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어른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이가 어른 같이 성숙한 것을 칭찬한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반대의 경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신앙 생활을 하였으니까 분명 선생히 될 만큼 연륜은 쌓였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입니다.
영적 진보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주시는 목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래서는 안된다는 말씀이지요.
성숙한 신앙인이 되라.
영적 미성숙을 극복하라.
이런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 지긋지긋한 영적미숙함을 벗어버리고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1. 어린 아이 같은 신앙인도 귀합니다.
[히5:12-13]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브리서를 받는 수신자들의 영적 상태는 한 마디로 어떻게 정의되고 있습니까?
아직 젖을 먹는 어린아이 신앙인이었습니다.
옳은 것을 분별하는 도덕적인 기준이 틀렸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입니다.
[1] 신자들의 올바른 삶이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 옳은 일이 분명합니다.
강재구 소령이 부하를 살리기 위해 수류탄을 제 몸으로 감싸고 자폭함으로 다른 부하를 살리려 했다는 기사를 볼 때, 그에게 옳은 일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는 초보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 앞에서 나의 행위가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의'가 됩니다.
[3] 히브리서를 받는 수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때가 오래 되었습니다. 마땅히 선생이 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지 오래되었으므로, 신앙의 연륜으로 말하면 신앙이 성숙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였습니다.
[4] 그러나 히브리서를 받는 수신자들은 오랜 신앙의 연륜에 걸맞는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안타까이 여겨 그들을 책망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
적용을 나누어 봅시다.
1] 아직 신앙의 기초 단계에 있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젖이나 먹는 '우유를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 신앙인입니다.
어리다고 신앙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에게도 고집이 있습니다.
반발이 있습니다.
불신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믿음의 길로 들어 선 사람, 회심한 사람이니 얼마나 귀합니까?
디모데란 믿음의 용장은 어린 시절부터 믿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430장)이란 찬송처럼 신앙 생활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길로 가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2] 신앙의 연조(年條)가 오래되었으므로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터인데 현실은 여전히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성장이 없는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에게도 감사할 부분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갔지만 변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있으니 얼마나 귀합니까?
동네 어귀에 자리잡은 고목 나무처럼 수백 년을 한 자리에 서서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인걸은 간 데 없어도 고목 나무는 떡 하니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이곳이 바로 내가 태어난 마을이오, 자란 마을이오, 고향임을 알려주는 겁니다.
오가는 나그네들의 그늘도 되어 줍니다.
공중에 나는 새들의 집도 되어 줍니다.
지금 제가 고향에 간다면, 많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고목나무가 그대로 서 있다면 감개무량 아닙니까?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 교회에 오시는 분들은 늘 그 분들의 따뜻한 인사와 미소를 만납니다.
이민 교회에 변화가 많지만, 그냥 고목 나무처럼 언제나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십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감사하여야 합니다.
당신들이 계셔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당신들의 헌신과 기도 덕분에 흔들리는 우리들도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목나무 신앙인의 신앙인이 우리의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성장을 멈춘 신앙이라면 안타깝지요.
성숙이 멈춘 고목나무 신앙은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이상적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 뒷뜰에 단풍나무를 보시지요?
아마 수백 년이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시에서도 그 나무를 보호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고목 나무가 참 안타깝습니다.
너무 늙어버렸어요.
자리만 차지하고 있지요.
그늘도 약합니다.
가지도 잎도 연약해요.
태풍이라도 불면 어떻하나 염려가 됩니다.
언젠가 저 가지가 부러지면 밑에 있는 사람이나 차나 교회 지붕이 상할까 염려되지요.
고목나무가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 서글프지요.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우리 오랜 세월 교회를 다니면서 내 신앙이 정체되어 있다면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시면서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2. 자라나는 그리스도인은 아름답습니다.
[히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1] 자라나는 신앙인은 지각을 사용합니다.
지각이란 깨닫는 힘입니다.
'지각'에 해당하는 말은 도덕적인 분별력을 넘어 영적인 분별 기능을 뜻합니다.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각으로 의의 말씀을 깨닫게 됩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인생의 허물과 죄됨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필요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랄 수 있습니다.
원주민 마을을 찾아가면서 우리는 깨닫는 일이 있습니다.
오는 10월 23일 원주민 마을 방문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곳 종교 행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가까워지기 원하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적 퍼포먼스를 보고 이해하려고 힘쓸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그들을 좀더 이해하고 가까워지고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장성한 분량의 신앙인이 감당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선교는 귀한 것이지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지만, 선교에서도 장성한 분량의 신앙이 요구됩니다.
아직 어린 신앙인들이 그런 주술적 퍼포먼스를 대하게 되면 악한 영에 억눌림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가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2] 자라나는 신앙인은 받는 연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장성한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알며, 신앙인들에게 다가온 고난의 의미를 바로 알고 믿음 생활을 합니다.
저의 신앙 생활 여정에 김명혁 목사님과의 만남은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희를 다섯 살 때 뇌수종이란 병으로 하나님 나라에 간 철원이 묘지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우리를 왜 하나님 나라에 간 아들의 묘지에 데리고 가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 아들의 죽음이란 고난을 저주나 하나님의 징계로 해석하지 않고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승화시키시는 모습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축복일 수 있구나!
믿는 자에게 고난은 유익일 수 있구나!
고난은 변형된 축복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신의 저주나 하나님의 심판의 몽둥이 정도로 알아오던 전통적 사고를 변환시켜 준 사건이었습니다.
젖을 먹는 자들은 그리스도 고난에 관한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알 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14:22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엡 4:15, 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며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렀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3] 자라나는 신앙인은 선악을 분별하여 가는 신앙인들입니다.
어떤 진리는 그 안에 담아 두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 음식의 단단함 때문입니다.
초신자들과 같이 기독교에 입문한 지 오래되지 않은 어린아이 신앙인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진리가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진리를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삼위일체 진리가 좀처럼 소화되지 않는 단단한 음식입니다.
예정론은 진리는 어떤 분에게 단단한 음식일 수 있습니다.
장성한 신앙인은 '어린아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전한 자를 가리킵니다. '단단한 식물'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면서 한없는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진리를 묵상하면서 많은 감사를 합니다.
'연단을 받아' 끊임없이 훈련을 받아 성숙한 영적 분별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 분별력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여 범죄치 않으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됩니다.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마무리하는 말]
마가 요한이 자라갑니다.
에스더가 자라갑니다.
장성한 신앙인이 되기까지 자라갑니다.
우리도 자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토론토에서 제3회 선교대회가 진행 중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장성한 그리스도인을 생각하면서 우리 한민족이 배출한 좋은 선교사님 가운데 한 분인 정진호 선교사님을 소개합니다.
선교사님이 부르심받은 후, 오늘까지의 삶을 이 짧은 시간에 정리하는 것은 힘든 일이겠지만, 저는 정선교사님 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만나 본 것이 제 생애에는 참 기쁨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인의 초보를 지금도 걷고 계신 분들이 일어나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성경 본문]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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