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8 March 2015

벧전2:1-5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들어가는 말]

세기적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과 동시대의 철인 디오게네스와의 만남, 그리고 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나는 알렉산더 대왕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 나는 그대를 도와줄 수 있고, 또 그대를 돕고 싶다."

모래밭에 누워 햇볕을 쪼이고 있던 디오게네스는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조그만 옆으로 비켜주시기 바랍니다. 왕께서는 나의 태양볕이 드는 것을 막고 계십니다. 나에게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가 태양 볕을 소중함을 제대로 안 사람이란 생각이 들고 무릎을 치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디오게네스가 만난 햇볕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난 분을 통해 메시지는 "그러므로"로 시작됩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대속함을 받고
거듭남을 얻어
믿음
소망
사랑이란 영적 보석을 간직한 존재라면!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걸맞게 힘쓸 일이 있다는 명령입니다.

1.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벧전2:1]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성도들이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수많은 말을 쏟아 놓습니다.
그런 언어 가운데는
모든 악독
모든 기만
외식
시기
모든 비방하는 말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독약과 같아서 그 말을 듣는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좌절과 실패를 맛보게 하게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을 영육간에 황폐하게 만들고 죽입니다.

한나는 삼상1:6에 보면 브닌나의 악독과 시기로 인해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한나는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 중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후에 근심이 없어집니다.

[삼상1:18]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들로 인하여
개인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공동체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지고
국가가 무너집니다.

어두움의 권세는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행합니다.

그 이유는 이 말들이 자신과 듣는 자의 삶에 큰 상처와 아픔을 주고 인생을 황폐하게 하고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하는 이유는 성경에 따르면,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한 결과입니다.

(롬1:28-32)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인간은 창조함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되어 살도록 만들어졌고 아담과 하와 사이에도 사랑으로 하나되어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타락한 결과로 서로에게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비방하고 서로 멸시하고 조롱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남에 대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하고 있다면 주의 인자하심을 누려야 하는 심령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두움의 권세는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하나님과 이간시키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 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이에 서로를 비방하는 말들, 멸시하고 조롱하는 말들을 할 때에는 상대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 가운데 사탄이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마귀에 궤계에 넘어가서는 않됩니다.
오늘도 가정에서 회사에서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들로 인하여 주의 인자하심 대신에 아픔들을 맛보고 있습니다. 누려야 될 행복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주의 인자하심을 누리는 사람들 다웁게 이런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로 인해 부모님과 자녀 사이에, 부부 사이에, 교우들 사이에, 민족끼리 반목하고 갈라서 는 일에서 자유해야 할 줄 압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못한 분은 어릴 적에 입은 [내면적인 상처]로 인하여 평생을 괴로워하며 삽니다.

(잠18:8)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세상 별식을 누리며 삽니다. 감칠맛나게 하는데, 사실 그게 우리 [마음을 상하는 독약]이 됩니다.

(잠15;4)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이런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은 상처만 줍니다.

이웃을 망하게 합니다.

(잠11:9)
사특한 자는 입으로 그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이세벨은 모든 악독과 기만과 비방하는 말로 의인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강탈합니다. 살인을 위한 이세벨의 악독한 목적에 거룩한 금식이 선포됩니다.

[왕상21:12-13]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로 인하여 무너져 내립니다.
그를 지으신 주인이신 하나님을 이런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로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되고 형벌을 면치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행위입니다.
형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이런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 속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민 11:1).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못할 때 그 백성이라도 이런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모세와 같이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이 이런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살려야 할 우리 성도들이 오히려 죽이기도 합니다.
희망을 주어야 할 성도들이 오히려 좌절을 주기도 합니다.
성공을 주어야 할 우리가 오히려 실패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후에는 이런 옛 모습이 사라집니다.
걸맞지 않은 옷처럼 거추장스럽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입에 파수군을 세워 이런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을 벗어버리고 선한 말을 함으로 우리가 전하는 말에 의해 복을 받는 거룩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디오게네스가 무소유로 살면서도 오직 바가지 하나를 소유했답니다. 물도 떠먹고 거지로 먹을 것을 얻어먹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개를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개는 바가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개가 바가지조차 없이 살 수 있다면 나라고 바가지 없이 살지 못할 것이 뭔가?
바가지조차 버렸습니다.
개를 스승으로 삼고 살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을 가볍게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이라면, 어두움의 권세가 우리에게 입혀 준 이런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을 아낌없이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이런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거듭난 성도는, 믿음으로 성숙한 성도는 이미 이런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 자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까?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2. 마음에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합니다.

[벧전2:2-3]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대신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마음에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할 일입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어머니의 따사로운 품을 알고나면 다른 곳에 가려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듭난(born again) 하나님의 백성에게 또다른 영적 품을 주셨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롤 모델로 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셨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영적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신령한 젓을 먹고 자라야 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신앙이 성숙하려면 두 가지 일을 해야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나눈 말씀처럼, 버려야할 것을 버려야합니다.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입니다.
대신 취해야 할 것은 꼭 취해야합니다.

어거스틴의 명언이 전해옵니다

'본질적인 것에 있어서는 일치를 추구하고 비본질적인 일에 대해서는 자유를 구사해야하겠고, 그 외에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 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본질적인 문제 즉 구원과 영생,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일 과 같은 목표와 방향에 있어서는 같은 은혜를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어야" 합니다.

오늘 진정한 신자라면 갓난아이가 젖을 찾듯이 하나님 말씀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정말 거듭난 자인가를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중생한 영혼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날마다 신령한 양식을 찾습니다.

병든 아이는 젖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는 젖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도 신앙이 병들면 말씀이 잘 와 닫지 않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범죄와 함께 동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싫어지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은혜가 회복되고 영적 건강이 회복 될 때에는 반드시 말씀이 그리워집니다.

[예화]

미국에서 폭풍의 날씨라는 노래를 불러서 세계적인 가수가 된 '워터스'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비참하게 세상에 태어난 여자였습니다.
그 어머니가 괴한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임신이 되어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빈민굴에서 숱한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녀의 환경은 열악하였지만, 그녀는 자라서 훌륭한 가수가 되었습니다.
한 번은 할리우드에서 노래를 불러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는데 그 때 부른 노래가 '폭풍의 날씨'였습니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삶이 폭풍의 날씨처럼 안정을 찾을 수 없었기에 더욱 감동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여가수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누군가가 다시 한 번 폭풍의 날씨를 불러달라고 요청했을 때
'나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기 때문에 내 마음 속에는 더 이상 폭풍이 일지 않습니다'
'지금 내 마음 속에는 평화와 기쁨이 충만합니다'
'다시는 폭풍의 날씨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 가운데 계셔서 가장 아름다운 성품과 평안을 내게 주셨으므로 나는 이제 안전하게 된 것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고이 싸네.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을 때, 버리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려는 소망이 생깁니다.



3. 신령한 집, 거룩한 제사장으로 빚어집니다.

[벧전2:4-5]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주의 인자하심을 맛볼 때, 우리는 나갈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가는 일이 즐겁습니다.
어머니의 품을 맛볼 때, 어머니의 품속에 파고드는 어린 아이와 같이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성도는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길이 살리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감사하고
이런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수를 주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그녀의 광야와 같던 인생여정에서 한낮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나왔다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다.

산돌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견고하신 산돌이 되셨습니다.

[요4:13-14]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로버트 A 섬머스'라는 분이 '그리스도는 실패자인가' 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에 의하면 예수님은 큰 실패자였습니다.'
'그의 탄생은 귀족적이 못되었으므로 실패했습니다. 짚으로 된 마구간의 침대는 아무리 보아도 귀족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장차 유명해질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궁핍한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타락한 인류가 짊어질 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교육을 받는데도 실패하셨습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서 거창한 대학교를 나왔다는 인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본바탕의 신학도 공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논문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주님은 생활이 완전히 변화되어 자기를 좇는 자들을 위하여 자신을 소모시키며 목수와 목자의 말투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후에 그분에 대한 거대한 분량의 책들을 저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수 백개의 합창과 교향악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 수많은 대학들이 설립되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제자들의 선택도 과히 성공적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심사위원들도 우뢰의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이나 세리인 마태를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더구나 베드로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약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 하심의 큰 기쁨을 주셨으며 성령의 능력도 부어주셨습니다. 그들은 서투른 과거를 모두 믿음으로서 깨끗이 청산하고 세상에 나아가서 기쁜 소식으로 세상을 정복하였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처럼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처럼 신령한 집, 성령의 전되어
거룩한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1] 먼저 예수님처럼 신령한 집, 성령의 전이 되는 일이 감격입니다.

산돌이신 예수님은 신령한 집으로 세워졌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산 돌이신 비밀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령한 전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귀는 왜 성전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셨을까요?
성전은 예수님께 있어서 자신의 이름이나 명예를 세우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령한 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영광을 구하는 예수님의 중심 앞에서 마귀의 시험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 예수님께는 성전을 신령한 집으로 [회복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세속화를 한탄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어 성전은 신령한 집이었습니다.
신령한 집을 회복하시려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성전] 되게 하시려고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요2;19-21]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전이 장사하는 집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성전이 세속화되어서는 안됩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아버지의 집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전회복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5: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예수님께서 성전을 신령한 집으로 회복하셨지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제사장 무리들에게 이 일로 인하여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신령한 집을 회복하시느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는 신령한 집을 회복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셨습니다.
신령한 집이 우리에게 무엇일 수 있겠습니까?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피값으로 사신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로서의 교회당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신령한 집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나라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신령하다고 합니다.

2] 우리도 이 예수님처럼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라 말씀하십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은 아론 혈통에 선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직은 아론의 자손이어야 하며(출 29:9),
성결해야 하며(출 29:44),
육체에 흠이 없는 자(레 21:17:23)이며,
제사장의 보계에 이름이 기록된 자(스 2:62)이어야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하면 큰 재앙을 만나게 되었었습니다.
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웃시야는 정치를 잘해서 백성들을 잘 살게 해 준 아주 인기가 많았던 임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웃시야왕은 그것 때문에 문둥병에 걸려 왕이면서도 죽는 날까지 별궁에 갇혀 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제사장들만이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천주교에서도 고해성사를 받는 사제는 평신도와 엄격히 구별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아론의 혈통에 선 것도 아니고, 사제도 아닌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신령한 집"으로 세워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떻게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까?

제사장을 언급할 때에 먼저 우리는 구약의 한 예언의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제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사 61:6)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 자신이 친히 이 세상에 성육신(成肉身)한 것으로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61:6절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실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 즉, 교회를 가리켜 예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어떤 명분의 중보자도 필요 없습니다.

'직접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롬 8:15).

죄인이었던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히 4:16).

무엇이든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용서를 구하면 누구나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요일 1:9).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본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있어서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휘장이 없어져서 누구나 다 그 곳에 담대하게 들어가서 하나님과 교제를 직접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실 때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성소와 관련된 사건은 휘장입니다.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8)

위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찢어서 그 길을 여러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모두는 제사장의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계 1:6-7)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충성되지 못하고 게으르고 나태한 자를 왕같은 제상으로 불러서 많은 특권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특권은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히 10:19-22).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이런 놀라운 특권을 받은 우리는 제사장으로서의 본분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이 복입니다.

[1]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신령한 영적인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본문 5절).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제사장의 가장 큰 일은 [예배]를 드리는 일입니다.
영적인 제사를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만한 거룩한 영적인 제사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히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의 몸은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생활이 산 제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본문 9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에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중)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섬기는 봉사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사 61:6).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사 61:6)
[3] 제사장에게는 [중보기도의 사명]이 있습니다(딤전 2:1-2; 갈 6:2).
아브라함, 모세, 바울, 믿음의 사람들이 이 일에 헌신을 다했습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기도도 중요하지만 중보기도의 사명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결단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마무리하는 말]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성도 여려분.
옛 사람 때에 입었던 부적당한 내면과 외적 모습을 내려놓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시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거룩한 제사장다운 삶의 모습을 이루어가실 수 있기 바랍니다.

[설교성경본문]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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