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들어가는 말]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에게 생각하면 감사한 교회였습니다.
간구할 때마다 생각나는 교회.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빌1:3-4)하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사도 바울는 어떤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교회라고 고백합니다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인하여 끊임없이 감사하는 구체적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사도의 메시지를 하나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말씀을 받는 자세가 훌륭하였습니다.(13절)
1]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소돔 땅에 살고 있던 롯의 사위들은 그들을 구원할 생명의 말씀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창세기 19: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구원할 절대절명의 말씀, 순종하면 삶을 얻을 생명의 말씀을 들었지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멸망에서 구원받을 생명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세상!
이것이 소돔의 실상입니다.
행26장에 보면,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하는 바울 사도의 담대한 모습이 나옵니다.
[행26: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옆에서 바울 사도의 복음을 듣던 베스도 총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26:24]
.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지금 세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세상입니다.
성경을 그대로 믿으면 좀 모자란 사람으로 생각하는 세대가 아닙니까?
우리가 오늘도 고백한 신앙고백을 세상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런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세상입니다.
2]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도를 통해 들을 때, 진담으로 받았습니다.
준행하면 삶을 얻을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기쁨으로 열렬히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 사도를 적대하는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전하여 주는 말씀을 스스로 지어낸 인간의 말이라 생각하였고,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사도를 통해 선포된 말씀을 인간적인 차원의 말로 곡해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3]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때 어떤 결과가 따라왔습니까?
"이 말씀이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
살아 있고 항상 있으신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였습니다. 크고 비밀한 일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을 우리 안에 영접할 때, 말씀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꿈을 우리 안에서 지어 성취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영접할 때, 말씀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꿈을 우리 안에서 지어 성취하십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영접할 때, 말씀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꿈을 우리 안에서 지어 성취하십니다.
'
초대 교회가 일어난 후, 이방인 가운데 처음으로 주님 앞에 돌아온 사람을 말하라면, 고넬료를 말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진지하게 언급하고 있는 고넬료에게는 참으로 귀한 특성이 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께 열린 기도하는 사람이요, 이웃을 향해 마음과 물질이 열린 구제의 사람입니다.
이런 고넬료의 모습은 특이합니다.
[행10:22]
.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베드로 사도를 집으로 청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여 주기 위해 찾아온 베드로 사도에 대한 자세가 특별합니다.
[행10:24-26]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왜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까지 모아놓고 사도를 기다렸겠습니까?
왜 베드로가 들어올 때 그 발앞에 엎드려 절했을까요?
사람을 보면, 결코 그럴 수도 없고 그럴 리도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사도의 메시지를 하나님 말씀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을 때, 믿는 고넬료 안에서 말씀이 역사하여 이방인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영적인 눈을 크게 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받아 열매를 맺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인하여 끊임없이 감사하는 구체적 이유가 무엇입니까?
2.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14절]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살전1:6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은 사도들을 본받은 자들로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본이 된다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좋은 점을 본받는다는 것 또한 아름답습니다.
본이 되고 본받는 일은 그들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식입니다. 데살로니가인들이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의 뿌리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연결되었음을 보다 확고히 해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들의 이전 것들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라는 방법론적인 질문을 한다면 답이 필요하게 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는 자되었으니"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진정한 믿음을 전수함을 의미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또한 그들이 개종함으로 인해 이전의 관습과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수많은 박해에 직면하였습니다. 이방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이전 것을 버리고 새로운 신앙생활을 함으로 인하여 온갖 수난과 고통 앞에 직면하여야 했습니다(딤후 3:12).
그런데 교회가 당하는 이런 고난이 자기들만의 것도 아니요, 처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미 자신들이 받은 이상의 고난을 받은 교회가 있었고, 그 고난을 믿음으로 잘 이겨낸 교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교회는 바로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한 후, 여러가지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순교를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했어요.
베드로는 옥에 갇혔습니다.
수많은 교우들이 감옥살이를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재산과 가정을 희생하면서 각처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그들보다 앞어 극한 박해를 받음으로 순교하기까지 견뎌내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고난을 이기며 믿음을 지키는 예루살렘 교회를 본받기로 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역사하신 것과 같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도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교회 안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하나가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도 믿음으로 인해 핍박받는 자들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주시고 보호하시고 견고케 하심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8:26;히2:18).
고난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교회
고난 가운데 있는 바울 사도
그래서
고난을 피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는 데살로니가 교회
이 모두는 바로 바울 사도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요인입니다.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인하여 끊임없이 감사하는 구체적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자랑의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19-20절]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면류관(冕旒冠, CROWN)은 통치자가 머리에 쓰는 원형 장신구를 말합니다.
그것은 해의 왕국의 권능, 지배, 승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지킴으로써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영생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을 약쇽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딤후 4:8.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라, 벧전 5:4.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의(義)의 면류관'(딤후 2:5),
시험을 참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법대로 경기하는 자가 얻을 '승리의 면류관'(딤후 2:5),
이기기를 다투고 모든 일에 절제하는 자가 얻을 '썩지 않을 면류관'(고전 9:25),
복음 전도에 힘쓰는 자가 받을 '기쁨의 면류관'(빌 4:1),
주님 강림하실 때 주 예수 앞에 떳떳이 설 자를 가리키는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된 자(長老)가 얻을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주 예수의 보좌를 둘러싼 24보좌 위에 앉은 장로들이 쓴 '금 면류관'(계 4:4)등이 있습니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받은 자가 쓸 '인자와 긍휼의 관'(시 103:4)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시는 면류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싹튼 신앙이 성숙하게 자랄 소망!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싹튼 믿음의 진정성(眞正性)에서 나온 기쁨!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싹튼 바울의 전도 열매!
주께서 강림하실 때, 자랑스럽게 주 앞에 올려드릴 '자랑의 면류관'이란 바로 이런 열매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에서 우승자가 받았던 월계관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리스도인에게 심어 준 믿음을 통해 맺힌 소망과 기쁨과 전도 사역의 열매들을 사도 바울은 자랑의 면류관이란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당시 운동 경기 경주자들이 받는 면류관이란 용어로 바꾸어 감사하고 있는 것이지요(고전 9:25;갈 2:2).
영광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위에 피어난 하나님 나라의 꽃입니다.
No Cross, No Crown!
그렇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의 면류관도 없습니다.
[예화]
ㅇ
세상에서도 십자가를 지지 않아서 영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11일 만에 자신의 지분 10%를 800달러에 회사에 넘기고 퇴사했다. 이 지분 10%는 현재 애플 가치로 환산할 때 220억 달러나 된다. 이후 그는 여러 회사를 전전하며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다 퇴직했는데 현재는 얼마 안 되는 희귀동전과 우표가 그의 전 재산이다.
웨 인은 “나는 당시 42세로, 각각 21세와 25세였던 잡스, 워즈니악과는 달리 위험을 감수할 처지가 아니었다”고 밝혔다. 그는 “사람은 자신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에 서있는 순간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라고 덧붙였다.
이번 대회에서 얻은 교훈으로 색다른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차두리는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는 아프리카가 위험하고 치안이 불안하다고 들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훈련장과 경기장에서 우리 버스만 보고도 기뻐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눈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마무리하는 말]
그늘 속의 장미가 몇 년이 지나도 맥을 추지 못합니다.
양지에 옮겨 심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다른 장미들은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우리 장미는 답이 없습니다.
안쓰러워 조화를 속에 꽂아두었습니다.
장미꽃 나무가 피운 장미꽃은 이 장미의 영광과 기쁨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강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루시아'(*)는 고위 관리가 어느 지역을 방문할 때 사용되었는데 특히 거의 신적(新的)인 존재로 추앙받는 황제와 같은 지배자가 방문할 때 쓰여졌습니다. 바울 사도는 '파루시아'를 쓸 때에 이와같이 황제의 방문을 연상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나타날 더 크고 화려한 영광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 영화로운 날에 바울 사도는 그 존귀하신 분 앞에 자랑스럽게 올려드릴 면류관이 있습니다. 영광이요 기쁨이기 때문이지요.
그 면류관은 바로 바울 사도를 통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들을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들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1] 사도의 메시지를 하나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2]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3] 자랑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우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우리 모두의 영광이요 기쁨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설교할 성경 본문]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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