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4 March 2015

로마서 16:8-12 주 안에 있는 성도에게 일어난 일

[들어가는 말]

   번영 신학 전파의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있는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책을 읽노라면 신이 납니다.  그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점에서 보는 설교를 읽노라면 우리도 모르게 신이 납니다.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는 마음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믿음 속에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존경까지도 한 손에 거머쥘 방도를 말합니다. 믿음도 갖고 세상의 풍요를 얻는다고 말하니 꿩 먹고 알 먹는 신앙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설교에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 생각을 가진 교인들이 애용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끝은 창대할 것이다"(욥 8:7).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막 9:23).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무엇을 위한 창대함인가?
무엇을 위한 능력인가?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번영의 본이 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셨는가?

꼬리를 무는 질문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렇습니다.
긍정의 힘 속에서 성공주의의 윤리적 기초를 발견하기 또한 쉽지 않습니다.
성공주의적 선교 이데올로기 안에서 '하나님나라와 의'라는 대전제는 그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좋은 생각과 긍정의 힘이 만능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속에 좋은 생각과 긍정의 힘이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생각을 대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생각과 긍정의 힘이 전부라면,
예수님께서는 왜 가장 성공적인 천국을 떠나 이땅에 오셨겠습니까?
그리고 이땅에서 성공하지 않았겠습니까?
십자가에 왜 달리셨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왜 그렇게 모진 고생 길을 갔겠습니까?

초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목숨까지 바쳤겠습니까?

좋은 생각 긍정의 힘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생각이나 부정의 힘에 휘둘림 당하는 세상에서 좋은 생각과 긍정의 힘은 음지보다 양지가 좋다는 상대적 선의 의미를 가질 만 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생각 긍정의 힘보다 더 본질적인 무엇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란 답을 찾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당신이 성공하고자 하는지' 답을 찾게 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때 좋은 생각과 긍정의 힘도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세상에서 성공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그냥 중성이예요. 그 목적에 따라 선이 될 수 도 있고 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을 때 성공은 바로 선일 수 있습니다. 열매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주 안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주 안에 있는 일꾼에게 일어나는 일들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1. 주 안에 있는 일꾼에게는 사랑이 일어납니다.

[로마서 16:8]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로마서 16: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로마서 16:12]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사도 바울은 암블리아에  대해 '내 사랑하는' 자라고 매우 다정한 수식어를 사용하여 특별히 개인적인 애정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서로의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으로서 바울과 그의 사이에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우정이 깃든 교제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관계가 '주 안에서' 일어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아름다운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은혜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 밖에서 적대적이거나 아무 상관없이 살던 남남이던 두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스다구 역시 '나의 사랑하는'이란 표현을 쓴 것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람도 역시 바울 사도와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암블리아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 바울과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로마 교회의 성도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이름이 귀족의 비문(碑文)에 나타난 것을 보고 그는 황제의 가족에 속한 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Gifford).

   사랑이란 아끼고 위하고 한없이 베푸는 이타적인 마음입니다.
행위입니다. 다른 사람의 안녕(安寧)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시작하기 전에 방언이나 천사의 말이나 예언이나 믿음이나 구제와 비교해 볼 때 사랑이 ‘가장 좋은 길’(the most excellent way)이라고 묘사했습니다(고전 12:31).

   신약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단어는 ‘아가페’(agape)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일어나는 이웃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그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기로 선택한 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선택은 이스라엘의 자격이나 가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보다 더 깊고 확고하며 인간의 불순종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사건이요(요 3:16; 롬 8:37;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사건입니다(롬 5:8).

   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은 새 이스라엘, 곧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각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졌습니다(요 14:23; 16:27; 17:23; 갈 2:20).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이런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입니다(요일 3:17-1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요 21:15-17).

예수님의 질문 베드로의 대답 예수님의 응답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주안에서 사랑을 받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이웃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성경말씀으로 선언한 이래, 관례적으로 거의 모든 대통령이 이같이 하고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은 1월20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역대하 7장14절의 성경말씀으로 선언문을 읽을 예정이라고 CNN이 3일 보도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1861년 에브라함 링컨 전 대통령이 취임할 때 사용하였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1933년 대공황 당시 대통령에 피선된 후, 4번이나 대통령을 연임하였다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고린도전서 13장13절의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선언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백성을 섬겼을 때, 대공황 가운데 빠졌던 미국국민들이 살아났고 더 튼튼한 국가로 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꾼에게 일어나는 일은 사랑입니다.

  대통령이 주 안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받을 때 백성들이 살아납니다.

  식물도 주 안에서 사랑을 받을 때, 살아납니다.

   [예화]

   종려나무 두 그루를 화분에 옮겨 심고 하나는 강단위에 올려놓고 하나는 문 앞에 놓았습니다.

  하나는 이렇게 잘 자라고 하나는 말라비틀어져 갑니다. 어젯밤에도 물을 주긴 하였지만 살 소망이 많지 않아 보입니다.

   세상이 참 춥습니다.

   주 안에 거하면서 사랑의 따뜻함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2. 주 안에서 일꾼에게 일어나는 일은 수고입니다.

   12절]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우리는 신앙적으로 성공한 생명책의 주인공 속에서 성공 개념을 만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좀 당혹스럽습니다.

  한국 교회 성장 과정에서 많이 쓰인 성경 말씀 한의 대목을 적어봅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

   사실 이 말씀의 창대나 할 수 있는 대상은 세상적 성공 개념은 아닙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그는 순교까지라도 할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성경의 근본정신은 승승장구하는 것에서 무너질 것을 보고, 패배하는 듯하지만 위대한 시작을 보는 하나님의 섭리에 그 중심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섭리의 핵심입니다. 세상은 십자가에서 패배를 목격했지만 신앙은 거기에서 죽음을 이긴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새로운 시작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망과 그 의를 위한 헌신은 그 무엇으로도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성공은 전혀 다른 평가 속에 놓이게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성공처럼 보여도 하나님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너지게 되어 있으며, 몰락과 패배처럼 여겨져도 그것이 하나님나라와 의에 접붙여진 것이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영광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성공을 전제로 한 세상의 견해와 여론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외면적 가치 기준에 사로잡혀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진실의 면모에 눈멀기 쉽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달아보아야 할 저울은 '하나님의 저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저울도 때로 깃털보다 가벼운 마음을 달아볼 수 없으며, 또는 우주 전체보다 더 무거운 인간의 생명을 달아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진실을 달아볼 수 있는 저울도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란 이 세상의 가장 작은 것도, 이 세상의 가장 큰 것도 들어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바로 그 '마음자리'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재는 저울을 어디에서 발견하겠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 소망과 믿음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 또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삶 가운데 어떤 진실이 있는가에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것을 이룬 듯해도 그것이 그 인간의 진실 됨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허사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아직 미미하고 초라할지라도, 그 안에 진실이 자라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저울에서 참된 무게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먼저 하나님의 저울에 자신의 인생을 달아 그로써 자신의 삶이 가진 가치와 진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큰 힘을 얻어야 합니다.(한종호)

   사랑하기에 수고하는 형제의 가치는 참으로 귀한 보석입니다.




3. 주 안에서 일꾼은 옳다 인정함을 받는 날이 옵니다.

    [로마서 16: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아벨레가 어떤 극심한 시련을 통해  신앙의  연단을  단단히  받았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Lenski, Murray).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임한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아 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꾼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 정체성이 분명하여집니다.


  [예화]

옛날 어떤 부유한 나라에 강하고 지혜로운 왕이 살고 있었다.
이 왕은 아름답고 총명한 자녀들을 많이 두고 있었다.

왕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그의 자녀들이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잘 이해하고
그들에게 지혜로운 통치를 베푸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은 그의 자녀들이 아직 철이 들기 전에
그들을 돌볼 하인 가족을 한 집씩 묶어서
각기 백성들 사이로 가서 살게 하였다.

그들의 신분은 극비 사항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이 왕의 자녀들인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어떠한 특권도 누리지 못하게 했으며
도리어 평균 이하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때가 되고 기한이 차면
다시 왕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동안 백성들 사이에서 겪었던 일들은
백성들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잘 다스리도록 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었다.

왕이 가장 사랑하는 막내아들도 예외 없이 이 과정에 참여해야 했다.

하방(下方)의 삶은 여느 백성들과 다를 게 없었다.
모든 게 부족하고 도리어 더 불편했다.
특히 어리광만 부리다가 갑자기 하방을 당하게 된 막내 왕자는 더욱 힘들어했다.

어려서 백성들 사이로 들어왔기 때문에 궁궐에서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백성들 사이에 살면서 어느덧 그들의 삶에 동화되고 있었다.

여느 백성들처럼 사소한 이익과 천박한 욕구에 휘둘릴 수도 있었다.
남이 가진 것과 나의 부족한 것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괴로워할 수도 있었다.
좀 더 나은 옷, 좀 더 맛있는 음식, 좀 더 멋진 집을 가지기 위해
남을 속이고 착취하거나 심지어 희생시킬 수도 있었다.

이 무명의 고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다행히 대체로 그러지 않았다.

딱 한 가지 점에서 막내왕자는 다른 일반 백성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련하지만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왕궁 생활의 기억이었다.

아련히 남아있는 그 기억은 그가 지금 보는 모든 것의 가치를 알 수 있게 만들었다.

백성들이 좀 더 가지고자 비싼 값을 치루는 옷과 음식과 집들은
왕궁에서 공짜로 주어지는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나 다름없었다.

좀 더 비싼 집과 좀 더 높은 지위가
왕이 원하는 바라는 거짓 주장은 그를 유혹할 수 없었다.

왕궁 보다 비싼 집이 어디 있으며, 왕자보다 높은 지위가 어디 있으랴.

욕망의 분출에 만사를 맡기면
왕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야망도
강하고 지혜로운 왕이 통치하고 있는 한 부질없는 것이었다.

막내 왕자의 관심사는 그를 다시 왕궁으로 부르실 왕의 마음이었다.
그가 나를 다시 부르실 것인가?
내가 과연 그의 부름에 합당한 자인가?
나는 그가 원하는 바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그의 즐거움이야말로 곧 나의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었던가?
만일 내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베풀기 위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다면
능히 그 일을 감당하겠다는 마음만으로도 아버지는 기특하게 여기실 터이었다.

아직 어리고 철은 덜 들었지만
그 기억이 그가 취할 태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미래를 약속하는 과거의 기억이 그의 현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 것도 특별히 주어지지 않았지만
막내 왕자는 그 기억 하나 만으로
백성들 사이에 머무는 동안 삶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백종국 / 경상대학교 교수, ; 막내 왕자 이야기)

  주 안에서 일꾼에게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입니다.
나에겐 가야할 나라가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무엇도 그 나라에서의 짝퉁일 뿐입니다.

   그는 세상이 이기지 못할 사람입니다.

일꾼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하는 일꾼들이여!

   반드시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인정함을 받을 그날이 아들에게 있음을 확신하고 사랑하고 수고하는 일에 전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무리하는 말]

   잠비아에서 사역하는 강남진 선교사 소식을 읽었습니다.
굶어 죽어가는 북한 동포들 소식을 접한 강남진 선교사는 지금까지 하루에 밥 한 끼만을 먹으면서 지냅니다. 북한동포들이 굶어 죽어간다고 하는데 어떻게 밥 세 끼를 먹을 수 있느냐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사모가 누군가가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가까이 가 보았더니 자기의 남편이었습니다.
그는 잠비아에서 기도와 눈물과 사랑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고아원과 학교를 세우면서 잠비아인들을 섬겨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두 끼씩 금식하면서 굶어 죽어가는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한 선교 헌금을 모아 북한 어린이 살리기 헌금으로 보냈습니다.

선교헌금을 전달받은 김명혁 목사님은 이런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탐욕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들도 눈물과 사랑의 헌물을 바치게 하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굶어 죽어가는 북한 동포들을 살리게 하시옵소서! 사랑과 눈물의 선교 헌금을 보낸 강남진 선교사부부와 저들이 하는 사역을 축복해 주시옵소서!-2008년 12월 31일 오후 3시 30분

   그리스도 안에서  일꾼된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꾼된 우리는 수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꾼을 주 안에서 인정하실 날이 옵니다.


[설교할 성경본문]

8.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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