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18 March 2015

디모데후서 4: 6-8 신앙의 경주에서 중요한 것

설교 본문 말씀]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들어가는 말]

   바울 사도는 후임자 디모데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설교와 교육, 전도와 봉사의 직무를 다하라고.

   왜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이유는!"[='왜냐하면'('가르')가 개역개정에 번역되지 않음]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경주자들은 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까?]
왜 [전도자의 직무를 다해야 합니까?]



    1. 우리 앞서 달려온 선배의 신앙 경주가 중요합니다.

   [6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1] 그의 신앙 경주는 42.195Km를 완주한 마라토너를 생각나게 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나의 달려갈 길'이란 마라톤 경기에서 정해진 경주 코스를 의미합입니다.
    '달려갈 길'(드로몬)은 마라톤 경기에서 정해진 '경주 코오스' 42,195Km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비유한 말입니다.
복음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온 생애를 말합니다(행 20:24;갈 2:2).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경주 코스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렸습니다.(Guthrie).

    (갈2: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 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대단히 보람있는 회고입니다.
마라톤의 이 길이는 결코 쉽지 않은 거리이며
달리는 사람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적당한 거리입니다.

    달려본 사람은 누구나 느끼는 바이지만, 중간에 몇 번이고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의 고비는 반드시 있는 것이 마라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럴때 마다 떠오르는 생각은 여기서 차라리 중도 포기할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잡념들을 물리치고 계속 달리기만 하면
시간이 적게 걸리던 많이 걸리던 간에 반드시 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이처럼,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길고 긴 코스를 다 달렸다는 것입니다.

중간 중간의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어려운 위기들을 다 이기고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온갖 내면적인 유혹과 외부의 유혹을 다 이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라톤 풀 코오스를 잘 뛰어 우승한다는 것이 아니라,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는 것입니다. 완주할 수 있었 다는 것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의 신앙 경주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미 생(生)이 뉘엇뉘엇 저물어 가고, 사명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2] 그는 그에게 정해주신 길을 최선을 다해 달려왔습니다. 힘이 든 일이 많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 받은 이후 로마의 감옥에 이르도록 온갖 장애물을 통과하면서 달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달렸던 그 길은 복음 전파의 길이었습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곧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노라"
    주님께 받은 이 사명의 길은 생명도 내놓을 만큼 중요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과 허다한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혹은 함께 뛰었던 중요한 신앙 경주였습니다.


    3] 더욱 중요한 사실은 주 예수님께사 그와 함께 계시면서 그가 받은 사명의 길을 완주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는 맡아 수행한 일은 주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다만 그 일을 맡아 수행한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4] 이 신앙 경주는 난코스 중 난코스였습니다.

    포기한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를 위해 예비된 면류관을 바라보았습니다.
인내하며 경주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파의 길, 사명의 길을, 순교를 각오하고라도 끝까지 완주하고 싶은 중요한 코스였습니다.
그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자기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5] 마지막 순간에 그는 전제와 같이 자신을 쏟아 붓습니다.

   '전제'는 제단 위에 올려진 제물 위에 붓는 일종의 제주(祭酒)입니다(민 15:1-10).
'제주'를 붓는 행위는 '희생 제사'의 마지막 의식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붓고 있습니다.
혼신의 힘을, 자기 생애 마지막 모든 것을 주님 앞에 쏟아 붓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신앙의 경주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관제와 같이 자신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마라토너가 마지막 경주의 순간에 남은 모든 힘, 젖먹는 힘까지 다쏟아 붓는 경주를 생각나게 합니다.

   (빌 2:16-17)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주의 제단에 산제사 드린 후에 주 내맘을 주장하여"

   주의 제단에 마지막 생명을 하나님의 나라와 온 교회를 위하여 산 제물로 드리고 있습니다. 주의 제단에 자신의 최선을 쏟아 붓고 있는 바울 사도을 보면서 사람들은 순교라고 말합니다.



    6] 경주를 마무리하고 그가 손에 쥔 바통을 디모데에게 넘겨주고 떠나려 합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떠날'(아날뤼세오스)은 '풀어놓는', '걷어내는'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원이 배를 바다로 출항시키기 위하여 정박해 놓았던 배의 로우프를 푼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나그네가 다음날 새로운 행진을 하기 위하여 자신이 거처하던 장막을 걷어낸다는 의미입니다.
    바울 사도의 죽음이 시간적으로 멀지 않습니다.
그 인생의 황혼이 오고, 순교의 시간이 다가 왔습니다(빌 1:23).

    배가 떠나려 그 로프를 풀어야 합니다.
새로운 행진을 하기 위하여 자신이 거처하던 장막을 걷어야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사에는 이렇게 떠나간 아름다운 순교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있어 그들의 흘린 거룩한 피로게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는 이렇게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 역사를 순교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렇게 로프를 풀고, 장막을 걷고 떠나갔던 우리 신앙 선배들의 기도의 눈물과 봉사의 땀과 순교의 고귀한 피를 머금고 자라났습니다. 한국 총회 순교자 기념 선교회가 정리한 것을 보면 개신교회의 순교자는 약1천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유명한 순교자들은 이렇게 로프를 풀고, 장막을 걷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초대교회 교인이시면서 최초의 순교자이신 백홍준 장로님께서 로프를 풀고, 장막을 걷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감리교 초대 감독이셨던 양주삼 목사님께서 로프를 풀고, 장막을 걷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한국의 성자라고 일컬음을 받는 주기철 목사님께서 로프를 풀고, 장막을 걷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신 손양원 목사님께서 로프를 풀고, 장막을 걷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일본의 국회를 방문하여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역설함 벌컥 뒤집어 놓았던 박관준 장로님께서 로프를 풀고, 장막을 걷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예수 천당을 외친 최 봉석 목사님께서 로프를 풀고, 장막을 걷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주님을 위해 34세로 처녀로 순교하신 백인숙 전도사님께서 로프를 풀고, 장막을 걷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릴레이 선수들이 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줄 압니다.

1번 선수가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립니다.
그 힘이 다하는 지점에서 3번 선수가통을 이어받습니다.
2번 선수가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립니다.
그 힘이 다하는 지점에서 3번 선수가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3번 선수가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립니다.
그 힘이 다하는 지점에서 4번 선수가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400미터 코스는 달리는 선수들의 최고의 속도를 만들어 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1번 선수라 한다면 바울 사도는 2번 선수일 수 있습니다.
그 바통을 이어 받는 디모데는 3번 선수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어 달리기를 한 신앙의 경주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이 경우 바울 사도의 경주는 너무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 한 사람이 바른 바통을 잘 전해 줄 때, 이를 이어받은 경주자는 받아 든 바통을 소중히 부여잡고 달리고, 그 다음 신앙의 경주자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를 멋있게 마쳐가는 사도 바울이나, 그의 직무를 계승하여 달려갈 디모데는 다같이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바통은 전해 주는 자에게나 전해 받은 자에게나 생명처럼 소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바통을 들고 어떻게 경주하고 있습니까?
이는 여러분께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중요한 사건입니다.



   2. 신앙 경주에서는 선한 싸움과 믿음이 중요합니다.

    [7절]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1]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7a]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1] '선한 싸움'(아고나)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1} 우선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벌이는 싸움을 생각나게 합니다.
(2) 레슬링이나 권투와 같은 운동 경기를 생각나게 합니다.(Hendriksen, Lenski). (고전 9:24,25;빌 3:12,14;히 12:1-3).

인생을 싸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싸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울 사도의 싸움은 선한 싸움입니다.
싸움은 싸움이지만 그러나 선한 싸움입니다.

    보통 "싸움"이라는 말을 할 때, '링 위에서 싸워 승부를 내는 권투 시합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피를 흘리기까지 싸우는 싸움입니다. 상대방이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때까지 싸우는 생존 싸움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싸우는 싸움은 생존을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돈을 벌자는 싸움이 아닙니다.
명예를 얻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어떤 대의명분을 위하여 싸우는 싸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선한 싸움"을 여러 가지로 말씀합니다.

    [빌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여기에서 [착한 일을 위한]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싸움]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싸움]이 바로 "선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싸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복음전도자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미혹하여 지옥으로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복음 전파하는 것을 막습니다.
이 때에 발생하는 싸움이 바로 "선한 싸움"입니다.
마귀에게 잡혀 있는 세상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데는 숫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싸움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유혹했던 마귀들은 오늘날 우리들도 유혹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에서 멀어지도록 합니다.

    그는 한 평생을 이 "선한 싸움"을 싸워왔노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가 싸운 싸움은 바로 구원을 위한 싸움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싸움이었으며,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이었습니다.

    [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님의 싸움이 바로 선한 싸움이요, 우리들이 한 사람의 믿지 않는 자를 전도하는 것이 바로 선한 싸움입니다.

    또 이 "선한 싸움"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싸움입니다.
오직 천국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하자는 천국을 위한 싸움입니다.
영생을 쟁취하는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한 싸움"을 보이지 않는 영적인 전쟁이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크리스챤으로서 살아간다는 자체가 바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전쟁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시험과 유혹과 죄악에 대항하여 담대히 싸워 이겨야 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닙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또한 이 싸움은 죄악으로 가득찬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 속의 육의 사람과의 싸움입니다.
옛 자아와의 싸움입니다. 이생의 자랑과 세상적인 욕심과 싸우는 영전입니다.

    이 싸움은 나 자신의 나태와 안일, 교만과 싸우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자신의 심령 속에 역사하는 죄와 사망의 법에 대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쾌락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과학만능주의와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성경을 거스리는 비성경적인 사상과의 싸움입니다.

    결단]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로 부름을 받은 그 날부터 영전의 격전지를 통과한 승리자였습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영전의 적들과 싸워 승리한 용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선택을 받아 영전을 하는 성도임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영적 전투 속에서 승리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게 하는 선한 싸움이기에 중요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싸움이요, 우리가 결산해야 될 신앙이기에 중요합니다.


     2] "믿음을 지켰으니"

    "믿음을 지켰으니"

    여기 '지키다'라는 말은 도덕적으로는 처녀가 그 정조를 지킬 때 쓰는 용어이고, 군사적으로는 군인이 성을 지킬 때 쓰는 용어입니다.

    "지킨다"는 말은 달리기 선수들이 경기 규칙을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군인들이 상관에게 충성을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올바른 교의, 교리, 말씀을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또
한 청지기로서 악조건 속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심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믿음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엡2:8). 이 믿음이 바로 구원의 빙거요, 보배입니다(벧전1:9-10).
이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이 믿음이 죄를 이기게 합니다.
이 믿음이 나를 그리스도 앞에서 의인이라고 증언합니다.

    바울은사도는 질그릇 속에 있는 이 귀한 보배를 상실하거나 변절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신부가 오직 주님만을 위해 정절을 지켰습니다.
그는 복음과 교회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또한 그는 군인이 성을 지키듯이 그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법과 육체의 법의 끊임없는 싸움이 있습니다.

    [롬7:18-19]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선과 악이 싸우는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워 이기는 "선한 싸움"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직장에서 하나님이 뜻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자 하는 "선한 싸움"입에서 승리합시다.
가정에서 믿지 않는 가족들과의 "선한 싸움"에서도 승리시니다.
선한 싸움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신앙 경주를 하는 성도에게는 면류관이 중요합니다.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선한 싸움"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선한 싸움을 마친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아, 나는 이제 떠날 때가 다 된 것 같습니다.
내 인생을 돌이켜 보니...
선한 싸움을 다 싸웠습니다.
달려야 할 길은 다 달렸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제 생각으로는...
다 달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의로운 월계관...
그렇게도 받고 싶었던 바로 그 월계관을 받는 일만 남은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참으로 멋있는 회고의 모습입니다.

    면류관 [冕旒冠]은 왕의 정복인 구장복(九章服)에 갖추어 쓴 예모(禮帽)입니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국왕이 국가의 대제 때 면류관을 썼으며, 조선 후기에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할 때 면류관을 썼다고 합니다. 옛날 우리 고국 임금님은 왕관을 씀으로써 왕의 권위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대 희랍에서는 지.정.의를 가진 사람 중에서 누가 건전한 방법으로 잘 하는 가 경주하여 승리자에게 면류관을 씌어 주고 칭찬하고 존경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영국을 비롯해 군주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거창한 대관식을 갖고 왕관을 머리에 씁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도 교황은 관을 쓰고 있습니다.
왕관까지는 아니지만, 군대에서 장성들은 장식이 붙어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는 모자를 쓰고, 학위를 받을 때에도 학위 모를 씁니다.

    ‘면류관’은 영어로 단순히 왕관이지만, 원어의 '스테파노스'는 왕관을 뜻하는 동시에 '승리자에게 주는 월계관'의 의미도 있습니다.(순교자 스데반의 의미가 바로 이 월계관임).

    우리들의 죄를 속량해 그 죄값을 다 지불하기 위해 먼저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웠다(막 15:17 They dressed him up in purple and put a crown plaited from a thornbush on his head).”

     성경에서 이 면류관은 전도자가 받는 상급으로 나타납니다.(고전9:25)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무를 잘 감당하는 자에게 내려주시는 상이 면류관입니다.(딤후2:5)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과 기쁨으로 하나님의 양무리를 칠 때, 목자장께서 오실 때 본이 된 봉사자에게 면류관을 주십니다.(벧전5:4)

계시록에서는 24장로들이 주님 앞에 이 면류관을 올려드립니다.(계4:10)

머리에 쓰는 면류관은 쓸 자격이 있는 사람만 씁니다.

[월간 목회]지 97년 10월 호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영등포에 있는 어떤 교회 장로님이 1954년도에 값비싼 고급 애완견을 200마리 키우고 있었습니다. 마침 교회가 성전건축을 하게 되자 개 한 마리 값을 성전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천국에 가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과연 천국은 듣던 대로 얼마나 좋은 곳인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장로님은 환영 나온 천사들의 안내를 받아 어떤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방에는 금과
은과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면류관이 수북히 쌓여 있었습니다. 천사는 그 많은 면류관 중에 장로님에게 맞는 것을 하나 골라 써보라고 했습니다. 장로님은 그 많은 면류관중에 가장 좋아 보이는 면류관을 하나 집어 써보았습니다. 그러나 맞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이것저것 다 써보았으나 하나도 맞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구석에 개털모자가 하나 있어 써보았더니 의외로 꼭 맞았습니다. 그 때 천사가 말하기를 이것이 당신이 쓸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이 장로님은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보니 온 몸에 식은 땀이 범벅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꿈을 통해 이 장로님은 통회자복하고 목사님께도 용서를 빌고,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이와 함께 성경에는 9종류의 면류관이 언급돼 있습니다.

    ① 교만하여 망하는 면류관이 있습니다.

    “에브라임의 술 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에브라임의 술 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다(사28:1-3).”=

    ② 금 면류관: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있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계 14:14).”

    마지막 추수가 시작되는 장면에서 주님은 금 면류관을 쓰시고 심판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십니다.

     ③ 손자 손녀는 노인의 면류관입니다(시 128:6).”

     ④ 생명의 면류관
서머나 교회 사자에게 알려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죽기까지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고 계십니다(계2:10).

     ⑤ 영광의 면류관
백발은 공의로운 길에서 얻을 영화의 면류관입니다.(잠16:31)
     ⑥ 영화로운 면류관
    “그(주님)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잠 4:8-9).”
“그 날(심판의 날)에 실로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사 28:5).”
    ⑦ 의의 면류관
    ⑧ 자랑스런 면류관
    ⑨ 훌륭한 아내는 그 남편의 면류관이다(잠 12:4).
어진 여인을 남편의 면류관이라 하십니다.(잠12:4)

    주님을 사랑함으로 시험을 참고 견디어 낼 때, 주님께서는 승리의 면류관을 주십니다.(약1:12).



   [마무리하는 말]

   하루 해가 저물어 갈 때에는 저녁 노을이 아름답습니다. 일년의 계절가운데 봄과 여름도 모두 아름답지만 가을의 풍요함도 아름답습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1] 우리 앞서 달려온 선배의 신앙 경주가 중요합니다.
    2] 믿음으로 감당하는 선한 싸움이 중요합니다.
    3] 면류관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바울 사도은 "관제(灌祭)와 같이 벌써 나의 부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습니다"

이제 관제(灌祭)는 피를 부어 드리는 시간이 왔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피를 하나님의 제단 앞에 부어 드리는 순교자가 될 그날을 꿈꾸면서 이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 앞에 땀과 눈물을 모두 바쳤습니다.
이제 나머지 피까지 바치려고 이런 비장한 결심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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