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3 April 2015

(부활) 눅24:1-12 '부활의 참 뜻을 알라!'

들어가는 말

본문은 안식일 다음날 새벽 예수의 무덤에서 발생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왜 믿어야 하는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 때, 우리에게 어떤 특권이 주어지는지 오늘 본문은 알려줍니다.

근심하는 자여,
1.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이날 새벽에 여인들은 예수의 시체에 향을 바르기 위해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은 갈릴리로부터 온 여인들로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거기서 예수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근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들어가니 주(主) 예수의 시체(屍體)가 뵈지 아니하더라 (4)이를 인(因)하여 근심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활하고 그곳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이 왜 근심하였습니까? 화려한 옷을 입은 천사들의 말이 그 답을 잘 말해 줍니다.

어찌하여 산 자(者)를 죽은 자(者) 가운데서 찾느냐

천사가 곁에 서서 예수의 부활 소식을 여인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이 근심한 까닭은 살아나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많은 신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근심하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도 많고 조건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우리 곁에 살아계신 사실을 안다면 그게 과연 근심할 일일까요?

이로 볼 때, 우리가 근심하고 살아가는 까닭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11)사도(使徒)들은 저희 말이 허탄(虛誕)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분명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입니다. 근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사도들까지도 부활하신 사실을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이 사망의 문제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마리야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 가운데 살아 일하고 계십니다.

예화]
요사이는 암이 참 많아요. 걸렸다하면 암, 암! 암이 너무 많아요. 암종류가 250가지가 된다고 해요. 발톱하고 머리카락 외에는 다 암에 걸릴 확률이 있대요. 이마에서부터 머리, 뇌, 눈… 어떤 분은 혀에도 암이 생기고, 목에도 암이 생기고, 코에도 귀에도… 안 생기는 곳이 없어요. 학자들에 의하면 부모님이 암으로 돌아가셨다면 유전도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암이 음식을 통해서도 암에 걸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식생활을 잘못하면 암에 걸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 밖으로부터 바이러스 침투라든지 환경이나 공기가 나쁘다든지 이런 것도 암이 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암 발생의 70%는 마음으로부터 걱정하고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고 불안해하고 남을 미워하고 증오할 때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을 밖으로 잘 막고 음식을 잘 먹는다 하더라도 속상해 하고 걱정하는 것이 제일 무섭다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 분은 계속 근심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산 자 가운데 계심을 믿는 사람은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인들이 속상해 할 일이 뭐가 있어요? 근심할 일이 뭐가 있어요? 근심할 것 같으면 뭐하러 예수 믿어요? 앞날에 대해 걱정 다하려면 뭐하러 예수 믿어요? 살아계신 주님이 내 모든 짐을 져 주십니다. (김삼환)
혼자 스트레스 받고, 혼자 속상해 하고, 혼자 다 걱정하니 암이 쏟아지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내 생각대로 살고 내 할 일은 모두 다 걱정 다하고 근심 다 하고 하나도 생활은 고치지 않고…. 이런 삶은 부활을 믿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근심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주님은 살아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으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도 이 살아계신 주님을 의뢰하지 않고 근심만 한다면 우리는 이런 책망을 들을 겁니다. 이는 바로 부활 신앙이 결여된 것입니다.

어찌하여 산 자(者)를 죽은 자(者) 가운데서 찾느냐

아니 그것은 불신앙니다. 우리는 삶 중에서 이런 근심에 쌓여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질 때, 근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만이 우리로 하여금 평강을 누리게 합니다.


2.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세요.



(7)이르시기를 인자(人子)가 죄인(罪人)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히고 제 삼일(三日)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함께 계시는 동안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지만 '제 삼일(三日)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는 부활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6절).

천사들은 그리스도가 전에 하신 말씀을 그 여자들이 기억하기를 원했습니다.

(7)제 삼일(三日)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들이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무덤 속에서 찾으려 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

그들은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했어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여자들은 무덤에서 돌아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였습니다. '주님은 살아나셨다!'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使徒)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告)하니

그러나 이번엔 사도들이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였습니다.(11절). 그들은 그 말을 단지 여자들이 환상을 보고하는 말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또한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사도(使徒)들은 저희 말이 허탄(虛誕)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사도들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 사실이었나를 반증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믿었어야 했습니다.

'제 삼일(三日)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베드로는 이 사실에 대해 조사를 했습니다(12절).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細麻布)만 보이는지라

베드로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무덤으로 갔습니다. 무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가 벗겨져 곱게 개어 있고 시체는 없었습니다. 죤 스타트는 이 부분을 깊이 연구한 후, 몸만 살짝 빠져나가고 수의는 푹 꺼진 모습 그대로라고 변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정말 '말씀은 '제 삼일(三日)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을까요?

향품을 가지고 예수의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이나 이를 전해들은 제자들이나 베드로에게서 우리는 부활 신앙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시체가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하기 위하여 향품을 가지고 찾아간 착한 사람들이지만 말씀을 믿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나는 진정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있습니까?
제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그 말씀 말입니다. 죄로 인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한 번 죽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내가 다시 살아날 그 사실을 믿습니까?

월남전에 두 다리를 잃은 보브 위렌트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두 다리가 위에까지 다 잘려졌는데도 미국을 손으로 걸어서 횡단하였습니다. 미국의 동-서의 길이가 4454km입니다. 부산까지 420km인데 그 길이의 10배입니다.  그런데 이 보브라고 하는 이 청년은 다리도 없는데 두 팔로만 걸어가지고 3년 8개월 6일만에 LA에 도착했어요. 얼마나 놀라운 일이예요? 걸어서 가는 것만해도 대단해요, 자동차를 타고 가도 한 주일 걸리는데, 걸어서 가도 대단한데 3년 8개월을  갔어요. 그래서 모두 환영하며 기자들이 가서 물었어요.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얼마나 어려웠느냐고. 그럴 때에 이 분이 대답한 게 뭔지 아세요. '내게는 권태로운 날이 하루도 없었다' 왜 그래요? 하나님의 사랑이 비취니까.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말씀하신 주님께서 보비 위랜드를 다시 살리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보브 위랜드 뿐만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믿는 모든 이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와 여러분에게 주신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약속은 소중합니다.


3. 주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主) 예수의 시체(屍體)가 뵈지 아니하더라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細麻布)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그들은 무덤 입구를 막고 있어야 할 돌이 굴려 옮겨지고 무덤이 빈 것을 보았습니다(2,3절). 돌은 짐승의 침입과 도굴을 방지키 위해 무덤의 입구를 인봉하는 맷돌같이 생긴 큰 돌(마 27:62-66)입니다. 20명 가량 힘을 써야 옮겨진다는 돌입니다. 그런데 이 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 빈 무덤에 대한 확인은 기독교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향품을 가지고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던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바로 증인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무덤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시신이 당연히 무덤에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죄와 죽음을 지고 무덤에 묻혔지만 언제까지 그 무덤에 누워있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덤에 묻어두고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에 예수님을 싸두었던 세마포는 있었지만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이미 부활하셨거든요.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두셨던 빈무덤은 영적인 죄의 정화장과 같습니다. 인류의 온갖 더러운 죄와 사망의 권세를 하나님 독생자의 보혈로 정케한 그 영적 죄의  정화장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빈무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빈무덤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우리 옛사람과 그에 속한 모든 죄와 허물을 무덤에 두고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마포만 무덤에 남았듯이 우리의 옛사람과 그에 속한 죄만 무덤에 남은 것입니다. 근심만 무덤에 남은 것입니다.

어느 Puritan 마을이 있었어요. 술집도 창녀도 없는 것을 자랑삼고 사는 좀 엄격한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처녀가 결혼하기 전에 애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요 또 그런가 하면 마을 사람들의 궂은 일은 온 마을의 궂은 일은 그 수도사가 하는 거예요.
이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그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말을 안해요. 그러다 추방당하기 전에 하는 말이 "저 수도사"라고 했어요.  수도사는 그대로 끌려가서 많은 몰매를 맞고 고역을 당하고 감옥에 처넣어졌어요.  시름시름 앓다가 감옥에서 죽었어요.  죽은 다음에 시신을 염하면서 보니까 이게 남자가 아니고 여자예요.  남장 여인이었다고요.  모든 사람은 숙연해졌습니다.  이 여자는, 이 수도사는 왜 '그것이 내 아이가 아니라'는 말을 왜 안했을까?  저 처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했어요.  내가 죽어야만 그 누군가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십자가는 의의 승리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먼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거기서 완전히 충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충족원리라고 합니다.  충족돼요.  그리고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무덤에 묻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도를 성전 삼고, 성도 안에서 거하시면서 성도를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바로 이 부활 신앙에 근거한 것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