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4:11-28
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함이라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 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머리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신앙의 목적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구원을 갈망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방문했던 루스드라 시민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는 현장을 목격한 루가오니아 사람들이 놀라와하며 흥분하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그들은 구원을 가져온 바울과 바나바를 새로운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흥분하여 격앙되었습니다. 기적의 현장은 구원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는 믿음은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는 헬라의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며 사고방식을 지닌 것으로 묘사됩니다. 구원을 향한 그들의 기대가 최대치로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중요한 일을 계획합니다. 누구보다 구원의 길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과 바나바 선교사는 구원의 바른 길을 제시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정녕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찾기 원합니다.
1.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15)
먼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길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은 놀랍고 경이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루스드라에 사는 사람들은 확신헀습니다. 헬라 신화 속에 나오는 신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이해한 것입니다. 당시 제우스와 머큐리 신에게는 황소를 제물로 바쳐 제사하며 화환을 함께 올려 놓았습니다.
13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루스드라 사람들은 두 사람을 통해 임한 구원의 사건을 보고 그들에게 제사함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보면서 참 어리석은 원시인들(?)이라고 단정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루스드라는 학식이 높은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다만 그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 높은 학식으로도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일본이 세계 최고의 과학문명과 학식을 누리고 있지만, 우상숭배가 가장 심하다는 것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얼마전 '어느 불상이 땀을 흘린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불상은 국가가 위험한 때마다 땀을 그렇게 뻘뻘 흘린다 해서 영험하다는 것이었습나다. 돌부처에 물이 흘러내려도 수많은 신문이 보도를 하고 정말 큰 일이 나는가 하여 조마조마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시주를 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온 자가 뛰어걷는데요.
[예화]를 한 가지 듭니다. 그들은 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허매(헤르메스)와 쓰스(제우스)라는 두 신이 그 도시를 방문했다는 전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두 신은 루스드라에 와서 단 두사람, 즉 빌레몬과 바우시스에게만 친절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허매(헤르메스)와 쓰스(제우스)라는 두 신을 천대했습니다. 그래서 허매(헤르메스)와 쓰스(제우스)라는 두 신은 이 도시를 저주하였고, 그 결과 무서운 홍수로 루스드라는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허매(헤르메스)와 쓰스(제우스)라는 두 신을 잘 섬긴 두 사람은 힘있는 나무가 되어서 성밖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지식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자 두 신들이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몰려듭니다. 그들이 가진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고상하다고 하지만, 이 정도인 것입니다. 이런 지식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한 것 이상은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들이 구원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공개적으로 알린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잘못된 열심을 꺾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겨우'라는 단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옷을 찢는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울분과 비통한 심정이나 절망과 증오를 위한 것으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습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헀습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그러면 두 사도가 말한 구원은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께서 자연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으므로 자연을 통해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모든 민족을 하나님은 공평히 사랑해 왔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하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크신 사랑으로 구원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적용]
오늘날 과학의 첨단을 걷는다는 미국에도 13일 금요일에 대한 미신적 사고가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이곳 캐나다의 어느 아파트에는 13층은 있으나 13층니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7은 Lucky 7이라 하여 좋아들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도 4자를 (死)와 연관시켜 싫어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면 어느 아파트에는 4층은 있으나 4층이란 말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남의 이름을 쓸 때, 빨간 볼펜으로 쓰는 것을 망설입니다. 그 사람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많은 이방인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들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가운데 찾아온다면, 옷을 찢어야 할 부분이 어느 부분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이 믿음에 거하라(22)
구원을 얻는데 방해가 되는 두 번 째 장애를 우리는 유대인들로부터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위해 율법과 할례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마련해두신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저들의 마음에는 시기와 비방의 악한 열매가 맺히자 그들까지 선동하여 악한 영향력 속에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은혜 아래 거하기를 거부하는 그들을 떠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두 사도의 가르침을 이단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이단자를 처형하듯이 바울 사도를 처형하려 했던 것입니다.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의 율법주의 신앙의 독소를 우리 안에서 불식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유교주의 풍토에서 자란 민족이기 때문에 이 독소가 너무 유해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율법주의적 무지가 앉은뱅이를 고치고 설교하던 곳에서 바울 사도를 죽기까지 폭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두 사람이 마술과 같은 속임수로 루스드라 사람들의 종교를 파괴하려 한다고 선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음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는 것입니다.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사도 바울이 우리 가운데 찾아온다면, 옷을 찢어야 할 부분이 어느 부분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 많은 환난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22)
구원의 길에 들어선 제자들 또한 이 구원의 완성을 위해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환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음에 이를 만큼 깊은 상처를 입고 고통의 신음을 하고 있었을 자리에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많은 제자들에게 1차 전도여행을 마감하면서 중요한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천국로는 비포장도로입니다. 세상적으로 넓고 반들반들한 길을 너무 좋아하면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 닦아놓은 길을 너무 사랑하지 마십시오.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좁고 협착한 길이지만,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 바로 천국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장막 수련회에 대하여 나름대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텔도 아니고, 좋은 수양관도 아니어서 어떤 분들에게는 불편을 드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부러 좁고 협착한 길을 택하여 갈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드럽고 윤택한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살 것같은 생활보다는 거칠고 험난한 장막생활 속에 천국로가 있다고 봅니다. 믿는 자에게는 실패와 좌절, 성공과 출세의 기준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새로운 길을 실패와 좌절 바로 그 뒤에 두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난관을 성공과 출세 바로 그 뒤에 두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정상에 오르게 될 때, 우리는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가 됩니다. 성공의 길로 나아가고 있을 때, 함정이 그 앞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예화]
저는 이번 밀알보에서 환난에 있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 토론토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41세된 한 여인이 부업으로 상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끄러운 셀로판지를 밟아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무릎 안쪽 혈관에 응혈현상이 생기더니 정맥염증으로 발전하여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수술부위를 치료하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나머지 다리까지 잘라내야 했습니다. 고난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통원치료 중, 의사가 붕대를 감다가 떨어뜨려 Tek가 다시 감았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세균이 감염되었습니다. 100여번이나 고통스런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술이 끝났을 때는 오른쪽 눈과 오른 팔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입장에 있다면, 어떤 결단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신체장애자의 권익을 위해 빛나는 공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뭇사람의 심금을 울린 베릴 포터 여사입니다. 그녀는 수많은 장애자와 하나가 되어 그들 앞에 놓여있던 태산 같은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장애자가 휠체어를 타고 차도와 인도를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는 커브 램프를 설치하는 일을 이룬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답니다. 베릴이 토론토 다운타운 Yonge St. 한복판을 휠체어로 지나칠 때, 교통이 마비되고 크락숀 소리가 요란했지만 그녀는 말했습니다. "나도 통행할 권리가 있는 시민"이라고 말입니다.그녀는 25년간 장애자가 일반인보다 불편하기는 하지만 어디든지 갈 수 있도록 수많은 악법들을 고치는데 성공했습니다.
1년 전 그녀는 세상을 떠났지만, 베릴여사는 신체장애를 통해 정신장애를 극복한 인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 캐나다는 장애인들의 천국이란 말을 듣습니다. 이런 오늘에 이르기 위해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에 환난을 극복하는 사명인들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고통과 박해를 겪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하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실존(實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기들을 따르는 제자들을 계속 배출했으며(4,20,21절)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방 지역에서 견고한 교회를 세워 갔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3:12 )
예화]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엄청난 핍박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바다에 십자가를 세우고 기독교인들을 그곳에 묶어놓았습니다. 밀물이 오면서 기독교인들은 익사하게 됩니다. 한 신부가 이 모습을 멀리서 보면서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침묵만 하고 계십니까?"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느니라."
기독교인들에겐 환난의 길이 천국가는 지름길입니다.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우리 믿는 성도들이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환난을 이기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교회 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교회생활을 잘해야 한다고 구태어 말한 까닭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사람 가운데 교회생활이 영 시원치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모신 자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구요.
무교회주의자도 있습니다. 보이는 지상교회의 약점을 물고 홀로 잘 믿는 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몸은 교회에 적을 두고 있으나, 교회생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통해서 양육받고,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받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까지 가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성도들과 연합하여 악한 사탄과 영적 전쟁을 감당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사탄이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나홀로 서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없습니다. 기드온이 똑똑했어도 300명의 용사를 맡겨주시는 이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하는 일이 직원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집단적인 공동체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활동적으로 이끌기 위한 지도자로 장로를 택하게 되었는데 이미 11:30에서 장로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로를 택하여 세웠다는 언급은 여기서 처음 나옵니다. 장로(elder, NIV)는 감독자라는 직분으로 언급되기도 하며(20:28) 다스리며(롬12:8;살전5:12) 수고하는 자(고전16:16)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목회자와 같은 기능을 하며 성도들을 돌보는 자로서 언급된 점으로 보아(딛1:5;약5:14) 사실상 목회자였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세우면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지도자들을 주께 부탁한 것은 선출된 자들에게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직분의 거룩성을 부각시켜 주고 있습니다.
맺음말
교회에 이방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너무 관대합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할 생각은 없이 하나님은 죄를 무조건 용서하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구태어 오른 쪽 강도에게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동성연애자들을 목회자로 세우는 교회를 사도 바울이 찾아 온다면 무어라고 할까요?
율법적인 요소가 영혼들을 질식시키고 있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 나라에 가고 있는 백성들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더욱 힘써 믿음의 경주를 하게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 법으로 이웃 사람들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하면, 무서운 형틀이 됩니다.
환난이 없는 무사태평주의적인 신앙이 우리 교회를 무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가운데 찾아온다면, 옷을 찢어야 할 부분이 어느 부분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방인에게도, 유대인에게도,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은 구원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 사랑을 알고 영접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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