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0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루스드라의 한 장애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입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무슨 일을 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기능이 정상적이었습니다. 단지 다리 한 부분의 장애 때문에 삶의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안타까운 장애인이 사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듣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이는 너무나 생생한 은혜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온 도시를 뒤 흔들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 임한 구원과정을 살펴 보면서 오늘 나의 장애를 주님 앞에 내놓고, 우리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능력을 받으시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는 어떻게 일어섰습니까?
1. 바른 복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1+3)
1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0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1] 두 사도가 함께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본문에서 복음 전하는 두 사도는 바울과 바니바입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따로 세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구태어 두 사도가 복음을 전할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둘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을까요? 저는 바른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잘못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앞에서 예수님을 본 자와 왼편에서 예수님을 본 자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오랜동안 함께 지낸 자와 짧은 기간 지낸 자가 다를 수 있습니다. 왜 복음서가 넷이나 되어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바울 사도가 전한 서신의 내용과 야고보 장로가 전한 내용이 다르냐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똑같은 제자들이 전한 복음이라도 요한이 본 예수님과 마태가 기록한 복음은 각도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사도가 함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구원을 얻고 믿음으로만이 아니니라! 전하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매우 의미 있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사도가 전한 복음에 비중을 두는 분입니다. 그분은 혼탁한 교계에서도 사도를 통한 복음을 통해서 받은 기쁨과 축복을 전해주었습니다. 자신이 주변에 아무나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의 교만과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있는지 구체적인 예로 들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는 평신도 사역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평신도들이 늘 명심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말씀으로 다락방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명심할 것은 목사로부터 위임된 말씀을 붙들고 전하고 있습니다. 목사인 저도 사도들과 바른 신앙의 전통에 선 교회로부터 위임된 복음을 연구해서 여러분에게 전해주려 애씁니다. 내게 좋다고 아무렇게나 전하지 않습니다. 특히 창세기에서 모든 이단이 나온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저희 노회에 어떤 목사님도 어떤 이단이라 알려진 교회에서 창세기를 공부하다가 이단에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깊이 명심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바울도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두렵고 떨림으로 전했다고 말했습니다.
바른 복음을 듣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그는 두 사도들이 함께 전해 준 복음을 받아 일어섰습니다.
그는 어떻게 일어섰습니까?
2]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믿는 맘으로 주께 가오니 나를 영접합소서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보배 피로써 나를 정케 합소서.'(219장)
구세주의 흘린 보배 피로써 나를 정케 합소서! 이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담대히 전하는 것이 당연 합니다. 주님께서 복음전하는 자와 함께 하시며 구세주의 흘린 보배 피로써 죄인을 정케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힘있게 전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많은 박해가 뒤따랐습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하여 루스드라 지방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이 기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10:23)" 말씀하신 대로 박해를 피하긴 했지만, 복음 전하는 것을 피하지는 않았습니다. 옮겨갔습니다. 옮겨간 목적은 살아 남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 기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말씀처럼, 사나 죽으나 그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이 기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기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담대히 말합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이 기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위로가 수영하는 것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팔만 팔랑개비처럼 돌리는 것입니다. 수영하는 사람은 팔에 온몸의 힘을 실어야 합니다. 팔을 돌린다고 몸이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팔로 물을 힘껏 끌어당겨야 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복음전하는 자와 함께하시는 것을 믿고 힘있게 전해야 합니다.
그는 어떻게 일어섰습니까?
3] 오래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예수님은 오랜동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해가 질녘까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며칠 동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미 사흘이나 되었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마15:32)
사도 바울도 오래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베소나 고린도에서 해를 넘기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드로아에서는 일주일 동안 계속 복음을 전합니다.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유두고란 분은 이때 졸다가 창에서 떨어져 생명을 잃을뻔 했습니다.
서출선 목사님은 이번 중국에 가서 하루 11시간씩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중국교회 교인들은 한 주일 동안 아예 먹을 것, 입을 것 모두 가지고 모여 밤낮으로 복음을 듣습니다.
이번 청년부 수련회에서도 이런 놀라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침6:30분 새벽기도회에서 시작하여 밤이 맞도록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어떤 분은 또 철야를 하며,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배달해준(deliver) 사도들과 복음을 사모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구원의 통로가 열린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 한민족에게 복음이 전달되는 데에는 1900년이란 시일이 걸였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좌절없이 오래 복음을 전하는 분들에 의하여 복음은 전하여 졌습니다.
그는 어떻게 일어섰습니까?
4] 주를 힘입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이 일어섰다는 말을 듣습니다. 의사를 통해서 일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방 종교에서도 이적을 체험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그분의 인생에 많은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를 힘입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주를 힘입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나 복음을 듣는 자는 이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려고 힘을 씁니다. 방송메체를 힘입기도 합니다. 전도지를 힘입기도 합니다. 서적의 도움을 힘입기도 합니다. 그들은 복음이 확실히 전달되도록 하려고 모든 열정을 쏟습니다. 그러나 제일 확실하고 효과적인 복음 전도 방법은 주를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힘으로 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을 알고 무엇보다 주를 힘입어 복음을 담대히 말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을 알고 무엇보다 주를 힘입어 복음을 담대히 말합니다.
필사적으로 영원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통해 루스드라의 발을 못쓰는 사람에게까지 복음이 전달된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일어섰습니까?
2. 구원 받을 만한 믿음과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그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0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 사도는 그들의 동족과 형제들에게 유익한 선물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멀고 먼 길을 걷고, 몇번 풍랑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복음을 들고 찾아 왔습니다. 이렇게 힘들여 전해진 복음 아닙니까? 값진 선물이지요. 하나님께서 외아들까지 주시면서 주신 복음인데요. 값진 피로 물들여진 복음이구요. 그런데 이러한 귀한 선물이라도 모든 사람이 감사함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받는 선물에 대한 마음가짐도 달라집니다. 이(利)를 따라 사는 사람은 이로운 선물이 주어질 때 좋아합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이 생명의 복음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그들은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입맛에 맛지 않았습니다. 입에 쓴 익모초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받아 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영생이 있고, 참 삶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듣기조차 싫었습니다. 유대주의적 편견과 선민의식을 가지고 복음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배척할 수 없는 복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장애인은 복음을 소중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나를 위해 전해 준 복음이구나 이렇게 감사하면서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복음을 통해 자신 위에 쏟아져 내리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예화]
약주를 좋아하시는 분은 약주를 선물로 드리면 기뻐합니다. 저는 아버님께 내려갈 때, 이 선물 때문에 고민을 했던 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아버님은 약주를 즐겨 드시기 때문에 그 약주보다 좋은 선물이 없는데, 영적으로 생각할 때나, 건강을 생각할 때는 이 약주는 마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사신다고 기뻐하시는 선물을 드려야지 했다가도, 그 약주가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것을 생각하면 망설여졌습니다. 언젠가는 이 약주를 선물로 사가지고 가서 따라 드리면서 이젠 약주를 그만드십시오. 한적도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암, 그래야지!' 하시면서 술을 맛있게 드셨습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맛있게 드셨습니다. 결국 아버지께서는 약주를 너무 맛있게 받아들인 것인 한 원인이 되어 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큰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의 아버님께서 약주드시듯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드이셨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사셨을까 아쉽습니다. 우리도 자손에게 한을 남기지 맙시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여기 복음을 달게 받아들인 분에게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2]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바울이 주목하여 보니,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로마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이와 같이 크게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믿음에 따라 열매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기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멧시지인 것을 알고,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생겼습니다.
3] 그는 순종까지 하였습니다.
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그는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기만 하지 않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습니다. 0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까 순종까지 합니다.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잘 들어서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믿음의 열매가 맺힙니다. 구원의 열매가 맺힙니다. 평생을 앉아서 살아온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까,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시원스런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일어난 본인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를 돌보던 사람들은 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사람이 말씀을 듣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게 되고, 순종까지 하게 되면, 본인뿐만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을 이렇게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행하셨습니다.
0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그는 어떻게 일어 섰는가?' 그가 어떻게 일어섰습니까? 복음을 전해준 사도들의 헌신적 수고 때문입니다. 본인 자신이 복음을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선물로 알고 기쁨으로 받아 먹은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말씀 안에서 만납니다.
0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없다면, 바울의 수고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그 장애인의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화]
저의 생애에 일어났던 몇 가지 기이한 일 가운데 한 가지를 소개합니다. 이 목적은 하나님게서 행하시는 일들이 오늘 날도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입니다.
저희 교회에 새롭게 등록하신 교우 한분이 Bramton에서 가게를 열고 계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만 새로운 교우가 얼마나 반갑습니까? 가깝지 않는 거리지만, 가게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눈 후, 기도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후에 들으니 그 집사님이 다리 통증으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통원치료를 받는 중에 있었지만 차도가 없어서 몹시 마음을 쓰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가게에 심방을 왔으니 주저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억지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길로 다리를 움쩍달싹 못하게 하였던 그 다리가 깨끗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랑할 수 없는 것은 제가 뭐 한 가지 한 일이 없습니다. 그분이 이 다리가 아프니까 기도해 주십시오. 한 것도 아입니다. 저는 그분이 다리 통증으로 아픔을 당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본인에게 믿음이 있었지만, 저를 만나기 전부터, 그 다리를 아프기 전까지 믿음이 있었던 분입니다. 그런데 왜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맺음말
나의 삶을 점검해 봅시다. 나의 어느 부분에 장애가 있으십니까? 신체는 멀정해도 내적인 장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성격적인 장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장애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이 시간, 나의 아픈 부분을 붙들고, 사도들을 통해 주신 복음을 들읍시다. 오랜 시간을 내어 복음을 들읍시다. 주를 힘입어 복음을 들릅시다.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이 시간, 나의 아픈 부분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리고 기도하십시다. 구원얻을 만한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하십시다.
나의 연약한 부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구원얻을 만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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