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17 March 2015

빌립보 4:1-3 성도가 주 안에서 행할 일

 [들어가는 말]

    나의 [사모하는 형제]에게 가장 소중한 몇 마디 유언을 남겨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말을 남기시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자매]에게 가장 소중한 몇 마디 유언을 남겨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말을 남기시겠습니까?

    나의 [기쁨인 아들]에게 가장 소중한 몇 마디 유언을 남겨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말을 남기시겠습니까?

    나의 [자랑이요 면류관인 부모님]께 가장 소중한 몇 마디 유언을 남겨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말을 남기시겠습니까?

    老 사도 바울께서 그분이 사모하고 사랑하였던 빌립보 교우들에게 남겼던 유언을 통해 답을 얻기 원합니다.



    1. 주 안에 서라.


    '주 안에 서라!'(스테케테 엔 퀴리우 you should stand firm in the Lord!)


    당시 빌립보 교인들은 風前燈火(바람 앞에 등불)와 같은 형편에 놓여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로마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는 적대적인 세력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는 회당 밖으로 내몰리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것을 꺼림직하고 미련하게 보는 세상에서 빌립보 교인들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들어야 할 복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주 안에 서는 것입니다.
주 안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흔들릴 수 밖에 없는 빌립보 교인들을 누구보다 잘아는 사도가 그들에게 남기고 싶은 가장 중요한 유언은

    '주 안에 서라!'(you should stand firm in the Lord!)

     어떻게 하는 것이 주 안에 서는 것일까요?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얻을 지혜로운 방법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여러가지 삶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주 안에 서라!'(you should stand firm in the Lord!)

    주 안에 서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구원이 그분으로부터 옵니다.

주 안에 서서 하나님 구원을 경험한 다윗은 외칩니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62:2).


    [세상에 편승하지 말고 하나님께 승선하라]


   [베드로]는 원래 모래와 같이 흔들리고 무너지기 쉬운 시몬이었습니다.
어린 계집종 앞에서도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그런 흔들리는 존재였습니다.

   '주 안에 서라!'(you should stand firm in the Lord!)

   베드로가 흔들리지 않는 주 안에 서서 하나님 구원을 바라보기 시작하였을 때 주님의 교회를 그 위에 세울 만한 반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할 있을 담대하였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었을 때, 그는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캐톨릭과 그 권세 아래 있는 권세는 너무 막강했습니다.
제국의 왕들까지 교황 앞에서 벌벌 떨던 시대였습니다.

   '주 안에 서라!'(you should stand firm in the Lord!)

   그는 주 안에 서서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를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흔들리지 않는 주님의 말씀 위에 믿음을 다시 세웠습니다.

   주 안에 서서 하나님 구원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담대해졌습니다.

그가 황제 앞에 섰던 WORMS 국회의사당 기왓장보다 많던 마귀들의 권세는 떨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그는 주 안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종교 개혁의 물결은 힘있게 추진되었습니다.

 흔들리는 세상에 편승해서 살아가면 흔들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흔들리는 세상에 편승해서 사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흔들리는 세상에 편승하여 살면서 흔들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흔들리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이 흔들리고 싶지 않다면, 흔들리지 배에서 내려 흔들리지 않는 땅세 서야지요.

   그러나 어떻합니까? 우리는 흔들리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요.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흔들리는 세상에 내 인생의 기초를 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고형원 형제가 만든 복음송(오직 믿음으로)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그렇습니다. 흔들리지 않으신 하나님께 승선하는 일입니다.
주 안에  있는 자에게 흔들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조나단 에드워드]는 세속화의 물결 속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았습니다.

    '주 안에 서라!'(you should stand firm in the Lord!)

    그는 주 안에 섰습니다.
서서 하나님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미 전역에 영적 대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당시 영국 모든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 휩쓸려 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주 안에 서라!'(you should stand firm in the Lord!)

    그는 주 안에 섰습니다.
광장에서 주 앞에 섰습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에서 주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교회밖으로 내몰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그의 교구로 편입해 주셨습니다.


    '휫필드'는  주 안에 섰습니다.
하나님 구원을 갈망했을 때, 그의 설교를 듣는 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조지 뮬러가 주 안에 섰습니다.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그가 돌보는 수천 명의 고아들이 양식을 공급받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말세지말이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 섭시다.
서서 하나님 구원을 갈망합시다.
하나님을 갈망할 때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에 흔들리고 계십니까?
요동하는 바다 물결처럼 흔들리고 계십니까?
이리저리 밀리는 모래더미같이 흔들리고 계십니까?
흔들리는 갈대처럼 흔들리고 계십니까?

    '주 안에 서라!'(you should stand firm in the Lord!)

   [출애굽기 14:13]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주 안에 서십시오. 하나님께서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주 안에 서십시오. 폭풍까지도 잔잔케하시는 주 안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요동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흔들리지 않으시는 주님 안에 서시면 요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동치 않으시는 반석이시요, 산성이십니다.


    [사무엘상 12:16]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우리는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쉽게 흔들리고, 쉽게 약해집니다.
그렇지만 흔들리지 않으시는 주님 안에 서십시오.
반석 되시고, 산성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2.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be of the same mind in the Lord)

    사람은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경영하는 것이 자신을 경영하는 것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자신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음은 땅과 같아서 하나님을 위해 기경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활동무대로 삼으십니다.
광야와 같이 방치해두면 마음은 마귀가 또한 역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

    어떻게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먼저 같은 마음을 갖기 어려운 경우를 잠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다른 마음을 틀린 마음으로 생각할 때입니다.

    유오디게와 순두게, 그들은 빌립보 교회에서 나름대로 충성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마음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저들의 마음을 서로 틀렸다고 고소합니다.
두 마음이 서로를 틀리다고 고소하고 있었어요.
이것은 비극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질 때, 상대의 마음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를 뿐인데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be of the same mind in the Lord)



    2] 내 안에 상처가 있을 때입니다.

    사람마다 크고 작은 상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마음이 변덕을 부립니까?
나의 마음에 상처가 덧날 때입니다.
어떤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나에게 상처가 있으면, 작은 사건 속에서도 아프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부딪쳐도 지나친 반응을 보입니다.
더 나아가면 상대를 나쁘게 몰아갑니다.
너무 아프거든요.
그러니까 같은 마음을 품기 힘이 듭니다. 마음에 변덕이 나요.

    일 년이면 한두 번, 제 입술이 부르트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 경우는 피곤이 쌓이고 잠이 부족하면 입술이 터집니다.
입안이 터지는 경우보다  고통은 덜하지만, 입술이 터지면 보기도 좋지 않고 외적인 위험에 노출되게 마련입니다..

    언젠가 탁구공이 날아가다가 제 아픈 상처에 맞은 적이 있는데 정말 아프더라고요.
아무 생각없이 스쳐간 탁구공이 너무 저를 아프게 하더라고요.
누가 일부러 저를 미워해서 탁구 공으로 제 상처를 때렸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는 국제 시합에 나갈 수준일 것입니다.
만일 저에게 상처가 없었다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제게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몹시 아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be of the same mind in the Lord)

    우리는 자신의 상처에 대하여 아파할 수 있습니다.
상처는 누구나 가질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다른 마음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아파하면 상처가 있나보다 생각하세요.

    대신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be of the same mind in the Lord)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3] 우리의 상처를 꽃처럼 아름답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무슨 엉뚱한 이야기냐고요?

    복효근의 작품에 '상처에 대하여'란 시를 한편 소개해 올립니다.
                                                                                         
오래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 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 향기가 괸다]
오래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 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 향기가 난다]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 향기가 괸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 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

    [잘 익은 상처에선
    꽃 향기가 난다]

    아름답지요?

    나의 상처든 상대의 상처든 아프게 마련이지만 상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내 상처를 유일한 고통으로 바라보면 그 상처를 건드리는 순간 폭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꽃을 닮은 내 상처
꽃 향기가 고이는 형제의 상처를 존중할 줄 안다면 우리는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4] 같은  마음을 품고 싶을 때는
주 안에서 [주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하나님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까지 주신 마음이 있습니다.
아플 때, 상처가 다쳐서 너무 아플 때,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주님의 마음을 품어 보십시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서로 주님의 마음을 품을 때 같은 마음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성도에게 같은 마음을 주기 원하십니다.

 

    5]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에게 관심을 가질 때 같은 마음이 생깁니다.

    골대를 향해 달려가는 선수들은 상대방에 대한 관심을 갖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골대를 향해 달립니다.

    우리는 서로의 다른 심장을 가지고 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주 안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사랑할 일입니다.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고 호흡을 맞출 일입니다.
기질이 다릅니다.
삶의 스타일도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대방에 관심을 갖고 그의 특성을 고려하면서 는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5] 경청하세요. 같은 마음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은 상대방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같은 마음은 자신의 존재를 내려놓고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은 상대방을 듣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같은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같은 마음은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 자의 마음입니다.
같은 마음은 상대방을 향해 열린 마음입니다.
같은 마음은 상대방을 품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같은 마음은 상대방 안에서 자신을 찾는 마음입니다.

    [빌립보서 2: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6] 같은 마음은 서로를 존경할 때 이루어집니다.

같은 마음은 상대방을 존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같은 마음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마음입니다.
같은 마음은 상대방을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같은 마음은 끝까지 믿고 기다려 주는 마음입니다.



    3. 믿음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종의 멍에를 매고 사역하는 사도 바울
그와 함께 종의 직분을 감당하는 동역자
모두 주님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경우, '복음 전파 사역에 바울 사도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지 않았습니다.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바울 사도의 동역자들을 돕지 않았습니다.


    1] 낮은 자 리에서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디아코니아와 어원이 같은 ‘디아코노스’(diakonos)는 후에 집사를 가리키지만 고대 어법에서는 ‘웨이터’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문화의 기원을 공동 식사의 업무에서 찾기도 합니다. 집사들은 웨이터들이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교회의 사역자를 종종 ‘종’(doulos)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섬길 일이 교회에서만이겠습니까?
지역사회를 섬겨야 합니다. 봉사에 참여할 일입니다.

    척 스윈돌 목사님께서 그분의 설교에서 인용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 레오날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되자 그를 좋아하는 팬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번스타인 선생님, 수많은 악기 중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악기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재치 있는 말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제2바이올린입니다. 제1바이올린을 훌륭하게 연주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1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과 똑같은 열의를 가지고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은 참으로 구하기 어렵습니다. 프렌치 호온이나, 플롯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1연주자는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 줄 제2연주자는 너무나 적습니다. 만약 아무도 제2연주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음악이란 영원히 불가능하지 않겠어요?”


    2] 조연을 기쁘게 감당할 일입니다.

      무대 뒤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조연자로 섬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연은 주연 못지않게 연극이나 영화에서 중요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모든 사람은 위대해 질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섬기기 위해 학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신분이 요청된 것도 아닙니다.
섬김을 위해서는 예수님을 닮은 섬기는 마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3] 영적 자녀는 동역 속에 태어납니다.

    펭귄이 새끼를 낳기 위해 교미를 하고, 그 후에 알을 낳고, 알을 낳은 후에 알이 부화하는 모든 과정을 담은 영화였습니다. 한 마리 펭귄이 이 땅에 태어난 후에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보여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펭귄은 바다에서 살다가 일 년에 한 번씩 그들이 본래 태어났던 아주 추운 장소로 새끼를 낳기 위해 찾아갑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짝짓기를 합니다. 서로 짝짓기를 하면 일 년 동안 그들은 부부가 됩니다. 우리가 볼 때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들 모두는 다릅니다. 펭귄에게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고, 그들만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들만의 구별법이 있습니다. 그들은 짝짓기를 한 후에 한 번의 사랑을 나눈 다음에 암컷이 알을 낳기까지 기다립니다. 알을 낳기까지 그들은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몸 안에 저장해 두었던 음식으로 생존합니다.

  알을 낳은 후에 암컷은 그 알을 수컷에게 조심스럽게 넘겨주고 음식을 먹기 위해 바다로 떠납니다. 암컷이 음식을 먹으러 바다로 떠나는 이유는 그가 알을 낳기까지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낳은 알이 부화하면 그 새끼에게 음식을 먹이기 위해서입니다. 엄마 펭귄이 바다로 떠나 있는 동안 수컷은 그 알을 품고 몇 주를 지냅니다. 그때 수컷은 자기 체중이 반으로 줄어드는 고통을 감수합니다.
    마침내 알이 부화하면 수컷은 새끼를 위해 자신 안에 남아 있는 거의 마지막 음식을 토해 내서 새끼에게 먹입니다.
   그 무렵 엄마 펭귄은 음식을 몸에 지닌 채 돌아와서 새끼에게 음식을 토해 내어 줍니다.
    엄마 펭귄이 돌아오면 수컷은 음식을 먹기 위해 급히 바다로 떠납니다. 급히 수컷이 바다로 떠나야 하는 이유는 알을 부화하기까지 소모된 체중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조금만 더 지체하면 탈진해서 바다까지 나가지 못한 채 지쳐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펭귄이 한 마리 새끼를 재생산하기 위해 이토록 엄청난 값을 지불하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무엇보다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부부가 동역하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펭귄보다 엄청 큰 사랑을 받고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가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는지..........    .

    그런데 펭귄에게서 배운 지혜 가운데 가장 소중한 지혜는 펭귄은 결코 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펭귄은 항상 떼를 지어 움직입니다. 펭귄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지게 되면 외로워서 죽고, 추워서 죽게 됩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죽게 됩니다. 펭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펭귄은 그 추운 겨울, 수개월 동안 밤이 계속되고 혹독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 그 추위를 견디기 위해 서로 몸을 맞대어 체온을 유지합니다.


    4] 교회는 동역자를 돕는 기능이 살아 있어야 건강합니다.

    선교사를 도와야 교회답습니다.
이웃 교회를 도와야 합니다.
이웃 목회자를 도와 믿음의 동역을 해야 합니다.
연약한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20세기에서 강조되던 교회의 이미지는 ‘종’입니다. 1966년 강림절에 보스턴의 쿠싱(Cushing) 추기경은  ‘종으로서의 교회’를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타자를 위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교회도 역시 ‘타자를 위한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즉 고난받는 종이어야 하며 따라서 종된 교회가 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마무리하는 말]

    [빌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 62: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무엇을 기뻐하라는 말씀일까요?

    1] 주 안에 서기를 기뻐하라는 말씀이지요.
    2] 같은 마음 품기를 기뻐하여야 합니다.
    3] 믿음의 동역자를 돕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명령형입니다.
    반복 명령형입니다.

    이런 일은 십자가를 지는 아픔과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도들이 갖는 기쁨은 맹목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세상의 고통을 충분히 통과한 기쁨입니다.

    우리는 서편제란 영화에서 고통을 통과한 기쁨을 봅니다.

    영화 마지막 부분, 아버지의 임종하는 장면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의 눈을 멀게 한 것을 알았느냐?”
“네, 알았습니다.”

   딸은 아버지가 자신을 훌륭한 소리꾼으로 만들기 위해 눈을 멀게 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서글픈 명창의 소리는 이렇게 탄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보다 큰 고통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보다 우리에게 큰 기쁨은 없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외치시는 그 고통 속에 피어난 기쁨을 주님은 우리가 소유하기 원하십니다.

주 안에 서서
같은 마음을 품고
동역자를 도움으로

   이런 기쁨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 안에 설 때
같은 마음을 품을 때,
믿는 동역자를 도울 때,  기쁨이 넘칩니다.


    "기쁨은 근육과 같아서 단련하면 단련할수록 더 강해진다."

   
    1] 주 안에 섬으로
    2] 같은 마음 품음으로
    3] 믿음의 동역자를 도움으로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본문]

[빌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