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차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운전대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운전대를 돌리느냐에 따라 차가 좌회전도 하고 우회전도 하고 직진도 합니다. 아무리 큰 버스나 32톤 카고트럭이라 해도 운전대가 돌아가는 방향으로 차가 움직입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운전대가 있습니다. 사람은 차와는 달리 영, 혼, 육으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의 운전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 일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고, 좌절하게도 하고, 춤추게도 하고, 그만 인생을 끝내게도 하는 자신의 운전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 운전대가 무엇인지 찾기만 한다면 자신과 자신의 운명을 원하는대로 쉽게 운전할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 운전대가 맘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인생이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가기도 하고, 벼랑 끝에 서기도 하고, 깨골창(하수구)에 빠지기도 합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운전대'는 무엇일까쵸?(최용우)
우리는 이 운전대가 바로 '종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옛언약에 기초한 율법주의적 사고로 운전해야 한다고 기독교도를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옛언약에 기초한 유대교에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럴 수 없는 이유를 분명하게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과 할례를 받는 문제 등…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육체의 예법에 머무는 “육적 유대인”에게 운전대를 맡기면 바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누구에게 운전대를 맡기라고 합니까?
옛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수많은 형태의 차들이 거리를 질주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형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대제사장이시고 새언약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깊이 생각합시다. 예수님께 운전대를 맡긴 신앙인은 바론 천국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내 신앙의 운전대를 맡겨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히9: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여기서 손으로 지은 성소에서 옛 언약대로 운전하는 신앙 운전법을 소개합니다.
제사장과 백성들은 성소의 문을 통해 성소로 들어갔습니다.
제물 위에 손을 얹어 자신의 죄를 전가시키고 그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렸습니다.
소나 염소 양이나 비둘기,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뿌렸습니다. 죄 지은 사람이 짐승을 끌고 와서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그 짐승은 자기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는 사람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그 짐승을 잡아 피를 가지고 그 사람에게 뿌립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제사 지냄으로 그 사람의 죄가 용서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제사장은 물두멍에 손을 씻었습니다.
떡상에 무교병을 올려드렸습니다.
향로에 기도의 향을 피웠습니다.
등대의 불을 켜서 성소를 비추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대제사장은 1년에 한 차례씩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자기 몸에 피를 뿌리면서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은 연 1회 백성들의 죄 문제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과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면서 그들은 죄사함을 받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지성소로 가서 자신의 죄와 모든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 받고 나왔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운전한 것이 옛 언약의 신앙 운전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옛언약을 따라 신앙생활을 해도 그 성소 안에 임재하시고 예법을 따라 제사를 바로 드리면 죄사함을 얻게 하심으로 구원의 소망을 그 성소와 제사에 담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를 통해 알려주신 제사법을 따라 옛 언약을 받아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나아가면 그들을 향해 마련하신 구원에 이를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옛언약을 따르는 제사 제도는 일시적인 것으로 온전한 천국 운전법의 그림자요, 불완전한 것입니다.
옛 언약을 받은 백성들은 연약했습니다. 성소에 나아가 온전히 그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누릴 수 있었지만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 언약을 온전히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사람입니다. 자기도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입니다.
구약에 드리는 모든 제사는 짐승의 피입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자꾸 반복해서 짐승을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제사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히9:9]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하나님께서는 성소와 그 제사를 통해서 구원받아야 할 인간에게 죄사함 받을 길과 방법을 알려주셨지만, 제사장이나 백성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으로 그 구원을 온전히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9:8]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온전한 구원자가 오시기까지 우리를 온전한 구원에 인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얻을 소망 가운데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성소이십니다.
1] 옛 언약은 새언약과 연속선상에 있으나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힌두교의 어느 유명한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신의 자녀요, 인간은 거룩하고 성결한 존재입니다."
정말로 인간이 거룩합니까? 회개가 필요 없고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우리 양심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인간 역사를 한번 살펴 보십시오.
인간이 정말 죄가 없습니까?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힌두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구원 받아야 됩니다.
성경은 명백히 선포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옛 언약은 예물과 제사로 죄사함을 받을 것을 명합니다.
이 면에서는 새언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옛언약은 새 언약의 그림자로서 새언약을 소망하게 하고, 바라보게 만들어 새 언약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새언약의 날에 온전히 개혁될 때까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은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나 옛언약의 먹고 씻고 하는 육체의 예법만으로는 불완전합니다.
[10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와서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입니다.
[히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새언약이 육체의 예법의 한계를 넘어 양심을 온전케합니다.
새언약은 옛언약의 육체의 예법의 한계를 넘어 갑니다.
새언약은 옛언약의 어떤 부분을 개혁한 것입니까?
새언약에 담겨있는 옛언약과의 차이는 단순한 외적 변화가 아니라 내적 변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옛언약은 먹고 마시고 씻는 것과 같은 외적 의식 곧 “육체의 예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옛언약은 9절에서 보는 것처럼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새언약은 옛언약에서 보는 육체의 예법 이면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옛언약에 대한 형식적 개혁이 아닙니다.
옛언약의 내적인 미흡함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에 나타나는 외식으로 인하여 불완전하게 보이는 옛언약이 새언약에서는 내적 개혁 보완으로 인하여 온전하여 집니다.
새언약이 죄사함이라는 원리에서는 옛언약과 연속성을 갖고 있지만, 양심이란 내적 문제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옛언약은 새언약을 통해 성취되고 온전하게 개혁되어야 합니다.
옛언약은 하나님의 새언약으로 개혁되고 완성되어야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해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는 구약의 제사를 가지고 이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제사제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9장 22절 보십시오. '율법을 좇아 그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것이 옛언약과도 연결된 새언약 제사의 기본 원리 입니다.
왜 제사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짐승을 잡습니까? 왜 피를 흘리고 피를 뿌립니까? 피가 없으면 죄 용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됨으로 인하여 생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찾아 온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을 대체할 생명을 다시 회복하려면 생명의 상징인 피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진리입니다. 피가 있어야 됩니다. 속죄의 은혜는 피가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옛 언약에서는 소와 염소와 양 그리고 비둘기 등으로 몇 천 년을 피 흘리는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이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았지만 죄사함은 불완전했습니다.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였습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제사제도는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그 죽음을 미리 가르쳐 주고 미리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표였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매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죽도록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완전 무결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게 만드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분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흠없고 점없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이 드려진 제사는 완전한 제사요, 영원한 제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짐승의 피가 아니고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사는 완전한 제사요, 한번 드림으로 끝나는 제사요, 다시 반복 할 필요가 없는 제사입니다. 한번 드림으로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제사를 받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보혈이 주어졌습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을 통한 속죄는 수천년의 피흘림을 넘어서는 은혜였습니다.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신 것입니다.
속죄는 우리가 바치는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보혈만을 의지할때 이루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지한 제사의 한계는 1천번제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의 속죄를 모면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보혈을 의지한 제사는 “단 한번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사를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못박히시니라,
운명 하시니라,
장사 지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죄인을 대신해서 죽는다 말입니까?
가장 참혹한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이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3. 그리스도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온전한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온전한 구원을 얻습니다.
[13-14절]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자기 몸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물 때문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속죄, 다시 말하면 한번 용서한 다음에는 더 이상 회개도 필요 없고 더 이상 용서도 필요 없는 완전무결하고 영원히 유효한 죄의 용서를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속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 그 강한 죄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옛언약에서 수천 년을 피흘리고도 해결하지 못한 것을 단번에 해결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요.
1863년 링컨이 새해 벽두에 노예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그 일로 인해서 링컨은 괴한에게 피살 되었습니다.
흑인들의 자유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링컨이 땅에 묻힌 뒤 수년이 지났습니다. 남부에 있는 농장에서는 여전히 흑인들은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알라바마에 있는 어떤 흑인을 붙들고 물었답니다.
"당신은 링컨을 압니까?"
"예, 링컨에 관한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링컨도 노예 해방도 잘 모릅니다."
믿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신을 위해 노예해방선언이 있었고, 이를 위해 희생한 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습니다.
귀가 닳도록 들어서 너무 많이 알아 가지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둔감해 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 버리고 덤덤해져 버렸습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20대에 과부가 되어 아들 하나에다 소망을 걸고 평생을 고생하며 키운 엄마가 있습니다.
그 아들은 장성하여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큰 한 아들을 놓고 엄마는 한사코 강조합니다.
'얘,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아니?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아니?'
밤이고 낮이고 계속 같은 이야기를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옛날 처음 어머님이 그 이야기를 하셨을 때는 감동이 되었는데 이제는 첫사랑을 잊었다고 말합니다.
어머님의 그 고마움이 고마움으로 전달이 안됩니다. 가슴이 무디어져서 듣는 둥 마는 둥, 들어도 그만이고 안 들어도 그만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심성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 아무리 감격적인 이야기라도 자꾸 계속해서 듣고 반복하면 감동이 없어집니다.
'아니 또 그 말씀이시구나.'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을 용인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항상 십자가의 은혜를 새롭게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늘 반복하여 새롭게 만나야 할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생전에 이 비밀을 더 알게 해주시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성령이여 좀 더 강하게 좀 더 진하게 좀더 뜨겁게 우리에게 임하셔서 계시의 영을 주시고 마음 눈을 밝혀서 십자가의 그 놀라운 죽음을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에 담을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외적 변화가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 밖에 없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내적 변화입니다. 제사가 예배가 되고 제사장이 목사가 되며 성전이 교회로 바뀌는 것도 변화일 수 있지만,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참된 연인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은 더 본질적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단번에 드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룬 것이 얼마나 온전한 제사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신주쿠 지하철에서 술에 만취 되어 철로에 떨어진 일본 사람을 건지려고 자기 몸을 던졌던 이수현씨의 죽음이 알려지자 전 일본 열도가 애도했습니다. 얼마나 그 죽음의 희생이 강렬했었는지 들은 모든 일본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서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바꿀 정도로 대단한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선한 사람의 죽음도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찌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은 세상을 구원 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주님 앞에 나갑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면 씻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 없습니다.
씻지 못한 죄가 없습니다.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오십시오. 십자가 앞에 와서 피 흘리시는 주님의 옷 자락을, 주님의 발목을 잡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추한 죄라도 다 씻어 주시고 다시는 기억치 않으십니다.
사랑하지 못한 죄,
용서하지 못한 죄가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불법을 사하시고 영원히 기억치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십니다.
이것이 영원한 속죄입니다. 할렐루야. 이 속죄를 우리에게 주실 만큼 십자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14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 어떻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흠 없는 자기를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이 말은 죽음에 이르는 악한 행실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 없는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십자가에는 강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해짐으로 죽음의 고통을 스스로 흡수 해 버린 신비한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필립 얀시) 그 사랑에 우리가 한번 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전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 사랑 때문에 성도들은 날마다 찬송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능력이 있어서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안겨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고 헌신하게 만들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꼭 사로 잡혀 살게 만듭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모든 죄가 피로써 정결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보혈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으셨습니다. 옛언약에서 제물로 드려진 짐슴 피가 다 뿌려졌지만, 예수님의 보혈은 새언약의 완성으로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보혈의 능력은 온전히 뿌려짐으로 죄를 정결케 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고국에서 일어났던 화제 사건에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지난 12/3일 인명 구조 베테랑 이재만(40) 소방장과 한상윤(32) 소방교는 다른 대원들과 함께 경기도 평택의 한 가구전시장에서 화재진압과 인명구조 작업을 펼치다 순직했다. .....이 소방장은 형도 소방관인 ‘소방관 집안’ 출신으로 지난 2006년 헌신적 구조활동을 인정받아 소방 방재청장상을 수상했다. 한 소방교는 4살 난 쌍둥이 아들을 둔 가장으로 임신 중인 아내를 놓아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경기도지사 표창, 안성시장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이런 기사도 있습니다.
소방관 6명이 화재가 난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던 기사인데 좀 특이합니다.
방화범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정신적으로 약간 온전치 않은 사람인데 정신병원이나 기도원을 전전하면서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날도 새벽 2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다투다가 어머니를 때리고 홧김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급히 밖으로 뛰어 나와서 소방관을 붙들고 아들이 아직 못 나오고 있으니 살려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소방관 6,7명이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우르르 집안으로 들어 갔다가 불더미에 힘없이 쏟아져 내리는 벽돌더미 아래 그 고귀한 생명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방화범은 살아서 밖에 있었습니다. 처자가 딸린 6명의 소방관이 너무나 아까운 생명을 희생하였습니다.
대제사장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가 온전케 된 줄 압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약하고 추해도 주께로 나가면 / 힘 주시고 내 추함을 곧 씻어 주시네/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아멘
[설교성경본문]
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