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26 March 2015

벧전3:13-17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들어가는 말]

베드로전서가 기록될 당시는 기독교 박해가 깊은 때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잃고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곳곳에 흩어져야 했습니다. 박해와 고난에 노출된 성도들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 고통 받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말을 알려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현실의 모든 기초가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산 소망이 있습니다. 그 세상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인생을 관광객으로 빗대어 이렇게 말합니다.
몇 사람의 관광객들이 버스를 타고 호수와 산,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지방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 버스 창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들은 차창 밖에 무엇이 지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오직 버스 안의 세계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누가 버스 앞자리에 앉았나, 누가 중요한 인물인가? 어떤 대화를 하는가? 어떤 관계인가? 등의 생각에 여행의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밖에는 여행자를 무궁무진한 절경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 여행객들은 그 지겨운 생활이 자신들의 모두인 양 여행하고 있습니다.
얼마 있으면 여행이 끝나는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우화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자칫하면 그럭저럭 살다가 생을 끝낼 수 있다는 위험을 암시해 줍니다.
나는 매우 중요한 일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눈을 뜨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기독교는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커든 밖의 아름답고 넓은 세계를 보여줍니다. 영원한 삶에 대해 눈을 열어줍니다.
복음은 버스 안에서 있는 사람들에게 가리어진 커튼 하나하나를 젖혀 주면서 그들에게 차창 밖의 다른 세상을 볼 수 있게 합니다.
버스 창의 커튼이 걷히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 앞에 전개되는 현실은 단지 여행의 일부일 뿐이고 하나님께서 펼쳐주시는, 눈 앞에 전개되는 세계에 대한 경이로움과 감탄을 연발합니다. 현실의 크고작은 일에 너무 연연하던 지난 날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산 소망으로 깨어나면서 세상과 생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오늘은 대답할 말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1.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

[벧전3:13]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당시는 비기독교도들이 천하에 권세를 잡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방 종교도들이 모든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권한을 모조리 휩쓸고 있던 때입니다. 오직 노예 계층이나 하류 계층은 겨우 숨 쉬고 살 던 시절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이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당신들이 가진 소망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묻는 자에게 우리 연약한 기독교인들이 행할 수 있는 말과 처신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대답할 말입니다.

우선 이 말씀은 선을 행하는 자들이 세상에서 전혀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본 절은 유대주의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내용을 강조하여 선포합니다.

(시 56: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송하는 사람이니 혈육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인생관이 좌우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를 대적하는 자가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셔도 우리를 대적하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위하셔도 욥에겐 고난이 있었고, 가까운 가족은 물론 친구들까지 대적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늘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육체적인 것은 해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영혼까지는 해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믿음의 사람에게 육신적으로 해를 가한다고 할지라도 묵묵히 참고 선을 행하면 하나님의 승리가 보장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안에는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에 하나님께서 보배롭게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의 인이 그 내면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소망이라 함은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수호뿐만 아니라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답'에 해당하는 '아폴로기안'은 본래 재판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변호할 때 사용되어진 용어입니다. 어떤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대답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대답이 무엇입니까?

[1]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는 생명이 없었어요.
영생이 우리에게 없었습니다.

[엡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감당하셨습니다.

[3] 이를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벧전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영생)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열심히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
우리 안에 영생이 있기에 나타나는 열매는 선행입니다.

여기서 선은 3장 앞부분에서 예로 제시하였던 바로 그런 행동입니다.

[벧전3:1-2]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순종할 수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순종이란 선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라와 같은 믿음의 사람을 예로 주셨습니다.

[벧전3:5-6]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돼지가 암소에게 불평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베이컨과 햄,심지어 발과 털까지도 제공해.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욕해.
암소가 말했습니다.그건 나는 살아 있을 때도 유익한 것을 제공하기 때문일꺼야,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 앞의 본문에서는 노예 계급 백성들이 어떻게 선을 행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벧전2:13-15]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우리 성도가 이런 선을 열심으로 행하면 복이 있다 하십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을 돕는 일은 단순히 봉사의 차원이 아니라, 버림받은 그들의 눈동자 속에서 그들과 함께 고통 당하며 눈물 흘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천주교의 양적 부흥은 좋은 면에서 보면 선행입니다.

악하게 대적하는 안티 기독교인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선행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고 또한 그의 귀가 의인의 간구를 들으시므로 열정을 갖고 선을 행하는 자들을 기억하십니다.

2]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 말씀은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하신 말씀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 앞서 주신 말씀의 도움을 받겠습니다.‘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지금도 안티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시시건건 시비를 겁니다. 조그만 약점이라도 보이면 벌떼처럼 일어나 덧글을 도배합니다.
내면까지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미국 메릴랜드의 한 마을에 남루한 복장의 고학생이 나타났습니다.서적 외판원인 청년은 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있었습니다.그는 마을 입구의 허름한 집을 방문했습니다.한 소녀가 학생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가난해요.책을 살 수가 없어요”

고학생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시원한 우유 한 잔을 부탁했습니다.소녀는 쟁반에 우유 두 잔을 담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고학생은 소녀의 친절에 감동해 수첩에 그녀의 이름을 적어두었습니다.

20여년 후 메릴랜드병원에 한 여성 중환자가 실려왔습니다.병원장 하워드 켈리 박사는 의사들을 총동원해 환자를 살려냈습니다.그러나 여인은 1만 달러가 넘는 치료비청구서를 받아들고 한숨을 토했습니다.그런데 청구서 뒤에는 병원장의 짤막한 편지 한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20년 전에 저에게 대접한 우유 두 잔이 치료비입니다”

겉으로 선행을 하면서 안으로 참는 자세는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2.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입니다.

[벧전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고난을 받으면'은 실제로 일어날 확실한 박해를 의미합니다.
믿는 성도들이 받는 이 박해는 의를 위한 고난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주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사는 성도에게 오는 고난입니다.

로키산맥 해발 3천 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 때문에 곧게 다리지 못하고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 무서운 인내력을 발휘하지요.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도 바로 이 ' 무릎 꿇고 있는 나무' 로 만든다고 합니다.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보여줄 선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을 말씀하실 때 (마 5:10-12)에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의로운 일에 고난이 오면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베드로 전서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가 준비해야할 대답은 바로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입니다.

C.S.루이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평안할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속삭이시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보내시는 것이다. 고난은 '인간의 잠든 감각'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큰소리' 이다"

어떠한 상황 하에서든지 주께 헌신한 자들이 흔들리지 않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확고한 모습을 봅니다. 이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가 준비해야할 대답입니다.
아,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소망이 있기에 이렇게 죽음 앞에서도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말인가. 고난을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닌가!
그 답은 '복있는 자'(*, 마카리오이)의 받을 복에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생명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 장차 하나님 나라에 속할 영생을 가지고 견뎌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현재적이지만 그 성도가 고난 이후에 받는 영생은 미래적인 복입니다.

한 시골 청년이 캔사스 시티에 들어왔습니다. 출판사와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자기가 그린 만화를 실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한군데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마침 주일이 되어 아무 교회나 길거리에 보이는 교회로 들어갔지만 예배내용은 머리에 들어올 리 없고 눈물만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청년을 보고 사정을 들은 후 교회 창고에서라도 자겠으면 일을 구할 때까지 묵으면서 교회 일을 해달라고 말씀하시며, "용기를 잃지 말게. 하나님이 자네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게"하고 겪려 했습니다. 이 교회 창고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쥐가 많이 나다녔습니다. 먹을 것을 조금씩 주자 쥐들은 도망가지 않게 되었고 쥐를 관찰하는 중 세계를 사로잡은 미키 마우스의 아이디어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먹을 것도, 잘 곳도 없던 청년이 월터 디즈니였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우리 성도들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 순간을 견디어 냄으로 하나님께서 주실 영생의 축복을 소유할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찰스 웨슬리는 어느 날 서재의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쉬고 있으려니까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매에 쫓겨 살 길을 찾아 그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새는 공포에 싸여 방안을 몇 바퀴 돌더니 푸드득거리며, 조용히 앉아 있는 그의 옷자락 속에 깃들였습니다. 찰스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새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습니다. 할딱거리던 새는 잠시 후 평안해진 듯 보였습니다. 그는 어린 새를 쓰다듬어 창밖으로 놓아 보내고 일어나 불현듯 그 마음에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388장)라는 찬송입니다.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사랑 많은 우리 주
나를 품어 주소서.
풍파 지나 가도록
나를 숨겨 주시고
안식 얻는 곳으로
나를 인도 하소서


3. 그리스도를 주로 삼은 거룩함입니다.

[벧전3:15]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곧 하늘에서 천사들이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고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는 그분(계 4:8,9)을 닮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를 닮아간다는 의미입니다(히 7:26).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성막과 거기에 사용되던 모든 기구들이 다른 물건과 뚜렷하게 구별되던 것과 같은 뜻의 구별입니다. 모든 세상적인 습관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준비해야할 마음은 범사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8: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 할 자로 삼으라

범사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는 것 일은 바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준비해야할 마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준비해야할 마음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불러주신 거룩하신 분,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1]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 되심을 드러냅니다.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후레드릭 미코니우스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었으나 루터에게는 더 할 수 없는 격려와 위로와 기쁨을 주는 친구였습니다.
종교 개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후레드릭은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을 앞에 두고 사랑하는 친구 루터에게 최후의 유서를 보냈습니다. 이를 받은 루터는 깊은 감회에 빠졌으나 곧 기도하기 시작했으며, 하루를 온전히 기도함으로 성령께서는 사랑하는 친구가 아직도 죽을 때가 안 되었다는 사실을 루터의 마음속에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루터는 후레드릭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살 것을 명령한다. 왜냐하면 종교를 개혁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아직도 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결코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나로 하여금 듣지 않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나는 하나님의 뜻이 네게서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나는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자 추구하므로 이를 확신한다."

이 편지를 받은 후레드릭의 병은 신속히 회복되어 의사가 선언한 불치의 병에서 소생되어 6년을 더 살며 루터를 도와 종교 개혁의 위대한 사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테니슨은 그의 작품 「왕의 전원시」에서 기사의 서약을 제시했다.

『삶은 순결하게,
말은 진실하게,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왕을 따른다.
그렇지 않다면 왜 태어났는가?』

무엇보다도 크리스천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왕을 따라야 하는데, 그 자세는 거룩함입니다.

2]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제사장 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독일의 `라인란트 선교회'는 수마트라 선교를 위하여 논멘젠 박사를 파송하였습니다. 논멘젠은 1864년 바탁 지방에 들어가 추장을 방문하고 그의 부족에서 2년간 만 살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추장은 그 청원을 받아들였습니다. 논멘젠과 함께 생활한 지 2년 후에 추장은 그를 불러 그 동안 한 일에 감사한다고 말한 후 선교사가 가르친 것은 자기 족속의 법률에도 있으므로 더 이상의 교훈이 필요 없으니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법률에도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라고 씌어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하나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논멘젠이 말을 듣고 자신의 실패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바탁족의 윤리적 기준이 너무 낮은 것에 주의를 기울여 율법의 금지명령을 강조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속에 도덕적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실패했던것입니다.

그는 추장에게 여섯 달 만 더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죄용서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선포하는 데만 힘쓸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여섯 달이 지나자 추장은 그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몇 달 동안에 당신은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말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율법이라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모시려고 합니다."

그 결과 바탁 지방에서는 수천 명이 구주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바탁지방은 수마트라에서도 살기 좋은 지방으로 변하여 많은 이웃 지방의 사람들이 이주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3]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선지자 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화창한 어느 가을날, 한 농부가 토실토실하게 여문 옥수수를 엮어 나뭇가지에 매달았습니다. 한 다람쥐가 그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날마다 농부의 눈을 피해 옥수수가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에 올라가 배가 터지도록 옥수수를 먹어댔습니다. 며칠 후 농부는 나무 밑에 떨어져 죽어 있는 다람쥐를 발견했습니다. 너무 먹어 둔해진 몸을 이끌고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뎠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다람쥐처럼 절제를 하지 못해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말의 절제, 행동의 절제, 음식의 절제 등 우리의 삶에 절제가 필요한 부분은 참으로 많습니다.

챨스 피니(Chales Finney)는 영적 무감각의 큰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고린도인들이 영적으로 새롭게 되지 않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보다 더욱 비난을 받아야만 할일이라는 것이다"




[마무리하는 말]

리로이드 죤 오길비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어느 날 나는 이비인후과 의사를 찾아갔을 때 그는 진찰하기 위해 먼저 나의 귓속을 소제해 주었다. 그는 강력한 펌프를 사용하여 오랫동안 쌓였던 귓밥을 빼내 주었다.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이렇게 많은 귓밥을 담고서 듣는데 별 장애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군요.' 그랬더니 의사는 나에게 멋진 말을 해 주었다.

'귓밥이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떡이 되면 그때에는 청력장애가 옵니다. 그렇게 되면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크리스천과 같아집니다.'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우리 성도들이 보여줄 대답은 그리스도 통치 아래 사는 모습이요,
죄용서를 받고 사는 모습이오,
말씀을 생명으로 받는 모습입니다.

주께서 보여주신 선함은 이 땅 위에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삼아 그 통치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를 제사장으로 삼아 죄사함을 얻고,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삼아 말씀을 들으며 살 때, 우리의 삶은 세상과 구별됩니다.

[성경본문]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