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15 March 2015

고전4:8-13 그리스도 때문에 - 건강한 교회 12

[들어가는 말]

     지난 한 주간은 여름성경학교가 계속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한 현장이 현실적으로 영적으로 교회 안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교회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사명과 임무를 다하였습니다.
교역자들
교사들
봉사자들
부모들에 이르기까지
너무 아름다운 봉사를 다하였습니다.
주일 아침에 보니 언제 전쟁이 휩쓸고 지나갔느냐 싶게 친교실은 깨끗이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책상들은 정돈이 되어 있고, 노란의자, 빨간 의자,  파란 의자, 색갈 별로 잘 정리된 서머나 레스토랑이 우리 교인들을 맞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참 아름다운 지체들, 일꾼 들이 모여 있구나 감사할  교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가문에 속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지요.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할 때, 하나님의 몸된 교회 지체답지 못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몸된 교회의 지체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분쟁과 시기를 하며 살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로 이런 지체들로 인하여 건강을 헤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쓰나미 앞에서 휩쓸려 가는 연약한 지체들을 어떻게 세우며 살아갈 수 있는가를 말씀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1. 함께 왕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고전4: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세상 모든 갈등이 어디서 옵니까?
내가 왕 되어야 한다는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정치적 모든 갈등이 그렇습니다.
내가 여당이 되고 왕이 내 지지하는 정당에서 나올 때와, 내가 야당이 되고 왕이 상대편 당에서 나올 때가 다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보았을 때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그들 삶은 모든 면에 있어서 풍요로움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풍요는 감사와 찬양으로 돌려지지 아니하고 교만의 근거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완성될 왕국을 바라보면서 긴장을 가지고 죄악의 요소들과 싸워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풍요(豊饒)와 배부름 속에서 즉 교만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말씀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벌써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함께 우리도 한번 왕 노릇을 해 볼 것이 아닙니까?'

왕이 되고나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다'는 구절은 무슨 뜻입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들이 지닌 영적 가르침이 사도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 왕 노릇을 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심은 분들이고, 복음으로 물을 준 사도요, 그 가르침 위에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 고린도교회에서 왕 노릇 하는 자들은 '그곳에서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함을 누리며 왕 노릇을 하는 지체들'이었습니다.
교회 터를 잡는 일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터 위에 교회를 견고하게 세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함을 누리며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즉 교만한 자들이 왕 노릇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 노릇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틈에서 일꾼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이렇게 답을 합니다.
8b를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 모두의 연약함을 감당하셨습니다.
바울 사도의 허물과 죄를 모두 감당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를 하나님 나라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 또한 하나님 나라의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시면 그들과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현재의 교만한 왕 노릇이 바른 것은 아니지만, 저들도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함을 받은 지체들이니, 장차 올 세상에서 사도들이 함께 왕 노릇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을 넘어가며 왕 노릇 하는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교만 속에서 만들어 놓은 스스로의 왕 노릇을 절제하기를 원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부요와 배부름은 자신의 곤고와 가련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어리석은 교만 속에서 만들어진 거짓 왕 노릇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유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과(고후 5:7) 어떤 불의한 환경 속에서도 자만하지 않는 겸손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 뿐입니다.




2. 끄트머리를 중요한 지체로 생각합니다.

[고전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 끄트머리는 세상에서 값있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생선도 끄트머리는 잘라서 버리는 것을 봅니다.

운동하는 사람들도 먼저 달려들어온 사람들은 왕처럼 영접하여 상을 주고, 메달을 주고 박수를 칩니다. 끄트머리에 달려 온 사람들은 가치없게 생각합니다.

학교간 실력을 알아보는 학력고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영화를 보니까, 그 학교에서는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학생을 쉬게 합니다. 시험을 치룬 학생 수에 들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도 끄트머리 인생들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나그네,
과부,
고아 등등,
다스리는 자와 거리가 먼 인생에 있어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해 있는 비천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풍요하게 하기 위해 끄트머리를 희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하나님은 끄트머리를 소중히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

하나님께서는 가장 충성되고 헌신된 바울 사도 일행을 하나님께서 끄트머리에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하시고 끄트머리 인생이 되셨습니다.
낮고 비천한 자리에 태어나셨습니다.

끄트머리 인생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세리와 창기와 같은 끄트머리 인생들, 낮고 비천한 자들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십니다.


[막10:45]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친히 비천한 자리에 찾아오심으로 낮은 자리에 처한 인생을 귀히 보시고, 끄트머리 인생을 존귀케 하셨습니다.

왕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끄트머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헨리 나우웬 박사의 위대한 저술은 끄트머리 인생을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어느 날 정신박약아 아담 군을 만났을 때,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지만, 내리막길에서는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인생의 끄트머리에 있는 정신박약아 아담 군을 만났을 때,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하여, 왕이신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였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나그네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한 시대의 온도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구호를 두고라도, 끄트머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늘의 소리를 제일 민감하게 듣고, 세상의 변화를 가장 빨리 알아차리는 사람들란 뜻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는 이런 끄트머리 인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일꾼의 사명은 이름 없이 낮은 자리,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 끄트머리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과 교회를 섬길 때, 교회는 건강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이 끄트머리 인생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다윗이 끄트머리 인생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압살롬과 아도니아와 같은 왕자들이 끄트머리 인생을 거부하다가 낭패하였습니다.

3] 바울 사도는 끄트머리 인생의 소중함을 이해하였습니다.

직접 주님을 따라 끄트머리 인생살이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끄트머리 인생길로 내려가고 내려가며 구경거리가 되는 자리까지 나아간 것이지요.

"구경거리가 되었노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었던 기독교인들이 원형 경기장(Colosseum)에서 맹수들에게 찢겨 죽어간 고난의 삶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구속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당시 어떤 고난 앞에서도 주님의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순교를 각오하는 삶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그 순교 대열에 올려놓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되어 마땅한 사도가 끄트머리가 되고, 자랑거리가 되어야 할 사도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3.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고전4:10-13]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1] 세상에서 가장 천한 것이 찌꺼기입니다.

요즈음 국가마다 찌꺼기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분쟁과 다툼 속에 있는 교인들이 방종과 안일 속에 있으면서도 서로 왕되려는 마음으로 시기하고 다툴 때,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찌꺼기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갖은 고난 가운데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자신의 '미련함', '약함','비천함'을 나열함으로써 앞 절에서 말한 구경거리가 구체적으로 자신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연고로' 바보가 되었으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세상 지혜와 경험을 소유함으로 마치 자기들만 지혜로운 자들인 것처럼 행세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세상 지혜에 대하여 무지(無知)한 자들이 되었습니다.1:17,21;3:18)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비천한 자같이 매맞으며 핍박을 당하는 자(11,12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에 지혜롭고 강하며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세상의 찌꺼기 같은 우리'의 소중함을 이렇게 말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4:13)"

이 말씀은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위 내용이 오늘날 소위 복음 사역자들인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이유는, 바울이 이 내용을 쓸 당시 정확한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너무 많은 세상의 애착들이 남아 있어서 우리는 만물의 찌꺼기가 되기를 스스로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서 거룩하게 될 때 누구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따로 구별된 자"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게 됩니다.

베드로는 "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을 당한 것같이 여기지 말라(벧전4:12)"고 합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을 이상하게 여긴다면, 이는 우리 마음이 겁으로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 시험을 피할 수만 있다면 약삭빠르게 빠져나갈 것입니다. "나는 복음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싶지는 않아. 사람들에게 굽히고 싶지 않아." 물론 당신은 얼마든지 복음을 위해 당신을 따로 구별하시는 하나님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당신은 "복음이 증거된다면 나는 이 땅에서 찌꺼기같이 대우받아도 상관없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하나님의 복음의 실체를 위해 순교할 각오를 한 자들입니다. 세상의 찌꺼기가 되는 것을 혹시 주님의 거룩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오해하고 살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그것이 오히려 주님이 기대하는 모습인 것조차 모르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요. 죄에 대해 죽었다고 선포한 입술의 고백과 인정은 순간의 기억이고 우리의 삶은 여전히 죄된 자아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의 정반대편에서 우리에게 손짓하십니다.


한국 초대교회 선진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찌꺼기 같이 되었습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요즈음 신세대 신앙인들 앞에서 우리 선진들은 무척 어리석어 보입니다.
주일을 성수함으로 시간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성실히 지켰고
십일조를 드림으로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고백했던 선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던 분들입니다.

강함을 자랑하는 자들 앞에서 약하였습니다.
존귀함을 자랑하는 자들 앞에서 비천하였습니다.
강함을 자랑하는 자들 앞에서 약하였습니다.
배부르고 풍성함을 복받은 것으로 자랑하는 자들 앞에서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었습니다.
말로 정체성을 찾는 자들 가운데서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합니다.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하게 되었습니다.
신체적인 박해를 참았습니다.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습니다.

사도가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을지라도, 그것이 찌꺼기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폐품 수집가(이중수 목사임 저서 ‘화가 복이 될 때까지’ 제 1편)란 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멸시하고 버린 인생들을 주님은 수집하신다. 주님은 폐품 이용(recycle)의 매니저다. 주님의 손에서 재생되고 회생되지 못할 폐품 인생은 없다. 당신은 버림을 당한 적이 있는가? 배신을 당하였는가? 쓸모 없는 자로 낙인이 찍혔는가? 주님은 당신을 찾아 나선다. 날마다 주님은 폐품 수집을 위해 나가신다. 하늘 아버지가 세상의 찌꺼기들을 모으라고 아들에게 명령하셨다. 아들은 주님의 뜻을 기쁨으로 행하신다. 아무리 더럽고 무시 받는 폐품이라도 주님의 손에 잡히면 몰라보게 새로워진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가치를 재발견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대상임을 알게 된다.

◐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버려진 폐품 인생이다.
◐ 주님을 배반하고 통곡하던 베드로는 폐품이었다.
◐ 선교 여행에서 탈락했던 마가도 폐품이었다.
◐ 밧세바와 동침했던 다윗도 폐품이었다.
◐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아브라함도 폐품이었다.
◐ 동생을 죽였던 가인도 폐품이었다.
◐ 뱀의 말을 들었던 하와도 폐품이었다.
◐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아담도 폐품이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들의 인격과 성품에는 죄악으로 물든 오염된 자국들이 즐비하다. 내 인생의 여러 곳에서 폐품들이 쌓여 있다.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폐품들이 나를 썩히고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찾아 나선다.

십자가는 모든 폐품 인생들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버려진 인생들을 재창조하신다. 사람들은 날마다 쓰레기를 버린다. 버린 쓰레기를 주우면 사람들의 눈에 귀하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쓰레기를 버리기는 원하지만, 버린 쓰레기를 줍기는 원치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버리는 인생 쓰레기들을 하나님은 줍기를 즐거워하신다. 하나님에게는 창피도 수치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날마다 인생 폐품들을 수집하러 나가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에 의해 내버려진 폐품 인생들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하나님의 작품 전시실에는 어떤 품목들이 전시되어 있을까?

걸작품만 전시되어 있다. 완전한 예술품만 수집되어 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하였다(엡 2:10). 어느 날 새 땅과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작품들이 온 만물 앞에서 전시된 날이 올 것이다. 그 때 천사들과 우리들은 놀라고 또 놀랄 것이다. 세상의 폐물들이 위대한 걸작으로 변화된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 걸작 중에는 나도 끼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의 주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적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3)고 말하였다. 세상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우리가 더럽고 우리가 만물의 찌꺼기들이다. 나 자신이 더럽고 또한 세상이 나를 그렇게 취급한다. 그러나 현재의 아픔과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 8:18).

그렇다면 우리들의 미래는 얼마나 밝고 복된 것인가! 새 날이 밝아 온다. 폐품들을 수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 안에서 우리들의 영광된 새 날이 밝아 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어떻게 된 것일까요?

강함을 자랑하였습니다.
존귀함을 자랑하였습니다.
배부르고 풍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랑이 달라져야 할 겁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4:13)"

주님 때문에 만물의 찌꺼기가 되는 것을 자랑합시다.
주님은 찌꺼기가 된 우리를 찌꺼기로 두지 아니하시고, 십자가로 깨끗게 하시고 재생하실 것입니다.

찌꺼기가 되는 일, 궂은일을 오히려 마다하는 고급 크리스천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영광의 날, 주님 때문에 깨끗케 하실 걸작으로 그 전에 세우실 것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는 주님 때문에 만물의 찌꺼기가 될지라도 그 삶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마무리하는 말]

어제 오후 설교를 준비하는데 어떤 분이 영상 한 편을 보내주셨습니다.

쓰나미 생존자 '마리아 벨론'

' cafe.daum.net/dm3179/9q2j/326

이 작품 속에서는 그 가족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지만, 저는 하나님의 가족의 소중함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가족입니다.

이 교회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1. 함께 왕 노릇 하기를 소원합니다.
2. 끄트머리도 중요한 지체로 생각합니다.
3.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을 위해 몸을 버리시고 우리를 그 가족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성경본문]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