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소는 고집이 센 짐승입니다.
거기에 힘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소를 제어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 코를 뚫어 거기에 멍에를 끼워 사용합니다.
그 멍에를 끌어당기면 코가 찢어질 것처럼 아프기 때문에, 사람에게 억지로 끌려서 순종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는 아직 멍에를 매어보지 아니한 암소입니다.
이 암소에겐 인간적 제어 장치가 없습니다.
소를 제어하기 위한 강압장치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멍에를 매어보지 아니한 암소입니다.
코가 꿰어 억지로 끌려가는 소가 아닙니다.
하지만 암소는 울고 있습니다.
젖 먹던 송아지를 방금 떼어놓고 나왔기에 웁니다.
철철 젖이 흐르나 먹일 송아지가 없기에 웁니다.
억지로 떼어놓은 어린 송아지를 뒤로하고 가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웁니다.
사랑하는 새끼와 떨어지기가 싫어서 웁니다.
자기 몸으로 낳은 송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웁니다.
어린 새끼와 함께 있고 싶어서 웁니다.
새끼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웁니다
그러나 울망정 뒤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점을 노리고 일부러 돌아설 수밖에 없도록 이런 어린 송아지를 가진 암소를 선정한 것입니다.
돌아오라고
일부러
새끼가 딸린 암소를 고른 것입니다.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나 그런 암소를 고른 것입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 다 , 울면서도 돌아서지는 않습니다.
순종이란 걸 안다는 듯
반항하지 않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벳세메스를 향해 똑바로 가고 있습니다.
왼쪽으로 돌 수도 있고 오른 쪽으로 돌 수도 있을 법 한데
좌우 어느 쪽으로도 한눈을 팔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길로도 빗나가지 않고 벧세메스를 향하여 갑니다
그 소들이 특별히 훈련을 받았겠습니까?
그렇게 가도록 하늘이 낸 소들이겠습니까?
아니지요.
그들 본성으로 하자면 한 걸음도 그렇게 나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 소들을 강권하시니 그렇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법궤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까지 가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피땀을 흘리시며 가시던 그 고난의 종처럼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는 울면서 갔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이 살을 깎는 것처럼 아프셨습니다.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부인이 등을 찔렀습니다.
모욕하는 군중들의 외침이 귀를 찢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의 무지막지함
동족인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악한 음모술수
몸이 찢기고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기는 아픔에
예수님은 우시면서 골고다를 향하셨습니다.
결국 암소는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백성의 죄를 지시고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엘리~~~~~~~~~~~~~'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오늘도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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