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재산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따라 가면서 세가지만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집 두 채요
둘은 그 집에서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오.
셋은 심판 날에 각각 몸으로 행한 선을 따라 주님의 상을 받는 일입니다.
1. 성도는 누구나 집 두 채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고후5:1]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1] 한 채는 땅에 있는 장막집입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은 사람의 육체입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은 몇 분만 호흡이 공급되지 않아도 무너질 수밖에 없을만큼 연약합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은 70년이고 장수해보아야 100세를 넘기 힘든 유한하고 임시적입니다.
그래서 이 장막집이 무너집니다.
우리 인생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자연적으로 쇠합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장막집은 고난을 많이 당합니다.
질그릇과 같은 육신은 부서집니다.
고통의 날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인, 육체를 소중한 선물로 생각합니다.
성도는 땅에 있는 집,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에 살면서
이 땅에 있는 집으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따라서 성도는 땅에 있는 장막집, 곧 몸을 중시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땅에 있는 장막집, 곧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마땅한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에게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 육체가 아닌
또다른 집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고린도후서 5:8]
“차라리 몸을 떠나” 란 말은 바울이 빨리 죽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의 생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그가 홀연히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또다른 집에 살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고후5:2-3]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소망하였습니다.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한다”
당시 유대인들이 죽어서 육체를 떠난 영혼이 옷을 벗은 몸으로 음부에 존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왜 입니까?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전부가 아닙니다.
무너집니다.
그러면 그게 끝입니다.
아담이 장막집이 무너졌을 때 큰 낭패를 당했어요.
아브라함도 장막집이 무너졌습니다.
다윗도.
그래서 성도는 소원이 있습니다.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땅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에 참여하는 성도이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받아 그의 영혼이 부활의 몸을 덧입기를 소망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집은 누가 마련하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14:1-3]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이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요14:5-6]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어떻게 이 길로 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대신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나대신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로 하늘로부터 온 집에 살게 하시려 사망에 삼킨 바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생명이 죽음을 삼킨 사건입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심
우리를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이제 죽어야 할 우리의 운명이, 즉 썩어야 할 우리의 몸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사망의 힘들은 근본적으로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죽음을 삼켰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죽음이 지배하는 오늘과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종말을 봅니다.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라
[고후5: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죽음은 생명에게 삼키게 됩니다.
Centennial Park(센테니얼 공원)에 가면 공원 한 중앙에 스키장으로 쓰임받는 높다란 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산은 원래 없었어요.
쓰레기를 그곳에 쌓았던 것인데 지금은 그곳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나무가 우거지고
공원의 상징처럼 우뚝 산모양으로 서 있습니다.
쓰레기더미가 푸른 산에게 삼키게 된 것이지요.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지면 그 죽음은 극복됩니다. 큰 생명 사건 안에 죽음이 들어가요.
우리의 삶은 오히려 죽음의 힘에게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낙심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 뜻하지 않은 사고나 질병으로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에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쉽게 파괴되고, 우리의 마음도 쉽게 낙심됩니다.
생명이 죽음의 능력을 완전히 제압하는 일은 종말론적으로 가능합니다. 생명이 죽음을 삼킨다는 바울의 진술도 정확하게 보면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게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은 오늘의 현실에서 그것을 기다리고 희망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미 역사 안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현실로 적용되는 건 종말에서 가능합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죽음의 힘들이 이미 종말론적 부활의 영에 의해서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7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령한 몸을 덧입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믿음에 담대함을 갖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갈망하였습니다.
2]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입니다.
[고후5:1]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
하늘에 있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입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과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었기에 죽음의 고통까지도 감당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전혀 새로운 영적 시각으로 죽음의 문제를 뚫고 나갑니다.
성도에게는 ‘하늘의 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워 주시는 집입니다.”(5b)
하늘의 집을
어떻게 덧입을 수 있을까요?
옷과 비슷합니다. 하늘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썩게 될 옷 대신 썩지 않을 옷을 입는 것과 비슷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도움을 받습니다.
[고전 15:53-55]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우리가 사는 집은 쉽게 썩고 낡아집니다.
인간의 육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라질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땅의 장막집인 육체가 썩어 없어진다 해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영원히 썩지 않을 부활의 몸을 덧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5:49-52]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생명이 죽음을 삼켰습니다.
죽음이 이미 생명 안으로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땅에 있는 장막이나 하늘에 있는 집 사이의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제 우리 성도의 죽음과 삶은 전혀 새로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몸을 이미 생명이 껴안았습니다.
2. 주와 함께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고후5:8-9]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햄릿에서 그 유명한 명언을 남깁니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오늘날까지 이 말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회자되는 것은 공감대를 얻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 근본적인 고민은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가 아닙니다.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죽음이란 우리 성도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라고 말씀하십니까?
“주와 함께 있는”!것이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
“주와 함께 있는”!것이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 근본 문제입니까?
건강한 성도는 나를 창조하신 주
나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가장 우선 순위에 둡니다.
건강한 성도는 주께서 몸에 있게 하시면 몸 안에서 주를 어떻게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몸을 떠나게 되면?
건강한 성도는 몸을 떠날 때도 어떻게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성도 인생목적을 잘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확증해 주십니다.
성도가 어떤 존재입니까?
“주와 함께 있는”!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주와 함께 살면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란 존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주와 함께 있는”!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인생의 목적이 되는 존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 영광을 덧입는 성도,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게 그 목적은 동일합니다.
“주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에 참여한 성도의 삶의 목적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 됩니다.
에녹은 이 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 헌신된 믿음의 조상입니다.
300년을 “주와 함께 있던” 에녹은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이 죽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까닭이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음부에 벗은 자로 나타날 우리가
생명을 덧입고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명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로 인해서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몸이 생명을 얻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요,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의 권세가 근본적으로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죽음을 삼켰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오
주를 기쁘시게 것입니다.
그들을 위한 봉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오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일이 왜 중요합니까?
주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가 죽어서 주를 맞이하든지 살아서 새롭게 변화된 몸으로 주를 맞이하든지 속히 그날이 오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일입니다성도는 육의 몸을 입고 있는 목적도 주님을 성전에 모시고 함께 살면서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당하는 모든 환난을 견디어 내는 목적도 주님의 기쁨을 위함입니다.(4:8, 9)
장막을 벗어 버리고 주님과 함께 있을 소망을 입는 목적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빌 1:20-21]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사도 바울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속히 주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이란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의 뜻 앞에 철저하게 자기를 맡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소망하는 바울이었기에 언제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에 힘썼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바울의 삶의 목표는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환난을 견디어냈고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자신을 종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니다.
3.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고후5:10]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최후의 심판을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마 25:31, 32; 롬 14:10) '그리스도의 심판'으로 표현된 것은 이 심판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다.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최후의 심판대는 우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을 구분하는 자리입니다(마 13:36-43;25:31-46;살후 1:6-10).
하지만 그 심판은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그들이 받을 상의 크고 작음을 가리는 자리입니다(롬 14:12; 살전 1:3).
사도 바울을 비롯한 성도들이
장막에 살던 떠나 살던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이 심판 날 상 받을 일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하는 것들은 늘 치우칩니다.
교회 안에도 그렇습니다.
헬라파가 있으면, 히브리파가 있습니다.
바울이 있으면 바나바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참 여러 가지입니다.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습니다.
상급을 받는 기준 가운데 중요한 요소가
각각이오
선이냐 악이냐요
선한 일이라도 몸으로 행한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몸으로 선한 것이 유효하다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말 한 마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마 25:21]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마무리하는 말]
한 젊은 피아니스트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됐습니다. 잘 훈련된 그의 손가락을 통하여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올 때, 청중은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마지막 음이 사라지자 청중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우뢰와 같은 박수를 터뜨렸습니다.
그런데 맨 앞줄에 앉은 한 노인만은 예외로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그걸 보자 피아니스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무대감독은 그의 연주를 칭찬했습니다. 그때 그 젊은이는 “전 잘하지 못했습니다. 실패한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무대감독이 말했습니다. “저 청중을 보세요, 한 늙은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어서 있지 않습니까?” 젊은이는 침통하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저 노인이 저를 가르친 나의 선생님이십니다.”
이 피아니스트가 자기 스승의 칭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칭찬을 갈망했습니다.
우리 성도의 재산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장막입니다.
장차 입을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입니다.
이 처소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일로 심판 날에 주님의 상을 받는 일입니다.
모든 성도는 이 순서를 따라 살아요.
장막생활과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생활
주님과 함께 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주의 재림 때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 간에 행한 모든 것을 보응을 받게 되는 것으로 영생에 들어갑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은 육신의 죽음 때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이 무너질 장막 집에서 주님과 함께 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다
심판 날에 상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성경본문]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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