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1 March 2015

히6:1-8 더 완전한 신앙으로 나아가자

 [들어가는 말]

  히브리 기독교인들이 가진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의 역풍을 맞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복음을 가진 자리에 멈춰 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옛 모습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의 신앙은 지금 어떤 단계에 서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고 계신 단계입니까?
그 믿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이십니까?
믿음의 열매를 맺고 계시는 단계입니까?
그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고, 이웃과 나누는 단계입니까?

  신앙은 나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심겨진 것은 중요합니다.
이어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1. 신앙의 성숙은 진리에 뿌리내리는 데서 출발합니다.

  [히6:1-2]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초보'는 처음 '초', 걸음 '보'가 합하여 이루어진 말입니다.
초보란 단어를 급수를 매기자면 좀 저급한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경주로 말하자면 '첫 걸음', '출발점'이란 뜻입니다.

나무로 비유하면 처음 식목한 지점입니다.

  신앙은 출발점이 견고해야 합니다.

  100m 경주자가 출발점에 발을 굳게 딛고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진리에 첫걸음을 굳게 딛고 서야 합니다.

   히6장에서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초보가 무엇입니까?

   [1-1] '그리스도인의 초보, 곧 출발점'은 '죽은 행실 회개'입니다.

   나무를 보면, 죽은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행실을 보면, 죽은 행실이 있습니다.
죄와 악이 사람의 행실을 죽입니다.
암세포가 몸의 어떤 기관에 붙어 이기면 그 기관에 암덩어리로 차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첫단계는 이런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은 신앙의 첫 걸음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지난날의 행실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인 '회개'는 사람의 죽지 않은 부분을 살리자는 중요한 신앙 요소입니다.

   세례 요한이 '죽은 행실 회개'를 강조하였습니다(마3:2).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행실 회개'를 전파하셨습니다(막1:15)

그리고 초대교회의 사도가 '죽은 행실 회개'를 전파하였습니다.(행2:38)

   내 안에 있는 죽은 행실은 무엇입니까?

   교회 뜰에 있는 가래 나무의 죽은 가지를 잘라내니 참 좋더라구요.
내 안에 있는 죽은 행실도 회개함으로 잘라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1-2] 또다른 '그리스도인의 초보, 곧 출발점'은 "세례와 안수"입니다.[히6:2]

  '세례들'은 유대교의 일반적인 정결 예식입니다(레11-15장, Bruce).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죄 씻음을 받은 표징(表徵)으로 생각합니다.
세례란 옛사람에 속한 죽은 행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세례란 옛사람의 죽은 행실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는 표시입니다.

   [갈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


  '안수'는 구약시대부터 시행되던 관습이었습니다(민8:10;신34:9). 신약시대에도 새로운 개종자(행8:17)나 전도사역자(딤전4:14)에게 종종 안수를 시행하기도 하였습니다(행8:17-19).

   오늘 날도 집사 안수, 장로안수, 목사 안수가 있습니다. 안수 의식은 받는 성도들에게 매우 소중합니다.
  받은 안수를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 선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받은 안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맡겨진 직무에 충성하는 것은 주신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와 안수도 신앙 전반을 두고 볼 때에는 출발점입니다. 이제 세례를 받고 안수를 받았으니 열심히 경주하겠습니다 하는 출발입니다.
세례자적 삶을 살겠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안수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겠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안수 받은 것을 끝이다,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직분 주신 분에게 큰 실례를 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많은 분이 서리집사 직분을 받으셨는데요.
서리집사로 행할 일에 대하여 다짐하고 서약서를 작성합니다.
어떤 분은 작성한 내용을 따라 집사직분을 감당하려고 힘을 기울입니다.
이런 집사님들을 보면 참 귀하고 감사하지요.


   [1-3]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은 또다른 '그리스도인의 초보, 곧 출발점'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 중 미래에 속한 종말론적 교리입니다(사26:19;단7:9,10;12:2;눅20:37,38;행23:8;마카비2서 7장,Bruce).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책임적 존재로 이 세상을 경주하다가 마지막 때에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회계하는 날이 있습니다.
경주자에게 있어 최종 목적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출발점에서 이 최종 목적지를 마음에 품고 최종 목적지에 눈을 맞추고 경주를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죽은 자의 부활과 심판도 신앙의 초보입니다. 신앙인들이 출발 선상에서 그 심중에 품어야 할 진리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기본기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운동하는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본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초보는 바로 기본기와 같습니다.
회개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고 안수를 받은 자로서의 자세가 분명해야 합니다.
부활과 심판날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초보 곧 출발점에 굳게 서는 일이 중요합니다.


  "굳건한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신앙의 성숙은 그리스도 진리에 확고부동하게 서는 데서 출발합니다.



  2. 더 온전한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히6:3-6]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출발선상에 우리 성도가 굳건히 서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1] 출발지점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

   [히5:12]에서 히브리인 성도들은 문제를 지적받고 있습니다.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신앙적인 정진을 권면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그리스도인의 초보를 버리란 말은 회개, 세례, 안수, 부활, 심판과 같은 신앙 기본기를 쓰레기처럼 처분하란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신앙의 첫 걸음, 즉 첫 단계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는 말입니다.
기본기만 가지고 운동하면 좋은 선수는 아닙니다.
경주자가 출발점에만 서 있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 출발점에 굳게 서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라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젖을 먹는 어린아이(5:13)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경주자가 출발지점에 서면 목적지점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경주자가 그냥 그 출발선상에서 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신앙경주자가 그냥 그 출발선상에서  맴돌고 있어서도 안됩니다.
역 주행을 해서는 더욱 안됩니다.


한 번 출발선상에 굳게 섰으면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목적지를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경주자가 앞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처럼 앞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회개는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달려 나가기 위한 출발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수받는 것은 달려갈 새로운 목적지로 나가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때가 되면 그 초보를 박차고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2]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바울 사도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관여한 것, 예수님 믿은 사람들을 핍박한 과거를 회개하는 일만 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의 달려갈 길, 곧 주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 전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경주하였기 때문에 그의 회개는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완전'이란 말의 원뜻은 '성숙'이라는 의미입니다.
성숙은 출발선상에 서 있기만 하면 이루어 질 수 없어요.

   '준비, 땅!'

   울리는 순간부터 그 소리에 순종하여 달려야 합니다.

온전한 데 나아간다는 말은 우리 성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저는 수영이나 탁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제가 기본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요.
기본기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땀만 나지 진보가 없요.
그런데 기본기를 배운 선수들을 보니까 설설 하는 것 같은데 앞으로 쑥쑥 나갑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기본기를 배우곤 해요.
그리고 그분들이 해준 말에 순종하면서 운동을 하려고 노력해요.
아직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여 큰 성과는 기다려야 하지만 나름대로 보람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시작하셨습니까?
기본기에 충실하십.시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세례를 받으세요.
안수가 중요합니다.
부활과 심판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만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이상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초보에 머물지 말고 성숙해야 합니다.
성숙하기를 소원하면서 진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순종하면 성숙하게 됩니다.


   그 옷만 입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 앞 체육관에 다니는 운동선수들이 멋진 운동복을 입고 한 줄로 뛰어가는 것을 본 꼬마가 엄마를 졸라 운동복을 사입었습니다. 그런데 선수들처럼 잘 달릴 줄 알았는데 앞마당을 한바퀴 채 못뛰고 숨이 차서 하는 말:

   "엄마, 이거 입어도 선수가 안되는구나!”


   그렇지요. 운동복을 입는다는 것은 운동에 도움은 될 수 있어도, 운동을 잘하는 단계에 나아가는 일은 별도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신앙으로 나아가려면 이와 같이 우리 힘으로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으로만 되는 일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원하시면 다음 말씀에 유념하셔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신앙인에게서 고백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조건이 있을 때 모든 일이 가능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완전한 데 나아갈 수 있습니까?
사실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가능합니다.
운동선수가 출발 선상에 서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완전 곧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축복 속에서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아브라함처럼, 광야를 가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금식합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왕 앞에나아갑시다.
그러나 왕을 잠못이루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르드개의 선행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에스더 왕비를 향해 긍휼의 홀을 내어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겸비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허락을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2] 한번 비췸을 얻어야 합니다.

  비췸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리스도 자신을 암시하는 '세상의 빛'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고후4:4,6;벧후1:19)

   [요1:9-10]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세상의 빛'(마5:14;요8:12)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빛의 비췸을 받아야 합니다

   영감이란 말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경주자들이 전심으로 경주하기 전에 영감을 얻는 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경주를 하든지 먼저 여유를 갖고 차도 한 잔 마시면서, 산보도 하면서, 이런 저런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면서, 쉬임도 때로는 가지면서 영감을 얻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비추어 주시는 빛이 우리를 성숙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3] 하늘의 은사를 맛보아야 합니다.

 '하늘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선물입니다.

  이슬을 받아 마시며 자신을 키우는 난처럼, 하늘의 은사를 받아 마시며 성숙을 향해 가는 성도는 성숙합니다.


 4] 성령에 참예한 바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참여한 바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하시는 일에 우리가 참여한 바 되어야 합니다.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아야 합니다.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말씀입니다(Morris, Hewitt).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재에도 교회 안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4-5절에 걸쳐 진술된 영적인 체험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恩賜)입니다.

   '내세의 능력'은 미래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장차 올 세계의 능력입니다.


   6] 타락으로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힘쓸 일입니다

   [6절]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훌륭한 선수가 되려면 매일매일 많은  훈련과 땀과 시간이 필요하듯. 성장하여 쓰임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 이상의 수고가 요구됩니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좋은 은사를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의 소중함과 그 보배 됨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보배됨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갑니다.
옛사람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타락'한 옛사람의 삶에 방치합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6a]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경주자가 출발 선상에서 출발신호를 받고 힘차게 뛰쳐나갔습니다.
그런데 불법을 행하여 탈락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경주는 끝입니다.
내가 실수했으니까 다시 하자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1) 다시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든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탈락하면 그 경기에서는 끝이라는 겁니다. '다시 회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0.1초를 다투는 경기에서, 다시 돌이켜서 갔다 왔다 할 수 없습니다.
'회개'한 경주자는 회개하는 자가 자신의 삶 전체의 방향을 전환시켜 그리스도인으로 경주한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코 반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경주는 일회적인 것입니다. 신앙적 타락도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에도 변함없이 반복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죄를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면 되지 생각합니다.
손 한번 씻어버리면 깨끗해지는 것처럼 회개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밥먹듯이 짓고 회개를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올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한 번 출발 선상에 선 선수는 그 경주에서 일회적인 회개를 다시 반복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2) 또한 한 번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다시 에덴에 들어가서 살아보는 그런 경우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건에서 아담과 이브는 알고 지은 고의적으로 배도한 '타락'이 돌이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아담과 이브가 그러니까 지옥을 갔다고 말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분명 에덴에서 내어보내셨지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창3:15말씀처럼 여자의 후손에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담과 이브를 타락의 길로 몰아간,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이 여자의 후손을 바라보았다면 그들에게도 회개의 길은 열려 있었습니다.

   문제는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타우룬타스'에서'다시'로 번역된 접두사 '아나'는 '다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위에'라는 의미입니다(Robertson, Hewitt, Morris). 이것은 타락한 자들이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십자가 위에 못박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던 자들과 다를 것이 없음을 알려주십니다.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3.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히6:7-8]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1] 자주 내리는 은혜를 받아 걸맞는 채소를 낼 일입니다.

  [7절]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그리스도인의 장성함에 대한 비유로 사5:1 이하의 '포도원의 노래'와 내용 면에서 비슷합니다(Bruce).
   '땅'은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입니다.(마13:18-23)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등을 비유한 것입니다(사44:3;55:10).
   밭을 경작하는 농부가 열심을 다해 밭을 갈았습니다. 그런데 그 밭이 그의 수고에 걸맞는 소출을 내면 밭을 경작한 농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배도하지 아니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아갈 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십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2] 땅인 우리는 우리 위에 자주 내리는 은혜의 비를 흡수하십시오.

   3] 가시와 엉겅퀴는 지우십시오.

   [8절]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가시와 엉겅퀴'는 창 3:17, 18의 내용과 연관됩니다. 창세기에서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쫓겨난 그 황무한 땅에서 자란 저주의 산물이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에 순종하지 못함으로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입니다. 그 '마지막' 즉 결과는 심판 날에 불사름을 당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소멸당할 수밖에 없습니다(10:27;12:29).




  [마무리하는 말]

  [예화]

  앤토니 플루는 감리교 목회자의 아들이었고, 결국 그와 같은 길을 걸었던 ‘선배’ C.S.루이스가 의장을 맡은 옥스퍼드대학 소크라테스클럽에서 무신론 철학논문 <신학과 위증성>을 발표하는 등 무신론의 대변인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50년 간 철저히 대변해온 무신론 입장에서 변화하여 유신론에 인생의 뿌리를 다시 내고 있습니다.

   “신의 존재를 입증할 책임이 유신론에 있으며 무신론이 기본 입장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앤터니 플루가 “신의 부재가 입증되지 않는다”고 정반대 입장을 보인 것이다. 심지어 그에게는 이어령 박사와 같은 ‘초자연적이거나 기적적인 현상’도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그는 ‘이성의 순례’를 통해 신을 발견했다.

플루는 간단히 말해 ‘현대 과학으로 드러난 세계상’ 때문에 신을 믿게 됐다고 답한다. 그는 이제 우주가 무한한 지성에 의해 존재하게 됐다고 믿고, 생명과 생식이 신적 근원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이는 어떤 새로운 현상이나 논증 때문이 아니라, 지난 20년간 꾸준히 사고체계가 움직였던 결과이자 자연의 증거를 계속 평가한 결과다.

그는 과학이 탐구하는 세 가지 영역, 즉 ①자연법칙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②생명현상이 어떻게 무생물에서 생겨났을까 ③물리적인 것 전부를 뜻하는 우주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등을 통해 무신론을 비판하면서 몸이 없고, 완벽한 작인(作因)이면서 시간 바깥에 있는, 정합성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신을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그는 ①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 등 자연법칙들은 합목적적으로 설계자를 전제하는 등 신을 향하고 있다 ②지구에서 볼 수 있는 ‘목표지향적이고 자기복제하는’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만족스러운 대안은 무한한 지성을 갖춘 정신 하나뿐이다 ③우주가 원인 없이 존재할 가능성은 대단히 낮지만 신이 원인 없이 존재할 가능성은 그보다 높다고 각각 설명한다.

이처럼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그의 회심은 이 책 <존재하는 신(There is a God·청림출판)>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책 출간 3년 뒤인 2010년 4월 ‘소천’했다.

   하나님께선 평생에 무신론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도 회개케 하셔서 그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똑똑한 것 같아도 정말 똑똑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짐승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굉장한 신앙 수준에 있어 보이지만, 자라야 합니다. 초보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신앙 성장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열 흘 후에 우리 교회에서 선교 부흥회가 열립니다.
세 분의 선교 전문가를 모시고 나누는 선교 축제입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잔치가 필요합니다.
이 선교 부흥회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어디를 향해 자라가야 할 것인가를 알았으면 합니다.
이런 귀한 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들로 나타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성경본문 [히6:1-12]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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