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이 중요합니다.
1] 구원을 이루는 필수 요소가 믿음입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3]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4]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 믿음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왜 중요합니까?
1. 유익이 있습니다.
[약2:14-1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믿음에는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져보아야 별 의미가 없습니다.
열매가 열리지 않는 과일나무 같습니다.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유익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 이유가 되는 예를 제시합니다.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를 찾아가요.
찾아 간 '형제나 자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자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결속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다만 그는 '초라한', '남루한' 옷을 입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궁핍하여 절망의 상태에 있습니다.
음식도 그날 벌어 그날 입에 풀칠을 하는 가난한 형제입니다.
그 가난한 형제가 그래도 믿음이 있어 보이는 부자 형제에게 찾아갑니다. 그리고 몸에 쓸 것을 구합니다.
그런데 부자는 쓸 것을 주지 않습니다. 말만합니다.
그는 위로의 말로 떼웁니다.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유대인들이 헤어질 때 사용했던 통례적인 인사입니다. 걱정이 쌓여있는 '헐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 자'에게 샬롬!하는 통례적인 인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스스로 옷을 따뜻하게 입을 능력이 없는 동족들에게 가서 몸을 덥게 입으세요, 배부르게 하세요, 평안히 가세요 말하면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우리가 처음 동족을 방문했을 때, 우리를 안내하는 분이, 그곳 사람들에게 ‘이분들이 지난 번 담뇨를 보내준 분들입니다’ 소개하니까 그분들의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고 '네가 알아서 스스로 배부르게 하라'라고 권면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와주지 않고 공허한 말만 하는 것은 오히려 깊은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요일3:17-18]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일3:16]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나의 나 됨은 주님의 희생 속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희생의 터 위에 있을 진데, 우리 자신에게나 형제에게 유익한 줄 압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모든 믿음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 유익합니다.
만들기 어렵기로 평이 난 ‘인절미도 말(言)로 만들면 조선 사람이 다 먹고도 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하게 살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1624년, 조선 왕 가운데 인조는 이괄의 난을 당해 공산성으로 피난을 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고난의 시절 임씨네 집에서 떡을 만들어 왕께 진상을 하였는데 너무 맛이 있었습니다. “절미로구나!” 그 떡의 이름을 알고 싶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 임씨가 진상한 떡이 절미였기에 임절미라 하였답니다. 임절미가 인절미로 바뀐 것은 아마 어감이 편하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떡이 맛이 있는 까닭은 그만큼 정성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찹쌀을 담구는 것, 찌는 과정, 그걸 메주로 찧는 일 등 어느 한 가지 거저 되는 일이 없습니다. 찔 때도 수증기가 밖으로 새지 않도록 밀가루 반죽을 솥 둘레에 발라주어야 하고, 떡을 찧을 때도 힘 있게 내리 찧어야 맛이 고소합니다. 저는 가끔 찰떡을 요즈음 사먹을 때가 있는데 어릴 적의 인절미 맛이 없습니다. 인절미가 인절미 맛이 나는 까닭은 정성들인 행동이 들어가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행함이 담겨서 정성이 담긴 인절미처럼 평생을 가도 그립고 그 맛(유익)이 생각나는 그런 믿음이길 소원합니다.
찰떡 만들어 먹는데도 모든 게 기계화되어 온통 편해지긴 하였는데, 그 고소한 맛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이 그 인절미 맛을 회복할 때, 인간성도 회복되고 서로에게 유익한 믿음이 되는 줄 압니다.
한 번 자신에게 속담을 한 번 다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절미도 말(言)로 만들면 조선 사람이 다 먹고도 남는다’
말(言)이 아닌 땀과 정성이 담긴 인절미처럼 평생을 가도 그립고 그 맛(유익)이 생각나는 그런 믿음이길 소원합니다.
2. 보입니다.
[약2:18]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롯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를 떠날 때, 롯도 그와 함께 갔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 섰을 때, 보이는 세상을 향해 소돔까지 나아갔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면에서 믿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옛 사람을 그대로 지니고 행동합니다. 그가 행하는 일을 보면, 믿음을 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며 양보하는 믿음을 보여준 것과 대조적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 머물게 됩니다. 양보를 행함으로 신앙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롯은 눈에 보이는 좋은 땅을 택하고 그곳으로 나아가다가 결국 소돔까지 나아갑니다. 우리는 그의 행동에서 믿음을 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 마다 제단을 쌓는 일에도 행위가 담긴 믿음을 보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그러나 롯은 한번도 스스로 제단을 쌓지도 않고 행함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로 심판을 받을 때, 그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롯과 딸들은 그 유황불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그 딸들은 아버지의 자식을 낳는 수치스러운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약2:21-23]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아브라함은 행함이 보이는 믿음을 소유한 분입니다.
그에게 있어 믿음은 추상 명사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의 행동을 움직입니다.
믿음은 생애를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믿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 없음을 보시고 심중한 말씀을 주십니다.
[요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내 말에 거하면’, 진리를 따라 행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된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말씀을 주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고, 진리에 따라 움직였던 아브라함을 예로 드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요8:38-41]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본토를 떠났을 때,
약속의 땅에 도착하여 단을 쌓을 때,
롯에게 양보할 때,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올라갈 때
한결같이 믿음에는 행함이 따릅니다.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은 참으로 귀하고 좋으나
보이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좋으신 하나님을 보여주시려고 성육신하셨습니다.
우리가 행함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그 좋은 믿음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3. 살아있습니다.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약2:17,26]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과 멀어요.
생명과 멀어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아들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생명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영생을 얻은 자로서의 행동이 따릅니다.
목숨이 붙어 있으면 움직이는 것처럼, 생명이 있으면 진리를 행합니다.
그런데, 진리를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요, 헛된 믿음입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즉 본질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나무와 같습니다. 아무런 힘이나 능력이 없어서 외부적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꽃이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어있는 나무와 같아서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약2:26]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주님은 산상수훈을 마무리하시면서 주여 주여 하는 분들을 소개하십니다.
그들은 누가 보아도 정상적인 신앙인으로 보입니다.
[마7:21-24]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여 주여”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합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냅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밝히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주여 주여, 주인님 이렇게 부름은 주인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주인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주여!” 라고 부르지를 말든지, 아니면 주인의 종답게 따라 행동하든지.
행함은 믿음이 살아있음을 증명하여 줍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입술로 고백된 믿음은 행위로 증명되게 마련입니다.
수영을 잘하노라 말하는 사람은 물에 들어가 보면 압니다.
나의 수영 실력은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느냐, 맥주병처럼 잠기느냐 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교회가 영적인 중풍병에 걸렸다는 말을 합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들이 그렇지요.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경로로 오늘날의 성도님들은 그 옛날의 성도님들 보다 훨씬 더 많이 듣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믿음은 이렇게 침체되어 있습니다.
듣고 아는 것은 너무나 많은데 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족을 못 쓰는 영적 중풍병입니다.
많은 목회나 선교 세미나가 있습니다.
전략이 있습니다.
넘치도록 많습니다.
행동하지 못합니다.
개인이 가라않습니다.
교회 전체가 침체됩니다.
2] 행함 있는 믿음, 살아있습니다.
[25절]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은 여리고성 창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녀 믿음은 살아 있었습니다.
[약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은 하나님의 약속,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1]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참신이십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는 증거를 믿습니다.
[3] 하나님은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녀는 여리고 성의 타락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여리고 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옳게 생각했습니다.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살아있어서 그 시대를 거슬러 오릅니다.
정탐꾼을 숨겨주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고, 가족을 살려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약속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7:24-25]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가파른 산에 오르고 내리는 사람이 살아있는 가지를 잡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나뭇가지는 비록 조그맣더라도 사람을 지탱합니다.
욥기 31장에서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31; 16-21]
"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17.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18.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
19.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본 체 했다면
20. 만일 나의 양털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입혀서 그의 허리가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다면
21. 만일 나를 도와 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주먹을 들어 고아를 향해 휘둘렀다면 ".
욥 곁을 무서운 쓰나미 고난이 휩쓸어갔지만, 살아 있는 욥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할 때, 예수님께 한 것으로 계수하십니다.
(마태 25: 35-36)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자 의인들이 이렇게 답변합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너희가...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 25: 40). 그러면서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나옵니다.그는 강도에게 얻어맞아 죽어가는 나그네를 돌보아 줍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냐?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여라."
[마무리하는 말]
삶 속에 믿는 바를 행함으로 구원의 열매를 맺읍시다.
행함으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땅에 뿌리내리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유익이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보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살아있습니다.
머릿속에서만 감도는 믿음
‘귀신도’ 그런 믿음을 가졌다고 경계합니다.
[약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중세시대에 수도원 운동은 맑고 깊은 영성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건강한 신앙으로 권면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격리되어, 세상을 위해 행함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경건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백성들을 구제하는 생활로 보여졌습니다.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설교본문]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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