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들어가는 말]
오늘 말씀은 '그러므로'라는 인과 접속어로 다리를 건너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그러므로'라는 접속어를 따라 다리를 건너면서 끝이납니다.
앞의 다리는 앞에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란 원인이 있으므로 그 결과 우리가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의 다리는 이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요약하면 예수님 그분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1. 우리 성도에게는 큰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14절]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 우리의 큰 대제사장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사람의 영혼과 신체를 그리고 마음과 생각 뜻까지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그 앞에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2] 우리의 큰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전능하심 앞에서 외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3] 우리의 큰 대제사장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다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시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14절)
대제사장이란 백성들의 죄의 문제, 절망적인 어떤 일이 있을 때 대신 하나님께 간구하는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중에서 가장 큰 비교할 수도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은 성막 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2.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시기에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히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2]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유일한 선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제사나 율례를 지키는 것을 믿음의 도리르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아론 반열에 선 대제사장들을 통해 드리는 제사를 믿음의 도리로 생각하였어요.
그러나 우리의 큰 대제사장은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 반열에 선 어떤 대제사장들보다 우월하십니다.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이 땅의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지고(至高)한곳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시므로 그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사역의 탁월성을 소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성을 소유하셨습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유한성을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신,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이 예수님은 하늘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지고(至高)한 곳으로 올라가셨습니다.
3.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갈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큰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습니까?
1]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연약함과 시험을 감당하신 능력자이십니다.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개역 한글 성경에는 15절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15절)
구유에 태어날만큼, 가난한 목수로 살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살점이 찢어지도록 채찍에 맞아 본 분이 있습니까?
침 뱉음을 당하는 조롱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고통에 해당하는 고통을 당해보신 분이 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시험을 다 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아픔과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1]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십니다.
'연약함'은 죄의 유혹에 대한 인간의 연약성입니다.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인간과 동일하게 연약함을 느끼십니다.
'체휼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인간성에 참여하셨기 때문에 능히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2]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같이 되셔서 인간들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경험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돕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셨으나 인간과는 달리 흠이 없으시며(9:14) 지상의 성막에서 제사드리는 대제사장과 같이 자신의 죄를 위해 제사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었습니다(7:27).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인간들처럼 시험에 넘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극복하심으로 범죄하지 않으셨으며 시험을 인간과 동일하게 받으심으로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시험의 어려움을 낱낱이 아십니다.
[3] 죄는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죄의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범죄하시지 않았습니다
2]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때 받는 은혜가 있습니다.
[16절]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와 백성, 음란이 행하는 자, 교만한 자, 감사하지 아니하고 불평 불만만을 말하는 자, 자기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자 등은 긍휼히 여기지 아니합니다.
호 2:4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겔 7:4 "내가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보다도 더 큰 은혜와 긍휼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해결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두 소경이 따라가며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냥 지나치셨습니까? 아닙니다. 손으로 그들의 눈을 만져 주셨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이 소경처럼 예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란 말속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고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을 다 포함하여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우리가 필요할 때 언제나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에 우리는 언제나 나와 우리의 소원을 기도로 아뢸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계속하여 드리는 기도가 응답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자였고 하나님도 욥을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고난이 닥쳐왔고 그 때마다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였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고난의 파고 점점 더 엄청나게 밀려왔고 아내 친구들마저 그를 외면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하나님을 처절하게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욥은 절망 중에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욥 23:1-9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여러분들 중에도 이러한 기도의 경험이 있으신 분들도 계신 줄 압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더 큰 은혜로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욥이 후에 갑절의 복을 받은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3]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때,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긍휼 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면서도 때에 따라서 우리는 망설이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여 주실까? 움츠러 들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돈을 세상에서 탕진하여 버린 아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며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눅15:16-20a]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는 담대하게 아버지께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아버지는 그를 어떻게 맞아 주셨습니까?
[눅15:20b-24]
20b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후 방탕한 세월을 보내는 그 동안 내내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돌아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 아버지가 달려나와 둘째 아들을 끌어 안습니다. 집안에 들어오게 하여 목욕을 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우고,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돌아 온 아들을 환영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마무리하는 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직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우리들의 죄 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품에 안기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천국의 모든 천사와 함께 여러분을 환영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를 아실 뿐만 아니라 시기 적절하게 베풀어주십니다.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이 현존해 계시는 장소로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상징적 장소인 성막 안의 속죄소와 연관됩니다(9:5;출25:21,Bruce). 대제사장들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안에 있는 속죄소에 나아갈 수 있었으며 속죄의 행위가 받아들여졌을 때 지성소 안에 있는 그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소(施恩所)가 되었습니다(9:5;레16:2-34).
그러나 본절에서 '은혜의 보좌'는 더이상 모세가 전해준 율법적인 속죄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우편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 좌정해 계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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