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1 March 2015

히6:13-20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섬기던 히브리인들에게 고난의 파도가 넘쳐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예수님 때문에 집을 잃고
예수님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고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서 많은 히브리 기독교인들은 흔들렸습니다.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언약의 소중함을 아는가?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알려주시면서 흔들리는 히브리 기독교인들을 세우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물렁물렁한 우리들의 믿음도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 위에 굳게 세우고 소망을 새롭게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복주고 번성케 하시길 원하십니다.

    [14절]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창22:1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
"게 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택한 백성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과 인내에 대해 엄격한 시험을 거친 후에 약속에 대한 보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창22:1,15-18). 약속의 성취는 이삭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것을 체험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또다른 명령,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셨을 때 그 말씀에도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이같은 믿음은 약속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이런 약속을 믿은 사람들은 교회 역사상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일찍이 엘리사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왕이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병거(兵車)와 마병(馬兵)이시어 하고 울부짖으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엘리사가 마병이 되어서 전장에 나가 싸웠다는 이야기 없는데도 말입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복의 근원이었습니다.
엘리사로 인해 그 나라가 수 차례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존 낙스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드렸습니다.
그의 기도가 암담한 스코틀랜드를 구원했다고 믿는 역사가들은 많습니다.

    이런 믿음의 용사들은 어디서나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인생 행로에 외로운 이들, 쓰러진 이들, 이런 이들을 살립니다.
다시 일어나서 승리의 길로 걸어갈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그 향기가 온 사회에 퍼지게 됩니다. 무언의 감화가 있습니다.
이런 신앙인들이야말로 사회와 국가의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이런 놀라운 하나님을 믿고 복받기에 합당한 삶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선생님하고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가는데 선생님은 돈 안내고 공짜로 간다고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자리를 양보를 해 주지 않아 선생님이 너댓 시간 동안 서서 갔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복을 받겠습니까?

    그 동네에 가서 인사 잘하는 아이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니까 동네 사람들이 다 압니다. 이 아이는 저 먼발치에 어른이 지나가도 먼데서 ‘안녕하세요’ 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인사합니다.  간혹 인사하는 소리를 못 듣고 지나가면 쫓아가서 붙잡고 인사를 합니다.  그 아이들이 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이런 놀라운 하나님을 믿고 복받기에 합당한 삶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2.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않습니다.

    [17절]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주시고 번성케 하실 때 약속을 따라 일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틀림없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직접 보증이 되셨습니다.

    [1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가진 특징은 일관성입니다. 그 약속이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장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올려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22:16-17]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십니다.
'보증하셨나니'
'중재자가 되었습니다'.
'보증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맹세가 필요없으나 자신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습니다.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그의 후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후손 즉 그리스도인들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맹세는 하나님의 약속이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증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맹세' 소망을 는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맹세'는 모든 날 마지막에 나타난 말씀인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1:2).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맹세'하여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통해 성취되었습니다(20절)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맹세', '이 두 가지 변할 수없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맹세'하여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통해 성취되었습니다(20절)


    세상 모든 것들이 변합니다.

    20세기 중에도 세계 지도가 몇 번이나 변했습니다.
국경이 변하고 정권도 변했습니다.
인물도 변합니다.
옛 지도자는 어느덧 지나가고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인간 자신도 항상 변합니다.
얼굴도 변하고 말도 변하고 사상도 변합니다.

    풍속도 변하고 유행도 변하고 또 인심은 조석변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현대를 급변하는 세대라고 말합니다. 그리해서 혁명시대라고 합니다. 사실 현대는 전 세계를 통해서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급격한 변천이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대우주를 지으실 때에 그 속에 두신 기본 원칙, 곧 자연의 법칙은 변치 아니합니다.
아침이 변해서 저녁이 됩니다.
그러나 해가 서편으로 뜨는 것을 누가 보았습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자연법칙은 변치 아니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인간이 빙 빙 도는 공과 같은 이 지구 위에 안전히 집을 짓고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이 한번 변한다고 해 보세요. 온 우주가 혼돈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이 성립됩니다. 자연법칙이 변치 않기에 과학이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주선을 날려서 우주를 탐색 할 수 있습니다.

      삼라만상이 변하나 하나님의 법은 변치 아니 합니다. 우리는 이 변화무상한 세상에서 변함이 없는 만세반석이신 그리스도의 약속 위에 생의 근거를 두고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변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법 위에 인생의 기초를 두고 살 때에 우리의 생명이 안전할 것입니다.

    [미가서 6:8]

    "사람아 주께서 선하심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공의, 인자, 겸손의 생활은 언제나 변치 아니합니다.
    아무리 변하는 세상이라고 해도 변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복음 위에 살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조그만 디지털 카메라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카메라가 액정이 하얗게 나타납니다. 삼성카메라 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보내라 합니다. 보냈더니 고치는 비용을 이메일로 알려왔습니다. 너무 비쌉니다. 산값보다 고치는 값이 비쌉니다.
"No, Thank You."
그냥 버리고 말 작정이었습니다.
    고치지 않겠다고 했더니 그 사람들이 삼성 회사에 알린 모양입니다.
삼성 회사에서 고쳐주기로 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당연히 "Thank You."라고 답했습니다.

    조그만 카메라 하나도 삼성 브랜드는 약속을 신실히 지키는구나 신뢰가 갑니다.
다시 새로 카메라를 사야 될 때도 자연스럽게 발길이 그곳으로 갈 것 같습니다.
브랜드에 대한 신뢰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좋은 브랜드는 이렇게 약속을 잘 지킵니다. 하물며 온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확실한 일관성 유지하고 있겠습니까?
다른 질문이 필요없습니다.

    일관성이란 변덕스러운 기분이나 갑작스러운 변화, 일시적인 유행과는 거리가 먼 꾸준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내 기분이나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하나님 언약은 불변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꾸준합니다. 항상 동일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곁길로 가게 하는 세상에서 모든 유혹에 맞서 낮이고 밤이고  일관성이 있으십니다.
오늘은 물론이고, 내일도 어제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저께 하나님 앞에서 한  행동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항상 일관성을 가지고 대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찾습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할 때에도 항상 그분은 그 자리에 계시고, 내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분을 찾으면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일관성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않습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고 그 소망 안에 닻을 내리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18-19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소망'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소망'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재 이룩되었으며 앞으로 완성되어질 구원입니다.

    [소망 없는 예]

    1977년 부산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4남매를 홀로 키우며 고생고생하며 살던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임종이 가까워오자 흩어졌던 4남매가 다 모였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런데 평생에 다이아 반지 한번 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원통 하구나”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자녀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인데 자식 된 도리로 안들어 드릴 수 없지 않느냐? 하면서 조금씩 돈을 내서 다이야 반지를 사 드리기로 했습니다. 이때 맏며느리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최근에 옆집 아주머니가 다이야 반지를 샀는데 그것을 빌려다가 끼워 드리고 어차피 돌아가실 어른이니까 나중에 빼서 되돌려 주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모두들 생각해 보니 그것도 좋을 것 같아서 옆집 아주머니의 반지를 빌려다가 고급상자에 넣은 다음 누워계신 어머니께 가지고 갔습니다. 반지를 받은 어머니는 어린애처럼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는 불빛에 비쳐보고 얼굴에 비비시며 한참 좋아하시더니 물 한그릇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이 물을 갔다 드렸더니 어머니는 반지를 빼내 입에 털어 넣고는 꿀꺽 하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만족 한 듯 자리에 누우시면서, “나희들이 선물한 반지 애미가 극락까지 가지고 갈란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자녀들 사이에 다이야 반지를 어떻게 찾아 돌려주어야 할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들들이 어머니의 배를 갈라 반지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니까 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은 어머니를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반대했습니다. 결국 화장을 시켜 드리고 잿더미 속에서 반지를 찾았는데 너무 손상이 되어 버려 도저히 돌려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4남매가 돈을 모아 새 반지를 사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다이아반지를 소원하며 저승까지라도 가지고 가시겠다는 어머니나 그것을 빌려다 끼워드리는 자녀들 또한 우리 마음을 씁쓸하게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다이아반지를 끼고 싶어하는 소망이나, 빌려서 끼워줌으로 그 소망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나 모두 헛된 것입니다.

    그러면 참 소망은 무엇입니까?

    믿음도 행실도 모범적인데 늘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여 성도가 있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분께 반문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을 받으리라 믿습니까?"
    "예!"
    "그것이 그나마 제게 있는 소망입니다. 하지만 제게 그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곰곰히 생각한 스펄전 목사님은 주머니에서 5파운드를 꺼냈습니다.

    "그나마 부인에게 있는 그 소망을 제게 5파운드에 파시지요."

    펄쩍 뛰며 부인은 대답했습니다.

    "천만 금을 준다해도 저의 이 소망만은 팔 수 없어요."

    "천만 금을 준다해도 팔 수 없는 그 소망을  가지고 계시면서 소망이 없다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천만금을 준다해도 팔 수 없는 소망을 확실하게 성도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고 그 소망 안에 닻을 내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거짓말 하실 수 없는  언약의 보증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앞에 있는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구속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으로 인해 이중의 보장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 즉 자신이 행하신 약속과 맹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현재 구원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인해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고 현재 지상의 삶 가운데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닻'의 비유는 헬라문학에서도 그러했듯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표현합니다.
저자는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가 확고한 것임을 알려줍니다.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휘장'은 구약 시대의 성막 안에 있던 두 개의 방 즉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천입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레16: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들어가심으로(20절) 휘장은 찢어졌습니다.(마27:51;막15:38)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 자유롭게 지성소 즉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닻'을 내리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닻'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시 될 수 있습니다

    '닻'은 다시 소망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결국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소망'입니다.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소망'이라는 사실은 7:19의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는 말씀으로 더욱 확증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소망은 닻과 같이 튼튼하고 안전하여 세상의 어떠한 시련이나 유혹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있는 줄 압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영혼의 닻과 같이 견고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까?

    [19절]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어떤 분이 성도의 삶은 회사에서 출장 나온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회사 다니시는 분들은 출장이라는 것을 다닙니다.
출장 다니는 사람은 자기 볼일로 다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을 받고 나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왕좌왕하지 않고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밥을 먹고 차를 타고 사람을 만나면서도 자기 할 일을 한시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출장 다니는 사람은 짐이 가볍습니다. 살림살이를 트럭에 싣고 다니지 않습니다. 어떤 회사원이 며칠 있으면 떠날 여관방을 리모델링 하고 가재도구를 사들이는데 돈을 쓴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출장 중에 있는 사람은 일급 호텔방에서 자더라도 이 호텔이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 집을 내 집이라 생각합니다.
일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도 이 음식을 계속 먹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1] 하나님이 보내셨음을 믿고 그분께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출장 가는 사람은 자신이 가고 싶다고 아무 때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필요가 있어 보내주어야만 갑니다. 인생을 출장 나온 사람처럼 살려면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에 뿌리 내리고 삽니다.

    인생은 관광이 아니라 출장입니다. 출장은 일할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목적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그 사명이 무엇인지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너는 목사가 되고 너는 의사가 되라” 는 식으로 처음부터 사명을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사명을 주시되 미리 주시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주십니다. 현실에서는 당장 해야 할 일만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을 완수하면 다음 것을 보여 주시고 그것을 완수하면 또 다음 것을 보여 주시면서 우리가 차근차근 사명을 완수해 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혹시 내가 지금 해야 할 사명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작은 사명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더 큰 사명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오늘 맡은 작은 일에서 내일의 사명을 위한 자세와 힘을 키워내지 못하면 결코 내일의 일은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다른 사람이 받은 사명과 자신의 것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누가 어떤 사명을 받고 어떤 일에 사용되든지 그 결정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다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전부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가서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우리가 깨달은 사실은 각자가 맡은 임무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똑같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긴 것이 많든 작든 하나님의 상은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고 맡은 일에 얼마나 충성하였나, 최선을 다하였나에 따라 상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확신하십니까?
정말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천국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는 최소한의 경비만 지출하고 자신의 전부를 천국의 삶을 위해 투자할 것입니다.
인생을 출장 나온 것처럼 살면서 불편을 감수하며 살 겁니다.
우리의 고향은 천국이고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출장 나온 곳일 뿐입니다. 인생을 출장처럼 사는 사람은 세상의 부조리 때문에 놀랄 것도 없고 지나치게 반응할 것도 없습니다.
    회사에서 출장을 보냈을 때 좋은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다면 보너스를 받든지 승진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어 세상에 보내셨고 사명을 잘 완수하면 이를 보상해 주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받을 상이 큼이라(마5:12, 눅6:2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마10:41, 막9:41)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 5, 16)

사도 바울도 상에 대해 말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3:8)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고전3:14)

사도요한도 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계11:18))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계22:12)

    나를 향한 하나님 약속은 무엇입니까?
나의 진정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내 안에 이루시고 하나님이 나의 소망이 되기 원합니다.
주의 확실한 약속을 붙들고 복을 누리고 기업을 이루어 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성경 본문]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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