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26 March 2015

벧전4:12-19 고난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이 가질 마음

[들어가는 말]

알제리와 모로코에서 사역하는 김범규 & 임경원 선교사로부터 지난 주간 이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알제리 남부지역에서 테러가 발생, 외국인 인질극, 50여명 가까운 외국인이 사망 실종되었습니다.
양노원, 고아원, 장애인 쎈타는 계속 돌보고 있지만 2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청각 장애자 학교는 가는 길목에 군경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외국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답니다.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며 무엇보다 여러분의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런 극단적 이슬람 세력으로 인한 기독교 적대국에서의 위험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의 위험은 우리 가까운 곳에서도 상존합니다.

지난해 6월 갤럽에서 조사한 미국 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사상 최저치인 44%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1975년 68%와 2001년 60%와 비교하면 현저하게 추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가 세속주의 쓰나미 앞에서 수많은 약점들을 노출하고 시대의 영향력에 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나리서치, 2013년 세해를 맞는 미국인들이 받는 유혹대상과 죄악 설문조사를 미전역 18세 이상 성인 1,021명을 무작위로 선정해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과식”이 1순위로 55%의 미국인들이 먹거리 앞에서 항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조절하거나 먹고 싶은 충동을 제어할 수가 없다고 응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나이 든 세대일수록 먹거리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고, 젊은 세대일수록 성적 유혹 앞에서 갈등을 벌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인들의 전통적인 죄들 즉 “과소비”는 35% 정도가, “험담이나 뒷담화”가 26%, “질투”가 24%, “거짓말”이 12% 그리고 “알코올/약물 중독”에 11%의 미국인들이 벗어나고 싶다고 응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죄들에 인터넷이나 SNS을 통한 첨단 기술의 유혹 등이 더해집니다. 새해 첫 시작을 “되도록이면 미디어나 SNS, 이메일에 빠지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는 미국인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즉 첨단 기술에 관련된 유혹에 맞서는 결단을 하는 미국인들이 거의 과반수에 육박하는 44%들이 갈등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면팔방에서 사탄이 현대 기독교인을 향해“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며 융단폭격을 하는 양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고난을 우리에게 오는 불시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 고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까?



1.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벧전4:12]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 불시험은 우리를 연단하려는 시험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의로운 사람이 시험을 당하면 더욱 견디기 힘이 듭니다.
불시험을 당하기라도 하면 이해가 안되어 당황합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당하였습니다.
요셉이 시험을 당하였습니다.
나오미가 시험을 당하였습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시험을 당하였습니다.

누구나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용장도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가져야 할 마음은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 주시는 테스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풀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풀기가 쉽지 않을 뿐, 이상
히 여기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이 모든 테스트가 좋아하지는 않지만 유익함으로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연단하려고 주시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2]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려함입니다.

[벧전4:1-2]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삼손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민족을 구원하는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의 길로 갔습니다.
육신의 정욕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불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수 차례의 기회를 놓친 삼손은 마침내 불시험 속에 떨어집니다.
그는 눈이 뽑히고 머리를 잘리우는 치욕을 당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죄를 그쳤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됩니다.

삼손이 불시험을 당하여 눈이 뽑히고 치욕적인 노예로 전락하게 된 것은 그의 인생 전체로 볼 때, 가장 다행스런 사건입니다.



2. 불시험은 즐거워할 일입니다.


1]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복이 있는 자’라니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불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만 시험 장에 팽개쳐두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믿음과 심지가 굳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단3:16-18]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러나 그 믿음에 출중한 용장들이 풀무불에 던져지는 불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풀무불 속에 떨어졌을 때, 또 한 분이 함께 그들의 곁을 거닐며 지키고 있었습니다.

[단3:22-25]
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불시험을 즐기라면 이상히 여기시겠지만, 시험을 즐기는 사람이 시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자신의 즐거움을 충족시켜 주는 세속주의 물결이 거셉니다.
이 시대는 그런 세속적 즐거움을 동경하고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물결로 출렁대고 있습니다.
음식이 맛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거리를 불문하고 달려갑니다.
경치가 좋다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립니다.
감각을 충족시키는 영화나 동영상에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즐기는 사람은 세상과 함께 침몰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세상을 즐기다가 유황불 심판에 떨어졌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을 따르다가 홍수 심판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권면합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나의 즐거움을 충족시키는 삶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삶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명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불시험을 당할 수 있지만,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절] 말씀처럼,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하십니다.
사랑을 주시다가 십자가에 고난 당하신 주님처럼 불시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 하십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기 때문입니다.


2] 그분 영광을 나타내실 때 갑절의 즐거움에 참여케 하십니다.

[벧전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2011년 봄에 미국에서 출판되어 복음주의권에 큰 충격을 줬다는 랍 벨 목사의 저술, ‘사랑이 이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천국은 저 ‘위’에 있고, 지옥은 저 ‘아래’ 있는가?
복음은 단지 ‘천국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문제인가?

랍 벨 목사는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은 그렇게 작지 않다"며 사랑의 하나님 입장에서 천국과 지옥을 해석합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모두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개념으로 정의했습니다. 천국의 경우 현재적이며 영원한, 강렬하면서도 실제적인 기쁨과 평화, 사랑의 경험이라고 정의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죽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된 지금 삶의 질과 생명력이라는 것입니다(p.59).

[벧전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현재가 비록 뜨거운 불시험 현장일 수 있지만, 믿음을 잃지 않고 뜨겁게 서로 사랑할 때, 우리에게 천국은 현재부터 시작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럼 지옥은 어디로 보는 것입니까?

롭 벨 목사는 신구약에 등장하는 ‘스올’ ‘게헨나’ 등의 단어를 비롯해 예수께서 12번이나 사용한 지옥(hell)을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는 입장에서 분석합니다. 지옥 역시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르완다의 대량 학살, 마약 중독과 살인 사건, 종교·정치적 편견으로 인한 박해, 인간관계에서의 상처 등. 그렇다고 그가 사후의 지옥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택을 주셨다 합니다. 우리가 사랑과 은혜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싶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이지요. 지금이라도 그에게는 하나님 없는 삶, 그것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없는 삶, 사랑과 상관 없는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지옥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2011년 영미 기독교 최대 화제작 [사랑이 이긴다]에서 랍 벨이 주장한 내용의 핵심입니다.
그는 내세의 지옥보다 현실의 지옥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에 열광하는 것은 그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그의 주장에 무리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싶은 것은 지옥과 천국은 내세에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연속선상에서 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너무 힘들지만, 사랑을 주시다가 십자가에 고난 당하신 주님처럼 불시험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절] 말씀처럼,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십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기 때문입니다.

곱절의 즐거움, 곧 천국이 현재 속에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우선, 근래 기독교적 표현들은 너무 피상적이고 얇게 보입니다. 그래서 미국 기독교는 3,000마일 넓이에 1마일 깊이를 가졌다고 평가하는 분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을 가지고, 다양하게 접근하지만,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언론이나 미디어가 유능한 크리스천 리더들의 도덕적 몰락이나 스캔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3)번영의 얄팍한 복음이 설교 강단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를 재정적으로 부유하게 하셨다”이는 달콤하지만 분명 복음과 다릅니다.

4) 동성애를 하면서도 동시에 예수를 따를 수 있답니다. 지구촌에 전염병처럼 전파되는 다른 복음입니다.
현대인들이 믿고 싶어 하고 따르고 싶어 하는 철학이 복음처럼 선포됩니다.
5) 예수님께서 나를 변화시켰다고 설교하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나에게 권한이나 권능을 주셨다고 선포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실수를 전하며 자신을 찾아와 변화시키고, 사람 낚는 어부로 파송하셨음을 전합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자신의 깡패 시절을 회개하며, 예수님이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가는 곳마다 전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교인들은 어떤 곳에 몰립니까?
우리도 좀 속을 후련하게 해주는 강사를 모시자는 요청을 받습니다.

6) 교회를 기업처럼 운영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현대인들의 눈에는 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는 운동이었고, 그리스에서는 철학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문화였고, 미국에서는 기업이 됐습니다.

7) 기업 원리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됐고, 대형교회 목회자는 CEO 역할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8) 하나님의 도움이나 간섭을 원하지 않는 자력형 크리스천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하고 단호한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하나님의 이미지를 부드럽고 아름답게 윤색하여 많은 사람들의 호의와 환심을 사려 하는가 합니다. 심지어 모든 이가 천국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는 것처럼 만인 구원론을 말합니다.

9) 목회자들이 섬기는 청지기로 불리우기보다는 군림해 인기에 연연하는 목회자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10] 우리가 만들고 다듬어낸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질문할 때, 그것은 믿음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자기를 정당화하고 자기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인가?를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욥과 하박국의 의심이나 항변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세세히 응답해주시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질문을 할 권리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야 할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그것은 아주 낯설고도 불친절한 반응인 듯 보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대에게, 그들의 입맛에 맞추어 대충 신학을 개작하고 복음을 재정의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 잠잠할지니라 선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욥38:1-4]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벧전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3.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욥은 하나님께서 연단하려고 주시는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욥1:21-22]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인생 길에서 이해 난망인 사건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사건, 이것은 당사자 입장에서 볼 때, 너무 황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따집니다. 수군거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생각은 너무 간단합니다.

[요9:3]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오늘 본문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십니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 자서전에서 고백한 내용을 거울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든 인류 문화사에서의 유일한 장소, 곧 죄와 용서, 속박과 자유, 갈등과 평화, 죽음과 삶 같은 궁극적인 신비들을 다루는 결정적인 장소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예측할 수 없는 것과 수수께끼 같은 것이 많이 있지만 내가 아무리 비틀거리며 걷더라도-지난 50년 동안 거듭해서 경험했듯이-바로 그 십자가로부터 나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고, 그 불빛을 받아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인도하는 그 별이 계속 거기에 있을 것이며, 죽음과 종말에 이를 때까지 줄곧 빛을 비추어 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불시험 속에서,
고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고
결국 인생의 중심 추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마크 갤리는 ‘하나님이 이긴다’라는 책에서 복음의 본질에 대해 언급하며 현대 복음주의가 간과하는 문제들을 명확하게 짚어냈습니다. 마크는 <사랑이 이긴다>에서 제시한 사랑이 결국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며, 무엇보다 '정의'부분이 축소 혹은 왜곡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를 다 이루시는 분이시기에 사랑보다 더 큰 개념인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이 이긴다>가 보편구원론와 가까운 논리로 이뤄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축소된 사랑', '공의 빠진 사랑'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바로 오늘날 복음주의가 해결해야 할 중대 사안은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성경에 대한 축소주의(reductionism)입니다.
현대 문화와 세계관이 강요하는 자기만족과 자기사랑은 교회로 하여금 선포하고 따라야 할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해왔고 그 결과 복음의 본질이 주변으로 밀려나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됐으며 비본질적인 것들이 본질을 대체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복음주의는 강점보다는 약점이 더 많은 기형 현상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복음, 사람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기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기대 속의 하나님일 뿐 실재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근사하게 전하는 것보다는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속성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들 즉, [사랑이 이긴다]가 강조하는 사랑과 인내와 온유하심 등 만을 골라 취하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에 대한 인류의 모든 불안은 단 하나의 질문,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인류를 대신하여 하신 그 질문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고뇌하는 우리의 모든 질문은 바로 이 질문으로 모아집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정말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질문을 제기하실 때 우리가 그분의 성품에 대해 추측하도록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계시하십니다
훨씬 더 온전하시고, 풍성하시고, 깊으시고, 더 실제적이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에서 대신 고난을 당하시고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마땅한 지옥의 형벌을 대신 당하시는 사랑입니다.
쓴 잔을 대신 마시는 폭넓은 사랑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이해하고 접할 때,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게 마련이오, 그 고난을 받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승리 위에 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며 그 영혼을 미쁘신 하나님께 의탁하라.


[마무리하는 말]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가서 잡아 제사로 드리라는 시험을 당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이상하게 여기는 것 대신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창22:11-18]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요셉은 하나님께서 연단하려고 주시는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불시험!

요셉에게 이 시험은 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그에게 꼭 있어야 할 축복의 과정이었습니다.


1.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1] 불시험은 우리를 연단하려는 시험입니다.
2] 불시험은 하나님의 꿈을 담은 테스트입니다.


2. 불시험은 즐거워할 일입니다.

1]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십니다.
2] 그분 영광을 나타내실 때 곱절의 즐거움에 참여케 하십니다.

3.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경본문]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