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1 March 2015

히3:1-6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들어가는 말]

    요즈음 우리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유일한 주제입니다.

    [1절]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세상에는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복음 12:27 ]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해야할 생각 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돌보심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된 사실은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히브리서 10: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히브리서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고난의 길을 갈지라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욥과 같은 성도를 생각하라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3:3 ]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갇힌 자 학대받는 이웃을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주님께서 그러나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믿음 없는 족보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주님이 심판주로 오심을 잊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와같이 우리들에게는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 있고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런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에서는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누구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입니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까?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 땅에서 생각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공동체의 부름을 받아도 영광인데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런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예수를 깊이 생각할 일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정도가 끝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를 "거룩한 형제"로 입양하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한 형제로 삼으시려고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심으로 성도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 깊은 사랑을 부어주신 분이 우리를 거룩한 형제라 부르시니 그분을 깊이 생각할 일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우리 대신 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일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 신분을 얻었습니다.


    사망의 권세에 매여 일평생 그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였습니다. 일평생 죄 가운데 살면서, 사탄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신 몸으로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할 그 어려운 시험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험당하는 우리를 능히 도우십니다.

    그 은혜를 덧입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분과 형제의 반열에 서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분과 형제의 반열에 서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십니다.(1절)

    [1절]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우리를 위해 오신 하나님의 [사도]이십니다.

     유대 문헌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 간주되고 있습니다(b.Qidd.23b;Ned.35b;Yoma19a-b). 이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뜻하는 용어 '쉴리'(*)가 헬라어 '아포스톨로스'(*, '사도')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본절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Manson).
    모세는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는 표현으로 보아(출3:10,LXX) 모세 또한 사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님을  '사도'로 표현한 것은 모세와의 역할을 비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Jones).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분의 외아들을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로 삼으시려고 하나님께서 친히 파송하신 하나님의 사도이십니다.



    2] 우리가 믿는 도리, 곧 복음을 위한 사도일 뿐 아니라 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주님은 완전하신 대제사장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면서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대제사장들은 불완전한 인간이었을 뿐이지만, 주님은 인간이면서 완전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완전한 한 분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인간들을 완벽하게 대표하시고, 사람들 앞에서는 완전하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직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교 전통의 대제사장들은 앞으로 완전하고 완벽한 대제사장으로 탄생하실 주님의 모형입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세마포 옷을 입고, 지성소에 나아가 자신과 권속을 위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은 자신의 죄까지 위하여 짐승을 드릴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단번에 속죄제물이 되심으로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로 삼으시려고 하나님께서 친히 파송하신 대제상이십니다.

    [예화]

    노르웨이에서 11년 7월 22일 연쇄 테러가 발생하여 9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테러범 베링 브레이빅이란 사람든 히틀러를 동경하는 백인 우월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한 이상을 가졌는데 노르웨이가 다문화이민정책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유럽을 이슬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정의롭지 못한 분노를 그렇게 표출하였습니다.

    베링은 이번 테러사건 전에 천명한 선언문에서 “오는 2083년까지 유럽 각국이 극우 보수 정권으로 정권 교체를 이뤄 무슬림 이민자를 내쫓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중동 이슬람 국가들을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유럽을 탄생시켜 기독교 문화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반 이슬람 정서를 확산시키고 있있습니다.

    그러나 베링이 품었던 “정의롭지 못한 분노”에 대하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되겠습니까? 월드(World)지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역사의 심판자가 된다는 것 자체를 논의하기 이전에 모든 정의롭지 못한 분노나 폭력은 바로 인간의 죄성에서 시작된다고 적고 있습니다.

    역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공의를 구하지 않고 자신이 처단하고 정의를 구현해야 하겠다는 욕망 자체가 바로 일종의 압제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입니다. 따라서 유럽 내에서 베링과 같은 급진주의적 사상을 가진 세력들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사형과 같은 심판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탄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대안은 기독교의 영향력이 사라진 유럽 대륙에 또 다시 성령의 바람이 불어 유럽의 교회들이 부흥의 계절을 맞아야만 또 다른 베링과 같은 불행한 영혼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런 미묘한 종교간의 갈등 속에서 2011년 7월 27일에는 서울행정법원에서 특이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란에서 한국에 온 세 사람이 자신로들은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면 무서운 박해를 받기 때문에 난민 지위를 허락해 주십사는 소송을 법원이 인정한 것입니다.
법원은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를 얼마나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나 살폈고, 그들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 그들 신앙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 박해 우려가 있다고 법원이 인정하여 법원이 직접 신앙검증을 확실히 거쳐서 그들에게 난민 지위를 인정한 것입니다.

    한국인 이란교회를 비롯한 많은 한국내 기독교인들이 한국에 온 이슬람인들에게 전도를 하여 이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영접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중인데 그런 가운데 이번 재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사건을 보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팽배하는 이슬람 세력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첨예한 사안을 거치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현실을 받아들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유일한 답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로 삼으시려고 하나님께서 친히 파송하신 사도시요 대제상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로 충성하는 예수님은 신실하십니다.

    [2절]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1] 예수님은 아들로 충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야로 세우신 하나님께 신실하셨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은 충성하셨다고 번역했습니다.

    모세는 성경에서 하나님께 충성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민12: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하나님의 온 집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200만이 넘는 그분의 백성을 위임받아, 그분의 온 집을 맡아 충성한 신실한 청지기였습니다.

    가데스바네야에서 생명을 내놓고 그 백성들을 살려주시도록 몸부림치는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신실해야 하는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2] 모세가 사환으로 이룰 수 없었던 충성을 아들로서 이루셨습니다.

     [히3:5-6]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모세와 예수님의 일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충성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종들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하나님에게 충성하였습니다.
시간의 제한을 받았습니다.
공간의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전 영역에서 온전하게 충성하였습니다.

    그 백성을 위해 생명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생명을 내놓기는 커녕 자기 자신조차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혈기를 부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자리에서 충성을 올려드리지 못했습니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집을 지으신 만유의 주인이십니다.
포도원을 세우신 분입니다.
모세는 종입니다. 즉 사환의 입장에서 일하신 것이지요.
포도원으로 말하면 일꾼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이해시키시기 위해 유대인들이 누구나 인정하는 모세의 '충성'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모세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십니다.
    우선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사환으로서(5절) 자신을 세우신 이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영광을 받을 합니다.
더욱이 그는 출애굽 직후 40일동안 시내 산상에서 하나님과 만남으로 인해서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을 얼마간 간직했었습니다(출34:29-35;고후3:7).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2:9)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빌2:6).
영광과 빛의 근원이십니다.(요1:4,5,9)

    모세는 분명 탁월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그 집의 한 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집을 자신의 피로 세우신 분이십니다.(행20:28) 하나님의 집 하인으로 충성한 모세보다 훨씬 존귀한 존재이십니다.

    6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그의 집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집 맡은 아들과 집, 이것이 신자와 예수님의 관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출하셨습니다. 지나가시다가 우연히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준 차원이 아닙니다. 살려주고 나서 단지 기억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구출한 자기 백성을 계속해서 도우시고 살피시면서 신자로 살아가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집을 맡았다면 그 집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잘 보전되도록 힘을 쓰고 관리할 것입니다. 신자가 바로 예수님의 관리를 받는 대상인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는 일에 귀히 쓰임을 받았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세주라면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구세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시적인 영광을 누린 모세와 달리 영원한 영광을 누리십니다.



    오늘 우리 민족의 역사 가운데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충성을 만납니다

    한국 교회사에는 이런 주님의 신실하심이 짙게 베어 있습니다.
1860년대에 토머스라는 26살 청년이 선교를 위해 이 땅에 도착하자마자 군인의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렇게 순교로 출발했습니다. 기독교신앙은 순교적 신앙입니다. 박충건이라는 군인이 토머스 선교사를 죽이려고 칼을 들었을 때, 선교사는 그에게 성경을 주면서 “이 성경을 받고 나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박충건은 성경을 받고 토머스 선교사의 목을 쳤습니다.

박충건은 성경을 집에 가지고 가서 읽어보았습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방에 내동댕이쳐 놓았다가 이영태라는 조카에게 주었습니다. 이영태도 읽어보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친구 최치량에게 주었습니다. 최치량은 종이가 귀한 때에 책 한 권이 생긴 것이 너무 좋아서 집에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을 조각조각 분리하고 잘라서 벽에 싹 발라버렸습니다. 자기 집 벽을 성경으로 도배해버린 것입니다. ‘성경으로 집을 바른 최치량’이 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평양의 그 최치량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최치량이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고, 토머스 선교사를 죽인 사람의 가족과 후손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왔을 때 평양에는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신실하게 지난 100여년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여 이 놀라우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합시다.

    아들로 충성하시닌 예수님은 신실하십니다.
신실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합시다.
그분의 신실함이 우리 인생에서도 열매로 나타날 수 있기 원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무엇을 생각하고 사십니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여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종으로가 아니라 아들로 충성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그분의 성전일 수 있습니다.



    [성경본문 히3:1-6]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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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정현 교회 장로님 가운데 장기려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장로님은 외과의사로서 젊었을 때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평양의 ‘도 병원’ 원장도 지내셨습니다. 김일성 수령을 수술해서 살려낸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장로님은 수술하기 전에 김일성 수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수술은 제가 하지만 낫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수술을 할 때 기도를 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제가 수령님을 위해 기도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죽게 생겼는데 어쩌겠습니까? “기도하고 하시오!” 장로님은 김일성 앞에서 기도를 하고 수술을 했고 김일성은 나았습니다.

6.25때 부산으로 피난을 나온 장 장로님은 오자마자 김일성을 살린 사람이라고 잡혀갔습니다. 당시 경남도지사 등 몇 분이 나서서 그분은 예수 믿는 사람이고 의사라고 변호를 해주었습니다. 장로님도 “나에게는 적이나 친구나 아무런 상관이 없소. 아픈 사람은 누구든지 고쳐줍니다. 이것은 내가 의사가 될 때 맹세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장로님은 체구가 자그맣고 인물이 잘 생긴 분이셨습니다. 예배 시간에 가끔 테너 목소리로 독창을 할 때마다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종종 독창도 하시고 때론 사모님과 함께 이중창도 하셨지요.

장 박사님은 둘째아들만 데리고 남쪽에 내려와서 ‘복음 병원’을 시작하셨습니다. 6.25의 와중에 돈 없는 사람들, 치료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시작했고 많은 피난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했습니다. 복음 병원은 점점 커져서 지금은 의과 대학도 있습니다. 장 박사님은 한국 최고의 외과의사로서 서울대학 의과대학 교수도 하셨고 막사이사이상을 받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집 한 칸도 없으셨습니다.

그 분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있습니다. 병원이 커져서 치료비를 받게 된 후에도 가난한 환자들의 치료를 마친 후에 “앞문으로 나가면 돈을 내라고 할 테니 뒷문으로 나가시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종종 자기 돈으로 치료를 해주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청십자 의료 보험운동’으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보험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돈 없는 사람들도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그 운동을 통해 참 이웃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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