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7 March 2015

행 23:1-11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라

들어가는 말

믿음이 다른 형제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설명하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참 어려운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신앙을 유대교에 열심인 종교지도자들에게 담대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같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혈통도 같습니다. 열심도 같습니다. 무엇보다 섬기는 하나님이 같습니다. 다만 예수님에 대한 입장이 전혀 다릅니다.
더구나 그들은 다른 입장을 내세워 예수님을 이미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그 제자들을 처형한 기독교의 핍박자들입니다. 오늘 그들은 바울까지 잡아 죽이려고 이를 갈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적대적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합니다. 동족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자신의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얼굴을 붉히는, 또는 그럴 필요가 있는 유일한 동물'(마크 트웨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되 구원에 이르는 믿음, 착한 양심을 정립하기 원하여 이 양심 회복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1] 양심이란?

사람에겐 양심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사회에서도
'도산 안창호 선생은 그 시대의 양심이셨다.'
'당신은 양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양심은 살아 있을 것 아니냐?'
'양심에 맡깁시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양심 바울이 오늘 특별히 말하고 싶은 이 '양심'은 '선한 양심'(good conscience)입니다. 바울이 전날 자신에게 덮어 씌워진 고발에 대해(21:28) 무죄함을 말합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도 바울 자신은 흠이 없습니다. 자신의 의가 율법의 행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복음의 원리에 따라 생활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행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원리와 법규대로 살았습니다'.
이 중심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후배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런 권면을 충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들 디모데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 1: 18 -19)

믿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착한 양심을 갖는 믿음이 귀합니다. '파선한 믿음'도 있습니다.
키가 없는 배는 '파선'하기 쉽습니다.
양심을 버린 믿음은 파선하기 쉽습니다.
'파선한 믿음'은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양심을 버릴 때, 믿음은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힘으로 안되고 능으로 안 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노아 때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심판에서 구원해 준 믿음은 노아의 믿음뿐이었습니다. 그외 사람들은 '이 착한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기 때문입니다.
발람 선지자는 나름대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얘기도 많이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대표적인 거짓 선지자로 알려졌습니다. 선악을 구별할 줄 아는 양심이 파선되었기 때문입니다.

2] 양심의 기원

양심의 기원은 인간 창조 시부터입니다. 양심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의 존재가 드러나고 작동을 시작한 것은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한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후부터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3:7-9)

그들이 선악의 나무 과실을 먹은  후 자신들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알게되고  하나님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는 양심의 기능이 최초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양심을 두신 것은 악을 거절하고 선을 받아드리는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3] 양심의 기능

   양심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한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표합니다.
   인간의 영은 영교, 직관, 양심의 세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가질  수 있는 영교,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인 직관,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는 양심입니다.
   타락전 인간의 영적 기능은 영교와 직관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 후 하나님의 면전을 벗어나게 되자 양심이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의 침투와 활동을 막기 위해서 양심은  온갖 삶의 방면에서 사람으로 선악 시비를  느끼고 분별할 수  있게된 것입니다. 양심은 마치 큰  건물에 설치된  자동경보기와 같습니다. 건물에 아무런 사고가 없을 때에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난 경보기는 도둑이 들면 벨을 울리고 개스경보기는 개스가 새면  곧바로 작동을 합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인간속에  양심이 있었지만  죄가 인간에게  침투되기 전까지는 기능을 발휘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발생했을 때 양심은 그본래의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양심은 세방면으로 기능을 발휘합니다.
 1. 선악을 식별합니다.
 2. 무죄와 정죄를 알게 합니다(롬2:15)
 3. 양심은 하나님을 대표합니다.

  양심은 인간의  범죄를 막기 위한 통제기관으로 善과 惡을  통제하는 출입구요, 무죄와 유죄를 식별케 하고  하나님을 대표하여 책망하는 警報를 울립니다.

4] 양심의 타락

하나님 떠난 인간은 양심의 통제를 받고 살지만 양심조차 화인 맞고 말았습니다.(창4:9) 우리가 그처럼  소중히 여기는 양심이란 것도  인간이 타락한 후 오염될 만큼 오염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타락한 후 인간은 자기통치 아래 놓여졌습니다.  이때 양심이 자기를 통제하는 주된 임무를 맡게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통제를 거절함으로서 자기 양심에 의해 통제 받게 되기는 하였지만 양심조차 화인 맞은 양심이 되고 보니 믿을만한 것이 못되게 되었습니다(딤전4:2). 모든 자연인은 양심을 최고로 알고 양심의 통치를  높이 평가하지만 양심이 온전한 양심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을 선한 양심으로 회복시켜야 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연인의 양심은 자기통치로 복귀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회복하기 위한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5] 양심의 회복

양심의 회복은 자기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이르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심만 지키면  하나님 뜻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양심만 믿고 산다고 말합니다.   양심만 바르면 하나님 앞에서도 거리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양심을 믿고  사는 이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이에겐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자연인의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겨져야 합니다. 선한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통치하에 놓여있는 이는 양심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통치하에  놓여있는 이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삽니다. 양심가는 선악의 시비에 연연해 있습니다. 늘  흑백의 논리에 묶여 삽니다. 그러나 선한 양심을 받은  신앙의 사람은 자기의 옳고 그른 판단, 즉 양심에 의존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 그의 거룩에 속한 것 그분께 속한 것을 순종하고 따릅니다. 양심은 악을 비판하고 선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선한 양심은 악을 거절할  뿐 아니라 우리의 선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께 속하고 생명에 속하기를 원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찾아내려고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양심의 과제요, 선한 양심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바울의 선한 양심이 바울을 담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는 얼마든지 유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다만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입을 막으려 합니다. 입을 칩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산헤드린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양자 사이에는 신학적인 견해 차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말함으로 공회에서 논쟁(論爭)이 일어납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1] 바울이 노련한 수를 쓴 것으로(Preuschen), 마 10:16에 언급된 소위 뱀 같이 지혜로운 행동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 상대방을 분열시키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었다(Farrar)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울이 취한 이 행동으로 인하여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에게는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에 대해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많은 주제들 중에서 왜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였을까요?
  바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 온 것은 그가 박해자였을 때입니다. 그가 일찍이 고백한 대로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 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갈 1:13)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 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행 9:1) 다메섹 여 러 회당에 갈 대제사장 공문을 청하여 무론 남 녀하고 결박하여 투옥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열심이었고(갈 1:14a; 빌 3:6), 모세의  율법에 열심이었습니다. 예수를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예수님은 토라(Torah)를 경시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더우기 나무(십자가)에 달려 저주의 죽음을 죽은 예수를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blasphemy)이었습니다. 율법을 위반(transgression)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21:23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수치였습니다. 핍박의 근거요 목표였습니다. 더욱 예수가 부활했다는 선포는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만드는 모독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문화와  종교가  다른 이방 나라에까지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체험하며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께서  현현(Christophany)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부터(고후 5:16;  갈  3:13) 하나님의 아들로, 主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높이신 메시야로 그에  대한  참 지식을 가지는 순간이었습니다(고후 5:16; 갈 1:16; 빌 3:8). 이 체험은 바울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예수에 대한 모든 태도나 관점이 이 사건 이후로 철저히 변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자신이 전혀 새로운 관점을 소유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전했습니다(롬 1:2-4).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f).
 또한 전승으로서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들을 살펴보면 예수의 신성과  그의 구원의 완전, 확실성을 보증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사도 바울이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었던 까닭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교의 핵심으로 전했다는  것은  현대의 선교사의 전파와 가르침의 내용도 본질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이  강조되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3. 부활하신 주께서 바울 곁에 서 계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양심껏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완악한 자기를 철저히 깨부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엄청난 핍박에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한 양심은 철저히 무시당했을 뿐만 아니라, 입을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짓밟혔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함으로 그의 동족을 구원하고자 했던 꿈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대신 스데반이 당했던 것과 같은 순교의  현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천부장은 공권력을 동원하여  가까스로 바울을 분노한 공회에서 빼냈지만 그의 장래는 너무나 두려운 일 앞에 놓였습니다.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 않겠노라 선언한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좋은 의도로 왔지만 결과는 정 반대로 전개되었습니다.
이 절망스런 그날 밤, 사역의 현장에 주님께서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주십니다.

"담대하라. 내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엄청난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1] 주님은 그 종의 위험을 결코 방치해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는 그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그 두려운 일을 만나셨을 때, 찾아오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에서에게 쫓겨가던 그 두려운 밤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밤, 사도 바울이 위험 속에서 두려워 할 그 시간에 변함없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내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두려운 밤을 맞고 있습니까?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밤이 있습니까?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형편을 보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화]

<양심의 배>
알베르트 시바이쩌 박사는 일생동안 양심의 세미한 소리에 고요한 귀를 기울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따르기 위해서 어떠한 괴로움이 찾아와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알베르트 시바이쩌 박사가 일생동안 지켜 온 양심은 철없던 어린 시절부터 순진하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소년 알베르트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게오르크라는 소년과 씨름을 했습니다. 게오르크는 나이도 위였고 몸집도 컸지만 알베르튼 그를 곧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나도 너처럼 일주일에 고깃국을 두번씩 먹으면 너 같은 건 문제없을 거야..."
이말을 듣는 순간 알베르트는 힘내기에 이겼다는 기쁨은 다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후 알베르트는 고깃국만 보면은 입맛을 잃고 항상 게오르크의 음성을 생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고통과 고난 속에 허덕이는 이들이 많은데 이들을 외면하고 난 자신의 행복과 건강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이것은 이미 음악의 대가가 되었고, 신학박사,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30세의 청년 시바이쩌 박사의 갈등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양심에 못이기고 그 모든 부귀와 명예를 포귀하고서 검은 대륙을 가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7년 후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1913년 3월 26일 저녁 프랑스 보르도에서 아프리카로 향하는 기선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장차 자신과 인류역사에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는 전혀 모른 채 오직 양심의 배를 탔던 것입니다
슈바이쳐박사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슈바이쳐박사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 목사님이 농촌 목회를 하면서 꿀벌을 좀 키웠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이 목사님이 벌통을 열어 놓고 꿀벌의 상태를 살펴보는 중이었는데 그때 마침 웃통을 벗고  놀고 있던 슈바이처는 그만 벌에 쏘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어린 슈바이쳐는 아프다며 엉엉 울게 되었고, 아들의 울음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놀라서 달려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어머니가 나와서 보니 아들은 잘못한 것이 없는지라 남편을 향하여 "당신이 정신이 있소, 없소? 아이가 웃통을 벗고  노는데 벌통은 왜 만지는거요?"라며 야단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가 내가 잘못했다며 그야말로 쩔쩔매게 된 것인데, 슈비아쳐의 기록에 의하면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욕을 먹는 것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소리로 울었고 그럴 때면 아버지를 향하여 나무라는 어머니의 음성도 포르테시모로 커져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슈바이쳐가 이렇게 한참 동안 소리를 지르며 울다가 보니 사실 나중에는 아프지도 않은 것을 울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마음 속에서 양심이 하는 말이  "야, 이 녀석아 그만 울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이 일을 기록한 슈바이쳐 박사는 "이것은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말은 하지 않지만 다들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양심은 하나님이 주시는 판
단력이요, 지성이며, 인간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느냐 없
느냐 하는 마음의 청결 여부에 따라 양심의 상태가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얼굴을 붉히는, 또는 그럴 필요가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 마크 트웨인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0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03 바울이 가로되 `회 칠한 담이여 !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 하니 0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 05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희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0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0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0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훤화가 일어날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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