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늘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도 조용한 시간에 앉아서 한 해를 돌이켜 보는데 다가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21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였나이다.
운전을 돌아볼 때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몰려오는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옛사람에 속한 것들이 우리를 많이 괴롭힙니다.
우리는 이 중요한 시점에서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 문제의 본질을 살펴보고, 새로운 지평을 믿음 안에서 열어 가는 지혜를 받기 원합니다.
1. 우리에겐 이전 것이 있습니다.
(15)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者)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自身)을 위(爲)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者)를 위(爲)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자신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우리가 '이전 것'이었을 때, 삶의 목적은 자기자신이었습니다.
(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肉體)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肉體)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이전 것 안에서 살던 그때에 나란 존재는 모든 일을 육체대로 생각하였습니다. 육신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까지 육체대로 생각하였습니다. 4대 성인 정도로 생각하였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인간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교회나 목회자나 성도들을 또한 인간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전 것'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지체)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주님과의 관계, 교회 각 지체간에 관계가 어긋납니다. 마음이 갈라집니다. 지체간에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교회가 건강을 잃게 됩니다. 교회는 자신의 내부 문제로 인하여 골머리를 앓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전 것에 속할 때 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전 것 안에서는 목적과 존재와 직분이 실종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전 것'이 유난히 강하게 역사하던 교회였습니다.
복음은 세상 지혜와 철학으로 오염되었습니다.(고전1장)
목회자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고전3장)
분쟁이 있었습니다.(고전4장)
근친상간 등의 음행 문제가 있었습니다.(고전5장)
성도간에 송사가 있었습니다(고전6장)
우상 제물로 식사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고전8-10)
예배드리는 데에서 여성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나 방언, 예언을 하는 문제 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고전11장-)
우리가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우리 곁을 스쳐간 몇 가지 문제들을 점검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 것'에 속하였기에 삶의 목적, 존재의미, 사명감을 잃고 살았지 않은가를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은혜 아래서 옛사람에 속한 것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기도제목을 찾게 됩니다.
C. S. 루이스의 '단순한 기독교 신앙(Mere Christianity)'이란 책에는 한 가지 죄에 관하여 수수께끼 같은 글을 적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죄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속박하고 있는 죄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 죄를 다른 사람에게서 볼 때 진저리를 친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이 죄가 자신을 얽매고 있음을 깨닫지도 못하거니와 그 죄를 고백하는 것을 보기란 불가능하다. 그들 스스로 성질이 고약하다거나, 주색잡기 등을 죄로 고백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가 가진 이 죄를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싫어하는 지, 믿는 자도 스스로는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정이든 국가든 일어난 참상의 대부분은 이 죄로 인하여 일어난다.
다른 어떤 악들은 사람들을 한데 묶어주기도 한다. 술 취하는 죄를 저지른 사람 사이에서도 때로는 좋은 친교가 있다. 부정한 죄를 저지른 사람 사이에서도 우정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죄는 사람에게든 하나님께든 늘 적대감만 유발한다.
이 죄를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당신의 위에 있는 어떤 것을 볼 수도 없다.
이 죄는 영적인 암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혹은 만족 혹은 상식의 근원을 먹어치운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죄는 다름 아닌 교만 혹은 자부심이다........... .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이전 것에 빠져서 삶의 목적과 존재의미와 사명을 잃고 공허한 인생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죄가 얼마나 우리를 황폐하게 하였는가! 이걸 아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지평이 되십니다.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世上)을 자기(自己)와 화목(和睦)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罪)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和睦)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付託)하셨느니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넓은 바다에 가보면, 까마득한 지평선이 보입니다. 그 너머에 분명히 무엇이 있을 텐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큰 영향력을 미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지평선 너머의 것은 더 이상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기독교인에게 '이전 것(옛사람)'이란 바로 지평선 너머의 세계와 같습니다. 과거 속에 존재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 옛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화목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역사의 화목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교회의 화목이 되십니다.
우리 가정의 화목이 되십니다.
우리 성도 개개인의 화목이 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이전 것과 새 것을 나누는 지평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도 우리의 '이전 것'을 지평선 너머로 지나가게 하시는 새로운 지평이 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맞게 하시는 소망의 지평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관계도 회복할 수 있는 화목제물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 곧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이전 것(옛사람)'에게서 찟기고 나뉜 관계들은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지평을 여시기 위해 세상의 화목 제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적과 존재의미와 사명의 기초가 되십니다.
3. 우리는 이 화목의 대사입니다.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自己)와 화목(和睦)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和睦)하게 하는 직책(職責)을 주셨으니
세상의 화목 제물로 오신 예수님께서 성도간에도 화목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요일2:2).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것처럼 성도와 성도 사이에서도, 그리스도는 화목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1] 인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저희 자신(自身)을 위(爲)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者)를 위(爲)하여 살게 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아왔던 우리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으로 그 목적이 변화한 것입니다.
2] 삶의 존재의미가 달라집니다.
새로운 피조물(被造物)이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그로 하여금, 새 옷을 입게 하십니다. 새 마음과 새 성품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새롭게 되었습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보라. 새로운 존재가 되었도다!
바울 사도 앞에 달라진 무엇이 있을까요? 외면상으로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행2-4장의 베드로를 보고 종교지도자들은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는 분명 새로운 피조물이었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왜 따라왔을까요? 새로운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를 보고 사람들이 무엇이라 외쳤을까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해를 보내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시기를 기대하실까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보고, 우리 교회를 보고, 하나님께서 외치는 감동이 우리 안에서 파도처럼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3] 사명이 달라졌습니다.
화목(和睦)하게 하는 직책(職責)을 받게 되었습니다. 화목은 불화, 흑은 친교에 틈이 생긴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전에 우린 하나님과 불화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18절).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18절). 새로운 사명입니다.
선교사님들의 직책은 무엇입니까? 그 백성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황 선교사님과 며칠을 보내면서 이분 가정이 미얀마 백성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직책을 잘 감당하겠구나 하는 기쁨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화목의 직책을 잘 감당하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우리는 서출선 목사님의 갈보리 교회 취임을 보면서 이분이 화목의 직책을 잘 감당할 적임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화목의 직책을 잘 감당하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저마다 나름대로 직책을 주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실까요? 이 화목의 직책을 잘 감당하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실 것입니다.
(노하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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