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28 April 2015

집으로 / 노하덕칼럼


하나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란 영화를 본다.
그 작품 속의 주인공은 김을분 할머니다.
할머니는 돈이 되는 사람이 아니다.
허스름한 집
깁고 기운 검정 고무신
손자가 그렇게 먹고 싶은 캔터키 치킨도
손자가 그렇게 갖고 싶은 장난감 전지를 살 돈이 없다.

그러나 그분을 보면서
돈이 되지 않는 사람 안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통닭 속에 있는 사랑'을 만난다.
90도로 허리 굽은 할머니가 나물 판 돈 몇 푼으로
손자에게 짜장면 값을 지불하고,
멀고 먼 장터에서 산골 오두막까지 걸어오는
그 가난한 할머니가 오히려 커 보이기 시작한다.
구박하고 짓궂게 괴롭히던 그 어린 소년의 가슴에
돈 주고 살 수 없던 사랑이 움터온다.
기울어 가는 석양녘에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돈이 되지 않는 할머니 안에서 참 가치를 본다.
돈이 안되어도
할머니가 있기에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배운다.





우리 신앙이 어릴 때면
이웃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추상 속에만 존재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기 시작하면
이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분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가를 만나 보게 되면
하나님이 구체적 현실 속에 움터 오른다
하나님의 사랑이 체험적으로 다가온다




많은 재산이 아니라고 할 지 모르지만, 나도 몇 만불 재물을 모아두고 산 적이 있다.
그 돈을 프랑크푸르트 외환은행에 정기예금으로 맡겨두었다.
도서관에 매일 들려 신문을 펼치고 환율 체크를 하곤 하였다.
달러화가 오르면 나는 부유해졌고, 마르크화가 오르면 나는 가난해졌다.
소수점 이하 숫자의 오르내림에도 내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년하고 나니까 마르크화가 곱절로 올랐고
그래서  나는 곱절로 가난해졌다.
그리고
그 놀음도 끝났다.

           그때 나는 내 안에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았다.
나의 눈빛은 하나님께 대한 기사보다 환율에 관한 기사에 훨씬 예민한 것을 깨달았다.
나의  마음엔 평화가 없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No comments:

Post a Comment