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30 April 2015
본이 되셨던 스승 / 노하덕칼럼
저는 학창시절에 본이 되시는 국어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장로님이셨던 그분은 언행이 참 조용하시고 인자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면서 저는 국어를 공부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년 시절을 국어선생님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강 신항 교수님은 성실과 제자에 대한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신 스승이십니다. 제자에 대한 사랑과 성실은 저만 누린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진솔한 생애를 담담한 필치로 적어 수필집으로 출판하시곤 하셨습니다.
저는 목회의 길을 가면서도 본이 되는 몇 분 목사님을 만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제가 새벽기도회를 존중하는 마음은 김 명혁 목사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그분은 참 바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꼭 새벽기도회에 나오셨습니다. 어느 날 새벽, 그분이 기도하는 내용을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습니다. 그냥 교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의 길에 들어서서 오늘날까지 목회자는 새벽에 나와 하나님 앞에 교인들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존재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월삭기도회, 즉 매월 첫 날 새벽을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회도 그분께 배운 기도입니다.
캐나다에 처음 도착하여 사역한 교회가 중앙교회였습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시던 김은대 목사님은 헌신적인 분이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사역하던 어느 날. 우연히 저는 그분이 낸 선교헌금 봉투를 보았습니다. 상당히 넉넉하게 선교헌금을 하고 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좀 놀랐습니다. 그후로 저는 헌금 생활을 좀 넉넉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계화삼 목사님을 만나고 그분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받은 본은 청빈과 헌신입니다. 계목사님은 새벽 기도를 가시다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그 보상금을 교회 교육관 건축헌금으로 내놓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국을 함께 방문하는 기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제가 받은 느낌은 청빈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의 수준에 여러모로 미치지 못하지만 그 방향을 바라보고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반면 교사가 되신 분도 계십니다. 어떤 목사님은 굉장히 박식하셔서 어떤 모임 자리에만 가면 대화를 독차지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분을 그렇게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말재주도 없지만, 사석에서는 세상 이야기를 가급적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분은 저의 반면 교사가 되신 셈입니다.
이런 분들을 생각하노라면, 참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내 생애에서 가장 감사한 분은 역시 나를 위해 나무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십니다.
'유대인의 왕'이란 푯말은 분명한데 실상은 벌거벗김을 당하신 채 나무에 매달려 계십니다.
만왕의 왕의 실상은 온 인류의 죄와 고통을 대신 당하심입니다.
이름은 분명, 나의 왕이신데 내용은 나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뒤치다꺼리하고 계시는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생각할수록 놀라운 본이십니다.
양무리의 본이 되라는 말씀이 그림으로 내 심비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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