올 영광, 승리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다’라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고난을 참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는 좋아하지만 고난은 싫어합니다. 둘째는 십자가는 체면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거역하고 대항하며 직접 십자가에 못박았던 대적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응하시지 아니하시고 참으셨습니다.

    이용도 목사님은 1901년에 태어났는데 1919년에서 24년까지 5년 동안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4번 투옥 당하였고 3년 이상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어주는 모범수였습니다. 수갑과 얼음에 얼어붙은 손목을 자기 뱃속에 품어서 녹여 주고, 배고파 하는 죄수들에게 자기 밥을 주고 기도도 하였습니다. 교도관과 판검사도 그의 행동에 감동했습니다.
    한번은 이 분이 재령이라는 곳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이 목사가 올 때 사람들이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남루한 무명 옷에 중절모를 써서 사람들이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목사라고 생각 하지 못한 것입니다. 선천 역에 내렸을 때도 너절한 회색 두루마기, 굵은 베바지, 고무신, 겨울모자 때문에 사람들이 이 목사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 목사는 예수처럼 사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예수의 삶을 실천하기 원했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통치권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르신 것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대신 사람들의 기관을 찾아가 조종 기법을 사용해 자신들의 시련을 이겨 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에 훨씬 못 미치는 삶을 살게 됐습니다.

    요셉은 처음에는 고자질쟁이에 허풍쟁이였고 조금 거만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계속 그런 상태로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역경을 통해 순종했고, 결국 능력 있는 통치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성품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원망과 악의와 용서하지 않는 마음과 형제들을 향한 미움을 품고 있었다면 쉽게 보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형들은 전 세계적인 가뭄이 들자 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왔습니다. 이때 요셉은 그들을 평생 감옥에 집어넣을 수도 있었고, 고문하고 심지어는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와 정반대로 행했습니다. 공짜로 곡식을 주었고, 그들의 가족들이 애굽의 가장 좋은 땅에 살게 해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나라에서 주는 가장 좋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요컨대 자격이 없는 형들에게 애굽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내어 준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속에는 성숙한 성품이 형성되고, 강해지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을 저주한 형들을 축복하고 자신을 미워한 형들에게 좋은 일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왕중 왕, 예수 그리스도의 즉위식을 나타내는 시 110:1의 인용입니다.

    [시110:1-2]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 신앙인의 경주에 목표가 되십니다.

    신앙인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가 확실한 자는 반드시 성공적인 인생이 됩니다. 마태 15장을 보면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소리를 지릅니다. "내 딸이 흉악한 귀신들렸나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여인의 분명한 목표는 바로 딸이 고침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여인은 개 취급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말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직 딸을 고쳐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리기를 먹나이다"
  모욕당하는 상황에서도 여인은 자신의 분명한 목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왕중 왕에게 무엇인들 못합니까?


    3. 인내를 가지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라

    [히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1] 죄인들이 거역한 일을 참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도 거역하였습니다. 흠 없고 점 없으신 하나님도 거역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자기에게 반대한 사람들, 팔아 버린 제자,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친 종교 지도자 그리고 로마 병정들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말합니다.

부끄러움을 참으셨습니다
2절 하반절을 보면『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반대하고 거역하고 배신하고 죽이려 했던 사람들과 최후에 사형을 선고했던 빌라도와 못 박고 희롱하고 채찍질하던 사람들은 모든 죄인들이었습니다. 죄 없는 예수를 죄인들이 심문하고 희롱하고 채찍질하고 못 박았습니다.

셋째, 배신을 참으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참으셨습니다.
베드로의 배신을 참으셨습니다.
군중의 배신을 참으셨습니다.
주님은 그것도 참으셨습니다.

    우리에겐 피곤하고 낙심할 일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고난을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2] 인내로 경주합니다.

    "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1절)

    경주를 경주하며 이 동사는 현재형입니다. 전에 달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으로 달릴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과거에 얼마나 훌륭한 경주를 했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어떤 경주를 하기로 계획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지금 달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정해놓으신 경주로(競走路)에 이미 들어섰고 그 위에서 지금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달리기를 계속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가다가 중단하고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 주님을 위한 경주입니다.

    그런데 그 경주는 나를 위한 경주가 아닙니다.
    'race marked out for him' 즉 나를 위해 준비된 경기가 아니라 '그를 위해 준비된 경기'라는 겁니다.
이 경기는 내 경기가 아니라 주님에 의한 경기입니다. 나 자신 스스로 정
해놓고 달리는 경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정해 놓으신 트랙(track)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트랙을 따라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경주자는 언제나 주님이 정해 놓으신 경주로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 경주로를 이탈해서 제멋대로 돌아다니거나 다른 선을 침범하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순간 실격패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정해 놓으신 그 코스(course)를 따라서 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진리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의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사랑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믿음의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을 마다하고 세상의 것을 좇아서 살아가게 된다면 그 사람은 신앙의 경주자로서는 적합하지가 못한 것입니다.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

    사도 바울도 달리기 선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2] 인내로 경주합니다.

    믿음은 행위를 표현하는 동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참는 행위, 곧 인내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승리의 관건은 누가 얼마나 오래 참고 잘 달리느냐에 있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육신을 잠잠케 하며 우리의 속사람을 세워 줍니다. 우리의 육신은 약합니다. 육신은 언제나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을 택하려 할 것입니다. 그것은 대개 잘못된 길입니다. 우리 육신은 세상의 강한 흐름을 거슬러 싸울 마음이 없습니다. 그에 반해 기도는 육신의 욕망을 이길 내적인 힘을 길러 줍나다. 기도는 우리가 낙심하지 않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눅 18:1) 한다고 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특히 슬픔(고뇌)이 우리에게 닥칠 때 기도하지 않으면 낙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겪은 일이 바로 낙심이었습니다. 이들은 기도해야 할 때에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태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수단을 이용해 성령님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억누릅니다. 텔레비전을 켜고, 웹 서핑을 하고, 항상 가지고 다니는 휴대폰으로 친구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컴퓨터 게임을 하고, 바쁘기만 하고 별로 쓸모없는 일을 하고, 또는 냉장고를 열고 배불리 먹는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와 경고에는 점점 더 둔감해집니다. 그 결과 고난을 통해 강해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끈질긴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퀴리부인은 랴듐을 발견할 때 400번의 실험을 실패하였다 합니다.
    에디슨은 전기 축전지, 전화기, 전차 등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11만번의 실패를 고백합니다. 전기불 발명 때에는 1000번 가까이 실패하였다고 합니다.

    옳은 줄은 알지만 참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병입니다.
약1:4 말씀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것입니다.
경주에는 고비가 있습니다.
등산할 때 마지막으로 넘어야 하는 고개가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할 때도 포기하고 되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할까요?
포기할까요?
목표를 수정할까요?
편법을 쓸까요?
법을 위반해서 슬쩍 넘어갈까요?
그러면 실격입니다.
인내로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만이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예: 어느 고아원원장 이야기]

어느 고아원에서 여자 원장님이 수백 명 고아들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식이 떨어져 고아들이 굶게 되었습니다. 원장님은 모금함을 들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네온싸인이 휘황찬란한 어느 술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병에 몇 백 달러하는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원장은 모금함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수백 명 고아들이 굶고 있어요. 도와 주세요.” 술을 마시던 한 남자가 “뭐야! 재수없게”라고 외치면서 맥주잔을 원장의 얼굴에 뿌렸습니다. 원장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에게는 맥주를 주셨는데 굶고 있는 고아들에게는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이 광경을 보던 한 노인이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모금함에 돈을 넣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금함으로 오더니 돈을 넣었습니다. 맥주를 얼굴에 뿌리던 사람이 지갑을 꺼내 들고 원장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부인! 죄송합니다. 부인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그렇게 말하고는 지갑을 몽땅 모금함에 넣었습니다. 원장 한 분의 수고로 고아 수 백 명이 굶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많아야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생이란 경주와 같습니다.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우리는 70~80년이라는 인생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면 관중들이 환호성과 박수로 선수를 격려합니다. 믿음의 영웅들이 때로는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말고 뛰어라’고 응원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12장 1절에 나오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입니다. 내가 바통을 이어 받아 믿음의 경주를 할 때 피를 흘려가며 순교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나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위로가 작년에 한국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식생활이 달라졌습니다.
    어떤 음식을 안먹습니다.
어떤 음식은 정말 먹고 싶은데 일주일에 한 번만 먹습니다.
대신 어떤 음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먹습니다.

    웬 일인가 보니 한국에서 권투를 하다 왔습니다.
    권수 선수는 팔에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특별한 운동을 하고 음식을 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자신이 특별한 어떤 노력을 기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좋은 경주자가 되려면 특별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버릴 것이 있습니다.
좋은 운동선수가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잘 하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꽃피우기 위해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인내로서 열매를 맺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 속한 단어지만 ‘믿음’은 인간에게 속한 단어입니다.
   믿음을 사람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받은 믿음이란 선물을 가지고 어떤 작품을 만들어가느냐는 사람에게 달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요즈음 봄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그 꽃망울들이 겨울 내내 인내하였습니다.
존 비비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달려갈 길을 다 마치기 위한 영적 필수품을 성경 안에서 찾아냈습니다. 바로 ‘끈질김’의 패러다임입니다.
근근이 참고 버티는 수준이 아니라, 강력한 ‘은혜의 능력’으로 모든 난관을 돌파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끈질긴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역경이 닥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과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권합니다.
“모든 일에 ‘끈질김’으로 승부하라!
모든 상황은 당신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끈질긴 믿음,
끈질긴 겸손,
끈질긴 내려놓음,
끈질긴 근신,
끈질긴 대적,
끈질긴 순종,
끈질긴 기도
‘어떻게 하면 고난을 피할까’에 골몰하느라 고난을 통해 영혼을 튼튼하게 세울 수 있는 특권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끈질긴 태도와 믿음으로 역경에 잘 대처하면 점점 하나님의 통치권 안으로 들어가지만, 믿음의 노 젓기를 멈추면 금세 세상 물살에 떠내려갑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질서이자 원리입니다.
‘은혜의 능력’으로 끝까지 삶을 다스립시다! 하나님의 뜻을 끈질기게 추구할 때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권위로 승리할 것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시고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인내함으로 좋은 인생 경주를 하시는 우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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