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들어가는 말
우리가 잘 아는 한용운 시인의 작품에 '님의 침묵'이란 것이 있습니다. 임을 떠나보내고 그 임이 다시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애절한 시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 민족의 마음을 담은 걸작으로 회자되어오고 있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띠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 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인이었다면 이런 시를 남기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어느 민족, 누구이거나 곤고한 날엔 임을 기다립니다. 구원해주실 분을 기다립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의 압제 하에 있을 때, 이런 임을 애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떠나가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약 없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떠나시면서 아름다운 약속을 남기셨습니다.
이 약속의 핵심은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실 약속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이 약속을 지키시는가를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약속 안에서 나를 새롭게 생각하고, 이 약속 안에서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부활주일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인자는 약속하신 대로 죽으셨습니다.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보라, ...... 인자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이 말씀은 선지자들이 전한 약속의 핵심입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사52:12-13)
세례 요한이 전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고난을 가장 잘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동시에 그 이후의 영광을 기다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님이십니다. 다니엘이 인자라고 말한 분이 바로 저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세 차례나 앞으로 당하실 고난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셨습니다. 16장과 17장에서 이미 두 번이나 십자가 수난에 대한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능욕하며 채찍질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유대인을 위한 구원의 길이 되시고 이방인을 위한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화목케 하셨습니다(엡 2:16).
1] 범죄한 유대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범죄한 유대인을 위해 왜 주님께서 죽으실 수 밖에 없었는지 한 사람의 예를 들겠습니다.
유다 역대 왕들 중에서 므낫세란 왕이 있습니다. 그는 부패하고 간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전에 우상의 제단을 만들어 놓고 온갖 악을 자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 환난을 주셨습니다.
그는 쇠사슬에 꽁꽁 결박당한 채 앗수르로 끌려갔습니다.
이런 유대인을 위한 구원의 길이 되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므낫세 왕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저가 환난을 당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기도한 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그 간구를 들으시사 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대하 33:12-13)
므낫세와 같은 유대인들이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시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2] 법 없는 이방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존 밀턴은 44세에 소경이 되고 말았으나 위대한 저서 실락원을 남겼습니다.
베토벤도 음악가로서 없어서는 안 될 청력을 상실했으나 그 이후에 더욱더 훌륭한 명곡을 작곡했습니다.
화니 크로스비 여사는 어렸을 적에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찬송시를 많이 짓게 되었습니다.
존 번연은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없었는데요.
그들은 원래 그리스도밖에 있었는데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 2:12)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엡2:1)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이런 이방인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이런 복된 인물들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그 사랑 위에 인생을 새롭게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하신 십자가 고난을 반석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3]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약속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경건치 않은 삶으로 하나님과 불화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화목케 하려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화목을 위한 십자가였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고통을 주님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죄의 삯인 죽음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의 고통을 맛 보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범죄함으로 겪어야 할 모든 고통을 주님은 대신 당하셨습니다.
배반자가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살인자가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위선자가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대신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화목케 하시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습니다.
그런데 원수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큰가를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으심으로 최상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친히 그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나는 죄의 덫에 걸려 꼼짝달싹할 수 없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양도,
풍채도,
흠모할 만한 것도 없이
십자가 형들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2. 삼일만에 살아나셨습니다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선지자들을 통해 그의 부활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죽으신 지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목격자들이 그의 부활을 증명했습니다.
오늘날 성령님께서 예수의 살아 계심을 확인해 주십니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가 하루는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는 불량 소년을 보았습니다.
"얘야, 새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니?"
"괴롭히면서 놀다가 죽일 거예요."
스펄전은 그 소년에게 2파운드를 주고 그 새를 사서 멀리 날려보냈습니다
이틀 후, 부활 주일 예배에서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셨을 때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해도 무슨 허탄한 말인가 했습니다.
부활에 관한 한 그들의 눈은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슬플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속할 임이라고 확실히 믿었지만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그런 소망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다 경겁간에 예수님께 십자가 죽으심이 다가오자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도망쳤습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시는 모습만 보고 있었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원수들이 오히려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대책을 세웠습니다. 무덤에 파숫군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정말 살아나셨을 때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얼마나 믿기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죽는데서 살아나기는커녕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다고 해도 믿지 않는 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1957년 데이빗 스티브즈 공군 중위는 그가 텄던 공군 훈련 제트기가 실종된 지 54일 만에 미국 켈리포니아 주에 있는 [시에라] 산중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그는 고장난 비행기에서 낙하한 후 눈이 덮인 황야에서 살아 나온 믿기 어려운 얘기를 했습니다. 데이빗 중위가 살아 나왔을 때 그는 공식적으로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한 확대 조사가 이루어져 비행기의 파손된 잔해를 찾아 낼 수 없게 되자 사건 조작의 의혹을 사게 되어 스티브즈 중위는 의심을 받고 강제로 예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후 소년단원들이 그가 탔던 비행기의 잔해를 발견했을 때 그의 이야기는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죽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유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우리를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는 약속을 지키셨듯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부활하심으로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주님만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주님께서만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대하여 살리시는 길을 여셨습니다.
[적용]
우리에게는 오늘 날 여전히 유효한 약속이 살아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요11:25)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를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5:54)
하나님께서 죽어 장사 지낸바 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그날 나를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도 다시 살게 됩니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입니다(빌 3:21)
부활은 그리스도 사역의 중심이며 우리 믿음의 올바른 근거가 됩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갖는다면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는 주님의 약속은, 용기가 좌절되고 크게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한 마을에 꽃을 파는 할머니 한분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가난했습니다. 복장은 허름했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 항상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지요” 노인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고통을 당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의 새벽을 맞지 않았습니까. 저는 고난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고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제 삶이 한결 행복해졌어요”
할머니가 누리는 행복은 부활의 소망입니다. 봄이 오면 앙상한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는다는 소망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주님께서 사흘만에 살아나리란 약속을 지킬 줄을 믿었다면 사흘을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흥분되었겠습니까? 주님 부활을 기대하고 무덤에 갔더라면, 사흘도 다 차지 않은 새벽 미명에 살아나신 주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는 이 약속은 성도들의 소망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현세의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장차 나타나게 될 영광"을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본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시 한편을 하나님 앞에 올립니다.
여러분에게도 은혜가 되시길 바랍니다.
나의 생명 나의 부활의 주님이시어!
마라토너가 먼 거리를 달려온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달리고 또 달려오길 52년!
잘 달린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난 그렇게 좋은 경주자가 아니었습니다.
때로 경건치 않은 길로도 달려갔었고
때론 부끄러운 죄악의 길로도 미끄러져 갔었습니다.
이래저래 수없이 넘어졌고
정말 이제는 이 경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절망의 절벽에도 여러 번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 덫에 걸려 꼼짝달싹할 수 없는 어린양처럼
헐떡거리던 나의 통곡을 주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때,
제가 선 땅은 한나의 겨울처럼 꽁꽁 얼어붙었고
영하의 온도는 엘가나의 사랑처럼 고독했고
브닌나의 언어처럼 살 끝을 파고드는 찬바람으로 마른땅이 되어갔습니다.
그래도 부활하신 주님은 가시나무 같은 제 인생에 백합화처럼 피어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제 가시가 흔들리노라면
채찍에 맞은 여린 살결처럼 주님의 몸은 찢기셨고
아플수록 더 진동하던 그 주님의 향기를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자랄수록 주님은 찔렸고
제가 강해질수록 주님께선 깨어졌으나
커다랗게 망울진 사명을
밤새워 이슬에 담아
온종일 소중한 꽃으로 터뜨리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찾아오셨던 그 부활의 주님께서
차갑고 슬프기만 한 저의 가슴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로 바울을 찾아오셨던 그 주님께서
강퍅해진 나를 빛처럼 찾아와 천둥처럼 큰 소리로 깨우쳐 주셨고
디베랴 바닷가로 고기잡으러 갔던 제자들을 찾으셨던 그 부활의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저의 식어가던 첫사랑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저는 절대로 부인하지 않을 겁니다 맹세하기를 수수 백 번
결국은 하루 세 번씩 밥먹듯이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저에게
새벽 닭 울음처럼 변함없이 가슴을 울려주셨습니다.
저는 늘 혼자라 생각하고 달렸었는데
알고 보니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늘 제 곁에 계셨습니다.
이렇게 경주하기를 계속하노라면
어느 날 저는 결승점에 서서 그 영화로운 면류관을 받게 될텐데
그날이 저에겐 지금부터 부담스러워 집니다.
지금 저의 경주가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한 지점까지 온 것 같지만
이게 어디 제가 잘나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포기하고 싶었던 저를 격려하셨고
쓰러져가던 저를 부축하셨고
나아갈 수 없는 저를 뒤에서 밀어 주셨고
두려움으로 멈칫거리는 저를 끌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의 나되기까지 땀흘리시며 수고하신 분은 주님이신데
결승점에서 상은 제가 받아야 할 것이니
이런 송구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양도,
풍채도,
흠모할 만한 것도 없이
내대신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나아가셨던 분은 주님이신데
영광의 면류관은 제가 받아야 한다니
이런 죄송한 경우가 있을 법이나 한 일 입니까?
세상에 비옥한 땅에서 지혜롭게 자라신 분들도 많은데
못 보신 듯 뒤로하고
마른 땅으로 굳어버린 내 인생에 찾아오신 생명의 줄기여!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존귀와 영광을 홀로 받으소서
찬란한 나의 부활,
나의 생명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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